아키즈키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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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키즈키의 난은 1876년 10월 24일 구마모토현에서 발생한 신푸렌의 난에 호응하여, 이전 아키즈키번의 사족들이 일으킨 반란이다.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화 정책으로 특권을 잃은 사무라이들의 불만이 신푸렌의 난을 통해 폭발했고, 이에 영향을 받은 아키즈키 사족들이 봉기했다. 아키즈키 당은 후쿠오카 현 경찰관을 살해하고 도요쓰번과의 연계를 시도했으나 실패했으며, 정부군과의 전투 끝에 해산되었다. 주모자들은 처형되었고, 가담자들은 징역형 등을 받았다. 이 사건은 메이지 정부에 대한 사족들의 저항 중 하나로, 일본 경찰관 순직의 첫 사례로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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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76년 분쟁 - 신푸렌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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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빅혼 전투는 1876년 6월 25일 몬태나주 리틀빅혼 강에서 미국 육군 제7기병대가 라코타, 샤이엔, 아라파호 연합군에게 패배한 전투로, 미국 서부 개척사의 전환점이자 원주민과의 갈등을 상징하는 사건이다.
아키즈키의 난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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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메이지 정부 |
교전국 2 | 간조타이 |
지휘관 및 지도자 | |
지휘관 1 | 노기 마레스케 |
지휘관 2 | 이소 준 도키 기요시 마스다 시즈카타 미야자키 구루마노스케 이마무라 효쿠하치로 |
병력 규모 | |
병력 1 | 보병 제14연대 1개 및 3개 경찰 대대 중대 |
병력 2 | 870명 아키즈키 반군 |
피해 규모 | |
사상자 1 | 사망 5명 이상 (최소 군인 2명, 민간인 2명, 경찰 1명) |
사상자 2 | 사망 24명 (전사 및 자살) |
관련 정보 |
2. 역사적 배경
1876년 10월 24일 구마모토현에서 신푸렌의 난이 일어나자, 이에 호응하여 이전 아키즈키번의 사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 난은 규슈 지역의 반(反) 메이지 ''사무라이''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아키즈키 반란은 이소 준, 도키 키요시, 마스다 시즈카타, 이마무라 효쿠하치로, 미야자키 쿠루마노스케 등 5명이 주도한 간조타이(Kanjōtai)라는 반(反) 메이지 정치 단체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2. 1. 메이지 유신과 사족의 불만
1868년 메이지 유신으로 일본 제국이 수립되고, 1600년부터 일본을 통치해 온 도쿠가와 막부가 무너졌다. 메이지 정부는 폐번치현, 도쿠가와 신분제 해체 등 근대화와 서구화 정책을 추진했다. 이전의 강력한 무사 계급이었던 보수적인 사무라이들은 이러한 개혁으로 특권적인 지위와 수입을 잃었고, 보편적인 징병제로 인해 사회에서 그들의 역할이 대체되면서 불만을 품게 되었다. 일본의 매우 빠른 근대화와 서구화는 일본 문화, 의상,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왔고, 많은 사무라이에게 존왕양이의 "오랑캐를 몰아내자"는 부분에 대한 배신으로 여겨졌다.1873년 정한론 논쟁에서 조선 침공이 좌절되면서, 해외 팽창주의를 통해 사무라이 전사의 필요성을 자극하고 옛 사무라이 계급을 이전의 명성과 위신으로 되돌릴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던 사족들은 더욱 분노하게 되었다. 특히, 칼 소지 금지령과 정부가 시마즈 히사미츠의 조언에 따라 국가의 서구화를 중단하는 것을 거부한 것에 대한 불만이 컸다.
2. 2. 신푸렌의 난
1876년 10월 24일 구마모토현에서 일어난 신푸렌의 난은 아키즈키의 난이 일어나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3. 경과
1876년 10월 24일 구마모토현에서 신푸렌의 난이 일어나자, 이에 호응하여 이전 아키즈키번의 사족이었던 미야자키 샤노스케, 이소 아쓰시, 도하라 야스우라, 이소 헤하치, 도나미 한구로, 미야자키 테츠노스케, 토키 키요시, 마스다 시즈가타, 이마무라 햐쿠하치로 등 약 400명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폐도령과 정한론 좌절 등 메이지 정부의 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특히 정한론이 좌절되면서 사무라이 계급의 몰락에 대한 불안감이 커졌고, 이는 반란의 주요 원인 중 하나였다.
아키즈키의 난은 신푸렌의 난 발생 3일 후인 10월 27일부터 12월 3일까지 전개되었으며, 주요 사건은 다음과 같다.
날짜 | 사건 내용 |
---|---|
10월 27일 | 이마무라 햐쿠하치로를 대장으로 하는 아키즈키 당 거병. 묘간지에서 후쿠오카 현 경찰 호나미 한타로 살해 (일본 최초의 경찰관 순직). |
10월 29일 | 옛 도요쓰번 사족과 연계 시도. 스기우 주로 등과 동시 봉기를 약속했으나, 도요쓰번 사족의 봉기 거부 및 스기우 등 감금. 노기 마레스케가 이끄는 고쿠라 진대의 공격을 받음. |
10월 31일 | 아키즈키 측 17명 사망, 정부군 2명 사망. 에가와촌 구리카와치(현 아사쿠라시 구리카와치)로 퇴각 후 아키즈키 당 해산. 이소, 미야자키, 도키 등 7명 할복. |
11월 24일 | 이마무라 등 26명, 아키즈키 소학교 습격, 현 고위 관계자 2명 살해, 주점 창고 방화 후 도주. 11월 24일 체포. 마스다는 10월 26일 사가번 사족과의 동시 봉기를 위해 사가시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체포. |
12월 3일 | 후쿠오카 임시 재판소 판결. 주모자 이마무라와 마스다 당일 참수, 약 150명 징역 또는 평민 강등. |
이소 준, 토키 키요시, 마스다 시즈카타, 이마무라 햐쿠하치로, 미야자키 구루마노스케 등 5명은 간조타이라는 반(反) 메이지 정치 단체를 결성하여 반란을 주도했다. 이들은 흰색 깃발에 '나라에 보답(報国)'이라는 한자를 새기고 봉기에 참여했다.
3. 1. 봉기
1876년 10월 27일, 이마무라 햐쿠하치로를 중심으로 아키즈키 당이 결성되어 봉기하였다. 봉기 직후, 묘겐지에서 호나미 한타로를 살해하였다. (일본 최초의 경찰관 순직)3. 2. 도요쓰번 사족과의 연계 시도
옛 아키즈키번의 사족들은 미리 옛 도요쓰번 사족인 스기우 주로 등과 동시에 봉기하기로 약속했다. 이후 도요쓰로 가서 10월 29일에 도착했지만, 이 때 전 도요쓰번 사족들은 봉기하지 않기로 결정하였고, 스기우 등은 이미 감금된 상태였다. 담판을 벌이던 중 도요쓰 측의 연락을 받고 도착한 노기 마레스케가 이끄는 오구라 진대가 아키즈키 당을 공격했다. 아키즈키 측은 17명의 사망자를 냈고, 정부군은 2명이 사망했다. 결국 아키즈키군은 에가와 마을 구리카와치(현 아사쿠라시 구리카와치)로 퇴각했고, 10월 31일 아키즈키 당은 해산했다.3. 3. 정부군과의 전투 및 진압
1876년 10월 27일, 이마무라 햐쿠하치로를 대장으로 하는 '아키즈키 당'이 거병하여, 우선 묘간지에서 설득에 나섰던 후쿠오카 현 경찰 호나미 한타로를 살해했다. 옛 아키즈키번의 사족들은 미리 옛 도요쓰번 사족인 스기우 주로 등과 동시에 봉기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이후 도요쓰 번으로 가서 10월 29일에 도착했다. 그러나 이때 전 도요쓰 번 사족은 봉기하지 않기로 방침을 굳혔고, 스기우 등은 감금되어 있었다. 담판을 벌이던 중, 도요쓰 측의 연락을 받고 도착한 노기 마레스케가 이끄는 고쿠라 진대가 아키즈키 당을 공격했다.아키즈키 측은 사망자 17명을 남기고 (정부군 사망자 2명) 에가와촌 구리카와치(현 아사쿠라시 구리카와치)로 퇴각했고, 10월 31일 아키즈키 당은 해산되었다. 이소, 미야자키, 도키 등 7명의 번사는 할복했다. 항전파 이마무라는 다른 26명과 함께 아키즈키로 돌아와 아키즈키 소학교에 설치되어 있던 아키즈키 당 토벌 본부를 습격하여 현 고위 관계자 2명을 살해하고, 반란에 가담한 사족을 억류하고 있던 주점 창고를 불태운 후, 흩어져 도망쳤으나 11월 24일 체포되었다. 또한 마스다는 거병 이전인 10월 26일에 옛 사가번 사족의 동시 봉기를 모색하기 위해 사가시로 향했지만, 돌아오는 길에 체포되었다.
3. 4. 재판 및 처벌
12월 3일 후쿠오카 임시 재판소에서 주모자인 이마무라 햐쿠하치로와 마스다 시즈카타는 당일 참수되었고, 나머지 가담자 약 150명에게는 징역, 평민 강등 등의 징계가 내려졌다.4. 결과 및 영향
1876년 12월 3일 후쿠오카 임시 법원에서 관계자들에 대한 판결이 선고되었다. 주모자로 지목된 이마무라 햐쿠하치로와 마스다 시즈가타는 당일 참수되었고, 약 150명에게는 징역, 평민 강등 등의 징계가 내려졌다. 이 난으로 인해 아키즈키 성은 파괴되었다.
아키즈키의 난은 일본 역사상 현대 경찰 소속원이 공무 수행 중 사망한 최초의 사건이다. 현재 아키즈키의 아키즈키 향토 자료관에는 간부들의 친필 절명시 등이 전시되어 있다.
5. 평가
아키즈키의 난은 메이지 유신 이후 급격한 사회 변화에 불만을 품은 일부 사족들이 신푸렌의 난에 호응하여 일으킨 반란이다. 이들은 봉기했지만, 정부군의 진압으로 실패했다. 주모자들은 처형되었고, 많은 이들이 징계를 받았다.
5. 1. 진보적 관점
아키즈키의 난은 봉건적 특권 유지를 위한 보수적 저항이라는 비판적인 시각과, 메이지 정부의 급격한 개혁에 대한 불가피한 반발이라는 시각이 공존한다.6. 관련 자료
현재 아키즈키의 아키즈키 향토 자료관에는 간부들의 친필 절명시 등이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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