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킬레 바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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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킬레 바르치는 이탈리아의 오토바이 및 자동차 경주 선수로, 1924년부터 7번의 맨 섬 TT에 출전하는 등 오토바이 경주에서 성공적인 경력을 쌓은 후 1928년 자동차 경주로 전향했다. 부가티, 알파 로메오, 마세라티 등을 몰고 1930년과 1934년 이탈리아 선수권 챔피언을 차지했으며, 타르가 플로리오와 밀레 밀리아에서 우승하는 등 1934년 최고의 해를 보냈다. 아우토 유니온으로 이적 후 모르핀 중독과 불륜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3개의 서로 다른 메이커로 트리폴리 그랑프리에서 우승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42세의 나이로 레이스에 복귀했으나, 1948년 스위스 그랑프리 연습 주행 중 사고로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경주용 헬멧 착용 의무화에 영향을 미쳤으며, 사후 그의 이름을 딴 팀과 기념 우표가 발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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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킬레 바르치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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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 이름 | Achille Varzi |
| 출생일 | 1904년 8월 8일 |
| 출생지 | 이탈리아, 피에몬테주, 갈리아테 |
| 사망일 | 1948년 7월 1일 |
| 사망지 | 스위스, 베른주, 브렘가르텐 바이 베른 (브렘가르텐 서킷) |
| 주요 승리 | |
| 르망 24시 | |
| 참가 연도 | 1931년 |
| 팀 | 부가티 |
| 최고 성적 | 기권 (1931년) |
| 클래스 우승 | 0 |
2. 초기 생애 및 모터사이클 경력
아킬레 바르치는 이탈리아 피에몬테주 노바라현의 갈리아테에서 부유한 섬유 제조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2] 젊은 시절 그는 오토바이 경주 선수로서 성공적인 경력을 쌓았다. 가렐리, DOT, 모토 구찌, 선빔 등 여러 제조사의 모터사이클을 타고 경주에 참여했으며, 특히 1924년부터 7번이나 맨 섬 TT에 출전하며 실력을 인정받았다.[2] 이후 1928년 자동차 경주로 전향하여 활동 무대를 옮겼다.[2]
갈리아테 출신인 아킬레 바르치는 젊은 시절 오토바이 경주 선수로 명성을 쌓았다. 가렐리, DOT, 모토 구찌, 선빔 등의 팀 소속으로 활동하며 1924년부터 7번의 맨섬 TT에 출전하는 등 성공적인 경력을 보냈다.
3. 자동차 경주 경력
1928년 자동차 경주로 전향한 바르치는 이후 10년 동안 당대 최고의 드라이버들인 타치오 누볼라리, 루돌프 카라치올라, 베른트 로즈마이어 등과 치열한 경쟁을 펼쳤다. 초기에는 부가티 타입 35를 탔으나 곧 알파 로메오와 마세라티로 옮겨가며 1930년과 1934년 이탈리아 레이싱 챔피언십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특히 1934년에는 타르가 플로리오와 밀레 밀리아를 같은 해에 제패한 최초의 드라이버가 되는 기록을 세웠다.[2][8] 하지만 1933년 트리폴리 그랑프리 우승 당시에는 승부 조작 의혹에 휘말리기도 했다.
1935년부터 1937년까지는 아우토 우니온 팀 소속으로 활동했으나, 이 시기에는 모르핀 중독과 개인적인 스캔들 등 어려움을 겪으며 이전만큼의 성과를 내지는 못했다.[3][9]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리폴리 그랑프리에서 세 번째 우승을 차지하는 등 여전한 기량을 보여주었다. 그의 라이벌이었던 루돌프 카라치올라는 다루기 어려운 아우토 우니온 레이싱카를 제대로 다룰 수 있는 드라이버는 바르치와 로즈마이어뿐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10]
1938년 레이스계를 떠났고, 제2차 세계 대전 발발로 유럽에서의 자동차 경주가 중단되었다. 전쟁 기간 동안 바르치는 약물 중독을 극복하고 개인적인 안정을 찾았다. 전쟁이 끝난 후, 42세의 나이로 레이스계에 복귀하여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다. 1946년 인디애나폴리스 500 출전을 시도했으나 예선 통과에는 실패했고,[4][11] 1947년에는 몇 차례의 소규모 그랑프리에서 우승하며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그랑프리에 참가하는 등 활동을 이어갔다.
3. 1. 초기 경력 (1928-1934)
갈리아테, 노바라현, 피에몬테에서 섬유 제조업자의 아들로 태어난 아킬레 바르치는 젊은 시절 가렐리, DOT, 모토 구찌, 선빔 소속으로 성공적인 오토바이 경주 선수로 활동했다. 1924년부터 7번의 맨섬 TT에 출전한 후 1928년 자동차 경주로 전향하여, 이후 10년 동안 타치오 누볼라리, 루돌프 카라치올라, 베른트 로즈마이어와 같은 당대 최고의 드라이버들과 경쟁했다.
바르치의 첫 번째 경주용 자동차는 부가티 타입 35였지만, 곧 알파 로메오로 바꾸었다. 1929년 이탈리아 레이싱 시즌 동안 알파 로메오를 타고 많은 우승을 거두었다. 1930년에는 당시 비교적 신생 회사였던 마세라티에서 차량을 인수했다. 그는 이 마세라티와 알파 로메오를 번갈아 운전하며 1930년 이탈리아 레이싱 챔피언십에서 우승했으며, 이 기록은 1934년에도 반복되었다. 그의 주요 승리 중 하나는 명망 높은 타르가 플로리오 경주에서 강력한 경쟁자였던 루이 시롱을 꺾고 차지한 1930년 우승이다. 한편, 복권과 연계되어 있던 1933년 트리폴리 그랑프리에서의 우승은 경주가 조작되었다는 의혹의 중심에 서게 만들었다.
1934년, 바르치는 알파 로메오 P3를 운전하며 알레산드리아, 트리폴리, 타르가 플로리오, 바르셀로나의 페냐 린, 코파 치아노, 니스에서 열린 6번의 그랑프리에서 우승했다. 또한, 그는 한 시즌에 타르가 플로리오와 밀레 밀리아 타이틀을 모두 획득한 역사상 최초의 드라이버가 되었다.[2][8]
| 연도 | 참가자 | 제조사 | 1 | 2 | 3 | 4 | 5 | 6 |
|---|---|---|---|---|---|---|---|---|
| 1933년 | 에토레 부가티 | 부가티 | 1위 모나코 | 프랑스 | 2위 벨기에 | 리타이어 이탈리아 | 4위 스페인 | |
| 1934년 | 스쿠데리아 페라리 | 알파 로메오 | 6위 모나코 | 2위 프랑스 | 리타이어 독일 | 리타이어 벨기에 | 리타이어 이탈리아 | 5위 스페인 |
- '''굵은 글씨'''는 폴 포지션, ''기울임꼴''은 최고 랩 타임
3. 2. 아우토 우니온 시절 (1935-1937)
엔초 페라리의 지휘 아래 알파 로메오 팀이 높은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었음에도, 바르치는 1935년 아우토 우니온 팀으로 이적하여 1937년까지 활동했다. 이 시기 바르치는 심각한 개인적 문제들을 겪고 있었는데, 만성적인 모르핀 중독과 동료 드라이버 파울 피에츠(Paul Pietsch)의 아내 일제 피치(Ilse Pietsch)와의 스캔들이 그의 레이싱 퍼포먼스에 악영향을 미쳤다.[3][9]아우토 우니온 팀에서는 뛰어난 팀 동료 베른트 로즈마이어의 활약에 가려지면서 바르치의 우승 횟수는 4회로 줄어들었다. 하지만 그는 트리폴리 그랑프리에서 세 번째 우승을 차지했는데, 이는 세 개의 서로 다른 제조사 차량으로 달성한 기록이었다. 당시 유럽 챔피언십에서 세 번 우승한 라이벌 루돌프 카라치올라는 다루기 어려운 아우토 우니온 레이싱카를 제대로 다룰 수 있는 드라이버는 바르치와 로즈마이어뿐이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10]
1938년, 바르치는 레이스계에서 모습을 감추었으며, 곧이어 발발한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유럽에서의 자동차 경주는 중단되었다.
3. 3. 은퇴와 복귀 (1938-1947)
1938년, 바르치는 레이스계에서 모습을 감췄고, 곧이어 발발한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유럽에서의 자동차 경주는 중단되었다.[9] 전쟁 기간 동안 바르치는 개인적인 어려움이었던 모르핀 중독을 극복하는 데 성공했으며, 노마 콜롬보와 결혼하여 안정된 생활을 꾸렸다.전쟁이 끝난 후, 바르치는 42세의 나이로 레이스계에 복귀하여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다. 1946년에는 마세라티 차량으로 인디애나폴리스 500에 출전하고자 했으나, 예선 통과에는 실패했다.[4][11] 1947년에는 세 차례의 소규모 그랑프리 경주에서 우승을 차지했으며, 부에노스아이레스 그랑프리에 참가하기 위해 아르헨티나로 건너가기도 했다.
3. 4. 주요 우승 기록
Ret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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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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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8
4
Ret
Ret
2
2
Ret
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