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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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안막은 본래 안필승이었으나 일본의 무용가 이시이 바쿠의 이름을 따서 개명한 인물로, 필명은 안추백이다. 경성제2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 대학교에서 유학하며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했다. 1930년대 초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의 이론가로 활동하며 평론을 발표했고, 임화, 김남천과 함께 김기진을 비판했다. 카프 해체 후에는 아내 최승희의 매니저 역할을 했다. 광복 후 월북하여 북한 내각의 고위직을 지냈으나, 1958년 한설야 제거를 위한 숙청 과정에서 부르주아 평론가로 몰려 숙청당했다. 무용평론가 안재승이 동생이며, 최승희와의 사이에서 딸 안성희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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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름
개명 이전의 이름은 '''안필승'''(安弼承)이며, 필명(筆名)은 '''안추백'''(安萩白)이다. 이후 '''안막'''(安漠)으로 개명했는데, 이는 일본의 무용가 이시이 바쿠(石井 漠)의 이름을 따서 스스로 개명한 것이다.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나 죽산 안씨를 본관으로 하였다. 경성제2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9년 일본 와세다 대학교 노어노문학과에서 유학하며 사회주의 운동에 뛰어들었다. 1931년 최승희와 결혼했다.[1]
3. 생애
1930년대 초반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카프)의 핵심 이론가로 활동하며, 임화, 김남천과 함께 김기진을 비판하는 평론을 썼다. 1930년대 중반 카프 해체 및 투옥 이후에는 아내 최승희의 매니저 역할에 전념하였다.
광복 직후 월북하여 1950년대 중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문화선전성 부상을 지내는 등 고위직을 역임했으나, 1958년 한설야 숙청의 사전 작업으로 진행된 카프 계열 문학 인사 정리 과정에서 서만일, 윤두헌과 함께 부르주아 평론가로 몰려 숙청,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다.
무용평론가 겸 연출가 안재승은 그의 남동생이며, 최승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 안성희(초명 '안승자')는 발레 무용수였다. 동요 〈엄마야 누나야〉의 작곡가 안성현은 안막의 조카이다.[2]
3. 1. 초기 생애와 사회주의 활동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죽산이다. 경성제2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9년 일본 와세다 대학교 노어노문학과에서 유학하며 사회주의 운동에 뛰어들었다. 사회주의 계열의 문예운동가였던 최승일과 박영희의 소개로 최승희를 만나[1] 1931년 결혼했다. 최승일은 최승희의 오빠이다.
1930년대 초반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의 주요 이론가로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카프 시절 평론으로는 〈프로 예술의 형식문제 - 프롤레타리아 리얼리즘의 길로〉(1930), 〈조선 프로예술가가 당면한 긴급한 임무〉(1930), 〈창작방법문제의 재토의를 위하여〉(1933)가 있다. 같은 일본 유학파이며 소장파인 임화, 김남천과 함께 김기진을 비판하는 내용의 평론을 썼다. 1930년대 중반 카프가 해체되고 투옥된 이후에는 뚜렷한 활동이 거의 없었으며 아내 최승희의 매니저 역할에 전념하였다.
무용평론가이자 연출가인 안재승은 남동생이며, 최승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 안성희(초명 '안승자')는 발레 무용수였다. 동요 〈엄마야 누나야〉의 작곡가 안성현은 안막의 조카이다.[2]
3. 2. 카프 활동과 이론적 기여
1929년 일본 와세다 대학교 노어노문학과에서 유학하며 사회주의 운동에 뛰어들었다. 사회주의 계열의 문예운동가이던 최승일, 박영희의 소개로 최승희와 만나[1] 1931년 결혼했다. 최승일은 최승희의 오빠이다.
1930년대 초반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의 이론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했으며, 카프 시절의 평론으로는 〈프로 예술의 형식문제 - 프롤레타리아 리얼리즘의 길로〉(1930), 〈조선 프로예술가가 당면한 긴급한 임무〉(1930), 〈창작방법문제의 재토의를 위하여〉(1933)가 있다. 같은 일본 유학파이며 소장파인 임화, 김남천과 더불어 김기진을 비판하는 내용의 평론을 썼다.
3. 3. 카프 해체 이후와 월북
1931년 최승희와 결혼했다.[1] 최승희의 오빠는 최승일이다.
1930년대 중반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가 해체되고 투옥된 이후에는 두드러지는 활동이 거의 없었으며, 아내 최승희의 매니저 역할에 전념하였다.
광복 후 곧바로 월북했고, 1950년대 중반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문화선전성 부상을 지내는 등 내각의 고위직에서 일했으나, 1958년 소설가 한설야 제거에 대한 사전 작업으로 카프 계열 문학 인사에 대한 정리가 이루어질 때 서만일, 윤두헌과 함께 부르주아 평론가로 몰려 숙청당해 곧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자세한 사망 경위나 사망 연도는 알려진 바가 없다.
3. 4. 북한에서의 활동과 숙청
광복 후 곧바로 월북했고, 1950년대 중반에 문화선전성 부상을 지내는 등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의 고위직에서 일했으나 1958년 소설가 한설야 제거에 대한 사전 작업으로 카프 계열 문학 인사에 대한 정리가 이루어질 때 서만일, 윤두헌과 함께 부르주아 평론가로 몰려 숙청당해 곧 사망했다고 전해진다.[1] 자세한 사망 경위나 사망 연도는 알려진 바가 없다.
4. 가족 관계
5. 주요 경력
- 카프 동맹 중앙위원 역임
- 조선로동당 당무위원 역임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문화선전성 부상 역임
참조
[1]
뉴스
"그를 위해 예술도 버릴 수 있었다" - 박민일 전 강원대 교수, 무용가 최승희 러브스토리 공개
http://www.kado.net/[...]
강원도민일보
2006-07-17
[2]
뉴스
"'엄마야 누나야' 작곡가 안성현 사망"
연합뉴스
2006-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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