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브레히트 3세 추 메클렌부르크슈베린 공작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알브레히트 3세는 메클렌부르크의 알브레히트 2세의 아들로, 1364년 스웨덴 귀족들의 추대로 스웨덴 국왕에 즉위했다. 그는 독일인에게 특혜를 주는 정책을 펼쳤으나, 덴마크의 마르그레테 1세와 대립하며 1389년 패배하여 포로로 잡혔다. 석방 후에도 스웨덴 왕위 주장을 포기하지 않고 해적 활동을 벌였으며, 1384년에는 메클렌부르크 공작위를 계승했다. 1412년 사망했으며, 그의 아들 알브레히트 5세가 메클렌부르크 공작위를 이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메클렌부르크슈베린가 - 알렉산드리네 추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녀
알렉산드리네 추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녀는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대공녀로 태어나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10세와 결혼하여 덴마크 왕비가 되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 덴마크 국민을 지지하다 1952년에 사망했다. - 메클렌부르크슈베린가 - 하인리히 추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자
하인리히 추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자는 독일에서 태어나 빌헬미나 네덜란드 여왕과의 결혼으로 네덜란드 왕족이 되었으며, 독일 장교 출신으로 왕자 칭호를 받고 올림픽 개막식에 참석했으나 사후 사생아 아들의 존재가 드러나기도 했다. - 1412년 사망 - 이거이
이거이는 이성계의 추천으로 등용되어 조선 건국 후 공신에 책록되었고, 왕자의 난에서 이방원을 도와 공신이 되었으며, 영의정부사를 지내는 등 조선 초 정치에 기여한 무신이자 공신이다. - 1412년 사망 - 마르그레테 1세
마르그레테 1세는 14세기 말 칼마르 동맹을 성립시켜 스칸디나비아 3국을 통합한 덴마크 여왕이자 노르웨이와 스웨덴의 섭정으로, 아들 올라프 2세 사후 에리크를 후계자로 삼아 3국의 왕으로 옹립하여 동맹을 통치하며 북유럽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알브레히트 3세 추 메클렌부르크슈베린 공작 | |
---|---|
기본 정보 | |
![]() | |
이름 | 알베르트 |
독일어 이름 | Albrecht |
스웨덴어 이름 | Albrekt av Mecklenburg |
왕위 | |
스웨덴 국왕 | 1364년 – 1389년 |
이전 국왕 | 마그누스 4세와 호콘 |
다음 국왕 | 마르그레테 |
공작위 | |
메클렌부르크-슈베린 공작 | 1384년 – 1412년 |
이전 공작 | 마그누스 1세 |
다음 공작 | 알베르트 5세 |
가문 | |
가문 | 메클렌부르크-슈베린 |
아버지 | 알베르트 2세 |
어머니 | 에우페미아 아브 스베리에 |
개인 정보 | |
출생 | 약 1338년 |
출생지 | 메클렌부르크 |
사망 | 1412년 4월 1일 |
매장지 | 도베란 수도원 |
배우자 | |
배우자 | 리하르디스 폰 슈베린 (1359년 결혼, 1377년 사망) 아그네스 폰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1396년 결혼) |
자녀 | |
자녀 | 에리크 1세 리하르디스 카타리나, 괴를리츠 공작 부인 알베르트 5세 |
2. 생애
메클렌부르크의 알브레히트 2세 공작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인 에우페미아 에릭스도테르는 쇠데르만란드의 에리크 망누손 공작의 딸이자 스웨덴의 망누스 4세 국왕의 누나이기도 하다.
1364년 스웨덴의 귀족들이 망누스 4세 국왕에 대한 반란을 일으키면서 망누스 4세는 스웨덴의 왕위에서 물러나게 된다. 스웨덴의 귀족들은 한자 동맹을 맺고 있던 독일 북부의 여러 도시들과 공작들, 백작들의 지원을 받고 있던 메클렌부르크의 알브렉트를 스웨덴의 새 국왕으로 추대했으며 1364년 2월 18일에 대관식을 치르면서 스웨덴의 국왕으로 즉위했다. 1384년에는 마그누스 1세의 뒤를 이어 메클렌부르크 공작으로 즉위했다. 스웨덴의 국왕으로 즉위한 이후에는 스웨덴에 거주하던 독일인들에게 광범위한 혜택을 부여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1389년 알브렉트 국왕에 대한 불만을 품은 스웨덴의 귀족들이 덴마크의 마르그레테 1세 여왕과 연합 전선을 형성했다. 1389년 2월 스웨덴군이 덴마크군과의 오슬레(Åsle)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덴마크군의 포로로 잡혔고 스코네의 린드홀멘 성에서 6년 동안 수감되었다. 1395년에 열린 평화 협상을 통해 석방되었으며 1412년 메클렌부르크 바트도베란 수도원에서 사망했다.
스웨덴 귀족들이 1364년 마그누스 에릭손을 추방한 후, 그의 아들인 노르웨이 왕 호콘 6세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막기 위해 마그누스의 조카 알브레히트를 북독일의 메클렌부르크 가문에서 데려왔다. 1384년에는 동생 마그누스 1세의 죽음으로 메클렌부르크-슈베린 공위를 계승했다.
형 하인리히 3세와 덴마크 왕 발데마르 4세의 장녀 잉게보르의 딸 마리아는 포메라니아 공작 브와디스와프 7세와 결혼하여 아들 에리크를 낳았지만, 잉게보르의 여동생이자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섭정마르그레테는 에리크를 먼저 1388년 노르웨이 왕위(에이리크 3세)에 앉혔다. 한편 알브레히트는 1370년에 발트해에 세력을 뻗친 덴마크를 견제하기 위해 한자동맹과 독일 제후들의 반덴마크 연합에 스웨덴을 참여시켜 덴마크를 굴복시키고 슈트랄준트 화의를 체결했다[6]。 그러나 스웨덴 국내에서는 국왕 알브레히트와 귀족 및 고위 성직자 등 유력자들 간의 대립이 표면화되었다[7]。 알브레히트는 메클렌부르크와 독일에서 용병을 모집하여 왕권 강화를 꾀했지만, 이에 반해 귀족과 고위 성직자들은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섭정인 마르그레테를 지지했고, 1388년에는 양측의 대결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마르그레테가 실질적으로 여왕으로 군림하는 덴마크는, 스웨덴 왕위를 놓고 알브레히트와 다투었다. 1389년에 모집한 독일인 기사를 포함한 알브레히트 군과 덴마크 군을 주력으로 한 섭정 마르그레테 군이 남부 스웨덴에서 결전을 벌였고, 알브레히트는 덴마크에 패하여 포로가 되어[8], 스웨덴 왕위에서 폐위되었다. 에리크는 1396년 덴마크(에리크 7세)와 스웨덴(에리크 13세)의 왕위에 올랐고, 이듬해 1397년 3개국에 의한 칼마르 동맹이 체결되었다[9]。 1395년에 알브레히트는 한자동맹 도시들의 중재로 석방되었지만, 스웨덴 왕위 청구권을 포기하지 않고 해적 집단인 비탈리엔브뤼더를 고용하여 고틀란드 섬의 비스비를 점령하고, 1398년에 그 비탈리엔브뤼더가 고틀란트에서 쫓겨난 후에도 1408년까지 해적 행위를 계속했다[10]。
메클렌부르크-슈베린 공작으로서는, 1383년부터 1388년까지 조카(마리아의 형) 알브레히트 4세를 공동 군주로 했지만 요절했고, 알브레히트 사후에는 아들 알브레히트 5세가 공위를 계승했다.
2. 1. 배경
그는 메클렌부르크의 알브레히트 2세 공작과 에우페미아 에릭스도터의 차남이었으며, 에우페미아는 쇠데르만란드의 에릭 마그누손 공작의 딸이자 마그누스 4세 국왕, 마그누스 7세의 누이였다.1384년 그는 메클렌부르크 공작위를 상속받았고, 이를 스웨덴과 개인 연합으로 묶었다. 알브레히트는 스웨덴 왕위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그의 가족 관계에 근거했다. 그의 어머니는 마그누스의 누이였고, 그의 부계 조부모는 마그누스 3세 국왕이었기 때문에, 알브레히트는 마그누스 4세의 모든 자녀가 폐위되거나 사망한 후 스웨덴 왕위 계승 서열 1위를 주장했다. 또한 스웨덴 공주 크리스티나, 즉 1196년부터 1208년까지 스웨덴 국왕이었던 스베르케르 2세의 딸을 통해 권리를 주장했다.
2. 2. 스웨덴 국왕 즉위
1363년, 보 욘손 그리프(Bo Jonsson Grip)가 이끄는 스웨덴 귀족 평의회는 메클렌부르크 궁정에 도착했다.[2] 귀족들은 망누스 4세에 대항한 반란을 일으켜 그를 스웨덴에서 추방했다.[2] 귀족들의 요청에 따라 알브레히트는 여러 독일 공작과 백작, 그리고 북부 독일의 여러 한자 도시들의 지원을 받아 스웨덴을 침공했다.[2] 스톡홀름과 칼마르는 한자 인구가 많았기에 이 개입을 환영했다.[2]1364년 2월 18일 모라의 돌에서 알브레히트는 스웨덴 국왕으로 즉위했다.[2] 이 행사를 기념하는 돌 조각이 아직 남아 있는데, 이를 세 개의 왕관 석이라고 부른다.[2] 이것은 세 개의 왕관을 스웨덴의 국장으로 사용한 가장 초기의 사례 중 하나이다.[2] 알브레히트의 등장은 알브레히트 지지자와 마그누스 지지자 간의 8년간의 내전을 초래했다. 1365년 엔셰핑 근처 전투에서 마그누스는 패배하여 알브레히트에게 포로로 잡혔다.[2]
덴마크 국왕 발데마르 4세가 마그누스와 호콘을 위해 개입했고, 발데마르의 군대는 마그누스를 지지하는 스웨덴 농민들과 합류했다. 알브레히트는 스웨덴 지방에 독일인을 관리로 임명하는 정책으로 인해 스웨덴인들 사이에서 인기가 없었다.[2] 덴마크와 스웨덴 동맹의 도움으로 호콘 6세는 1371년에 알브레히트를 일시적으로 물리치고 스톡홀름을 포위했다. 그러나 포위는 오래가지 못했다.[2] 스톡홀름의 스웨덴 귀족의 군사적 도움으로 알브레히트는 노르웨이와 덴마크를 물리칠 수 있었다. 평화 협정이 체결되었고, 마그누스는 석방되어 노르웨이로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게 되었다.[2] 알브레히트는 스웨덴 왕관을 확보했지만, 섭정 평의회에서 스웨덴 귀족들에게 광범위한 양보를 하겠다는 늦은 대관 선서를 해야 했다.[2] 보 욘손 (그리프)(Bo Jonsson (Grip))는 이 권력을 이용하여 개인적으로 1,500개의 농장을 찬탈했으며, 곧 스웨덴 최대의 토지 소유자가 되어 스웨덴 영토 전체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왕실을 제외하고 가장 큰 부를 소유하게 되었다.[2]
1370년에 알브레히트는 발트해에 세력을 뻗친 덴마크를 견제하기 위해 한자동맹과 독일 제후들의 반덴마크 연합에 스웨덴을 참여시켜 덴마크를 굴복시키고 슈트랄준트 화의를 체결했다[6]。 그러나 스웨덴 국내에서는 국왕 알브레히트와 귀족 및 고위 성직자 등 유력자들 간의 대립이 표면화되었다[7]。 알브레히트는 왕권 강화를 꾀했지만, 이에 반해 귀족과 고위 성직자들은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섭정인 마르그레테 1세를 지지했고, 1388년에는 양측의 대결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1389년 알브레히트 군과 마르그레테 군이 남부 스웨덴에서 결전을 벌였고, 알브레히트는 덴마크에 패하여 포로가 되어[8], 스웨덴 왕위에서 폐위되었다. 1395년에 알브레히트는 한자동맹 도시들의 중재로 석방되었지만, 스웨덴 왕위 청구권을 포기하지 않고 해적 집단인 비탈리엔브뤼더를 고용하여 고틀란드 섬의 비스비를 점령하고, 1398년에 그 비탈리엔브뤼더가 고틀란트에서 쫓겨난 후에도 1408년까지 해적 행위를 계속했다[10]。
2. 3. 내전과 덴마크와의 갈등
알브레히트 3세는 메클렌부르크의 알브레히트 2세(Albrecht II) 공작의 둘째 아들로, 그의 어머니 에우페미아 에릭스도테르는 쇠데르만란드의 에리크 망누손(Erik Magnusson) 공작의 딸이자 스웨덴의 망누스 4세 국왕의 누나였다.[2] 1363년 보 욘손 그리프(Bo Jonsson Grip)가 이끄는 스웨덴 귀족 평의회가 귀족들에게 인기가 없었던 알브레히트의 삼촌인 마그누스 4세 국왕에 대항한 반란을 일으킨 후, 스웨덴에서 추방되었다.[2] 귀족들의 요청에 따라 알브레히트는 여러 독일 공작과 백작, 그리고 북부 독일의 여러 한자 도시들의 지원을 받아 스웨덴 침공을 시작했다.[2] 스톡홀름과 스웨덴의 칼마르는 한자 인구가 많았기에 이 개입을 환영했다.[2] 1364년 2월 18일, 알브레히트는 모라의 돌에서 스웨덴 국왕으로 즉위했다. [2]알브레히트의 등장은 알브레히트 지지자와 마그누스 지지자 간의 8년간의 내전을 초래했다. 1365년 엔셰핑 근처 전투에서 마그누스는 패배하여 알브레히트에게 포로로 잡혔다.[2] 초기 패배 이후 덴마크 국왕 발데마르 4세가 마그누스와 호콘을 위해 개입했고, 발데마르의 군대는 마그누스를 지지하는 스웨덴 농민들과 합류했다.[2] 알브레히트는 스웨덴의 모든 지방에 독일인을 관리로 임명하는 정책으로 인해 스웨덴인들 사이에서 인기가 없었다.[2]
1371년, 덴마크와 스웨덴 동맹의 도움으로 호콘 국왕은 일시적으로 알브레히트를 물리치고 스톡홀름을 포위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2] 스톡홀름의 스웨덴 귀족의 군사적 도움으로 알브레히트는 노르웨이와 덴마크를 물리칠 수 있었다.[2] 평화 협정이 체결되었고, 마그누스는 석방되어 노르웨이로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게 되었다.[2] 알브레히트는 스웨덴 왕관을 확보했지만, 섭정 평의회에서 스웨덴 귀족들에게 광범위한 양보를 하겠다는 늦은 대관 선서를 해야 했다.[2] 보 욘손 (그리프)(Bo Jonsson (Grip))는 이 권력을 이용하여 개인적으로 1,500개의 농장을 찬탈했으며, 곧 스웨덴 최대의 토지 소유자가 되었다.[2]
1384년에는 동생 마그누스 1세의 죽음으로 메클렌부르크-슈베린 공위를 계승했다. 알브레히트는 1370년에 발트해에 세력을 뻗친 덴마크를 견제하기 위해 한자동맹과 독일 제후들의 반덴마크 연합에 스웨덴을 참여시켜 슈트랄준트 화의를 체결했다[6]。 그러나 스웨덴 국내에서는 국왕 알브레히트와 귀족 및 고위 성직자 등 유력자들 간의 대립이 표면화되었다[7]。
1389년 알브레히트 국왕에 대한 불만을 품은 스웨덴의 귀족들이 덴마크의 마르그레테 1세 여왕과 연합 전선을 형성했다. 알브레히트 군과 덴마크 군을 주력으로 한 섭정 마르그레테 군이 남부 스웨덴에서 결전을 벌였고, 알브레히트는 덴마크에 패하여 포로가 되어[8], 스웨덴 왕위에서 폐위되었다. 1395년에 알브레히트는 한자동맹 도시들의 중재로 석방되었지만, 스웨덴 왕위 청구권을 포기하지 않고 해적 집단인 비탈리엔브뤼더를 고용하여 고틀란드 섬의 비스비를 점령하고, 1398년에 그 비탈리엔브뤼더가 고틀란트에서 쫓겨난 후에도 1408년까지 해적 행위를 계속했다[10]。
2. 4. 폐위와 만년
알브레히트는 메클렌부르크의 알브레히트 2세(Albrecht II) 공작의 둘째 아들로, 그의 어머니 에우페미아 에릭스도테르(Eufemia Eriksdotter)는 쇠데르만란드의 에리크 망누손(Erik Magnusson) 공작의 딸이자 스웨덴의 망누스 4세 국왕의 누나였다.1364년 스웨덴 귀족들이 망누스 4세에 대한 반란을 일으켜 그를 왕위에서 몰아냈다. 스웨덴 귀족들은 한자 동맹과 독일 북부 도시, 공작, 백작들의 지원을 받던 알브레히트를 스웨덴의 새 국왕으로 추대했고, 1364년 2월 18일 대관식을 거행했다. 1384년에는 마그누스 1세(Magnus I)의 뒤를 이어 메클렌부르크 공작으로 즉위했다.
1370년 발트해에 세력을 뻗친 덴마크를 견제하기 위해 한자동맹과 독일 제후들의 반덴마크 연합에 스웨덴을 참여시켜 덴마크를 굴복시키고 슈트랄준트 화의를 체결했다.[6] 그러나 스웨덴 국내에서는 국왕 알브레히트와 귀족 및 고위 성직자 등 유력자들 간의 대립이 표면화되었다.[7] 알브레히트는 메클렌부르크와 독일에서 용병을 모집하여 왕권 강화를 꾀했지만, 이에 반해 귀족과 고위 성직자들은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섭정인 마르그레테를 지지했고, 1388년에는 양측의 대결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1389년 알브레히트 국왕에 대한 불만을 품은 스웨덴 귀족들이 덴마크의 마르그레테 1세 여왕과 연합 전선을 형성했다. 같은 해 2월, 알브레히트 군은 오슬레(Åsle) 전투에서 덴마크 군에 패배했고, 알브레히트는 포로로 잡혀 스코네의 린드홀멘 성에 6년 동안 수감되었다. 그는 스웨덴 왕위에서 폐위되었다.[8]
1395년 평화 협상을 통해 석방되었으며, 3년 안에 스톡홀름을 포기하거나 마르그레테에게 많은 배상금을 지불하기로 합의했다. 3년 후, 알브레히트는 벌금을 내는 대신 스톡홀름을 포기하기로 했고, 1398년 이 합의가 발효되어 마르그레테가 스톡홀름을 소유하게 되었다.
1395년에 알브레히트는 한자동맹 도시들의 중재로 석방되었지만, 스웨덴 왕위 청구권을 포기하지 않고 해적 집단인 비탈리엔브뤼더를 고용하여 고틀란드 섬의 비스비를 점령하고, 1398년에 그 비탈리엔브뤼더가 고틀란트에서 쫓겨난 후에도 1408년까지 해적 행위를 계속했다.[10]
알브레히트는 메클렌부르크로 돌아와 1412년 메클렌부르크 바트도베란(Bad Doberan) 수도원에서 사망했다. 그의 묘는 독일 바트 도베란의 도베란 대성당에 있다.
3. 메클렌부르크 공작
알브레히트 3세는 메클렌부르크의 알브레히트 2세(Albrecht II) 공작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에우페미아 에릭스도테르(Eufemia Eriksdotter)는 쇠데르만란드의 에리크 망누손(Erik Magnusson) 공작의 딸이자 스웨덴의 망누스 4세 국왕의 누나였다.[6]
1384년에는 마그누스 1세(Magnus I)의 뒤를 이어 메클렌부르크 공작으로 즉위했다.[6] 1383년부터 1388년까지는 조카 알브레히트 4세를 공동 군주로 삼았으나, 알브레히트 4세는 요절했다. 알브레히트 3세 사후에는 아들 알브레히트 5세가 공위를 계승했다.
스웨덴 귀족들이 1364년 마그누스 에릭손을 추방한 후, 그의 아들인 노르웨이 왕 호콘 6세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막기 위해 마그누스의 조카 알브레히트를 북독일의 메클렌부르크 가문에서 데려왔다.
4. 가족 관계
알브레히트 3세는 1352년 10월 12일 비스마르에서 슈베린 백작 오토의 딸인 리하르디스 폰 슈베린과 결혼했다.[3] 슬하에 에리크와 리하르디스 카테리나 2명의 자녀를 두었다. 리하르디스 여왕은 1377년에 사망하여 스톡홀름에 묻혔다.[3]
1396년 2월, 슈베린에서 알브레히트는 아그네스 폰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와 재혼했고, 그의 아들 에리크는 조피와 결혼했다. 알브레히트와 아그네스는 알브레히트 5세 1명의 아들을 두었다. 아그네스 여왕은 1430/1434년에 사망했다.
5. 평가
참조
[1]
웹사이트
Albrekt af Mecklenburg, konung i Sverige
https://runeberg.org[...]
2020-08-01
[2]
웹사이트
Kungahusets symboler
https://www.kungahus[...]
2023-09-27
[3]
웹사이트
Albrekt of Mecklenburg biography
https://runeberg.org[...]
[4]
서적
百瀬 他、p. 102
[5]
서적
Louda & Maclagan, p. 220
[6]
서적
百瀬 他、p. 101
[7]
서적
百瀬 他、p. 104
[8]
서적
百瀬 他、p. 107
[9]
서적
百瀬 他、p. 107, 108
[10]
서적
百瀬 他、p. 109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