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콘 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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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콘 6세는 1340년경 스웨덴에서 태어나 노르웨이의 공동 왕위에 올랐으며, 1355년부터 친정을 시작했다. 그는 스웨덴 왕위를 탈환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덴마크 국왕 발데마르 4세의 딸 마르그레테 1세와 결혼하여 북유럽 권력 투쟁에 참여했다. 호콘 6세는 1380년 사망했으며, 그의 아들 올라프 2세가 노르웨이 왕위를 계승하고 마르그레테 1세가 섭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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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콘 6세 | |
|---|---|
| 기본 정보 | |
![]() | |
| 군주호 | 노르웨이 국왕 스웨덴 국왕 (공동 통치) |
| 재위 기간 | 노르웨이 왕: 1343년 8월 15일 – 1380년 9월 11일 스웨덴 왕: 1362년 – 1364년 |
| 전임 | 마그누스 에릭손 (노르웨이) 마그누스 에릭손 (스웨덴) |
| 섭정 | 마그누스 에릭손 (1343-1364) |
| 후임 | 올라프 4세 (노르웨이) 알브레히트 (스웨덴) |
| 배우자 | 마르그레테 1세 (덴마크) (1363년 결혼) |
| 자녀 | 올라프 2세 |
| 왕가 | 뱔보 가문 |
| 아버지 | 마그누스 4세 |
| 어머니 | 블랑카 아브 나무르 |
| 출생일 | 1340년 8월경 |
| 출생지 | 추정 스웨덴 |
| 사망일 | 1380년 9월 11일 |
| 사망지 | 오슬로, 노르웨이 |
| 매장지 | 오슬로 성모 마리아 교회 |
2. 생애
1343년 8월 15일 노르웨이의 호콘 6세 국왕으로 즉위했으며, 1362년 2월 15일에는 스웨덴 귀족들에 의해 스웨덴 국왕으로 선출되었지만 1364년 알브레히트 3세 추 메클렌부르크슈베린 공작에 의해 폐위되었다.[1] 1363년에는 덴마크의 발데마르 4세 국왕의 딸인 마르그레테와 결혼했다.
1375년 덴마크의 발데마르 4세 국왕이 사망하자, 1376년 덴마크 왕실 자문 위원회는 호콘 6세의 아들인 올라프를 덴마크 국왕으로 추대했다. 올라프 2세는 1380년 호콘 6세가 사망하면서 노르웨이 국왕 올라프 4세로도 즉위했다.[57]
호콘 6세는 1380년 늦여름이나 초가을 쯤[1] 오슬로에서 사망했으며,[1] 40세였다. 그는 오슬로 성 마리아 교회에 묻혔다. 그의 아들 올라프 4세가 노르웨이 왕위를 계승했으며, 마르그레테 여왕이 섭정을 맡았다.[1][2][39]
2. 1. 초기 생애

호콘 6세는 1340년(아마도 8월 중순)에 태어났다. 출생 연도와 장소는 불확실하지만, 스웨덴에서 태어났을 가능성이 크다.[1][2] 그는 마그누스 에릭손 (노르웨이의 망누스 7세)과 블랑슈 드 남뤼의 아들이었다.[3] 그의 형인 에릭은 1356년부터 1359년까지 아버지에게 반대하는 스웨덴의 왕이었다. 호콘과 그의 아버지 쪽 가족은 스웨덴에서 에릭 왕가를, 노르웨이에서 스베르 왕가를 계승한 스웨덴의 뱔보 가문에 속했다. 호콘은 그의 유일한 적통 딸인 잉에보르그를 통해 호콘 5세의 증손자였으며,[4][5] 노르웨이 귀족들에게 왕위 계승자로 받아들여졌다. 호콘의 또 다른 주목할 만한 조상은 그의 아버지 쪽 할아버지인 세데르만란드 공작 에릭 마그누손을 통해 스웨덴의 마그누스 라둘로스 왕이다.[6][7]
2. 2. 노르웨이 왕위 계승
1343년 8월 15일 노르웨이의 호콘 6세 국왕으로 즉위했다.[1] 호콘은 스웨덴의 망누스 4세 국왕(노르웨이의 망누스 7세 국왕)과 그의 아내인 블랑슈 드 나뮈르의 둘째 아들로, 1340년 8월 중순경에 태어났다. 출생 장소는 불확실하지만, 스웨덴에서 태어났을 가능성이 크다.[1][2]호콘은 노르웨이에서 자라면서[2] 훗날 왕국을 통치할 수 있도록 준비되었다. 1343년 초 가을, 노르웨이 국의회는 바르베리 요새에서 마그누스 왕과 회의를 가졌고, 8월 15일에 호콘을 노르웨이 왕위에 올리기로 결정했다는 서한을 노르웨이와 스웨덴 전역에 발송했다.[1][2][8]
1년도 채 되지 않아, 도시와 일반 대중의 대표자들이 보후스 성에 모여 호콘을 왕으로 칭송하고 영원한 충성과 복종을 맹세했다.[1][2] 이 회의는 노르웨이의 옛 선출 군주제와 역사적인 유대 관계를 맺었지만, 국의회가 작성한 칭송 문서는 호콘이 노르웨이의 일부 지역만을 통치하도록 규정하고, 적법한 아들 없이 사망할 경우 노르웨이 왕위 계승법이 적용될 것이라는 점을 명시하여 세습 군주제가 유지되도록 했다.[1][2][8][9]
1350년 늦게 베르겐에서 열린 회의에서 1343년 바르베리 성에서의 회의와 1344년 보후스 성에서의 회의가 비준되었다.[1] 마그누스는 1355년 8월 8일에서 18일 사이에 노르웨이 왕위를 포기했고, 이후 호콘은 왕국에서 단독 왕으로 통치하게 되었지만, 그의 아버지는 이후 몇 년 동안 노르웨이에 대한 통제권을 계속 행사했다.[1][2][8] 호콘이 자신의 왕국을 단독 왕이자 통치자로서 행동한 최초의 기록된 사건은 1358년 1월 22일, 오슬로 시의 특권에 대한 승인 서한을 보낸 것이다.[1]
1355년의 노르웨이는 실제로 호콘과 마그누스 사이에서 분할되었다. 마그누스는 1350년 베르겐에서 열린 비준 회의에서 호갈란과 북해에 있는 노르웨이 섬들의 영토를 특별히 요구했다. 마그누스는 또한 퇸스베르그와 시엔의 영토를 소유했으며, 보가르와 대부분의 보후슬렌의 실제 통치자였는데, 이 지역은 블랑셰 여왕의 개인 봉토로 보유되었다.[1][10]
1343년에 아버지 마그누스 7세와 공동 왕으로 노르웨이 왕위에 올랐으며, 1355년에 친정을 시작했다.[54] 한편 형 에리크가 스웨덴 왕위를 계승하기로 결정되었고, 이로 인해 노르웨이와 스웨덴의 동군 연합은 해소되었지만,[54] 에리크는 1356년에 스웨덴 공동 왕위에 즉위했지만 1359년에 사망했다.[55]
2. 3. 스웨덴 왕위 계승
1343년 8월 15일 노르웨이 국왕으로 즉위한 호콘은 1362년 2월 15일 스웨덴 귀족들에 의해 스웨덴 국왕으로도 선출되었다.[14][15] 그러나 1364년 알브레히트 3세 추 메클렌부르크슈베린 공작에 의해 폐위되었다.[1]호콘의 아버지 망누스 4세는 스웨덴 내에서 분쟁을 겪었는데, 이 갈등은 결국 공개적인 전쟁으로 번졌다. 호콘의 형 에릭은 아버지의 통치에 불만을 품고 스웨덴의 강력한 귀족 세력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11] 그러나 반란은 오래가지 못했고, 망누스와 에릭은 1년 만에 화해했다.[12] 에릭 "12세"는 스웨덴 국왕으로 추대되어 아버지와 공동 통치자가 되었고, 스웨덴 남부를 지배하게 되었다.[13] 하지만 1359년 에릭이 흑사병으로 갑자기 사망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1357년 평화 협정에 따라, 스웨덴 귀족들은 곧 망누스를 폐위시키고 웁살라에서 호콘을 스웨덴 국왕으로 선출했다.[1] 1357년부터 호콘은 자신을 "스웨덴의 군주"라고 칭했지만,[1] 선출 후에는 "노르웨이와 스웨덴의 국왕"이라고 칭했다.[14][15]

2. 4. 결혼과 덴마크와의 관계
1343년 8월 15일 노르웨이의 호콘 6세 국왕으로 즉위했으며, 1363년에는 덴마크의 발데마르 4세 국왕의 딸인 마르그레테와 결혼했다.[18] 마르그레테와의 결혼은 북유럽 권력 투쟁의 일부로 여겨졌다.[13]1359년 덴마크 국왕 발데마르 4세의 차녀 마르그레테와 약혼[56]했으나, 두 왕국 사이의 분쟁으로 인해 몇 년간 결혼이 보류되었다. 1363년 양측이 화해하면서 코펜하겐 대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53]
원래 호콘과 마르그레테의 결혼은 망누스와 발데마르 사이의 동맹 조약의 일환이었다.[1] 발데마르는 마그누스가 장남 에릭에 의해 시작된 반란을 스코네 지방을 침공함으로써 지원할 것으로 추정되었고, 그 지원에 대한 보상으로 헬싱보리 성을 받기로 되어 있었다.[16] 그러나 1359년 에릭이 사망하자, 마그누스는 약속을 어기고 성을 반환하지 않았다. 이에 발데마르는 1360년 스코네를 침공하여 점령하고 헬싱보리 성을 포위하여 점령했다. 이로 인해 스코네는 다시 덴마크의 지배로 넘어갔다.[17]
1375년, 장인인 발데마르 4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왕비 마르그레테는 덴마크 왕국 참사회를 설득하여 호콘 6세와의 아들 올라프 2세(1370년 - 1387년)를 덴마크 왕위에 앉혔다.[57] 올라프 2세는 1380년에 아버지 호콘 6세가 사망한 후 올라프 4세로서 노르웨이 왕위도 계승했으며, 어머니 마르그레테는 덴마크 및 노르웨이의 섭정이 되었다(마르그레테 1세).[57]
2. 5. 스웨덴 왕위 탈환 시도와 한자 동맹과의 갈등
호콘은 아버지 마그누스의 스웨덴 내 분쟁에 휘말려 공개적인 전쟁으로까지 번졌다. 형 에릭 "12세"는 스웨덴 섭정회의 일원이 되지 못한 것과 아버지 마그누스가 막내아들 호콘을 편애한 것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11] 그러나 곧 화해하고 에릭은 스웨덴 왕으로 추대되어 아버지와 공동 통치자가 되었으며, 스웨덴 남부를 지배하게 되었다.[12][13] 하지만 1359년 에릭이 흑사병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13] 1362년 2월 15일, 스웨덴 귀족들은 마그누스를 폐위시키고 웁살라에서 호콘을 스웨덴 왕으로 선출했다.[14][15]1363년, 보 욘손 그립을 비롯한 스웨덴 섭정 의회 구성원들은 메클렌부르크-슈베린 공국 궁정에 도착하여, 마그누스의 누이 에우페미아와 결혼하여 스웨덴 문제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메클렌부르크 공작 알베르트 2세를 설득해 마그누스와 호콘에 대항하여 스웨덴에 개입하고, 그의 아들 알브레크트를 옹립하여 그들을 폐위하도록 했다.[1][19][20][21][22][23] 1364년, 알베르트 공작은 여러 신성 로마 제국 북독일 귀족들의 군사적 지원을 받아 스웨덴을 침략하여 정복하고 아들을 새로운 왕으로 옹립했다.[24] 1365년 11월, 알브레크트는 공식적으로 스웨덴 왕으로 추대되었지만, 이미 1364년 2월 18일에 대관식을 치렀다.[1][2][19] 마그누스는 아들과 함께 노르웨이로 피신하여 스웨덴 재정복을 계획했다.[25][26] 호콘과 마그누스는 베스트예틀란드, 달슬란드, 베름란드 지방을 통제했다.[27]
1365년 초, 호콘과 마그누스는 노르웨이인과 해당 지방의 스웨덴인으로 구성된 대규모 군대를 소집하여 스톡홀름으로 진격했다. 2월 27일, 호콘은 알브레크트와 그의 지지자들에 대항하여 포고령을 발표하고, 지역 주민들이 봉기하도록 촉구했다. 노르웨이군은 우플란드로 진입하여 가타스코겐 전투에서 스웨덴-독일군과 격돌했으나 패배했고, 마그누스는 포로로 잡혀 6년간 억류되었다.[2][28]
호콘의 주요 외교 정책은 스웨덴을 독일로부터 되찾고, 아버지를 구출하는 것이었다. 그는 서부 스웨덴을 소유하고 있었고, 독일인들에게 불만을 품은 귀족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노르웨이와 스웨덴 간의 전쟁이 계속되었고, 호콘은 덴마크의 발데마르 왕과 동맹을 맺었다.[2][28][29][30] 1371년 스톡홀름 포위전에서 호콘은 복수에 성공하는 듯했으나, 알브레크트와 독일 지지자들이 포위를 견뎌내어 평화 조약을 체결해야 했다. 1371년 8월 14일에 서명된 조약에 따라 호콘은 막대한 몸값을 지불하고 아버지를 석방하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2][28][29][31]

1361년, 발데마르는 스웨덴의 스코네 지역과 욀란드, 고틀란드 섬을 침공하여 비스비를 점령했다.[32] 한자 동맹 함대는 반격했으나, 헬싱보리 해전에서 덴마크 함대에 패배했다. 동맹은 보딩보리 조약으로 이어지는 굴욕적인 휴전을 받아들여야 했다.[33] 노르웨이와 덴마크의 동맹은 북유럽과 발트해 지역의 권력 균형을 뒤흔들 위협이 되었고, 1365년 베르겐에서 독일인 시위가 발생하여 1366년까지 브뤼겐의 한자동맹 사무소가 폐쇄되었다.[1]
1367년, 한자동맹은 쾰른 동맹을 결성하여 덴마크와 노르웨이에 대항했다. 동맹은 노르웨이 해안을 약탈하고, 덴마크가 점령한 스코네 지역을 침공했으며, 코펜하겐을 점령하고 약탈했다. 윌란의 반란 귀족들로 인해 발데마르는 1368년 부활절에 왕국에서 도망쳐야 했다. 발데마르는 헤닝 포데부스크를 임명하여 동맹과 평화를 협상하게 했다.[34][1][2][8][17][32][33][35] 동맹은 발데마르에게 무역 면세 권리와 덴마크 해협의 어업권을 인정하도록 강요했고, 미래 덴마크 왕 선거에 대한 거부권을 포함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으며, 스코네 해안과 헬싱보리 성의 여러 도시를 15년 동안 통제하게 되었다.[32][17]

1370년 5월 24일, 슈트랄준트 조약이 체결되어 전쟁이 종식되었고, 한자동맹은 이 지역에서 권력의 정점에 도달했다. 한자동맹 도시와의 패배는 호콘의 외교 정책에 타격을 입혔고, 노르웨이 무역은 한자동맹의 독점으로 고통받았다.[33][35][36][37][38] 호콘은 덴마크 문제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었고, 다시 스웨덴을 되찾는 데 집중했다. 1375년 발데마르의 죽음으로 호콘은 아들을 덴마크 왕으로 선출할 기회를 얻었다.[1][2][39]
1375년 10월 24일, 발데마르가 사망하자,[17] 호콘과 마르가레테는 아들 올라프를, 메클렌부르크의 하인리히는 아들 알브레히트를 왕위 계승자로 지명했다.[41][42][43] 호콘은 한자동맹으로부터 돈을 빌려 중립을 확보했고, 덴마크 왕국 평의회는 노르웨이와의 연합에 기울어져 있었다. 1376년 5월 3일, 올라프가 왕으로 선출되어 호콘의 영향력을 확장했다.[1][39][44]
2. 6. 덴마크 왕위 계승
1375년 덴마크의 발데마르 4세 국왕이 구레 성에서 사망하면서[17] 덴마크 왕위는 공석이 되었다. 새 국왕은 덴마크 왕국 평의회에서 선출해야 했고, 모든 후보자는 한자 동맹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17] 발데마르 4세는 후계자를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호콘 6세와 마르그레테 부부는 외아들 올라프를, 메클렌부르크의 하인리히는 아들 알브레히트를 각각 왕위 계승 후보로 지명했다.[1][40][41][42][43]호콘 6세는 아들의 덴마크 왕위 계승을 위해 한자 동맹에 많은 돈을 빌려 중립을 약속받았고,[1] 덴마크 왕국 평의회는 반독일 정서와 노르웨이와의 연합 가능성 때문에 올라프를 지지했다. 결국 1376년 5월 3일, 슬라겔세에서 올라프가 덴마크 국왕으로 선출되면서[39] 호콘 6세는 스칸디나비아 전역으로 영향력을 확장하는 데 성공했다.[1][44]
2. 7. 국내 정책
호콘 6세는 노르웨이에서 성장하며 왕위를 이을 준비를 했다.[2] 1343년 가을, 노르웨이 국의회의 주요 인사들이 바르베리 요새에서 마그누스 왕과 회담을 가졌다. 같은 해 8월 15일, 호콘을 노르웨이 왕위에 올리기로 결정했다는 서한이 노르웨이와 스웨덴 전역에 보내졌다.[1][2][8]1년도 안 되어 보후스 성에서 도시와 일반 대중의 대표자들이 모여 호콘을 왕으로 칭송하고 충성을 맹세했다.[1][2] 이 회의는 노르웨이의 옛 선출 군주제와 역사적 유대를 맺었지만, 국의회가 작성한 칭송 문서는 호콘이 노르웨이의 일부 지역만 통치하도록 규정하고, 적법한 아들 없이 사망할 경우 노르웨이 왕위 계승법을 따르도록 하여 세습 군주제를 유지했다.[1][2][8][9] 1350년 늦게 베르겐에서 열린 회의에서 이 결정이 비준되었다.[1]
1355년 8월, 마그누스는 노르웨이 왕위를 포기했고, 이후 호콘은 단독으로 왕국을 통치했다. 하지만 마그누스는 이후 몇 년 동안 노르웨이를 계속 통제했다.[1][2][8] 호콘이 단독 통치자로서 처음 행동한 기록은 1358년 1월 22일 오슬로 시의 특권에 대한 승인 서한을 보낸 것이다.[1] 1355년 노르웨이는 호콘과 마그누스 사이에 분할되었다. 마그누스는 호갈란과 북해의 노르웨이 섬들을 요구했고, 퇸스베르그, 시엔, 보가르와 보후슬렌의 대부분을 소유했다.[1][10]

1349년, 흑사병이 영국 상선을 통해 베르겐으로 유입되어 인구의 50%에서 60%가 사망[45]하면서 왕국은 사회적, 경제적 쇠퇴기에 접어들었다.[46] 왕국의 재정 구조는 붕괴되었고, 호콘의 외교 정책은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다.[8][46][47][49] 1371년, 호콘은 아버지의 석방을 위해 12000silver mark의 몸값을 지불해야 했고, 이를 위해 특별세를 부과했다.[48]
1379년, 호콘은 오크니 백작령에 대한 계승 분쟁을 해결했다. 그는 로슬린 남작 헨리 싱클레어에게 오크니 백작 지위를 부여했다. 싱클레어는 1000 노블을 지불하고, 필요시 100명의 무장 병력으로 노르웨이 국왕을 섬겨야 했다. 호콘은 1380년 사망 직전, 인질들의 귀가를 허락했다.[49][50][51]
호콘의 통치 기간 동안 교회와는 문제없는 관계를 유지했다. 스웨덴이 독일에 넘어간 후, 많은 스웨덴 귀족들이 호콘에게 지지를 약속하고 노르웨이에 정착했다. 메클렌부르크 출신의 독일 귀족들이 호콘의 군대에 들어갔다는 기록도 있다.[49][2]
호콘 재위 기간 동안 노르웨이 군대는 개혁되었다. 군사 구조는 전통적인 농민 징병 제도인 ''레이당''에서 충성스러운 노르웨이 영주들의 직접 통제를 받는 체제로 바뀌었다. 호콘은 영주들에게 더 많은 권한과 군사적 책임을 이양하여 더 큰 군대를 동원할 수 있었지만, 유지 비용이 많이 들었다. 스웨덴과의 전쟁 등으로 인해 호콘은 돈을 빌려야 했고, 노르웨이 귀족과 독일 상인들에게 의존하게 되었다. 외국 부채의 증가는 노르웨이의 정치적 권력을 변화시키고 군주의 권력을 약화시켰다.[8]
2. 8. 사망
1380년 늦여름이나 초가을 쯤[1], 호콘 6세는 오슬로에서 사망했으며,[1] 겨우 40세였다. 그는 오슬로 성 마리아 교회에 묻혔다. 그의 아들 올라프 4세가 노르웨이 왕위를 계승했으며, 마르그레테 여왕이 섭정 역할을 수행했다.[1][2][39]말년에 이르러 호콘 6세는 거의 끊이지 않는 전쟁과 사촌인 메클렌부르크의 알베르트와의 갈등으로 지쳐 있었다. 이러한 점과 호콘 6세 통치의 상당한 재정적 어려움이 그의 이른 죽음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추측된다.[48][52] 호콘 6세는 잃어버린 스웨덴 영토를 되찾아야 하는 자신의 책임을 결코 멈추지 않았고, 1380년 3월에는 스웨덴의 독일인에 맞서 전쟁을 준비하라는 서한을 발송했다. 이 서한에는 ''레이당'' 함대를 소집하여 출항 준비를 하라는 요청이 담겨 있었다. 분명히, 독일인들은 이전의 평화 조약을 깨고 호콘 6세에 맞서 전쟁을 벌이려고 모의했으나, 이 기간 동안 벌어진 전쟁이나 전투에 대한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1]
3. 평가
(요약 및 원본 소스가 제공되지 않아 내용을 작성할 수 없습니다.)
4. 가계
스웨덴의 망누스 4세(노르웨이의 망누스 7세)와 블랑슈 드 나뮈르의 둘째 아들로 1340년경에 태어났다. 출생 장소는 확실하지 않지만, 스웨덴에서 태어났을 가능성이 크다.[1][2] 형인 에릭 12세는 1356년부터 1359년까지 아버지에게 반대하는 스웨덴의 왕이었다. 호콘과 그의 아버지 쪽 가족은 스웨덴에서 에릭 왕가를, 노르웨이에서 스베르 왕가를 계승한 스웨덴의 뱔보 가문에 속했다. 호콘은 그의 유일한 적통 딸인 잉에보르그를 통해 호콘 5세의 증손자였으며,[4][5] 노르웨이 귀족들에게 왕위 계승자로 받아들여졌다.
| 가계도 |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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