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코네타르 다리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알코네타르 다리는 스페인 엑스트레마두라 지방의 타구스강에 걸쳐 있던 고대 로마 시대의 다리이다. '비아 데 라 플라타' 로마 도로의 일부로, 메리다에서 아스토르가까지 이어지는 중요한 내륙 연결로였다. 다리는 1970년 알칸타라 댐 건설로 인해 원래 위치에서 6km 떨어진 곳으로 이전되었으며, 현재는 역사 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다리의 주요 특징은 아치의 결원 형태였으며, 이는 당시 로마 시대의 다른 다리에서는 드문 형태였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카세레스도의 역사 - 알칸타라 다리
알칸타라 다리는 루시타니아 속주 시대에 건설되어 전쟁으로 파괴된 후 재건되었으며, 현재 181.7m 길이의 6개 아치로 구성되었고 로마 비문과 설계자를 기리는 신전이 존재한다. - 카세레스도의 관광지 - 알칸타라 다리
알칸타라 다리는 루시타니아 속주 시대에 건설되어 전쟁으로 파괴된 후 재건되었으며, 현재 181.7m 길이의 6개 아치로 구성되었고 로마 비문과 설계자를 기리는 신전이 존재한다. - 카세레스도의 건축물 - 알칸타라 다리
알칸타라 다리는 루시타니아 속주 시대에 건설되어 전쟁으로 파괴된 후 재건되었으며, 현재 181.7m 길이의 6개 아치로 구성되었고 로마 비문과 설계자를 기리는 신전이 존재한다.
알코네타르 다리 - [지명]에 관한 문서 | |
---|---|
개요 | |
이름 | 알코네타르 다리 |
원어 이름 | Puente de Alconétar |
원어 이름 언어 | es |
![]() | |
위치 | 스페인 엑스트레마두라주 카세레스도 가로비야스 데 알코네타르 |
횡단 대상 | 타구스강 |
종류 | 결원 아치교 |
재료 | 석조, 로마 콘크리트 |
제원 | |
경간 수 | 약 18개 (홍수 배출구 포함) |
최대 경간 | 15m |
길이 | 290m (접근로 포함) |
폭 | 6.55-6.80m |
최소 높이 | 12.50m |
역사 | |
설계자 | 다마스쿠스의 아폴로도로스 추정 |
완공 시기 | 트라야누스 또는 하드리아누스 치세 (서기 98–138년) 추정 |
기타 정보 | |
문화유산 등재 여부 | 스페인 문화유산으로 지정 |
2. 위치와 도로 접근
옛 알코네타르 다리는 하류에 위치한 알칸타라 다리와 혼동되기도 하며, 스페인 엑스트레마두라주 카세레스도의 중심부에서 알몬테강 하구 근처 타구스강을 가로질렀다.[5] 오늘날 다리 유적 인근으로 타구스강을 건너는 현대 고속도로와 철도는 스페인 남부와 북부를 잇는 이 교차 지점의 역사적 중요성을 보여준다.[5]
1970년 알칸타라 댐 건설 과정에서 다리의 남은 부분들은 원래 위치에서 북쪽으로 6km 떨어진 가로비야스 데 알코네타르 시 인근 목초지로 옮겨졌다.[6] 반면, 알몬테강을 건너던 인접한 고대 다리의 흔적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7]
2. 1. 비아 데 라 플라타
고대 로마 시대에 알코네타르 다리는 시간이 흘러 '비아 데 라 플라타'라고 불리게 된 로마 도로 ''이테르 아브 에메리타 카에사라우구스탐''의 일부였다. 이 중요한 이베리아 내륙 연결로는 남쪽의 지방 수도였던 메리다에서 시작하여 알라곤 강, 티에타르 강, 타구스 강 유역을 따라 북쪽으로 이어졌고, 메세타 센트랄 서부를 지나 살라망카를 거쳐 스페인 북서부의 아스토르가까지 도달했다.[8][4]
비아 데 라 플라타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재위: 기원전 30년–서기 14년)와 그의 후임자들이 이베리아반도에 대한 군사적 통제를 강화하고, 풍부한 스페인의 금과 은 광산을 개발하기 위해 건설한 네 개의 주요 도로 중 하나였다.[4]
이 도로를 따라 타구스 강을 건너는 알코네타르 다리 외에도, 알바레가스 강, 알후센 강, 카파라 인근, 그리고 토르메스 강을 가로지르는 다른 고대 다리 유적 네 곳이 발견되었다.[9] 또한, 알코네타르 다리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는 당시 로마 도로에서 관례적인 거리마다 설치되었던 만시오(여행자 숙소) 중 하나인 ''투르물루스''(스페인어: "Ad Túrmulos")가 있었다.[7] 이 만시오는 메리다와 아스토르가 사이에 있던 총 16개의 만시오 중 네 번째에 해당했다.[10]
3. 역사
알코네타르 다리의 정확한 건설 시기는 문헌 및 금석학 자료가 부족하여 알려지지 않았다.[11] 다리의 결원아치 구조는 서기 2세기 초, 좀 더 정확히는 트라야누스 황제(재위: 서기 98–117년) 혹은 하드리아누스 황제(재위: 서기 117–138년)의 치세에 지어졌음을 시사하는데, 이 아치 형태의 사용이 당시의 전형적인 특징이었기 때문이다. 두 황제 모두 스페인 남부의 히스파니아 바이티카 출신이었으며, 트라야누스는 즉위 후 로마 도로인 '이테르 아브 에메리타 카이사라구스타'(Iter ab Emerita Caesaraugustamla)의 복원을 명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2]
결원아치는 트라야누스 황제의 궁정 건축가였던 다마스쿠스의 아폴로도로스가 자주 사용했던 기법으로, 로마의 트라야누스 포룸이나 트라야누스 다리 등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특히 트라야누스 다리는 당시 최고의 토목 공학 기술이 집약된 건축물로 평가받는다. 이 다리는 20개의 거대한 콘크리트 교각 위에 세워졌으며, 트라야누스의 다키아 전쟁 당시 너비 1000m가 넘는 다뉴브강을 건너 군대를 이동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13]
3. 1. 중세 시대
무어인 지리학자들은 알칸타라 다리에 대해서는 극찬했지만, 알코네타르 다리에 대해서는 특별히 언급하지 않았다.[14] 다만, 알코네타르, 알코네타라 혹은 알콘트라(الكنترة|알콘트라ar, 아랍어로 "작은 다리"라는 뜻)라고 불린 공동체가 일시적으로 존재했다는 약간의 증거가 있는데, 이는 아마도 높이 솟은 알칸타라 다리와 비교하여 붙여진 이름일 수 있다.[7] 또한 이 다리가 지역 방언으로 '만티블레 다리'(Puente de Mantible)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이는 샤를마뉴와 그의 12 기사들에 관한 전설을 암시하는 표현이지만 정확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15]알코네타르 다리는 레콩키스타 시대까지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11세기~13세기)에는 타구스강이 기독교 세력과 무어인 왕국 사이의 국경 지대였기 때문에 잦은 충돌이 발생했고, 이로 인해 다리를 온전히 사용하기 어려웠을 수 있다.[16] 한편, 강물의 침식 작용으로 다리 기초 부분이 손상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16]

기록상으로는 1231년에 처음 언급되었고, 1257년 기록에는 다리가 사용 중이었다고 명확히 나타난다.[17] 당시 다리와 인근 마을을 소유했던 템플 기사단이 다리를 수리했을 가능성이 있다.[17] 현재 남아있는 아치 중 1번과 3번은 로마 시대의 것이 아니라 이 시기에 재건된 것으로 보인다.[17] 그러나 1340년 무렵에는 알코네타르 다리가 다시 사용 불가능한 상태가 되어, 강을 건너기 위해 나룻배가 운영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17] 고대 로마 시대의 역참이 있던 자리에는 중세 시대에 요새가 세워졌는데,[18] 이 요새의 탑은 로마 시대 건축물의 스폴리아 (spolia)로 지어졌으며, 알칸타라 저수지의 수위가 낮아질 때 물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3. 2. 근세와 현대
근세 초기에 알코네타르 다리를 다시 사용 가능하게 하려는 몇 차례의 시도가 있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1553년, 건축가 로드리고 힐 데 온타뇬은 다리 재건 비용을 80,000 두카트로 추산했지만, 그의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1560년 알론소 데 코바루비아스(Alonso de Covarrubias)와 에르난 루이스(Hernán Ruiz)가 참여한 건설 계획은 기획 단계를 넘어서지 못했으며, 1569년과 1580년 사이의 또 다른 계획 역시 마찬가지였다.[8]18세기에도 다리를 수리하려는 두 차례의 시도(1730년, 1760-70년)가 있었지만 실패로 끝났다. 후자의 시도는 군사 공병 출신인 호세 가르시아 갈리아노(José García Galiano)의 주도로 이루어졌으며, 그의 계획에는 커다란 결원아치 세 개를 포함한 완전한 재건 방식이 담겨 있었다. 계획 초안에 따르면, 당시 남아있던 아치들은 이미 오른쪽 강둑에만 한정되어 있었는데, 이는 1797년 페르난도 로드리게스(Fernando Rodríguez)의 삽화와 몇 년 뒤 알렉상드르 드 라보르드의 저서 Voyage pittoresque de l'Espagnefra에 실린 판화에서도 확인되는 사실이다.[8] 로드리게스가 그린 복원 스케치에서는 강의 중심부에 세 개의 주 아치가 솟아 있는 다리의 옆모습이 나타나 있으며, 이 아치들 양쪽으로는 각각 9개의 결원아치가 대칭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이러한 대칭 구조로 미루어 볼 때, 로마 시대에는 상류 방향에서 보이는 오른쪽 강둑의 요새 대신 또 다른 결원아치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19]
알코네타르 다리에 대한 현대적인 과학적 분석은 1925년 토목공학자 안토니오 프리에토(Antonio Prieto)의 조사에서 시작되었다. 그의 조사서는 1970년 다리가 현재 위치로 이전되기 전의 상태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스페인 학자 카를로스 페르난데스 카사도(Carlos Fernández Casado)는 이 조사가 다리를 가능한 한 원형에 가깝게 복원하려는 진지한 시도였다고 평가하면서도, 이러한 어려운 작업 과정에서 주요 구조에 약간의 변화가 불가피했음을 지적했다.[20]
알코네타르 다리는 1931년부터 스페인 당국에 의해 '역사 유산'(Monumento histórico-artístico, 현재의 Bien de Interés Cultural에 해당)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21]
4. 구조
알코네타르 다리의 가장 두드러진 구조적 특징은 아치가 완전한 반원이 아닌 원의 일부 형태인 결원아치(세그멘탈 아치)라는 점이다.[61][22] 이러한 형태는 고대 교량 건설에서는 흔치 않았으며, 히스파니아에 건설된 로마 교량 중에서는 소수만이 이러한 특징을 보였다.[62][23]
다리의 전체 길이는 약 290m에 달했으며, 이 중 190m 구간이 강바닥을 가로질렀다.[46][7] 아치의 정확한 개수에 대해서는 기록마다 차이가 있어 11개에서 16개까지 다양하게 언급된다.[63][24][50][11] 현재 남아있는 구조물 대부분은 물살이 비교적 약했던 타구스강 오른쪽 강둑에 집중되어 있으며, 일부 교각 잔해와 왼쪽 교대 등이 남아있다.[65][26] 1970년 알칸타라 저수지의 범람으로 상당수 유적이 물에 잠겼다.[66][27]
다리 건설에는 주변 지역의 화강암 마름돌이 사용되었으며, 외장은 모르타르나 철제 연결재 없이 돌을 정교하게 쌓아 올리는 오푸스 콰드라툼 방식으로 축조되었다. 교각과 경사로의 내부는 로마 콘크리트로 채워졌는데, 이는 로마 시대 교량 건설의 전형적인 방식이었다.[75][36] 교각들은 상류 방향으로 물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 뾰족한 스탈링(cutwater) 구조로 보강되었다.[74][35] 평평한 결원아치 구조로 인해 다리는 전체적으로 길쭉하고 수평에 가까운 외관을 가졌을 것으로 추정된다.[76][37]
4. 1. 교각과 아치



알코네타르 다리의 가장 큰 특징은 아치가 완전한 반원이 아닌 원의 일부 형태인 결원아치(세그멘탈 아치)라는 점이다.[61] 이는 고대 교량 건설에서는 흔치 않은 방식으로, 히스파니아에 건설된 로마 교량들을 조사한 결과 10개 중 1개만이 이러한 형태였고 대부분은 반원형 아치였다.[62] 프리에토(Prieto)에 따르면, 알코네타르 다리는 오른쪽 진입로의 암거를 제외하고 총 16개의 아치가 있었으며, 각 아치의 경간(너비)은 다음과 같다 (추정치는 대괄호 안에 표시):
그러나 다른 기록에서는 아치의 수가 11개에서 15개까지 다양하게 나타난다.[63] 다리의 전체 길이는 290m였고, 이 중 190m 구간이 수심이 낮은 강바닥을 가로질렀다.[46] 남아있는 교각을 기준으로 평균 두께를 4.4m로 가정하고 아치들의 경간을 모두 더하면, 양쪽 경사로 사이의 거리는 약 244m (= 178 + 15 x 4.4)로 추정된다. 이는 전체 강 단면의 73%에 해당한다.[45] 비교하자면, 코르도바, 메리다, 살라망카에 있는 로마 교량의 경우 이 비율이 각각 62%, 64%, 80%였다.[64]
현재 남아있는 다리 구조물의 대부분은 물살이 비교적 약했던 타구스강의 오른쪽 강둑에 집중되어 있다. 강 중앙에는 여러 교각의 잔해가 수면 바로 위로 드러나 있으며, 왼쪽 강둑에는 교각 두 개와 왼쪽 교대(橋臺)가 남아있다.[26] 안전한 곳으로 옮겨져 보존된 다리의 주요 부분은 오른쪽 경사로(아치형 암거 2개 포함), 교각 1, 2, 3번과 4, 6번의 잔해, 그리고 아치 1번과 3번 등이다.[6] 그 외의 유적들은 1970년 알칸타라 저수지가 범람하면서 물에 잠겼다.[27]
경사로 진입부의 길이는 42m이고 너비는 6.55m 에서 6.8m이다.[24] 경사로에 있는 결원아치 두 개의 경간은 각각 6.95m와 7.4m이며,[24] 경간 대 높이 비율(span-to-rise ratio)은 각각 4.0:1과 3.3:1에 해당한다.[28] 아치 받침 부분(스프링잉, springing)의 경사진 접촉면이 정교하게 맞춰져 있어 이 아치들이 로마 시대에 만들어졌음을 명확히 보여준다.[29] 아치를 구성하는 홍예석(voussoir)의 두께는 1.2m로, 아치 경간에 비해 상당히 두꺼워 보인다 (각각 아치의 세장비는 1:5.8과 1:6.2).[24] 반면, 현재 남아있는 아치 1번과 3번은 후대에 부주의하게 쌓인 잡석으로 만들어진 불안정한 대체물이다.[30] 이 아치들의 정확한 건축 시기는 다른 수리 부분들과 마찬가지로 알려져 있지 않으나, 성전 기사단 시대에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다.[17]
마찬가지로 로마 시대 이후에 개축된 것으로 보이는 부분은 첫 두 교각의 하단 처마 돌림띠(코니스, cornice) 윗부분 석조물이다. 이 석조물은 모든 교각에서 같은 높이로 돌출되어 있다.[31] 'Voyage Pittoresque' 삽화에 따르면, 2번 교각 위에는 도개교(드로교, drawbridge)[31]나 탑과 같은 구조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교각 상부 구조는 이를 위해 재건되었을 수 있다.[18] 반면, 세 번째 교각은 꼭대기까지 약 12.5m 높이가 로마 시대의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 정교하게 다듬어진 전돌(절단석, ashlar)과 모든 고대 교각을 따라 이어지는 두 번째 처마 돌림띠는 로마 시대 다리의 본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부분이다.[32]
특히, 아치가 시작되는 높이(솟음 레벨, springing level)에 남아있는 경사진 석재 지지대의 각도를 통해 로마 시대 결원아치의 원래 높이를 비교적 정확하게 복원할 수 있었다.[18] 이를 통해 세 번째 아치는 원래 95°의 원형 부채꼴 형태를 이루었을 것으로 추정되며,[24] 이는 다른 결원아치들의 경간 대 높이 비율이 대략 4:1에서 5:1 사이였음을 시사한다.[18] 이러한 추정은 19세기 초까지 인접한 네 번째 아치 자리에 온전한 로마 시대 결원아치가 남아있었음을 묘사한 드 라보르드(de Laborde)의 판화를 통해서도 뒷받침된다.[31] 리미라 다리나 폰테 산 로렌초와 같은 초기 사례들과 더불어, 알코네타르 다리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결원아치 교량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이 다리의 존재는 과거의 통념과는 달리 로마의 교량 건축가들이 이미 평평한 아치 구조에 대한 깊은 이해와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었음을 증명한다.[33]
교각의 두께는 강 중앙으로 갈수록 4.25m, 4.45m, 4.55m로 약간씩 두꺼워지며, 동시에 교각 사이의 거리(경간)도 7.3m에서 10.2m까지 넓어진다.[19] '주교의 명판(Mesa de Obispo)'이라는 독특한 별명을 가진 다섯 번째 교각은 강바닥에서 가장 멀리 나아가 있으며, 단면적이 8.1m로 가장 크다. 이 교각은 중세 시대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있으며, 원래 있던 로마 시대 아치 두 개를 대체하고 감시탑의 기초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34] 다섯 개의 교각 모두 상류 방향으로는 물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 뾰족한 형태의 절석(스탈링, cutwater) 구조로 보강되어 있다.[35]
교각의 외장은 주변 지역에서 채취한 화강암 전돌로 구성되어 있으며, 모르타르나 철제 연결재 없이 평행하게 쌓아 올리는 오푸스 콰드라툼(Opus quadratum)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교각의 내부와 경사로는 로마 콘크리트로 채워졌는데, 이는 로마 시대 교량 건설에 흔히 사용되던 방식이다.[36] 외관상, 평평한 결원아치 구조로 인해 다리는 전체적으로 길쭉하고 날렵한 외관을 가졌을 것으로 보이며, 다리 위의 도로는 수평이거나 약간 볼록한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37]
4. 2. 복원과 측정 치수
알코네타르 다리의 주요 특징은 아치의 결원 형태였으며,[22][61] 이는 고대의 교량에서는 흔한 것은 아니었다. 히스파니아에 있던 로마의 교량들에 대한 조사에서, 10개 중에 하나만이 동일한 특징을 보였는데, 대부분은 반원 구조였다.[23][62] 프리에토(Prieto)에 따르면, 알코네타르 다리는 오른쪽 진입로에 있는 암거를 포함하지 않고, 다음의 간격으로 16개의 아치가 있다고 하였다 (추정 수치는 대괄호 안에 있다):
- 미터: 7.30 – 8.20 – 9 – 10.15 – [11 – 12 – 13 – 14 – 15 – 14] – 13 – 12 – 11 – [10] – 9.30 – 9.10[11][50]
그렇지만 다른 사료들에서는 아치들이 11개에서 15개까지 다양했다.[24][63] 직선 구조물의 전체 길이는 290m였고, 이 중에 190m는 물 깊이가 낮은 강바닥 걸쳐 있었다.[7][46] 만일 아치들의 분명한 범위를 합하고, 남아있는 교각을 근거로 교각들을 평균 두께 4.4m라고 가정할 때, 두 다리 경사로 간의 거리는 244m (= 178 + 15 x 4.4)이었는데, 이는 강의 단면 73%에 해당했다.[6][45] 이와 대조적으로, 코르도바, 메리다, 살라망카의 로마 교량은 각각 62%, 64%, 80%에 해당했다.[25][64]
대부분의 남아있는 구조물은 강물의 흐름이 약했던 타구스강 오른쪽 강변에 집중되었다. 여러 교각의 남은 부분들은 강의 가운데에 수면 위로 바로 올라와 있고, 왼쪽 강변에는 교각 두 개가 서 있는 채로 남아있으며, 그 옆에는 왼쪽 교대가 따라 서 있었다.[26][65] 안전한 곳으로 옮겨진 다리의 일부 부분들은 근본적으로 다음과 같은데 (그림 참조): 아치형의 암거 2개가 있는 오른쪽 강변의 경사로, 4번 6번의 교각 잔해와 더불어 1, 2, 3번 교각, 1번, 3번 궁륭 등이다.[6][45] 그 밖에 희귀 유적지들이 1970년 알칸타라 저수지의 범람으로 물에 잠겼었다.[27][66]
경사로에 대한 진입로는 42m 길이이고 너비는 6.55m에서 6.8m이다.[24][63] 결원아치 두 개의 분명한 범위가 6.95m와 7.4m이었고,[24][63] 이는 각각 4.0과 3.3 대 1의 라이즈비에 해당한다.[28][67] 스프링잉(springings)의 경사 접촉면이 정확하게 적합한 것은 이 아치들의 로마 기원인 것을 분명하게 증명한다.[29][68] 이외적인 1.2m 너비를 지닌, 연석들이 경간과 관련해서 거대해 보인다 (각각 아치의 세장비가 1:5.8와 6.2).[24][63] 이와 반대로, 현존하는 교량의 아치 1번과 3번 두 개는 부주의하게 쌓인 돌무더기로 만들어진, 불안정한 대체품들이다.[30][69] 이 아치들의 시기는 수리 시기와 더불어 알려져 있지 않은데, 성전 기사단 시기에 지어졌을 가능성이 있다.[17][56]
동시에 고전 이후에 명백한 구조물들은 아래쪽 처마 돌림띠 위에 있는 첫 두 교각의 석조 부분인데, 석조 부분은 모든 교각에서 같은 높이로 돌출되어 있다.[31][70] 이 교각의 상부 구조는 'Voyage Pittoresque'의 삽화에 따르면, 2번 교각에 설치된,[18][57] 도개교나 탑을 목적으로 재건되었을 수 있다.[31][70] 그에 반해서, 세 번째 교각은 12.5m의 꼭대기까지 본래의 로마적 특징을 여전히 보존하고 있다. 모든 고대의 교각을 따라 형성되어 있고, 세심하게 만든 절단석과 두 번째 코니스는 로마 교량의 본래 형태에 대한 가장 독특한 느낌을 준다.[32][71]
특히, 스프링잉 높이에 있는 경사진 돌 지지대를 근거로 하여 로마 시대의 결원아치의 높이를 비교적으로 정확하게 복원하는 것이 가능할 수 있었다.[18][57] 따라서, 세 번째 아치는 원래는 부채꼴 95°를 형성했는데,[24][63] 이는 다른 결원아치들에 대하여 라이즈비가 대략 4-5에서 1라는 것을 암시한다.[18][57] 이 값은 19세기 초에 인접한 네 번째 베이 (Bay)에 걸쳐 있는 온전한 로마의 결원아치를 묘사한 드 라보르드의 판화를 통해 뒷받침된다.[31][70] 리미라 다리와 폰테 산 로렌초 같은 초기 예시들과 더불어, 알코네타르 다리는 따라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결원아치들 중에 손꼽힌다. 이 다리의 존재는 이전에 널리 믿어져 왔고 배웠던 것들과는 대조적으로, 로마의 교량 제작자들은 평평한 아치의 본질적인 지식을 지녔다는 것을 증명한다.[33][72]
4.25m, 4.45m, 4.55m로 측정된 교각의 두께는 강의 가운데로 갈수록 조금씩 커지며, 동시에 교각 사이의 거리도 7.3m에서 10.2m까지 커진다.[19][58] ‘주교의 명판’이라는 독특한 별칭을 지닌,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 교각은 강바닥에서 전진된 지점에 위치했고 8.1m라는 가장 큰 횡단면을 보유했다. 이 교각은 중세 때의 것일 수 있고 고대 시대의 아치 두 개를 대신하며 감시탑의 토대 역할을 했을 수 있다.[34][73] 다섯 개 모든 교각들은 뾰족한 스탈링을 통해서 상류면에서 보강되었다.[35][74]
교각의 외장은 주변 지역의 화강암 마름돌로 이뤄졌으며, 모르타르 혹은 철재 결착재를 사용하지 않은 채로 평행을 이루고 있다 (‘오푸스 콰드라툼’). 교각의 경사로처럼 교각의 내부는 로마 교각들에 적용되는 흔한 방식이었던 로마 콘크리트로 채워졌다.[36][75] 표면상으로, 평평한 아치가 다리를 길어 보이게 했음이 틀림없으며, 다리의 도로는 수평이나 살짝 볼록한 선을 이뤘다.[37][76]

참조
[1]
인용구
[2]
harvnb
[3]
harvnb
[4]
harvnb
[5]
harvnb
[6]
harvnb
[7]
harvnb
[8]
harvnb
[9]
harvnb
[10]
harvnb
[11]
harvnb
[12]
harvnb
[13]
harvnb
[14]
harvnb
[15]
harvnb
[16]
harvnb
[17]
harvnb
[18]
harvnb
[19]
harvnb
[20]
harvnb
[21]
웹사이트
Bienes culturales protegidos. Consulta de bienes inmuebles. Bien: "Puente de Alconétar"
http://www.mcu.es/bi[...]
[22]
harvnb
[23]
harvnb
[24]
harvnb
[25]
harvnb
[26]
harvnb
[27]
harvnb
[28]
harvnb
[29]
harvnb
[30]
harvnb
[31]
harvnb
[32]
harvnb
[33]
harvnb
[34]
harvnb
[35]
harvnb
[36]
인용
[37]
인용
[38]
정보
[39]
정보
[40]
정보
[41]
인용
[42]
인용
[43]
인용
[44]
인용
[45]
인용
[46]
인용
[47]
인용
[48]
인용
[49]
인용
[50]
인용
[51]
인용
[52]
인용
[53]
인용
[54]
인용
[55]
인용
[56]
인용
[57]
인용
[58]
인용
[59]
인용
[60]
웹사이트
Puente de Alconétar
http://www.mcu.es/bi[...]
Patrimonio histórico
[61]
인용
[62]
인용
[63]
인용
[64]
인용
[65]
인용
[66]
인용
[67]
인용
[68]
인용
[69]
인용
[70]
인용
[71]
문헌
[72]
문헌
[73]
문헌
[74]
문헌
[75]
문헌
[76]
문헌
[77]
문서
흘림 글씨는 추정치.
[78]
문서
모든 값은 이전 된 다리를 나타낸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