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부 (조위)
1. 개요
양부(楊阜)는 중국 후한 말, 조위의 무장이자 관료이다. 천수군 기현 출신으로, 젊은 시절 양주종사로 위단의 명을 받아 안정장사를 맡았다. 마초의 재기를 우려하여 조조에게 대비를 진언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마초가 기성을 공격하자, 8개월간 항전했으나 위강의 항복으로 실패했다. 이후 복수를 결심하여 노성에서 거병, 마초를 격퇴했다. 농우 평정 후 관내후에 봉해졌고, 무도태수를 거쳐 조위 조정에서 간언을 반복하다가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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톈수이시 출신 -
왕망 (치숙)
왕망은 기원전 86년에 위위에 임명되었고, 기원전 83년에 우장군으로 전임되어 3년 후 사망했으며, 그의 생애는 《한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
톈수이시 출신 -
이고 (당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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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위의 정치인 -
정무
정무는 중국 삼국시대 인물로, 정사 삼국지에는 정욱의 아들로 조비를 섬겼다는 기록만 있고, 삼국지연의에서는 하후무의 참군으로 촉한의 제1차 북벌 때 조운을 상대로 계책을 내는 비중 있는 조연으로 묘사되지만, 관흥과 장포의 지원으로 실패하고 남안으로 퇴각한 후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
조위의 정치인 -
하후무
하후무는 위나라의 무장으로 하후돈의 아들이며 조조의 사위였고, 조비의 총애를 받아 안서장군에 임명되어 관중을 방어했으나 군사적 재능은 부족하다는 평을 받았으며, 제갈량의 북벌 당시 탄핵을 받았지만 복귀하여 진동장군에 이르렀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양부는 간쑤성 간구현 일대에 위치한 천수군 기현(冀縣) 출신이다. 젊어서 고을 관청에서 하급 관리로 일했다. 외형(고종형) 강서의 집에서 자랐으며, 젊어서는 같은 군의 윤봉, 조앙과 함께 명성을 날려, 함께 양주종사(凉州從事)가 되었다.
양주종사로서 양주목 위단의 명령을 받고 허(許)를 찾아가 안정장사(安定長史)를 맡았다. 돌아오는 길에 관우(關右)의 여러 장수들이 원소와 조조 중 누가 이길지를 묻자, 원소를 폄하하고 조조를 추켜세웠다. 그는 "원공(원소)은 관대하지만 결단력이 없고, 여우 같지만 결론을 내지 못합니다. … 반면에 조공(조조)은 야망과 비전이 있고, 망설임 없이 결정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의 군대는 규율이 있고 강하며, … 그의 군대가 승리할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그의 예측은 적중했고 그는 선견지명과 통찰력으로 량주(涼州) 전역에서 명성을 얻었다.
장사 일이 맞지 않아 사직했으나, 위단이 태복이 되고 그 아들 위강이 양주자사가 되면서 부름을 받아 별가가 되었다. 또 효렴으로 추거되어 승상부의 부름을 받았으나, 위강이 표를 올려 참군사(參軍師)로 삼아 자기 아래로 잡아두었다. 이후 위강은 량주 자사로 그를 초빙하여 시독(侍讀)으로 임명했다.
2.2. 양주에서의 활약: 마초 격퇴
양부는 마초가 영포와 한신과 같은 용맹함을 지녔고, 강족과 흉노족의 지지를 받고 있어 재기할 것을 우려하여 조조에게 철저한 대비를 진언했다. 조조는 양부의 의견에 동의했지만, 하간군에서 소백의 반란과 손권의 유수구 전투 공격으로 인해 군대를 동쪽으로 돌려야 했기 때문에 양부의 제안을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212년, 마초는 융족의 거수들을 거느리고 농상의 군현들을 공격했고, 기를 제외한 모든 군현이 마초에게 호응했다. 마초는 장로에게 지원받은 양앙의 군사 만여 명과 함께 기성을 포위했다. 양부는 사대부와 종족 자제 천여 명을 모아 항전했고, 종제 양악에게 성 위에 언월영을 치게 했다. 8개월간 저항했지만, 염온이 구원 요청 중 살해당하고, 위강이 항복을 고려하자 양부는 눈물을 흘리며 항전을 주장했지만, 결국 위강은 마초와 강화를 맺고 성문을 열었다. 마초는 약속을 어기고 양악을 가두고 양앙에게 위강 등을 살해하게 했다.
양부는 복수를 결심하고 아내의 장례를 핑계로 휴가를 얻어 강서를 찾아가 마초의 만행을 알렸다. 강서는 어머니의 설득으로 양부의 계획에 동참했다. 212년 9월, 양부는 강은, 조앙, 윤봉, 요경, 공신, 이준, 왕령 등과 함께 노성에서 거병했다. 양모를 보내 양악과 연락하고, 양관, 조구 등과 연합하여 기성을 점거하고 마초의 처자를 죽였다.
양부는 역성을 공격하는 마초와 싸워 다섯 군데 상처를 입고 종족 형제 일곱 명을 잃었지만, 결국 마초는 장로에게 달아났다. 이 반란으로 강서의 어머니와 왕이의 아들 조월이 마초에게 살해되었다.
농우가 평정된 후, 조조는 공을 세운 열한 명을 후로 봉했고, 양부는 관내후에 봉해졌다. 양부는 위강을 지키지 못하고 마초를 죽이지 못한 것을 들어 사양했지만, 조조는 표창했다.
2.3. 무도태수 시절
건안 20년(215년), 조조가 장로를 치러 가면서 익주자사에 임명되었고, 돌아오면서는 금성태수가 됐으나 부임하기 전에 무도태수로 전임되었다. 유비가 통치하는 익주와 국경이 가까운 지역임을 고려하여, 법의 엄격한 적용에 얽매이지 않는 통치를 할 것을 요청했다.
건안 23년(218년), 유비가 장비, 마초 등을 보내 하변을 노리고, 저족도 뇌정(雷定) 등 7부 1만여 명이 이에 호응하자, 조조는 도호 조홍을 파견하고 참군 조휴에게 지휘를 맡겨 건안 24년(219년)까지 걸쳐 이들을 격퇴시켰다. 조홍은 승전하여 큰 연회를 열고 여자 가수들에게 얇은 비단옷을 입혀 춤추게 했다. 좌중들은 모두 웃었으나, 양부만은 조홍의 난행을 꾸짖고 회장을 나가버렸다. 조홍은 자신이 한 일을 그만두고, 양부를 청하여 돌아와 앉혔으며, 분위기는 숙연해졌다.
유비에게 한중을 내주자, 조조는 무도를 지키기 어려워 그 땅 사람들을 이주시키고자 했으나 주민들이 자기 땅을 떠나지 않으려 할 것을 두려워했다. 양부의 통치력으로 인해, 백성들과 저족 중 만여 호가 경조 · 부풍 · 천수로 이주했다. 양부는 또 군의 치소를 괴리성 서쪽에 있는 소괴리(小槐里)로 옮겼고, 주민들도 이를 따라갔다. 양부는 정치의 기강을 세우고, 차마 아랫사람에게 속임수를 쓰지 않았다.
2.4. 조위 조정에서의 간언
양부는 문제가 유엽 등에게 평판을 물어 삼공에 어울린다는 말을 들었으나, 등용되기 전에 문제가 급사했다. 명제에게 등용되어 10여 년간 무도태수 직책을 끝내고 성문교위가 되었다.
장작대장으로 승진한 후, 황제가 궁궐을 수축하고 미녀를 뽑아 후정을 채우며, 자주 사냥을 나가는 것과 가을 자연 재해를 들어 개선을 촉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또 황실 친척들의 대우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소부로 승진한 후, 태화 4년(230년), 대사마 조진이 촉을 정벌하러 출진했다가 큰 비로 이수, 낙수, 하수, 한수가 넘쳐 진군할 수 없게 되자 철수를 주장했고, 황제는 조서로 귀환 명령을 내렸다.
청룡 3년(235년), 황제가 허에 새 궁을 짓고 낙양에 궁궐을 증축하려 하자, 고당융 등과 함께 자주 간언했다. 명제는 양부의 간언에 감동을 받아 조서를 내리고 간언을 용납했으나, 결국 듣지 않았다.
양부는 자주 간언하고 논쟁을 펼쳤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은퇴를 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던 차에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