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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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포는 중국 초한 시대의 인물로, 평민 출신으로 반란을 일으켜 구강왕에 봉해졌으나, 한(漢)나라에 투항하여 초한전쟁에서 활약했다. 이후 한나라 건국 후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여 죽음을 맞이했다. 그는 군사적 재능을 보였지만, 배신과 변절로 비판받기도 하며, 중국 사찰과 도교 사원에서 숭배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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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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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영포 |
원어 이름 | 黥布 (경포) |
활동 분야 | 군사 장군, 군주, 정치인, 군벌 |
작위 및 칭호 | |
당양군 | 초나라 |
구강왕 | 초나라 |
회남왕 | 전한 |
생애 | |
출생지 | 루안, 안후이 성 |
사망일 | 기원전 196년 11월 또는 12월 |
사망지 | 징더전, 장시 성 |
통치 | |
회남왕 재위 시작 | 기원전 203년 8월 |
재위 종료 | 기원전 196년 11월 또는 12월 |
구강왕 재위 | 기원전 207년 – 기원전 203년 8월 |
가족 관계 | |
장인 | 오예 |
소속 | |
주요 섬김 | 항량 초 의제 항우 유방 |
2. 생애
(내용 없음 - 하위 섹션에서 상세 내용을 다루고 있으며, 주어진 원본 소스는 하위 섹션의 내용과 중복됨)
2. 1. 초기 생애와 반진 봉기군 합류
영포는 육현(현재 안후이성 루안시 부근)의 평민 출신으로, 어린 시절 "형벌을 받을 운명이나 후에 왕이 된다"는 예언을 들었다.[29][3] 이후 법을 어겨 경형(黥刑, 얼굴에 죄목을 문신으로 새기는 형벌)을 받게 되자, 영포는 예언이 이루어졌다며 기뻐했으나 주변 사람들의 비웃음을 샀다.[29][4] 이때부터 그는 '''경포'''(黥布)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다.[29]영포는 형벌로 인해 여산으로 끌려가 진시황릉 건설 노역에 동원되었다.[29] 그는 그곳에서 동료 죄수들을 규합하여 함께 탈출했고, 장강 일대에서 도적 집단을 이끌었다.[29]
기원전 209년 음력 7월, 진승과 오광이 진승·오광의 난을 일으키자, 영포는 자신의 무리를 이끌고 파군(番君) 오예에게 합류하여 진나라에 맞섰다.[29] 그는 오예의 신임을 얻어 그의 사위가 되었다.[29] 진 이세황제 2년(기원전 209년) 음력 9월, 진나라 장군 장함이 진승과 여신(呂臣)의 군대를 연이어 격파하자, 영포는 이에 맞서 군대를 북쪽으로 이끌고 청파(淸波, 현재 허난성 신채현 남서쪽)에서 진나라 좌우 교위를 격파한 뒤 동쪽으로 진격했다.[29]
이 무렵 항량이 회계군(당시 쑤저우 일대)과 강동 지역을 평정하고 장강을 건너오자, 동양현의 민란 지도자였던 진영 등이 항량에게 합류했다.[29] 이세 3년(기원전 208년) 음력 2월, 영포 역시 포장군(蒲將軍)과 함께 항량의 군대에 합류하였다.[29] 영포는 항량의 지휘 아래 경구, 진가 등 다른 세력들을 공격할 때 항상 선봉에 서서 용맹하게 싸웠다.[29] 이세 3년 음력 6월, 항량이 초 의제를 초나라 왕으로 옹립하면서 영포는 당양군(當陽君)에 봉해졌다.[29]
2. 2. 항우 휘하에서의 활약
진 이세황제 원년(기원전 209년) 진승과 오광이 반란을 일으키자, 영포는 파양군의 현령이자 장인인 오예에게 합류하여 진나라에 맞섰다.[29] 진승의 난이 진압된 후, 영포는 북진하여 청파(清波)에서 진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동쪽으로 이동했다. 이 시기 항량이 장강을 건너 세력을 확장하자, 진영 등이 항량에게 합류하였고, 기원전 208년 영포 역시 포장군과 함께 항량의 군대에 합류했다.[29]영포는 항량 휘하에서 경구, 진가 등을 공격할 때 선봉에 서서 용맹하게 싸웠다.[29] 기원전 208년, 항량이 초 의제를 왕으로 옹립하자 영포는 그 공적을 인정받아 당양군(當陽君)에 봉해졌다.[29]
같은 해 9월, 항량이 정도 전투에서 장함에게 패사하자, 영포는 다른 장수들과 함께 초 의제가 옮긴 수도 팽성(彭城)으로 집결했다. 이후 장함이 조나라의 거록성(鉅鹿城)을 포위하자, 초나라는 송의를 상장군으로 삼아 구원군을 보냈고 영포도 구원군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출진 도중 부장인 항우가 송의를 살해하고 군권을 장악하자, 영포를 포함한 초나라 군대는 항우를 따르게 되었다.[30]
영포는 항우의 명령으로 선발대를 이끌고 먼저 황하를 건너 거록의 진나라 군대를 공격하여 여러 차례 승리했다. 이후 항우가 이끄는 본대와 합류하여 거록 전투에서 장함이 이끄는 진나라 주력군을 격파하고 조나라를 구원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 전투에서 영포는 초군의 선봉으로서 용맹을 떨쳤다.[23][30] 기원전 207년에는 은허(殷墟)에서 장함의 항복을 받아냈다.
기원전 206년, 항우를 따라 관중(關中)으로 진격하던 중, 신안(新安)에서 항우의 명령을 받아 항복한 진나라 병사 20만 명을 밤중에 생매장하는 참혹한 일에 가담했다.[30] 같은 해 12월, 함곡관에서 유방 군대의 저지로 길이 막히자, 영포는 별동대를 이끌고 함곡관을 우회하여 기습 공격으로 함락시키고 진나라 수도 함양으로 진입하는 길을 열었다.
기원전 206년, 항우가 18제후왕을 분봉할 때 영포는 그간의 혁혁한 공로를 인정받아 구강왕(九江王)에 봉해졌으며, 수도는 육(六)에 두었다. 이는 항우 휘하 장수 중 유일하게 왕으로 봉해진 사례였다.[29] 구강왕이 된 후, 영포는 항우의 밀명을 받아 형산왕(衡山王) 오예, 임강왕(臨江王) 공오와 함께 명목상 군주였던 초 의제를 장사군으로 옮기는 도중 습격하여 기원전 206년 10월 침현(郴縣)에서 살해했다.[30][31]
2. 3. 유방에 투항과 초한대전
기원전 205년 음력 1월, 초의 항우는 제나라에서 반란을 일으킨 전영을 공격하기 위해 제후들을 소집했으나, 당시 구강왕이었던 영포는 병을 핑계로 직접 참전하지 않고 장수와 수천 명의 군사만 보냈다.[29] 같은 해 음력 4월, 한의 유방이 56만 연합군으로 초의 수도 팽성(彭城)을 함락시킨 후 항우가 반격하는 과정(팽성 전투)에서도 영포는 참전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항우의 노여움을 사 소환 명령을 받았으나, 두려움을 느껴 응하지 않았다. 항우 역시 당시 영포 외에는 자신을 도울 제후가 마땅치 않았고 그의 재능을 아꼈기에 당장 공격하지는 않았다.[29]팽성 전투에서 대패한 유방에게 수하는 자신이 영포를 설득하여 한나라 편으로 만들 수 있다고 제안했다. 유방의 승인을 얻은 수하는 부하 20명을 이끌고 회남으로 가 영포를 만났다. 수하는 영포에게 항우를 섬기는 것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한나라와 동맹할 것을 설득했다. 그는 항우가 초 의제를 살해하여 민심을 잃었고, 군사적으로도 한나라를 제압하기 어려운 상황임을 설명하며, 영포가 한나라 편에 서는 것이 유리하다고 주장했다.[9] 영포는 수하의 설득에 넘어가 비밀리에 한나라에 투항하기로 약속했다.
마침 초나라에서 군사 파견을 독촉하는 사자가 도착하자, 수하는 영포가 이미 한나라 편에 섰음을 공표했다.[10] 놀란 영포는 결국 수하의 조언에 따라 초나라 사자를 살해하고[11] 서초를 공격하며 공식적으로 항우에게 등을 돌렸다.[12] 이에 항우는 항성과 용저를 보내 회남을 공격하게 했다. 몇 달 간의 전투 끝에 영포는 용저에게 격파당하고 결국 유방에게 달아났다.[29]
처음에 유방은 영포를 다소 무례하게 대했으나, 이후 그에게 자신의 거처와 같은 수준의 융숭한 대우를 제공하여 영포의 마음을 달랬다. 한편, 영포가 보낸 부하들은 구강의 병력이 이미 항백에게 넘어갔고 영포의 가족들도 모두 살해되었음을 확인했다. 하지만 옛 부하 수천 명이 다시 영포에게 합류했고, 유방은 이들을 성고 수비군에 편입시켰다. 기원전 203년 7월, 유방은 영포를 회남왕으로 봉했다.[29]
기원전 202년, 영포는 유고와 함께 구강으로 들어가 서초의 대사마 주은을 설득하여 한나라 편으로 귀순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들은 구강의 병력을 이끌고 한나라 본대에 합류하여 해하 전투에서 항우가 이끄는 초나라 군대를 격파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29][24] 항우가 패망하고 유방이 중국을 통일하여 한나라를 세우자, 영포는 회남왕으로서 육(六)을 수도로 삼고 구강(九江), 여강(廬江), 형산(衡山), 예장(豫章)의 4개 군을 다스리게 되었다.[29][25]
2. 4. 전한 건국 이후의 행적과 반란
기원전 202년, 항우가 해하 전투에서 패망하고 고조 유방이 황제에 즉위하여 전한을 건국하자, 영포는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회남왕'''(淮南王)에 봉해졌다. 그의 영지는 구강(九江), 여강(廬江), 형산(衡山), 예장(豫章) 4군에 걸쳐 있었는데, 이는 과거 항우 밑에서 구강왕으로 봉해졌을 때보다 훨씬 넓은 영역이었다.[25]그러나 전한 건국 이후, 고조와 그의 아내 여후는 황제 중심의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강력한 세력을 가진 이성 제후왕들을 경계하고 제거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196년 봄, 초왕이었던 한신이 여후에 의해 반란 혐의로 처형당했다는 소식은 영포에게 큰 충격과 불안감을 안겨주었다.[29] 같은 해 여름, 양왕 팽월 역시 비슷한 운명을 맞이했다. 고조는 팽월의 시신을 토막 내어 젓갈로 담근 뒤, 본보기로 여러 제후왕에게 보냈다. 이 젓갈을 받은 영포는 극심한 공포에 휩싸였고, 자신도 한신이나 팽월처럼 숙청될 것이라는 두려움 속에서 은밀히 군사를 모으고 주변의 동태를 살피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시작했다.[29][13]
이 무렵, 영포가 아끼던 애첩이 병이 들어 의원에게 자주 치료를 받으러 다녔다. 공교롭게도 그 의원의 이웃에는 영포의 중대부(中大夫) 분혁(賁赫)이 살고 있었다. 분혁은 영포의 애첩에게 접근하여 값비싼 선물을 주고 함께 어울렸으며, 애첩은 돌아와 영포 앞에서 분혁을 좋은 사람이라고 칭찬했다. 영포는 분혁이 자신의 애첩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고 의심하기 시작했고, 분혁을 체포하려 했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분혁은 병을 핑계로 집에 머물다가[13] 수도 장안으로 도망쳐 고조에게 영포가 모반을 꾀하고 있다고 고변했다.[29]
상국 소하는 분혁의 고변이 개인적인 원한 때문일 수 있다고 보고, 일단 분혁을 구금한 뒤 사람을 보내 영포의 동태를 신중히 조사해야 한다고 고조에게 건의했다.[13] 그러나 영포는 분혁이 이미 자신의 비밀 계획을 누설했고, 한나라 조정에서 조사관이 파견되면 모반 준비가 발각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고 생각한 영포는 결국 분혁의 일가족을 모두 살해하고 기원전 196년 가을(8월 또는 9월경), 마침내 반란의 기치를 들었다.[29][14] 영포의 반란 소식이 장안에 전해지자, 고조는 분혁을 사면하고 그를 반란 진압군의 장수로 삼았다.[29] 영포가 반란을 일으키려 할 때, 그의 옛 재상이었던 주건(周建)은 반란이 실패할 것이라며 강력히 반대했지만, 중신 양보후(陽 பாதுகாக்க)는 반란을 적극 지지했다.[26]
반란을 일으키면서 영포는 부하들에게 "황제는 늙고 병들어 전쟁을 싫어하니 직접 나서지 못할 것이다. 설령 다른 장수를 보낸다 해도, 우리가 두려워할 만한 한신과 팽월은 이미 죽었으니 걱정할 것 없다"며 사기를 북돋았다.[18] 영포는 먼저 동쪽의 형나라(荊)를 공격하여 형왕 유고를 푸릉(富陵)에서 단숨에 격파하고 살해한 뒤, 형나라의 군대를 흡수했다. 이어 화이허를 건너 초나라를 공격했다. 초왕 유교는 군대를 셋으로 나누어 서(徐)와 통(僮) 사이에서 영포를 맞아 싸우게 했으나, 영포가 그중 한 부대를 격파하자 나머지 두 부대도 제대로 싸워보지 못하고 흩어져 달아났다.[19]
한편, 장안에서는 고조가 신하들과 영포의 반란에 대한 대책을 논의했다. 대부분의 신하들은 즉시 군대를 보내 토벌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고조는 영포의 군사적 능력을 알고 있었기에 신중한 입장이었다. 이때 여음후 하후영이 과거 초나라의 영윤(令尹)이었던 설공(薛公)에게 자문을 구해야 한다고 건의했다.[15] 고조가 설공에게 영포가 왜 반란을 일으켰는지 묻자, 설공은 "지난 2년간 팽월과 한신이 차례로 처형당했습니다. 영포는 자신도 같은 운명을 맞을까 두려워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라고 답하며, 이는 중앙 권력 강화 과정에서 예견된 비극임을 시사했다.[16]
설공은 영포가 취할 수 있는 전략을 세 가지로 분석했다.
- 상책: 오와 초를 신속히 점령하고 제를 병합한 뒤, 북쪽의 연과 조까지 세력을 확장하여 관동 지역 전체를 장악하는 것이다.
- 중책: 오와 초를 점령하고 서쪽으로 진격하여 한과 위를 병합한 뒤, 오창(敖倉)의 군량을 확보하고 성고(成皋)에서 한나라 군대와 결전을 벌이는 것이다.
- 하책: 오를 점령하고 하채(下蔡)를 확보한 뒤, 물자를 월 지역으로 옮기고 장사 지역을 배후지로 삼아 지구전을 펼치는 것이다.
설공은 영포가 죄수에서 왕까지 오른 인물로, 천하를 도모하기보다는 자신의 안위를 우선시할 것이므로 가장 실현 가능성이 높은 하책을 선택할 것이라고 예측했다.[17] 고조는 설공의 분석에 크게 만족하여 그에게 천 호(千戶)를 봉하고, 자신의 아들 유장을 새로운 회남왕으로 임명하여 영포의 뒤를 잇게 했다. 그리고 만반의 준비를 갖춘 뒤 직접 군대를 이끌고 영포 토벌에 나섰다.[17]
기원전 195년 10월, 영포는 약 1년간 초나라 지역을 휩쓸며 서쪽으로 진격하여 기현(蘄縣) 서쪽의 추(甀) 지역에서 마침내 고조가 친히 이끄는 한나라 군대와 대치하게 되었다. 영포는 과거 항우가 즐겨 사용했던 방식으로 군대를 배치했는데, 고조는 이를 보고 매우 불쾌해하며 영포를 향해 멀리서 물었다.[29]
"무엇이 괴로워서 반역을 일으켰는가?"[20]
영포는 거침없이 답했다.
"그저 황제가 되고 싶었을 뿐이다!"[21][29]
이어진 격렬한 전투에서 영포의 군대는 초반에 선전하여 고조가 잠시 용성(庸城)으로 후퇴하기도 했으나, 결국 한나라 군대의 총공세에 밀려 크게 패배했다. 이 전투 중에 고조는 화살에 맞아 부상을 입었는데, 이 상처가 악화되어 결국 그의 사망 원인이 되었다.[32] 영포는 남은 병력을 이끌고 화이허를 건너 남쪽으로 도주하며 여러 차례 저항했지만, 전세를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100여 명의 병사만 남은 채 장강 남쪽으로 후퇴했다.[22]
영포는 과거 진나라 말기에 함께 거병했던 오예의 사위였다. 당시 장사왕(長沙王)은 오예의 아들인 오신이었는데, 영포는 오신을 믿고 의지하려 했다. 오신은 영포에게 사자를 보내 함께 남월로 망명하자고 거짓으로 제안했다. 이를 믿은 영포는 오신을 따라 파양(番陽)으로 갔으나, 이는 오신의 함정이었다. 영포는 파양의 한 마을(茲鄉)에서 미리 매복해 있던 지역 주민들에게 살해당하며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22][29]
영포의 난이 평정된 후, 고조의 아들 유장이 공식적으로 회남왕이 되었다. 영포의 반란 계획을 밀고했던 분혁은 기사후(期思侯)에 봉해졌으며, 그 외에도 반란 진압에 공을 세운 여러 신하들에게 포상이 내려졌다.[29] 영포의 반란은 한나라 초기에 중앙집권 체제를 확립하려는 황제권과 기존의 독립적인 세력을 유지하려는 제후왕 사이의 갈등이 폭발한 대표적인 사건으로 평가된다.
2. 5. 최후
기원전 196년 여름, 여후가 한신을 죽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조 유방 역시 팽월을 반역 혐의로 처형한 뒤 살코기로 젓을 담가 제후들에게 보내자, 영포는 큰 두려움을 느꼈다. 자신도 한신이나 팽월처럼 숙청될지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서 그는 은밀히 병력을 모으고 주변 정세를 살피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시작했다.[29][13]이 무렵, 영포의 애첩이 병이 들어 의원에게 자주 치료를 받으러 다녔는데, 의원의 이웃에 살던 중대부 분혁(賁赫, 비혁)이 애첩을 자주 시중들었다. 애첩이 영포에게 분혁을 칭찬하자, 영포는 분혁이 애첩과 불륜 관계라고 의심하여 그를 체포하려 했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분혁은 수도 장안으로 달아나 고조에게 영포가 모반을 꾀하고 있다고 고발했다. 상국 소하는 분혁의 고변이 거짓일 수 있으니 일단 그를 가두고 영포의 동태를 신중히 조사해야 한다고 건의했다.[29][13] 하지만 영포는 분혁이 이미 자신의 비밀 계획을 누설했고, 한나라 조정의 조사까지 받게 되자 더 이상 숨길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결국 분혁의 일가족을 모두 죽이고 기원전 196년 가을(7월 또는 8/9월), 반란을 일으켰다.[29][14] 영포의 반란 소식이 전해지자 고조는 분혁을 사면하고 진압군의 장수로 삼았다. 반란을 일으키기 전, 옛 재상 주건은 영포를 만류했으나, 중신 양보후는 반란을 부추겼다.[26]
반란을 일으키며 영포는 부하들에게 "황제는 늙고 병들어 전쟁을 싫어하니 직접 오지 못할 것이다. 장수를 보낸다 해도, 우리가 두려워할 만한 한신과 팽월은 이미 죽었으니 걱정할 것 없다"고 말했다.[18] 그는 먼저 동쪽의 형나라를 공격하여 형왕 유고를 한 번의 싸움으로 격파하고 죽인 뒤, 형나라 군대를 흡수했다.[29] 이어 화이허를 건너 초나라를 공격했다. 초왕 유교는 군대를 셋으로 나누어 서로 돕게 했으나, 영포가 이 중 한 군대를 격파하자 나머지 두 군대도 흩어져 달아났다.[29][19]
한편, 고조는 하후영의 추천으로 옛 초나라의 영윤이었던 설공에게 자문을 구했다. 설공은 영포가 취할 수 있는 전략으로 상책(동쪽 제후국들을 공략하여 산둥 지역 장악), 중책(중원 지역을 공략하여 한나라와 대치), 하책(오나라와 하채를 점령하고 월나라와 장사 지역으로 퇴로 확보) 세 가지를 제시하며, 영포가 자신의 안위를 우선시하여 하책을 택할 가능성이 높다고 예측했다.[17] 고조는 설공의 분석을 받아들여 그를 천호후에 봉하고, 자신의 아들 유장을 새로운 회남왕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소하에게 수도 관중과 태자를 맡기고 직접 군대를 이끌고 영포 토벌에 나섰다.[27]
기원전 195년 10월, 서쪽으로 진격하던 영포는 기현(蕲縣) 서쪽의 추(甀) 지역에서 마침내 고조가 이끄는 한나라 군대와 마주쳤다. 영포는 과거 항우가 즐겨 사용했던 방식으로 군대를 배치했는데, 고조는 이를 보고 불쾌감을 드러냈다. 고조가 멀리서 영포에게 "무엇이 괴로워서 반역을 일으켰는가?"라고 묻자, 영포는 "그저 황제가 되고 싶었을 뿐이다!"라고 답했다.[29][21] 고조는 격노하여 총공격을 명령했다. 격렬한 전투 중에 고조가 화살에 맞아 부상을 입었지만(이 상처가 악화되어 결국 사망의 원인이 된다[32]), 영포의 군대는 크게 패하여 화이허를 건너 남쪽으로 후퇴했다. 영포는 여러 차례 반격했지만 전세를 뒤집지 못하고 결국 장강 남쪽으로 달아났다.
영포는 장인 오예의 아들이자 처남인 장사성왕 오신에게 의탁하려 했다. 오신은 영포에게 사자를 보내 함께 남월로 망명하자고 거짓 제안을 했다. 영포는 이 말을 믿고 오신을 따라 파양(番陽)으로 갔으나, 그곳에서 오신의 계략에 빠져 지역 주민들에게 살해당했다.[29][22] 영포가 죽자 유장이 정식으로 회남왕이 되었고, 영포의 모반을 고발했던 분혁은 기사후(期思侯)에 봉해지는 등 반란 진압에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상이 내려졌다.[29]
3. 평가와 영향
영포는 초한전쟁 시기 뛰어난 용맹과 군사적 재능으로 난세에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다. 그는 진나라 말기 혼란기에 봉기하여 항우 휘하에서 활약하며 거록 전투 등 주요 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이후 한나라 진영으로 옮겨 해하 전투에서 항우를 격파하고 한나라 건국에 기여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러한 공로로 구강왕, 회남왕에 봉해지며 한때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기도 했다.
그러나 영포의 삶은 잦은 배신과 변절로 점철되어 있다. 그는 항우의 신임을 얻었음에도 초 의제 암살에 가담하고 결국 항우를 배신했으며, 한나라 건국 후에는 유방에게 반기를 들었다. 이러한 행보는 한신, 팽월 등 다른 공신들의 연이은 숙청을 보며 느낀 극심한 불안감과, 스스로 황제가 되고자 했던 개인적인 야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설공은 영포가 개인의 영달만을 추구하며 백성이나 후사를 고려하지 않는 인물이라고 분석하며 그의 한계를 지적하기도 했다.
결국 영포는 자신의 불안과 야심을 극복하지 못하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직접 출정한 유방에게 패배하고 도주하다가 과거 인연이 있던 장사성왕 오신에게 배신당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그의 몰락은 뛰어난 능력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시대를 읽는 안목 부족과 통제되지 않은 욕망이 어떻게 개인의 파멸을 초래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남았다. 또한, 토사구팽이라는 고사성어와 함께 한나라 초기 공신 숙청의 비정함을 상징하는 인물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3. 1. 군사적 재능과 용맹성
기원전 209년, 진승과 오광이 대택향 봉기를 일으켜 진나라 타도를 목표로 봉기하자, 영포는 장인인 오예와 함께 수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봉기에 참여했다. 봉기가 진나라 장군 장한에게 진압된 후에도 영포는 독자적으로 세력을 이끌고 북진하여 청파(清波, 현재 신채현 남서쪽)에서 진나라 군대를 격파하는 등 군사적 역량을 발휘했다.[1] 이후 항량이 회계군에서 대규모 군사를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합류했다.영포는 항량 휘하에서 뛰어난 용맹을 발휘하며 경구, 진가(秦嘉중국어) 등 다른 반란 세력을 격파하는 데 기여했다. 기원전 208년, 항량이 초 의제를 명목상의 왕으로 내세우자 영포는 '당양군'(當陽君중국어)이라는 작위를 받았다. 같은 해 겨울, 항량이 정도 전투에서 전사한 후 영포는 다른 초나라 장군들과 함께 팽성(현재 쉬저우시)에 주둔했다.
이후 조나라의 구원 요청에 따라 초나라 군대가 파견되었고, 항우가 송의를 제거하고 총지휘권을 장악하자 영포는 항우의 휘하 장수가 되었다. 기원전 207년 거록 전투에서 영포는 항우와 함께 장한이 이끄는 진나라 대군을 격파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전투 후 항우의 명령에 따라 신안(新安, 현재 이마시)에서 항복한 진나라 병사 20만 명의 생매장을 감독했다.[2]
진나라 멸망 후 항우가 18제후왕을 책봉할 때, 영포는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구강왕'(九江王중국어)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항우의 통치 방식에 점차 불만을 품었다. 특히 기원전 206년, 항우가 초 의제를 장사군으로 사실상 유배 보낸 뒤 영포에게 비밀리에 의제를 암살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영포는 이를 실행했다.[3]
기원전 205년, 제나라에서 전영(田榮중국어)이 반란을 일으키자 항우는 영포에게 지원군을 요청했으나, 영포는 병을 핑계로 소극적으로 대응하며 수천 명의 병력만 보냈다. 같은 시기 유방이 팽성을 공격했을 때도 항우의 지원 요청을 다시 병을 핑계로 거절했다. 항우는 영포에게 불만을 품었지만, 제나라와 조나라의 위협 및 서쪽의 유방을 견제해야 하는 상황이었고, 영포의 군사적 재능을 아꼈기에 당장 공격하지는 않았다.[4]
이러한 상황에서 유방의 책사 수하(隨何)가 영포를 찾아와 설득에 나섰다. 수하는 항우 정권의 불안정성(의제 살해로 인한 민심 이반, 잦은 약속 파기)과 유방 진영의 강점(안정적인 보급, 제후 규합)을 강조하며 영포에게 초나라를 배신하고 한나라에 합류하도록 설득했다.[5][6][7][8][9] 마침 항우의 사자가 다시 지원을 요청하러 오자, 수하는 영포가 이미 한나라 편에 섰다고 선언했고, 영포는 수하의 조언에 따라 초나라 사자를 살해하고 항우와의 결별을 공식화했다.[10][11][12]
항우는 영포의 배신에 분노하여 항성과 용저를 보내 회남을 공격하게 했다. 몇 달간의 전투 끝에 영포는 패배하고 영토를 빼앗긴 채 한나라로 망명했다. 처음 유방을 만났을 때 유방의 격식 없는 태도에 실망하기도 했으나, 자신에게 주어진 거처와 대우가 유방의 것과 동등한 수준임을 확인하고 만족했다.[13] 유방은 영포에게 군대를 맡겼고, 기원전 203년에는 그를 '회남왕'(淮南王)으로 봉했다.
회남왕이 된 영포는 곧바로 군사를 이끌고 옛 영지인 구강을 공격하여 여러 성을 되찾았다. 그는 유가와 함께 주은을 설득하여 초나라에서 한나라로 귀순시키는 등 한나라의 세력 확장에 기여했다. 마침내 기원전 202년 해하 전투에서 영포는 유방의 주력군과 합류하여 항우를 격파하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이 전투의 패배로 항우는 자결했고, 초한전쟁은 유방의 승리로 끝났다. 영포는 한나라 건국 후에도 회남왕의 지위를 유지하며 구강(九江), 노산(廬山), 형산(衡山), 예장(豫章)의 군을 다스렸다.[14]
3. 2. 배신과 변절에 대한 비판
한신과 팽월이 연이어 숙청되자 영포는 자신도 같은 운명을 맞이할까 두려워하며 반란을 준비하기 시작했다.[13] 이러한 불안감 속에서 영포는 자신이 아끼던 후궁과 부하 분혁 사이에 불륜 관계가 있다고 의심하게 되었다. 분혁이 두려움에 병을 핑계로 나오지 않자 영포는 더욱 분노하여 그를 체포하려 했다. 이에 분혁은 수도 장안으로 도망쳐 영포가 반란을 꾀하고 있다고 고발했다.[13] 영포는 분혁이 자신의 계획을 누설했다고 판단하고, 한나라 조정의 조사가 시작되자 결국 기원전 196년 반란을 일으켰다.[14]고조가 영포의 반란 소식을 듣고 신하들과 대책을 논의할 때, 초나라의 전 영윤이었던 설공(薛公)은 영포의 반란 동기를 분석했다. 설공은 영포가 한신과 팽월의 죽음을 보고 자신도 숙청될 것을 두려워하여 반란을 일으켰다고 설명했다.[16] 또한 설공은 영포가 취할 행동을 세 가지로 예측하며, 그가 개인적인 이익만을 추구하고 백성이나 후손은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결국 가장 소극적인 세 번째 선택(오, 샤차이 공격 후 월, 장사로 후퇴)을 할 것이라고 보았다. 이는 영포가 과거 죄수 신분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왕의 지위에 올랐지만, 그의 행동 기반이 시종일관 개인의 영달에 있었음을 보여준다.[17]
영포는 반란을 일으키며 "황제는 늙었고 전쟁을 싫어한다. 한신과 팽월도 이미 죽었으니 두려울 것이 없다"고 말하며 자신감을 보였다.[18] 그는 초반에 징왕 유가를 죽이고 초나라 군대를 격파하는 등 기세를 올렸으나, 직접 군대를 이끌고 온 고조와의 전투에서는 결국 패배했다. 기시(蕲西)에서의 전투에서 영포는 고조에게 "왜 반역을 하려는 것이냐?"[20]는 질문에 "황제가 되고 싶습니다."[21]라고 답하며 자신의 야심을 숨기지 않았다.
패배 후 양자강 남쪽으로 도망친 영포는 과거 인연이 있던 장사성왕 오신(吳臣)에게 의탁하려 했다. 그러나 오신은 영포를 속여 포양(番陽)으로 유인했고, 영포는 그곳에서 농민들에게 살해당하며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22] 영포의 일련의 행적은 공신으로서의 지위와 명예보다는 개인적인 불안감과 야심에 휘둘려 결국 파멸에 이른 사례로 평가받는다.
3. 3. 한계와 비극적 최후
기원전 196년 초, 한신이 여태후의 명으로 처형당하고, 그해 4월경에는 팽월마저 같은 운명을 맞이하자 영포는 큰 불안감을 느꼈다. 특히 팽월의 시신이 조각나 각지에 보내진 것을 보고 공포에 질려 자신도 같은 처지가 될 것을 두려워했다. 이로 인해 영포는 비밀리에 병력을 모으고 주변 정세에 더욱 신경을 곤두세웠다.영포의 불안은 사소한 의심에서 폭발했다. 그가 아끼던 후궁이 병으로 의원에게 치료를 받으러 갔는데, 그 의원은 궁궐 관리 분혁(賁赫)의 이웃이었다. 후궁은 의원을 자주 찾았고, 분혁은 이를 기회로 후궁에게 접근하여 선물을 주고 함께 술을 마셨다. 후궁이 영포 앞에서 분혁을 칭찬하자, 영포는 둘의 관계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영포가 자신을 의심한다는 소식을 들은 분혁은 두려움에 병을 핑계로 집에 머물렀고, 이는 영포의 분노를 더욱 키웠다. 영포가 분혁을 체포하려 하자, 궁지에 몰린 분혁은 수도 장안으로 도망쳐 영포가 반란을 꾀하고 있다고 고발했다. 영포는 분혁을 추격했지만 잡지 못했다. 장안에 도착한 분혁은 영포의 반란 징후를 알리며 선제공격을 주장했다. 고조는 소하와 상의했고, 소하는 분혁의 말을 의심하며 먼저 조사를 보낼 것을 건의했다.[13] 그러나 분혁이 도망쳐 자신을 고발하고 조정에서 조사단까지 파견하려 하자, 영포는 자신의 계획이 탄로났다고 판단하고 결국 반란을 결심했다. 그는 분혁의 가족을 처형하고 기원전 196년 8월 또는 9월에 군사를 일으켰다.[14] 반란 소식이 전해지자 고조는 분혁을 사면하고 장군으로 삼았다.
고조는 신하들과 영포 문제를 논의했고, 대부분 영포를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때 하후영은 과거 초의 영윤이었던 설공(薛公)에게 자문을 구했다. 설공은 영포의 반란 원인을 "지난 2년간 팽월과 한신이 처형당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왕조 창업에 큰 공을 세웠고 영포와 비슷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영포는 자신도 같은 운명을 맞을까 두려워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라고 분석했다.[16] 설공은 고조에게 나아가 영포가 취할 수 있는 세 가지 전략과 그 결과를 예측했다. 첫째, 오, 초, 제, 노, 연, 조를 공격하여 산둥 지역을 장악하는 최상의 전략. 둘째, 오, 초, 한, 위를 점령하고 아오창(敖倉)의 보급을 확보하여 형양(滎陽)을 막는 중간 전략. 셋째, 오와 하채(下蔡)를 공격하고 월과 장사로 후퇴하는 최하의 전략. 설공은 영포가 죄수 출신으로 오직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행동하며 백성이나 후손을 고려하지 않기에 세 번째 전략을 택할 것이라고 예측했다.[17] 고조는 설공의 분석을 받아들여 그의 아들 유장을 새로운 회남왕으로 임명하고 직접 군대를 이끌고 반란 진압에 나섰다.
영포는 반란을 일으키며 "황제는 늙고 전쟁을 싫어하니 직접 오지 않을 것이다. 장수를 보낸다 해도 한신과 팽월 같은 위협적인 인물들은 이미 죽었으니 두려울 것이 없다"고 호언장담했다.[18] 그는 동쪽으로 진격하여 형을 공격했고, 푸링(富陵)에서 형왕(荊王) 유가(劉賈)를 격파하고 살해했으며, 회수를 건너 초를 공격했다. 초나라 군대는 세 부대로 나뉘어 쉬(徐)와 통(僮) 사이에서 영포를 막으려 했으나, 영포의 용병술과 명성에 눌려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한 부대가 격파되자 나머지 부대도 흩어졌다.[19]
그러나 영포의 예상과 달리 고조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타났다. 영포는 서쪽으로 진격하여 안휘성 쑤저우시 남쪽 기시(蕲西)에서 고조가 이끄는 한나라 군대와 마주쳤고, 추이(甀)에서 전투를 벌였다. 초반 영포 군대의 기세에 고조가 잠시 용성(庸城)으로 물러나기도 했으나, 항우를 연상시키는 영포의 군 진형을 본 고조는 분노했다. 고조가 "어찌하여 반란을 일으켰는가?"[20]라고 묻자 영포는 "황제가 되고 싶을 뿐이다!"[21]라고 답했다. 격분한 고조의 총공세에 영포는 결국 패배하여 회수를 건너 남쪽으로 도주했다. 도주 중에도 몇 차례 저항했지만 모두 실패하고 결국 100여 명의 병력만 남긴 채 양쯔강 남쪽으로 후퇴했다.
영포는 과거 오예의 사위였던 인연을 믿고, 오예의 아들이자 당시 장사왕(長沙王)이었던 오신(吳臣)에게 의탁하려 했다. 오신은 사자를 보내 영포가 남월로 도망치는 것을 돕겠다고 거짓 약속을 했다. 영포는 이를 믿고 사자를 따라 포양(番陽)으로 갔으나, 그곳에서 오신의 계략에 빠져 즈향(茲鄉)의 농민들에게 살해당하며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22] 그의 죽음은 한때 한고조와 함께 천하를 다투었던 영웅의 허망한 몰락이자, 권력 투쟁의 비정함과 통제되지 않은 개인의 욕망이 초래할 수 있는 비극을 보여주는 사례로 남게 되었다.
4. 기타
영포는 후대에 종교적인 숭배의 대상이 되기도 했으며, 현대의 대중문화 콘텐츠에서도 그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4. 1. 대중문화 속 영포
영포는 때때로 중국 사찰과 도교 사원에서 문신으로 숭배되기도 하며, 보통 다른 한나라 장수인 팽월과 함께 짝을 이룬다.그는 코에이의 비디오 게임 ''삼국지 11''에 특별 캐릭터로 등장하는 32명의 역사적 인물 중 한 명이다. 또한, 액션 롤플레잉 게임 ''진나라의 왕자''에서는 "청포"라는 이름으로 "근육남" 클래스의 플레이 가능한 캐릭터로 등장한다.
4. 2. 영포 숭배
영포는 때때로 중국 사찰과 도교 사원에서 문신으로 숭배되기도 하며, 보통 다른 한나라 장수인 팽월과 함께 짝을 이룬다.참조
[1]
서적
Zizhi Tongjian
203-08-04/-09-01 BCE
[2]
서적
Zizhi Tongjian
196-11-12/-12-10 BCE
[3]
서적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4]
서적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5]
서적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6]
서적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7]
서적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8]
서적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9]
서적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10]
서적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11]
서적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12]
서적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13]
서적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14]
서적
Zizhi Tongjian
196-08-16/-09-13 BCE
[15]
서적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16]
서적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17]
서적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18]
서적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19]
서적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20]
서적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21]
서적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22]
서적
Zizhi Tongjian
[23]
서적
蒙求集註
[24]
서적
史記
[25]
서적
史記
[26]
서적
漢書
[27]
서적
史記
[28]
서적
史記
[29]
서적
사기
[30]
서적
사기
[31]
서적
사기 표
[32]
서적
사기
[33]
문서
여나라가 도중에 제천나라로 이름이 바뀐 것으로, 유명이 봉해진 제천나라와는 연관이 없다.
[34]
문서
작위만 추증된 것으로, 봉지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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