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수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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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수구 전투는 후한 말기, 삼국 시대에 오나라와 위나라 사이에서 여러 차례 벌어진 일련의 전투를 통칭한다. 212년부터 223년까지 여러 해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조조, 손권 등 삼국 시대의 주요 인물들이 참전했다. 이 전투는 조조가 손권을 공격하면서 시작되었으며, 감녕의 기습, 여몽의 계책 등 다양한 전술이 사용되었다. 223년에는 전염병으로 인해 위나라가 철수하면서 마무리되었다. 유수구 전투는 삼국 시대의 세력 균형에 영향을 미쳤으며, 촉나라와 오나라의 동맹 관계를 회복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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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수구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
| 전투 개요 | |
| 전투명 | 유수 전투 |
| 일부 | 후한말 전쟁의 일부 |
| 시기 | 213년 |
| 장소 | 양주 유수구 (현재의 중국 안후이성 차오후) |
| 결과 | 손권의 전체적 승리, 조조의 철수 |
| 교전 세력 | |
| 교전국 1 | 조조 |
| 교전국 2 | 손권 |
| 지휘관 및 지도자 | |
| 지휘관 1 | 조조 |
| 지휘관 2 | 손권 |
| 주요 지휘관 | 여몽 |
| 병력 규모 | |
| 조조 군대 | 400,000명 |
| 손권 군대 | 70,000명 |
| 관련 전투 목록 | |
| 1차 유수구 전투 (212년 - 213년) | |
| 전투 결과 | 손권군 승리 |
| 교전 세력 | 손권군 vs 조조군 |
| 지휘관 | 손권, 여몽 vs 조조 |
| 피해 규모 | 손권군 7만 vs 조조군 40만 |
| 2차 유수구 전투 (214년 - 215년) | |
| 전투 결과 | 손권군 승리 |
| 교전 세력 | 손권군 vs 조조군 |
| 지휘관 | 손권, 감녕 vs 조조, 순유, 화흠, 부간 |
| 피해 규모 | 손권군 vs 조조군 10여만 |
| 3차 유수구 전투 (216년 - 217년) | |
| 전투 결과 | 손권군 승리 |
| 교전 세력 | 손권군 vs 조조군 |
| 지휘관 | 손권, 여몽, 장흠 vs 조조, 하후돈 |
| 피해 규모 | 손권군 vs 조조군 10여만 |
| 4차 유수구 전투 (222년) | |
| 전투 결과 | 손권군 승리 |
| 교전 세력 | 손권군 vs 위군 |
| 지휘관 | 주환 vs 조인 |
| 피해 규모 | 손권군 1만 vs 위군 수만 이상 |
2. 배경
213년 이전, 적벽 전투에서 패배한 조조는 마초와 손권에게 대항하여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조조는 손권과의 전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자신의 장수 사기(謝奇)를 완성(皖城; 현재의 안후이성 첸산 현)에 주둔시키고 병력을 기춘현까지 배치하여 손권을 위협하려 했다.[1]
213년 여몽의 제안으로 유수구에 유수오가 건설되었고, 이는 조조가 강을 따라 진격하는 것을 막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3] 조조는 40만 대군을 이끌고 유수구로 진격했으나, 여몽의 계책과 유수오 덕분에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한 달여 만에 철수했다.[5]
이에 손권은 여몽을 보내 사기를 압박했다. 사기는 항복을 거부하고 저항했으나, 결국 패배하고 후퇴했다.[2] 사기의 부하들은 여몽에게 항복했다. 이후 조조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유수로 진격했고, 손권 역시 여몽에게 합류를 명령하여 조조군에 맞섰다.
212년 10월, 마초 등 관중 군벌을 격파한 조조는 직접 손권 정벌을 지휘했다. 마초를 쓰러뜨린 조조는 서부에 투입할 병력을 줄이고, 관중 지역의 동원력을 확보하여 적벽 대전 때보다 더 많은 군대를 동원했을 가능성이 있다.
같은 해, 조조의 침공 소식을 들은 여몽은 유수구에 유수오를 건설했다. 213년 정월, 조조는 40만 대군을 이끌고 유수구로 진격하여 손권군의 장강 서안 진지를 공격하고 격파했다. 이 과정에서 조조군은 손권의 부장 공손양을 사로잡았지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다. 손권도 직접 방어전을 지휘했으나, 손유는 참전을 반대했다. 동습은 야간의 돌풍으로 배가 전복되어 사망했는데, 부하들의 하선 권유에도 불구하고 장군으로서 책임을 다하며 배의 복귀를 시도하다가 사망했다.
조조는 야간에 중주에 상륙했지만, 손권은 수군으로 중주의 조조군을 포위하고 3,000명을 포로로 잡았다. 익사한 적병도 수천 명에 달했다. 손권은 적극적으로 교전을 시도했으나 조조가 응하지 않자, 대선에 올라 조조군의 상황을 살폈다. 조조는 활과 쇠뇌를 발사했고, 화살이 배에 많이 박혀 배가 기울어지자 손권은 배를 돌려 반대쪽에도 화살을 맞게 하여 균형을 잡았다. 손권이 귀환할 때 악대가 성대한 음악을 연주했고, 조조는 손권군의 정연한 모습에 감탄하며 "아들을 낳는다면 손권 같은 아들이 좋겠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여몽은 기책을 자주 사용했고, 미리 구축해 놓은 유수오가 효과를 발휘하여 조조는 강을 따라 진격할 수 없었다. 조조는 한 달여 대치한 후 철수했다.
전투 후, 조조가 장제의 의견을 따르지 않아 장강·회수 부근에 사는 10여 만 명의 사람들이 손권 측으로 도망쳤다.[13]
3. 주요 전투
217년 조조는 다시 군대를 이끌고 유수구를 공격했으나, 여몽은 유수의 성채에 강력한 쇠뇌 1만 개를 배치하여 조조군을 맞이했다.[5] 이 쇠뇌에 조조군의 손관이 맞아 사망했다.[4] 결국 조조군은 큰 피해를 입고 철수했다.[5][6]
222년 조비는 오나라 정벌을 시작하며 조인에게 유수구를 공격하게 했다.[1] 223년 조인은 병력을 분산시키는 척하며 주환을 속이려 했으나, 주환은 이에 속지 않고 오히려 조인의 아들 조태를 격퇴하고, 상조를 전사시켰으며, 왕쌍을 포로로 잡는 등 큰 승리를 거두었다.
3. 1. 제1차 전투 (212년 ~ 213년)
212년 10월, 마초 이하 관중의 군벌을 격파한 한의 조조는 직접 손권 정벌에 나섰다. 마초를 쓰러뜨린 조조는 서부에 투입할 병력을 줄이고, 관중 이서 지역의 동원력을 확보하여 적벽 대전 때보다 더 많은 군대를 이끌었을 가능성이 있다.
같은 해, 조조가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들은 여몽은 유수구에 유수오를 만들었다.[3] 213년 정월, 조조는 40만 대군을 이끌고 유수구로 진격하여 손권의 장강 서안 진지를 공격해 격파하고 부장 공손양을 사로잡았다. 손권은 직접 방어 지휘에 나섰으나, 손유는 이를 만류했다. 동습은 야간 돌풍으로 배가 전복되어 사망했는데, 부하들이 배에서 내리라고 설득했지만, 장군의 책무를 다하며 마지막까지 배의 복귀를 시도했다.
조조는 밤에 출격하여 중주에 상륙했지만, 손권은 수군을 지휘하여 중주의 조조를 포위하고 3000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익사한 적병도 수천 명에 달했다. 손권은 적극적으로 싸움을 걸려 했지만, 조조가 출격하지 않자 대선에 올라 군대를 관망했다. 조조는 활과 쇠뇌를 마구 발사했고, 화살이 많이 박힌 배가 한쪽으로 기울어 전복될 뻔하자 손권은 배를 돌려 반대쪽에도 화살을 맞게 하여 배의 균형을 유지했다. 손권이 귀환할 때 악대가 성대한 음악을 연주하게 하자, 조조는 손권 군대의 정연함에 감탄하며 "아들을 낳는다면 손권 같은 아들이 좋겠다"라고 말했다.
여몽의 계책과 유수오 덕분에 조조는 강을 따라 진격할 수 없었고, 한 달여 대치 끝에 철수했다.[5] 뤼멍의 예측대로,[5] 손권은 조조 군대에 군함을 보냈지만, 일부 배가 항로를 벗어났을 뿐 큰 피해는 없었다.[6] (이것이 동습의 죽음 원인일 수도 있다.) 결국 조조는 철수를 결정했다.
전투 후, 조조가 장제의 의견을 따르지 않아 장강·회수 부근 10여만 명의 사람들이 손권 측으로 도망쳤다.[13]
3. 2. 제2차 전투 (214년 ~ 215년)
214년, 손권은 완성을 함락시켰다. 그해 7월[14], 조조는 부간의 간언을 무시하고 순유를 군사로 임명하여, 손권의 침공에 대한 보복으로 직접 10여 만의 군세를 이끌고 장강의 여수를 침공했다.[15] 그러나 순유와 병원 등이 출정 도중에 병사하여, 화흠을 후임 군사로 삼았다.
조조가 1개월여 동안 대치한 후, 손권은 감녕에게 3000명을 맡겨 전부독으로 삼고[16] 야습을 지시했다. 감녕은 100명의 결사대를 선발하여 야습을 감행했고, 이로 인해 조조군은 혼란에 빠졌다. 그 후에도 공방전이 이어졌으나 조조군은 여수오를 함락시키지 못하고 철수했다.[17]
3. 3. 제3차 전투 (216년 ~ 217년)
216년 10월, 조조는 직접 군대를 지휘하여 손권을 정벌하러 나섰다. 11월, 초에 도착한 조조는 군대를 이끌고 대치하는 한편, 산월족에게 반란을 일으키게 하는 등 정치 공작도 펼쳤다.[13]
217년 정월, 조조군은 거소에 도착했지만, 역병이 유행하여 사졸들이 잇따라 사망했다. 사마랑은 스스로 순찰하며 병사들에게 약을 나눠주었지만, 자신은 복용하지 않아 병사했다. 조조군은 학계에 주둔하며, 유수 수역을 공격하고 동시에 횡강 육안으로 진군을 시도했다. 손권은 여몽과 장흠을 제군절도에 임명하여 전군을 지휘하게 했다. 손권은 유수 방어를 위해 유수 앞쪽에 성을 쌓기 시작했다. 2월, 조조는 장료와 장패 등을 선봉으로 하여 축성 부대를 공격했다. 건설 중이던 손권군의 성은 격파되었고, 손권군은 후퇴했다. 그러나 폭우로 수위가 상승하여 손권군이 다시 진격해왔고, 장료는 철수를 고려했다. 장패는 조조가 자신들을 버리지 않을 것이니 독단적으로 후퇴하지 말고 명령을 기다려야 한다고 반대했다. 다음 날 철수 명령이 내려졌다.[3]
단양의 비잔과 파양의 우돌은 조조의 요청에 응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능양, 시안, 경도 이에 호응했다. 손권은 하제와 육손에게 명하여 반란을 평정하게 했다. 항복자 중에서 8000명의 정예병을 모집했으며, 회계, 파양, 단양에서 산월족 중에서 징병하여 정병 수만 명을 얻었다. 하제와 육손은 이 병력을 이끌고 횡강 근처로 돌아와 조조군을 맞이했다. 서성 등은 수상에서 조조군을 공격하려 했지만 강풍에 의해 떠내려가, 자신의 몽충은 조조군의 진지 해안 아래에 표류했다. 서성을 제외한 무장들은 배 안에 남았지만, 서성만이 병사를 이끌고 상륙하여 돌격했다. 서성의 돌격은 조조의 대군을 물리쳤고, 적군은 대혼란에 빠져 도주했다. 서성은 날씨가 회복된 후에 당당하게 귀환했다.[4]
여몽은 유수의 성채에 강력한 쇠뇌 1만 개를 배치하여 조조군을 맞이했다. 조조군의 손관은 이 쇠뇌에 맞아 사살되었다. 조조군의 선봉은 진지를 구축했지만, 여몽은 이를 기회로 급습하여 조조군을 격파했다. 3월, 조조군은 주태의 부대에 의해 공격을 받았다. 조조군은 피해가 컸고, 아무런 전과도 얻지 못했기 때문에 철수를 결정했다. 조조는 하후돈을 양주 방면 26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조인, 장료 등을 거소에 남겨두고 자신은 철수했다. 역병으로 인해 귀환하는 도중에 왕찬과 건안칠자 중 응창, 진림, 유정 등이 잇따라 사망했다. 조조의 대군을 격퇴한 공적으로 손권은 여몽을 좌호군, 호위장군에, 장흠을 우호군에, 주태를 유수독, 평로장군에 임명했다.[5][6]
이 전투 이후, 손권은 모략을 통해 사자 서상을 파견하여 한(漢)에 거짓으로 신종을 맹세했다. 조조는 이를 받아들였다.
3. 4. 제4차 전투 (222년 ~ 223년)
222년 9월, 손권이 손등을 인질로 내놓지 않자 조비는 오나라 정벌을 시작했다. 조비는 직접 지휘하며 허창에서 출격했고, 조휴, 장료, 장패의 군대를 동구에, 조인의 군대를 유수구에, 조진, 하후상, 장합, 서황 등의 군대를 강릉에 각각 파견했다.[1]
이에 맞서 오나라는 여범 등의 군대를 동구에, 주환은 유수구에, 주연은 강릉에 각각 배치하여 방어전을 펼쳤다.[1]
3. 4. 1. 동구 전투
222년 11월, 여범의 수군은 돌풍과 이를 기회로 삼은 조휴의 공격으로 인해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그 후, 맹패가 쾌속선 500척과 1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오군을 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지만, 전종과 서성은 맹패를 반격하여 격파하고, 윤로를 참살했으며, 조휴와 장료를 물리쳤다.[1]
3. 4. 2. 강릉 전투
조진, 하후상 등은 수만 이상의 군세를 이끌고 강릉을 공격했고, 신비는 그 군사로 종군했다. 장합은 손성의 구원군을 격파하고, 손성의 진지가 있던 장강의 중주를 점거했으며, 하후상은 중주에 진지를 설치하고 부교를 만들었다. 손성을 대신하여 제갈근과 반장이 주연의 구원에 파견되었다. 제갈근은 중주를 점거했지만, 하후상은 화공으로 제갈근을 격파했고, 주연은 고립무원 상태가 되었다.[1]
조진, 하후상, 신비, 장합, 서황, 만총, 문빙 등이 주연이 지키는 강릉을 포위했다. 토산을 쌓아 화살을 쏘거나 지하도를 파서 공격했지만, 주연은 병사들을 격려하고 틈을 노려 성 밖으로 나가 위군의 진지 2개를 격파했다. 제갈근은 패병을 모아 다시 위군을 공격했다. 반장은 장강의 상류로 가서 갈대를 베어 큰 뗏목을 만들고, 기후가 온난해져 강의 유량이 증가하는 시기에 불을 질러 위군의 부교를 불태우려 했다.[1]
군사로서 조비의 곁에 있던 동소는 반장, 제갈근이 두 방면에서 공격을 가하고 있는데 반해 하후상의 부교는 하나뿐이며, 시기적으로 장강의 수위가 급격히 상승할 가능성이 있음을 지적하며, 하후상 군을 철수시킬 것을 제안했다. 조비는 칙명을 내려 하후상을 철수시켰다. 조진, 하후상 등은 중주에서 철수했고, 제갈근은 부교를 공격하여 위군을 철수로 몰아넣었다. 주연의 강릉성 농성은 반 년여에 걸쳐 내응 소동과 역병 소동이 일어났지만 주연은 내통자를 처형하는 등 문제에 대처했고, 결국 강릉성은 함락되지 않았다.[1]
3. 4. 3. 유수구 전투
조인과 주환의 대치는 장기간에 걸쳐 이어졌다. 223년에 조인은 병력을 분산시켜 더욱 하류의 유수구와 동구(洞口)의 중간 지점인 선계(羡渓)를 공격한다고 선전했다. 이는 주환의 병력을 분산시키고 실제로는 전 병력으로 유수구를 공격하려는 작전이었다. 주환은 이 계략에 빠져 스스로는 유수구에 남아 병력을 나누어 한 부대를 선계로 파견했다.
조인은 배로 중주에 병력을 상륙시켜 주환 공격을 시작했다. 이때 주환이 수중에 둔 병력은 5천 명 정도로 수만 명 규모의 대군인 조인군에 비해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주환은 "전쟁이란 병력의 수가 아니라 지휘관의 질에 따라 승패가 결정되는 것이다. 나와 조비 중에는 내가 훨씬 더 뛰어나고, 하물며 조비의 부장인 조인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게다가 조인의 군대는 원정으로 피로해져 있고, 지리적 이점을 얻고 있는 것은 우리 쪽이다."라고 말하며 병사들을 독려했다. 그리고 깃발이나 진을 치는 북소리를 숨기고 성의 방어가 실제보다 더 약해 보이도록 하여 조인의 군대를 유인했다.
223년 3월, 조인은 스스로는 후방에서 총지휘를 맡고, 아들 조태에게 유수성을 공격하게 했으며, 장군 상조(常雕)에게 제갈건(諸葛虔)·왕쌍 등의 군대를 지휘하게 하여 여러 갈래에서 배를 타고 주환군의 가족들이 있는 중주를 공격하게 했다. 주환은 낙통·엄규(厳圭) 등의 여러 군대에 명령하여 상조군의 군선을 나포하게 하고, 그와 별도로 상조에게 직접 공격을 가했다. 주환 자신은 군대를 이끌고 조태와 대치하여 화공으로 그를 물러나게 했다. 상조는 전사했고, 왕쌍은 오군(吳軍)의 포로가 되었으며, 조인은 철수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조인은 병사했다). 조인군의 전사자는 천 명을 넘었다.
4. 결과 및 영향
223년 3월, 전염병이 유행하여 위나라 군대는 총퇴각했다. 유비는 전쟁 전에 사신을 오나라에 파견하여 동맹 관계를 회복했고, 촉나라와 오나라가 손을 잡고 위나라에 대항한다는 삼국 시대의 기본적인 구도가 다시 성립되었다.[13]
5. 관련 인물
212년 10월, 마초 등 관중의 군벌을 격파한 한의 조조는 직접 손권 정벌을 지휘했다. 여몽은 유수구에 유수오를 만들었다. 213년 정월, 조조는 40만 대군을 이끌고 유수구로 진격, 손권군의 장강 서안 진지를 공격하여 격파하고 부장 공손양을 사로잡았다. 손권도 직접 방어 지휘를 맡았지만, 손유는 이를 만류했다. 동습의 배가 야간 돌풍으로 전복되어 동습은 사망했다.
조조는 밤에 출격하여 중주에 상륙했지만, 손권은 수군으로 중주에 있는 조조를 포위하고 3000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익사한 적병도 수천 명이었다. 손권은 적극적으로 싸움을 걸었지만, 조조가 출격하지 않자 대선에 올라 군대를 관망했고, 조조는 활과 쇠뇌를 마구 발사했다. 화살은 배에 많이 박혔고, 배가 기울어 전복될 뻔하자 손권은 배를 돌려 반대쪽에도 화살을 맞게 하여 배의 균형을 유지했다. 손권이 귀환하자 악대에 성대한 음악을 연주하게 했다. 조조는 손권의 포진에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는 것에 감탄하며 "아들을 낳는다면 손권 같은 아들이 좋겠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여몽은 계책을 자주 사용했고, 미리 구축해 놓은 유수오가 효과를 발휘하여 조조는 강을 따라 군대를 진격시킬 수 없었고, 한 달여 대치한 후 철수했다.[13]
214년, 손권은 완성을 함락시켰다. 7월, 조조는 순유를 군사로 임명하여, 다시 직접 10여 만의 군세를 지휘하여 장강의 여수를 침공했다. 그러나 순유와 병원 등이 출정 도중에 병사하고, 화흠을 후임 군사로 삼았다.[15]
조조는 1개월여 대치한 후, 손권은 감녕에게 3000명을 맡겨 전부독으로 삼고, 밤을 틈타 기습을 지시했다. 감녕은 100명의 결사대를 선발하여 야습했고, 조조군은 혼란에 빠졌다. 그 후에도 공방전이 이어졌으나 조조군은 여수오를 함락시키지 못하고 철수했다.[17]
221년에 조조의 아들이자 위의 초대 황제인 조비는 손권을 오왕으로 추대하려 했다. 222년 6월, 1년 가까이 이어진 전투 끝에 오는 촉의 원정군을 격파했다 (이릉 전투). 9월, 손권이 손등을 인질로 내놓지 않자 조비는 오나라 정벌을 시작했다. 조비는 직접 지휘하며 허창에서 출격했고, 다른 장수들의 군대도 일제히 남하를 시작했다. 11월에는 조비가 완성에 들어가 본영으로 삼았고, 조휴, 장료, 장패의 군대를 동구에, 조인의 군대를 유수구에, 조진, 하후상, 장합, 서황 등의 군대를 강릉에 각각 파견했다.
이에 맞서 오나라는 여범 등의 군대를 동구에 파견했고, 유수구에서는 주환이 방어 지휘를 맡았다. 강릉에서는 주연이 성에 웅거하며 방어 지휘를 맡았고, 손성의 군대가 주연을 지원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조진, 하후상 등은 수만 이상의 군세를 이끌고 강릉을 공격했고, 신비는 그 군사로 종군했다. 장합은 손성의 구원군을 격파하고, 손성의 진지가 있던 장강의 중주를 점거했으며, 하후상은 중주에 진지를 설치하고 부교를 만들었다. 손성을 대신하여, 제갈근과 반장이 주연의 구원에 파견되었다. 제갈근은 중주를 점거했지만, 하후상은 화공으로 제갈근을 격파했고, 주연은 고립무원 상태가 되었다.
조진, 하후상, 신비, 장합, 서황, 만총, 문빙 등이 주연이 지키는 강릉을 포위했다. 토산을 쌓아 화살을 쏘거나 지하도를 파서 공격했지만, 주연은 병사들을 격려하고 틈을 노려 성 밖으로 나가 위군의 진지 2개를 격파했다. 제갈근은 패병을 모아 다시 위군을 공격했다. 반장이 장강의 상류로 가서 갈대를 베어 큰 뗏목을 만들고, 기후가 온난해져 강의 유량이 증가하는 시기에 불을 질러 위군의 부교를 불태우려 했다.
군사로서 조비의 곁에 있던 동소는 반장, 제갈근이 두 방면에서 공격을 가하고 있는 데 반해 하후상의 부교는 하나뿐이며, 시기적으로 장강의 수위가 급격히 상승할 가능성이 있음을 지적하며, 하후상 군을 철수시킬 것을 제안했다. 반장은 화공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전에 조비는 칙명을 내려 하후상을 철수시켰다. 조진, 하후상 등은 중주에서 철수했고, 제갈근은 부교를 공격하여 위군을 철수로 몰아넣었다. 주연의 강릉성 농성은 반 년여에 걸쳐 내응 소동과 역병 소동이 일어났지만 주연은 내통자를 처형하는 등 문제에 대처했고, 결국 강릉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5. 1. 위
216년 10월, 조조는 직접 군대를 지휘하여 손권을 정벌하러 나섰다. 초에 도착한 것은 11월이었다. 조조는 군대를 이끌고 대치하는 한편, 산월족에게 반란을 일으키게 하는 등 정치 공작도 펼쳤다.[15]217년 정월, 조조군은 거소에 도착했지만, 역병이 유행하여 사졸들이 잇따라 사망했다. 사마랑은 스스로 순찰하며 병사들에게 약을 나눠주었지만, 자신은 복용하지 않아 병사했다. 조조군은 학계에 주둔하며, 유수 수역을 공격하고 동시에 횡강 육안으로 진군을 시도했다. 손권은 여몽과 장흠을 제군절도에 임명하여 두 사람과 함께 전군을 지휘하게 했다. 손권은 유수의 방어를 위해 유수 앞에 성을 쌓기 시작했다. 2월, 조조는 공격을 시작하여 장료와 장패 등의 장수들을 선봉으로 하여 축성 부대를 맹공했다. 이로 인해 건설 중이던 손권군의 성은 격파되었고, 손권군은 후퇴했다. 그러나 그 후 폭우로 수위가 상승하여 수상을 통해 손권군이 다시 진격해왔고, 장료는 철수를 고려했다. 이에 대해 장패는 조조가 자신들을 버리지 않을 것이니 독단적으로 후퇴하지 말고 명령을 기다려야 한다고 반대했다. 다음 날 철수 명령이 내려진 것은 과연이었다.[17]
산월 출신인 단양의 비잔과 파양의 우돌이 조조의 요청에 응하여 각각 반란을 일으켰고, 능양, 시안, 경도 이에 호응했다. 손권은 하제와 육손에게 명하여 반란을 평정하게 했다. 항복자 중에서 8000명의 정예병을 모집했으며, 또한 회계, 파양, 단양에서 산월족 중에서 징병하여 정병 수만 명을 얻었다. 하제와 육손은 이 병력을 이끌고 횡강 근처로 돌아와 조조군을 맞이했다. 서성 등은 수상에서 조조군을 공격하려 했지만 강풍에 의해 떠내려가 자신의 몽충은 조조군의 진지 해안 아래에 표류했다. 이때 서성을 제외한 무장들은 배 안에 남았지만, 서성만이 병사를 이끌고 상륙하여 돌격했다. 서성의 돌격은 조조의 대군을 물리쳤고, 적군은 대혼란에 빠져 도주했다. 그 후, 서성은 날씨가 회복된 후에 당당하게 귀환할 수 있었다.[17]
여몽은 유수의 성채에 강력한 쇠뇌 1만 개를 배치하여 조조군을 맞이했다. 조조군의 손관은 이 쇠뇌에 맞아 사살되었다. 조조군의 선봉은 진지를 구축했지만, 여몽은 이를 기회로 급습하여 조조군을 격파했다. 3월, 조조군은 다시 주태의 부대에 의해 공격을 받았다. 조조군의 피해가 컸고, 한편으로는 아무런 전과도 얻지 못했기 때문에 조조는 철수를 결정했다. 조조는 하후돈을 양주 방면 26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조인, 장료 등을 거소에 남겨두고 자신은 철수했다. 역병으로 인해 귀환하는 도중에 왕찬과 건안칠자 중 응창, 진림, 유정 등이 역병으로 잇따라 사망했다.[17]
5. 2. 오
참조
[1]
서적
Sanguozhi vol. 54
[2]
서적
Sanguozhi vol. 54
[3]
서적
Sanguozhi vol. 55
[4]
서적
Sanguozhi vol. 55
[5]
서적
Sanguozhi vol. 54
[6]
서적
Sanguozhi vol. 55
[7]
서적
Sanguozhi vol. 17
[8]
서적
Sanguozhi vol. 17
[9]
서적
Sanguozhi vol. 55
[10]
서적
Sanguozhi vol. 55
[11]
서적
Sanguozhi vol. 55
[12]
서적
Sanguozhi vol. 55
[13]
인용
[14]
서적
三国志集解
[15]
서적
三国志集解
[16]
서적
三国志集解
[17]
서적
四庫全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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