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초 (촉한)
1. 개요
마초는 후한 말, 촉한의 장군으로, 자는 맹기이다. 마원은 그의 조상이며, 부풍 마씨 출신으로 마등의 아들이자 마원의 후손이다. 어려서부터 용맹함을 보였으며, 관서 지역에서 세력을 키우던 아버지 마등을 따라 활약했다. 조조와 대립하여 동관 전투를 치렀으나 패배하여 서융으로 달아났다. 이후 유비에게 귀순하여 평서장군이 되었으며, 유비가 한중왕이 되자 좌장군에 임명되었다. 팽양 사건에 연루되었으며, 222년에 4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용맹함은 칭찬받았지만, 행동과 도덕성은 비난받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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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마초 |
|---|---|
| 로마자 표기 | Ma Chao |
| 자 | 맹기 |
| 로마자 표기 | Mengqi |
| 별명 | 금마초 |
| 출생 | 176년 |
| 출생지 | 섬서성싱핑 시 |
| 사망 | 222년 (46세) |
| 사인 | 병사 |
| 국적 | 후한 → 촉한 |
| 씨족 | 부풍 마씨 |
| 최종 계급 | 표기장군 |
|---|---|
| 봉호 | 태향후 |
| 역임 관직 | 독군종사 편장군 정서장군 (자칭) 겸 병주목 (자칭) 평서장군 좌장군 표기장군 겸 양주목 |
| 아버지 | 마등 |
|---|---|
| 배우자 | 양씨 동씨 |
| 자녀 | 마추 마승 유리의 아내 최소 1명 이상의 자녀 |
| 친척 | 마대(종제) |
| 주요 소속 | 마등 독립 세력 장로 유비 |
|---|
| 주요 전투 | 동관 전투 기성 전투 한중 공방전 |
|---|---|
| 적수 | 염행 조조 허저 양부 |
-
싱핑시 출신 -
공손술
공손술은 전한 시대 인물로, 신나라 멸망 후 촉 지역에서 세력을 키워 성가를 건국하고 황제를 칭했으며, 후한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성가가 멸망했다. -
촉한의 향후 -
제갈량
제갈량은 삼국 시대 촉한의 정치가이자 전략가로, 유비의 삼고초려로 촉한에 합류하여 승상이 되었고, 섭정으로서 남정을 통해 촉한의 기반을 다졌으며, 북벌을 통해 위나라를 공격했으나 실패했으며, 법치주의와 인재 등용을 중시하고 경제 정책을 통해 국력을 강화했다. -
촉한의 향후 -
장비 (삼국지)
장비는 후한 말 삼국시대 촉한의 장군으로 유비, 관우와 도원결의를 맺고 유비를 도와 촉한 건국에 공을 세웠으나 부하에게 암살당했으며, 용맹함과 과격한 성품으로 널리 알려져 용맹한 장수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
촉한의 표기장군 -
이엄
유비 사후 제갈량과 함께 유선을 보좌하는 고명대신가 되었으나, 군량 보급 실패를 은폐하려다 발각되어 면직당하고 유배된 후 제갈량의 사망 소식을 듣고 병사한 촉한의 관료이자 장군이다. -
촉한의 표기장군 -
오반 (삼국지)
오반은 삼국시대 촉한의 장수로, 유비 시대에 영군을 지냈고 이릉 전투와 제갈량의 북벌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으며, 유선 시대에는 표기장군, 가절, 면죽후에 이르렀다.
2. 생애
마초는 사례 우부풍 무릉현(茂陵縣) 사람으로, 후한 복파장군 마원의 후손이자 마등의 장남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건장했으며, 아버지 마등은 정서장군으로서 관서 지역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한 세력가 중 한 명이었다. 마등의 아버지 마평(馬平)은 환제 치세 동안 천수군에서 무관으로 복무하다 관직을 잃은 후 이 지역의 강족 사이에서 살며 강족 여성과 결혼하여 아들 마등을 낳았다.
건안 초, 마등이 양주에서 진서장군(鎭西―) 한수와 전쟁을 벌였다. 이때 한수의 장수 염행과 마초가 서로 겨루었는데, 염행이 모로 마초를 찌르려 했으나 모가 부러졌다. 염행은 부러진 모로 마초의 목을 가격해 마초는 죽을 뻔했다. 이후 사례교위 종요가 관중으로 부임해 한수와 마등을 화해시켰다.
202년, 원담·원상 형제가 곽원과 고간을 보내 하동군을 공격했다. 마초는 종요의 독군종사(督軍從事)가 되어 토벌을 도왔다. 평양현(平陽縣)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마초는 유시에 맞은 다리를 자루로 싸매면서까지 분전하여 적을 격파했다. 곽원의 머리는 마초의 부장 방덕이 베었다. 마초는 서주자사를 거쳐 간의대부(諫議大夫)에 임명되었으나 실제 부임하지는 않았다.
208년, 마등은 위위를 받고 조정으로 들어갔다. 마초는 편장군(偏將軍)에 도정후(都亭侯)를 받고 마등의 세력을 통솔하게 되었다. 동생 마휴와 마철도 각기 봉거도위(奉車都尉)와 기도위에 임명되어 가족들과 함께 업으로 이주하고, 마초만이 남았다.
211년 3월(음력), 조조가 장로가 다스리던 한중으로 군을 움직이자, 관중십장은 자신들을 노리는 것이 아닌지 의심했다. 마초는 한수에게 “종요가 저더러 장군을 치라고 했을 정도로 관동 사람들은 믿을 게 못 됩니다. 저는 아버지를 버리고 장군을 아버지로 여기겠으니 장군도 자식을 포기하고 저를 자식처럼 대하십시오.”라며 설득하였다. 결국 양추, 이감, 성의 등 관중십장은 동시에 군을 일으켜 동관으로 진군하였다.
관서군은 긴 모를 능숙히 다루는 정예 강군이었다. 조인은 싸움에 응하지 않고 수비만 굳혔다. 그해 가을, 조조가 직접 동관에 전력을 집중하자, 관서군도 황하 서쪽의 병력을 동관으로 집결시켰다. 이에 조조는 서황과 주령에게 명하여 포판진(蒲阪津, 하동군 포판현 소재)을 기습 점거하게 하고, 이어서 본대도 황하 북쪽으로 도하시켰다. 마초는 만여 명의 병력으로 조조군을 공격했으나, 허저가 조조를 호위하고 정비가 풀어놓은 소와 말에 군사들이 정신이 팔려 조조를 놓치고 말았다. 조조군이 황하 서안을 확보하면서 관서군은 위구(渭口)로 물러났고, 조조는 위수로 진출하여 남쪽에 교두보를 마련하였다. 관서군도 위수 남쪽으로 이동하였다.
9월, 마초는 조조군이 강을 건너는 것을 기병으로 저지했다. 강가에는 모래가 많아 조조군은 보루를 쌓지 못했는데, 누규가 ‘날씨가 차니 모래에 물을 붓자’고 하여 하룻밤 만에 위수의 남안에 성을 축조하고는 기어이 넘어왔다. 마초 등이 수차례 공격했지만 조조군은 응전하지 않았다. 관서군은 조조에게 자신들의 영토만 보전해준다면 강화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 과정에서 한수·마초가 조조와 필마단기로 회담하였다. 마초는 자신의 힘을 믿어 조조를 붙잡을 생각이었는데 허저가 조조 곁에서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고 있었기에 실행하지 않았다.
조조는 가후의 계책을 활용해 관서군의 요구를 들어주는 척하면서 그 사이를 멀어지게 하였다. 조조는 한수의 아버지와 같은 해에 효렴으로 천거됐으며, 한수와는 동년배이기도 하였다. 한수의 요청에 서로 회담하면서도 군사에 관한 일은 꺼내지 않고 사사로이 담소만 나누었다. 파한 후 마초 등 관중십장이 한수에게 조조가 무슨 말을 했냐고 물었다. ‘별 말 없었다’는 대답에 의심이 생겨났다. 다른 날 조조가 한수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고치고 지운 흔적이 많아 마치 한수가 그런 것처럼 보인지라 관중십장의 의심은 더욱 커졌다. 마침내 조조가 벌인 회전에서 대패하여 마초는 서융으로 달아났다.
장로를 의지하였다. 장로는 마초를 도강좨주(都講祭酒)로 삼고 자신의 딸을 주려 했으나, '피붙이도 사랑하지 않는 자가 다른 이를 사랑할 수 있겠냐'는 이야기가 나와 그만두었다. 정월 초하루, 첩 동씨(董氏)의 동생 동종(董种)이 장수를 빌자 가슴을 치고 피를 토하며 “온 집안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같은 운명을 맞았는데 새해를 경축하겠는가!”라며 애통해하였다. 214년, 장로에게 병사를 받아 다시 기산을 공격하였으나, 하후연이 재가도 받지 않고 재빠르게 원군으로 출동하였다. 그 선발대 장합의 군세를 보고는 싸우지 않고 철수하였다.
214년경, 유비는 익주를 차지하기 위해 익주 자사 유장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때 마초는 장로를 불신하고 그가 큰 업적을 이룰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여 유비에게 투항할 계획을 세웠다. 양백 등 장로의 장수들은 마초를 싫어했다. 유비가 성도에서 유장을 포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마초는 유비에게 비밀 서신을 보내 자신을 섬기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유비는 마초의 서신을 받고 기뻐하며 "익주는 내 것이다."라고 외쳤다. 유비는 이회를 보내 마초를 만나 군수 물자와 추가 병력을 제공했고, 마초는 무도군을 통해 촉나라로 들어갔다. 그 후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성도 북쪽으로 가서 포위에 합류했다. 마초가 성도 아래에 주둔하니 성은 두려움에 떨었고, 마초가 도착한 지 10일 만에 유장은 저항을 포기하고 유비에게 항복하였다. 유비는 마초를 환영하며 평서장군(平西―)에 임명하고 남군 임저현(臨沮縣)을 수비하게 했으며, 작위는 도정후를 유지하였다.
유비에게 망명한 이후 첩 동씨, 아들 마추, 부장 방덕은 장로의 세력에 남아 있었다. 장로가 조조에게 귀순한 이후 조조는 방덕을 본인이 데려갔고 동씨를 염포에게 하사했으며 마추를 장로에게 하사했다. 장로는 마추를 참수했고, 염포는 동씨를 자신의 첩으로 삼았다. 방덕은 조위의 장수가 되어 훗날 관우와 맞서게 되었다.
유비 휘하의 관리였던 팽양은 성도를 떠나 강양으로 새로운 임무를 수행하려 할 때, 마초를 방문하여 "당신은 바깥에 있고 저는 안에 있으니, 천하는 평정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마초는 최근 유비의 군대에 합류했고, 종종 문제가 생길까 두려워했다. 팽양의 말을 듣고 그는 팽양이 유비를 상대로 한 쿠데타에 참여하라고 요구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침묵을 지키며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팽양이 떠난 후, 마초는 몰래 팽양을 고발했고, 결국 팽양은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마초는 222년에 47세(세는나이 기준)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죽기 전에 유비에게 편지를 써서 "내 가족 200명 이상이 조조에게 살해당했습니다. 이제 사촌 마대만 남았는데, 그가 우리 가문의 대를 이을 것입니다. 그를 폐하께 맡기니, 이 말 외에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2.1. 가문 배경
사례 우부풍 무릉현(茂陵縣, 현재의 산시성 싱핑시 북동쪽) 사람이다. 후한의 복파장군 마원의 후손이자 마등의 장남으로 어렸을 때부터 건장하였다. 아버지 마등은 정서장군으로서 관서 지역에서 독자 세력을 구축한 세력가 중 한 명이었다. 마등의 아버지인 마평(馬平)은 환제 치세 동안 천수군에서 무관으로 복무했다. 마평은 관직을 잃은 후 이 지역의 강족 사이에서 살며 강족 여성과 결혼하여 아들 마등을 낳았다.
건안 초, 마등이 양주에서 진서장군(鎭西―) 한수와 전쟁을 벌였다. 한수의 장수 염행과 마초는 서로 이름이 났기에 겨루었다. 염행이 모로 마초를 찌르려 했는데 모가 부러졌다. 염행은 당황하지 않고 부러진 모로 마초의 목을 가격해 마초는 죽음의 문턱을 다녀왔다. 사례교위 종요가 관중으로 부임해 한수와 마등을 화해시켰다.
202년 원담·원상 형제가 곽원과 고간을 보내 하동군을 공격했다. 마초는 종요의 독군종사(督軍從事)가 되어 그 토벌을 도왔다. 평양현(平陽縣)에서 맞붙어 유시에 맞은 다리를 자루로 싸매면서까지 분전한 끝에 격파하였다. 곽원의 머리는 마초의 부장 방덕이 취하였다. 이윽고 서주자사를 거쳐 간의대부(諫議大夫)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는 않았다. 208년 마등은 위위를 받고 조정으로 들어갔다. 마초가 편장군(偏將軍)에 도정후(都亭侯)를 받고 마등의 세력을 통솔하였다. 동생 마휴와 마철도 각기 봉거도위(奉車都尉)와 기도위에 임명되어 가족들과 업으로 이주하고 마초만이 남았다.
2.2. 초기 경력
마초는 사례 우부풍 무릉현(茂陵縣) 사람으로, 후한의 복파장군 마원의 후손이자 마등의 장남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건장했으며, 아버지 마등은 정서장군으로서 관서 지역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한 세력가 중 한 명이었다.
건안 초, 마등이 양주에서 진서장군(鎭西―) 한수와 전쟁을 벌였다. 이때 한수의 장수 염행과 마초가 서로 겨루었는데, 염행이 모로 마초를 찌르려 했으나 모가 부러졌다. 염행은 당황하지 않고 부러진 모로 마초의 목을 가격해 마초는 죽음의 문턱을 다녀왔다. 이후 사례교위 종요가 관중으로 부임해 한수와 마등을 화해시켰다.
202년, 원담·원상 형제가 곽원과 고간을 보내 하동군을 공격했다. 마초는 종요의 독군종사(督軍從事)가 되어 토벌을 도왔다. 평양현(平陽縣)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마초는 유시에 맞은 다리를 자루로 싸매면서까지 분전하여 적을 격파했다. 곽원의 머리는 마초의 부장 방덕이 베었다. 마초는 서주자사를 거쳐 간의대부(諫議大夫)에 임명되었으나 실제 부임하지는 않았다.
208년, 마등은 위위를 받고 조정으로 들어갔다. 마초는 편장군(偏將軍)에 도정후(都亭侯)를 받고 마등의 세력을 통솔하게 되었다. 동생 마휴와 마철도 각기 봉거도위(奉車都尉)와 기도위에 임명되어 가족들과 함께 업으로 이주하고, 마초만이 남았다.
197년, 군벌 조조가 종요를 사예교위(司隷校尉)로 임명하여 관중 지역을 지키게 했다. 종요는 마등과 한수에게 편지를 써서 한 조정에 복종하는 것의 이점과 그렇지 않은 경우의 부정적인 결과를 설명했다. 조조가 승상이 되었을 때, 마초를 채용하여 한 정부에서 일하게 하고 싶었지만 마초는 거절했다.
2.3. 조조와의 대립
211년 3월(음력), 조조가 장로가 다스리던 한중으로 군을 움직이자, 관중십장은 자신들을 노리는 것이 아닌지 의심했다. 마초는 한수에게 “종요가 저더러 장군을 치라고 했을 정도로 관동 사람들은 믿을 게 못 됩니다. 저는 아버지를 버리고 장군을 아버지로 여기겠으니 장군도 자식을 포기하고 저를 자식처럼 대하십시오.”라며 설득하였다. 결국 양추, 이감, 성의 등 관중십장은 동시에 군을 일으켜 동관으로 진군하였다.
관서군은 긴 모를 능숙히 다루는 정예 강군이었다. 조인은 싸움에 응하지 않고 수비만 굳혔다. 그해 가을, 조조가 직접 동관에 전력을 집중하자, 관서군도 황하 서쪽의 병력을 동관으로 집결시켰다. 이에 조조는 서황과 주령에게 명하여 포판진(蒲阪津, 하동군 포판현 소재)을 기습 점거하게 하고, 이어서 본대도 황하 북쪽으로 도하시켰다. 마초는 만여 명의 병력으로 조조군을 공격했으나, 허저가 조조를 호위하고 정비가 풀어놓은 소와 말에 군사들이 정신이 팔려 조조를 놓치고 말았다. 조조군이 황하 서안을 확보하면서 관서군은 위구(渭口)로 물러났고, 조조는 위수로 진출하여 남쪽에 교두보를 마련하였다. 관서군도 위수 남쪽으로 이동하였다.
2.3.1. 동관 전투
211년, 조조는 종요와 하후연을 파견하여 한중의 장로를 공격하게 했다. 그들은 가는 길에 관중 지역을 통과해야 했다. 마초는 조조가 자신을 공격할 계획이라고 의심하여 한수와 동맹을 맺었다. 그는 한수에게 "전에 종요가 당신을 해치라고 명령했다. 이제 관동(동관 동쪽) 사람들은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제 나는 아버지를 버리고 당신을 아버지로 인정하려 한다. 당신도 당신의 아들을 버리고 나를 당신의 아들처럼 대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마초는 또한 양추, 이간(李堪), 성의(成宜), 후선(侯選), 정은(程銀), 장횡(張橫), 양흥(梁興), 마완(馬玩) 등과 연락하여 10만 명의 연합군을 결성하여 동관(현재의 동관현, 섬서성)을 공격했다.
조조는 군대를 이끌고 동관으로 가서 마초와 연합군을 공격하여 동관 전투가 벌어졌다. 양측이 몇 차례 교전을 벌인 후 조조는 마초와 한수와 회담을 가졌다. 마초는 자신의 강력한 힘을 믿고 만나면 즉시 돌진하여 조조를 사로잡을 의도를 품고 있었다. 그러나 조조의 측근 중 한 명인 허저가 그를 노려보자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조조는 나중에 가후의 계략을 따라 마초와 한수 사이에 불화를 심어 서로 의심하게 만들었다. 마초와 한수 사이의 적대감을 이용하여 조조는 서북부 군벌을 공격하여 격파했다.
앞서 조조의 군대가 포반(蒲阪; 현재의 대려현 동쪽, 섬서성)에 있었고 위수를 건너 서쪽으로 향할 계획이었을 때, 마초는 한수에게 "우리는 위수 북쪽에서 그들을 막아야 한다. 20일 안에 강 동쪽의 보급 창고가 고갈될 것이고, 그 후 그들은 반드시 퇴각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한수는 그의 생각을 거부하며 "우리는 군대를 강에서 적과 교전하도록 보내야 한다. 이것이 더 직접적이지 않은가?"라고 말했다. 조조는 마초의 계획을 듣고 "저 어린 말이 죽지 않으면 제대로 된 장례를 치를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2.3.2. 관중에서의 전투
9월, 마초는 조조군이 강을 건너는 것을 기병으로 저지했다. 강가에는 모래가 많아 조조군은 보루를 쌓지 못했는데, 누규가 ‘날씨가 차니 모래에 물을 붓자’고 하여 하룻밤 만에 위수의 남안에 성을 축조하고는 기어이 넘어왔다. 마초 등이 수차례 공격했지만 조조군은 응전하지 않았다. 관서군은 조조에게 자신들의 영토만 보전해준다면 강화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 과정에서 한수·마초가 조조와 필마단기로 회담하였다. 마초는 자신의 힘을 믿어 조조를 붙잡을 생각이었는데 허저가 조조 곁에서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고 있었기에 실행하지 않았다.
조조는 가후의 계책을 활용해 관서군의 요구를 들어주는 척하면서 그 사이를 멀어지게 하였다. 조조는 한수의 아버지와 같은 해에 효렴으로 천거됐으며, 한수와는 동년배이기도 하였다. 한수의 요청에 서로 회담하면서도 군사에 관한 일은 꺼내지 않고 사사로이 담소만 나누었다. 파한 후 마초 등 관중십장이 한수에게 조조가 무슨 말을 했냐고 물었다. ‘별 말 없었다’는 대답에 의심이 생겨났다. 다른 날 조조가 한수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고치고 지운 흔적이 많아 마치 한수가 그런 것처럼 보인지라 관중십장의 의심은 더욱 커졌다. 마침내 조조가 벌인 회전에서 대패하여 마초는 서융으로 달아났다.
2.4. 장로 휘하
장로를 의지하였다. 장로는 마초를 도강좨주(都講祭酒)로 삼고 자신의 딸을 주려 했으나, '피붙이도 사랑하지 않는 자가 다른 이를 사랑할 수 있겠냐'는 이야기가 나와 그만두었다. 정월 초하루, 첩 동씨(董氏)의 동생 동종(董种)이 장수를 빌자 가슴을 치고 피를 토하며 “온 집안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같은 운명을 맞았는데 새해를 경축하겠는가!”라며 애통해하였다. 214년, 장로에게 병사를 받아 다시 기산을 공격하였으나, 하후연이 재가도 받지 않고 재빠르게 원군으로 출동하였다. 그 선발대 장합의 군세를 보고는 싸우지 않고 철수하였다.
마초는 기산 전투에서 패배한 후 한중군으로 돌아와 장로에게 의탁했고, 장로는 딸을 마초에게 시집보내려 했으나, 측근 중 한 명이 "가족과 친척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라며 반대하여 이 계획을 취소했다.
어느 해 설날, 한중으로 피신해 온 마초의 친척이 그를 찾아왔다. 마초는 가슴을 치며 피를 토하고 친척에게 "백 명이 넘는 대가족이 하루아침에 같은 운명을 맞이했는데, 이제 우리 둘만 서로에게 인사를 나누게 되었구나?"라고 말했다.
마초는 끊임없이 장로에게 군사를 주어 양주를 공격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장로는 이에 동의했지만, 마초는 이 원정에서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장로 휘하의 장수인 양백은 마초의 능력을 질투하여 그를 해치려 했다. 마초는 이 소식을 듣고 무도 (현재의 간쑤성 룽난시 일대)에서 탈출하여 그 지역의 저족과 함께 살았다.
2.5. 유비에게 귀순
214년경, 유비는 익주를 차지하기 위해 익주 자사 유장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때 마초는 장로를 불신하고 그가 큰 업적을 이룰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여 유비에게 투항할 계획을 세웠다. 양백 등 장로의 장수들은 마초를 싫어했다. 유비가 성도에서 유장을 포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마초는 유비에게 비밀 서신을 보내 자신을 섬기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유비는 마초의 서신을 받고 기뻐하며 "익주는 내 것이다."라고 외쳤다. 유비는 이회를 보내 마초를 만나 군수 물자와 추가 병력을 제공했고, 마초는 무도군을 통해 촉나라로 들어갔다. 그 후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성도 북쪽으로 가서 포위에 합류했다.
마초가 성도 아래에 주둔하니 성은 두려움에 떨었고, 마초가 도착한 지 10일 만에 유장은 저항을 포기하고 유비에게 항복하였다. 유비는 마초를 환영하며 평서장군(平西―)에 임명하고 남군 임저현(臨沮縣)을 수비하게 했으며, 작위는 도정후를 유지하였다.
유비에게 망명한 이후 첩 동씨, 아들 마추, 부장 방덕은 장로의 세력에 남아 있었다. 장로가 조조에게 귀순한 이후 조조는 방덕을 본인이 데려갔고 동씨를 염포에게 하사했으며 마추를 장로에게 하사했다. 장로는 마추를 참수했고, 염포는 동씨를 자신의 첩으로 삼았다. 방덕은 조위의 장수가 되어 훗날 관우와 맞서게 되었다.
2.6. 팽양 사건
유비 휘하의 관리였던 팽양은 성도를 떠나 강양으로 새로운 임무를 수행하려 할 때, 마초를 방문하여 "당신은 바깥에 있고 저는 안에 있으니, 천하는 평정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마초는 최근 유비의 군대에 합류했고, 종종 문제가 생길까 두려워했다. 팽양의 말을 듣고 그는 팽양이 유비를 상대로 한 쿠데타에 참여하라고 요구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침묵을 지키며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팽양이 떠난 후, 마초는 몰래 팽양을 고발했고, 결국 팽양은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2.7. 사망
馬超중국어는 222년에 47세(세는나이 기준)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사망 원인은 역사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는 죽기 전에 유비에게 편지를 써서 "내 가족 200명 이상이 조조에게 살해당했습니다. 이제 사촌 마대만 남았는데, 그가 우리 가문의 대를 이을 것입니다. 그를 폐하께 맡기니, 이 말 외에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유선은 260년 10월 또는 11월, 아버지 유비의 뒤를 이어 마초에게 시호인 "위후"(威侯)를 추증했다.
3. 평가
마초는 뛰어난 힘으로 유명했으며, 북방의 민족들 사이에서 큰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무예가 뛰어나지 않다는 평가도 있다. 염행과의 일기토에서 단 1합 만에 패하고 중상을 입었다는 기록이 유일하며, 당시 만 15세를 성인으로 인정하던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면 마초의 무예가 약했다는 평가를 피하기 어렵다.
* 조창은 살아있는 호랑이의 입을 맨 손으로 찢어서 죽였다.
* 손견은 혼자 도적떼 한가운데로 뛰어들어 토벌하고 그 중 한 명을 사살했다.
* 손책은 태사자와 일기토를 벌여 무승부를 기록했고, 엄백호를 토벌하여 산월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으며, 엄여를 단숨에 죽였다.
* 문앙은 사마사의 군대를 요격해서 전멸 직전까지 몰고 갔으며, 이 때문에 사마사는 지병이 악화되어 사망했다.
* 곽거병은 흉노를 거의 멸망 직전까지 만들어 놓았다.
진수는 《삼국지》에서 마초를 "오직 이민족(서융)과의 관계와 그의 용맹함에 의존했지만, 그의 일족 전체를 멸망시켰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 그러나 그는 위험에서 벗어나 마침내 평화를 얻을 수 있었는데, 그의 모든 행동이 그를 더 나은 운명으로 이끌었을까?"라고 평가했다.
관우는 제갈량에게 누가 마초와 겨룰 수 있는지 편지를 보냈는데, 제갈량은 "맹기(마초)는 문무에 능하다. 그는 사납고 맹렬하며, 당대의 영웅이다. 그는 영포와 팽월에 비견될 수 있다. 그는 장비와 겨룰 수 있지만, 비할 데 없는 수염에는 미치지 못한다."라고 답했다.비할 데 없는 수염중국어은 당시 아름답다고 여겨진 수염을 자랑했던 관우를 지칭했다.
양부는 마초가 위강을 살해하고 양주를 강제로 점령한 것에 대해 "마초는 마등을 배신하고, 헌제에게 반역했으며, 우리 주의 관리들을 학살했다. [...] 마초는 강하지만 사악하다. 그는 도덕적으로 약하며 유혹과 속임수에 취약하다."라고 비판했다. 양부와 다른 이들은 마초를 상대로 음모를 꾸며 그를 양주에서 몰아냈고, 마초는 이성(歷城)으로 쳐들어가 강서의 어머니를 사로잡아 죽였다.
양희는 《계한보신찬》(季漢輔臣贊)에서 마초를 "경예장군(驃騎將軍; 마초)은 일어나 동맹을 맺고, 삼진에서 봉기를 일으켜 강과 통관을 정복했다. 그는 그의 추종자들이 동의하든 그렇지 않든 조정에 반역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적이 그와 그의 부하들 사이에 불화를 조장할 기회를 제공하여 그의 가족과 세력이 파멸되었다. 그는 도덕과 윤리에 반했지만, 결국 용과 봉황에 의존해야 했다."라고 평가했다.탁봉반룡중국어(託鳳攀龍)은 귀족이나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사람들에게 크게 의존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성어이다.
진나라 역사가 손성은 마초가 그의 아버지 마등을 배신한 것을 다른 극악무도하고 비인간적인 역사적 사례와 비교했다.
그 외의 평가들은 다음과 같다.
* 순욱: 원소와의 대결 이전, 조조에게 "관중의 장수들은 10명이나 되지만, 결속하지 못하며, 다만 한수와 마초가 가장 강합니다"라고 평했다.
* 주유: 마초와 한수를 조조의 후환으로 보고, 210년에 익주 공략에 대해 "손유와 함께 촉을 취하고, 촉을 얻으면 한중을 병합하여 분위장군을 그 땅에 머물게 하여 지키게 하고, 마초와 친분을 맺어 연합하려 합니다"라고 손권에게 제안했다.
* 왕상: "용감하나 어질지 못하고, 이익을 보고 의를 생각하지 않는 인물이니, 입술과 이빨이 될 수 없습니다"라고 평하며 마초와의 연맹에 반대했고, "익주는 그 국토가 아름답고 백성이 풍요로우며, 귀중한 물품도 생산되는 곳이므로, 교활한 자들이 노리는 곳이며, 마초 등은 그 때문에 익주에 접근합니다. 만약 그를 가까이 한다면, 호랑이를 길러 스스로 재앙을 남기는 꼴이 될 것입니다"라고 유장에게 간했다.
* 양부: 조조에게 올린 간언에서 "마초는 한신·경포와 같은 무용을 지녔고, 강호의 마음을 매우 얻고 있습니다. 서주(양주)는 그를 두려워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또한 "아버지에게 등을 돌리고 주군을 배반했으며, 주자(자사)를 학살했다", "강하지만 불의하다"고 비난했다.
* 제갈량: 관우에게 보낸 편지에서 "맹기는 문무의 재능을 겸비하고, 남들보다 뛰어난 웅렬함을 지녔으며, 당대의 걸출한 인물로서 경포·팽월과 같은 무리입니다"라고 평했다. 또한 그 서신에서 마초를 장비와 동렬로 취급했지만, 황충을 후장군에 임명하려던 유비에게는 "황충의 명망은 관우·마초와 견줄 수 없습니다"라고 관우와 함께 언급했다.
* 양희: 『계한보신찬』에서, "표기장군(마초)은 분기하여 합종연횡했다. 삼진(관중)에서 일을 시작하여, 황하와 동수를 점유했다. 생각은 조정을 종주로 삼았으나, 때로는 이반하고 때로는 동맹을 맺었으며, 적이 그 틈을 틈타 일족은 멸망하고 군세도 잃었다. 도리에 어긋나고 덕에 반했지만, 용과 봉(유비)에게 몸을 의탁했다"라고 평했다.
4. 일화
유비가 마초를 후하게 대우하자, 마초는 유비를 낮추어 불렀다. 이를 관우와 장비가 불쾌하게 여겼다. 어느 날 마초가 유비를 만났을 때, 관우와 장비가 칼을 차고 유비의 양옆을 지키고 있었다. 마초는 자신의 무례함을 깨닫고 태도를 바꾸었다고 한다.
하지만 배송지는 이에 대해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배송지는 마초가 어려운 상황에서 유비에게 의탁하여 작위를 받았는데, 어찌 오만하게 유비의 자를 부를 수 있었겠느냐고 반문했다. 또한 유비가 촉으로 들어갈 때 관우는 형주를 지키고 있었으므로, 익주에 온 적이 없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관우가 마초의 투항 소식을 듣고 제갈량에게 서신을 보내 마초의 재능을 물어본 것이지, 산양공재기(이 책)의 내용처럼 관우가 장비와 함께 서 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배송지는 마초가 유비의 자를 불렀다면, 그것은 이치에 맞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설령 관우가 마초를 죽이려 했다 하더라도 마초는 듣지 못했을 것이며, 단지 두 사람이 서 있는 것을 보고 자신이 유비의 자를 불렀기 때문이라고 깨닫고 '관우, 장비에게 죽을 뻔했다'고 말했을 리 없다고 비판했다. 배송지는 이러한 내용이 이치에 맞지 않아 분노스럽다고까지 표현하며, 원위와 악자 등이 기록한 내용이 추잡하고 헛되며 그릇된 것이 많다고 비판했다.
5. 가족 관계
마초의 작위인 태향후는 아들 마승이 물려받았다. 마초의 딸은 유비의 아들 유리와 결혼했다.
마초는 최소 두 명의 부인이 있었다. 첫 번째 부인은 양씨(楊氏)로, 동관 전투 이후 양주를 장악했을 때 함께 있었다. 양씨는 마초에게 최소 한 명의 자식을 낳아준 것으로 보이는데, 《삼국지》에 따르면 조거(趙衢), 윤봉 등이 반란을 일으켜 양주에서 마초를 몰아낼 때 마초의 가족(아내와 자녀)을 살해했다. 마초의 두 번째 부인 동씨(董氏)는 아들 마추를 낳았다. 마초가 장로에게서 탈출하여 유비에게 귀순했을 때, 한중군에 남겨두었다. 장로는 조조에게 항복했고, 조조는 동씨를 장로의 참모였던 염포에게 주었고, 마추는 장로에게 주었다. 장로는 마추를 직접 죽였다. 마승과 딸의 어머니가 누구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양씨나 동씨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대는 촉한에서 장수로 복무했으며, 최고 직책은 진북장군이었고, 진창후로 봉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