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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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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양습은 위나라의 관료로, 조조, 조비, 조예 시대를 거치며 활약했다. 조조가 사공이 되자 장현장으로 임명되었고, 해서, 하비 등의 현령을 역임하며 치적을 쌓았다. 병주 자사로 임명되어 흉노족을 안정시키고, 조비 시대에도 병주 자사로 재임하며 변방 경영에 뛰어난 공을 세웠다. 228년 대사농으로 임명되었으며, 청렴한 생활로 명제의 칭찬을 받았다. 230년에 사망했으며, 아들 양시가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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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습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량시
원어 이름梁習
자우 (子虞)
출생지예주진군 자현
사망일230년
직업관리
작위신문정후 (申門亭侯)
관직
대사농228년 ~ 230년
군주조예
병주자사220년 ~ 228년
군주조비
임명 시기건안 11년 (206년)
임명 종료 시기건안 18년 (213년)
군주헌제
승상조조 (208년부터)
가족 관계
자녀량시

2. 생애

양습은 의 관리로, 주로 병주 지역의 안정과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초기에는 군(郡)의 강기(綱紀)였으나, 조조사공이 되면서 발탁되어 여러 현의 현령을 지내며 행정 능력을 인정받았다.[1] 조조고간을 평정하고 병주를 장악한 후, 양습은 병주 자사 대행으로 임명되어 혼란스러운 지역 상황을 수습하는 중책을 맡았다.[1] 그는 남흉노 세력을 안정시키고 할거하던 호족들을 제압하여 변경의 평화를 회복시켰으며, 농업 장려와 법질서 확립에도 힘썼다.[1] 이러한 공으로 조조에게 관내후 작위를 받고 정식 자사로 임명되었으며, 그의 통치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1]

조비 시대에도 병주 자사로서 선비족 토벌 등 변경 안정에 힘썼고, 뛰어난 통치력을 인정받았다.[1] 조예 시대에는 중앙으로 소환되어 대사농에 임명되었다.[1] 양습은 20년 이상 지방관으로 재직하면서도 청렴함을 잃지 않아 조예로부터 신임과 후한 대우를 받았다.[1] 230년에 사망하였고, 아들 양시가 뒤를 이었다.[1]

소설 『삼국지연의』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2. 1. 초기 활동

군은 강기(綱紀) 출신이었으나, 조조사공이 되면서 그를 불러들여 장현장(長縣長)으로 삼았다.[1] 이후 승씨(乘氏), 해서(海西), 하비(下邳) 등 여러 현의 현령을 역임하며 가는 곳마다 뛰어난 치적을 쌓았다.[1]

해서현령으로 있을 때, 해서현과 회포(淮浦)의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도위(都尉) 위미(魏彌)와 함께 광릉군(廣陵郡)의 강기였던 서선을 구출하기도 했다(『삼국지』 위지 「서선전」).

이후 중앙으로 자리를 옮겨 서조령사(西曹令史)가 되었고, 곧 서조속(西曹屬)으로 승진했다.[1] 이때 동료 왕사(王思)가 조조의 미움을 사 처벌받게 될 위기에 처하자, 마침 자리에 없던 왕사를 대신하여 자진 출두했다. 뒤늦게 소식을 듣고 달려온 왕사가 자신의 죄를 자백하며 처형을 자청하자, 조조는 두 사람의 의로운 행동에 감탄하여 그들을 의사(義士)라고 칭찬했다.[1]

조조고간을 물리치고 병주를 평정한 후, 양습은 별부사마(別部司馬)로서 병주 자사의 직무를 대행하게 되었다.[1] 당시 병주는 고간의 난으로 인해 남흉노가 세력을 떨치고 있었고, 관리와 백성들은 흉노 부족에게 투항하거나 망명하는 일이 잦았다. 또한, 지역의 무장 호족들이 할거하며 서로 다툼을 벌이는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1]

2. 2. 병주자사 부임과 통치

조조고간을 물리치고 병주를 평정한 후, 양습을 별부사마(別部司馬)로 삼아 병주 자사의 직무를 대행하게 했다. 당시 병주는 고간의 난 여파로 남흉노가 세력을 떨치고 있었으며, 관리와 백성들은 흉노에게로 도망치고, 각지의 호족들이 세력을 다투며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양습은 부임 후 먼저 병주 내의 유력자들을 후하게 대우하며 초빙한 뒤, 이들을 조조의 막부로 천거하는 방식으로 실질적인 영향력을 제거했다. 또한 성인 남성들을 의용병으로 징집하여 조조의 군대에 편입시키고, 그 가족들은 으로 이주시켰는데, 그 수가 수만 명에 달했다. 양습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세력은 무력으로 토벌하여 수천 명의 목을 베고 수만 명을 포로로 잡았다. 이러한 정책으로 선우(單于)는 조조에게 복종하게 되었고, 명왕(名王)이라 불리던 흉노의 지도자들도 평화롭게 지냈으며, 흩어져 있던 부족민(部曲)들은 호적에 편입되어 생업에 종사하게 되었다.

그 결과 병주의 국경 지대는 안정을 되찾았고, 백성들은 다시 농업에 힘쓸 수 있게 되었으며, 법과 질서(금령)가 바로 서게 되었다. 양습이 천거한 상림, 양준, 왕릉, 왕상, 순위 등은 모두 후에 높은 관직에 올랐다. 조조는 양습의 공적을 높이 평가하여 관내후의 작위를 내리고 정식 병주 자사로 임명했다. 당시 원로들은 자신들이 겪어본 자사들 중 양습만큼 뛰어난 인물은 없었다고 칭찬했다.

213년병주기주가 통합되자, 양습은 의랑(議郎) 겸 서부 도독 종사(都督從事)가 되어 기존에 자신이 관리하던 병주의 군사 및 행정 업무를 계속 총괄했다. 그는 상당(上黨) 지역에 사신을 보내 의 궁궐 건축에 필요한 큰 목재를 징발하도록 지시했다. 또한, 둔전도위(屯田都尉) 두 명에게 각각 300명씩 총 600명의 인부를 주어 도로를 따라 콩과 조를 심게 하여, 이동하는 사람과 가축의 식량으로 사용하도록 조조에게 상표(上表)하기도 했다.

양습은 병주 지역에서 약탈을 일삼아 백성들을 괴롭히던 선비족의 지도자 육연(薁鞬)을 참수하여 그 위세를 꺾었다. 217년에는 오환족의 노석(魯昔)이 반란을 일으키자, 선비족을 이용하여 이를 성공적으로 토벌하기도 했다. 선우가 조정에 입조하고 서북쪽 국경이 안정된 것은 양습의 공으로 평가받았다.

조비(문제)가 황제로 즉위하여 병주가 다시 설치되자, 양습은 다시 병주 자사로 임명되었고, 신문정후(申門亭侯)로 봉해져 식읍 100호를 받았다. 그의 통치는 천하 제일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225년에는 선비족의 유력자 가비능을 토벌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2. 3. 병주와 기주 합병 이후

213년, 병주기주가 합병되자 양습은 의랑·서부 도독 종사로 임명되어 기존에 관리하던 부곡을 계속 통솔했다.[1] 그는 상당에 사신을 보내 의 궁궐 건축에 필요한 큰 목재를 징발하도록 지시했다.[1] 또한, 둔전도위 2명을 임명하고 인부 600명을 동원하여 도로를 따라 콩과 조를 심게 하여, 이동하는 사람과 가축의 식량으로 사용하도록 황제에게 상주했다.[1]

이 시기 양습은 병주 지역에서 약탈을 일삼아 백성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선비족의 우두머리 육연을 참수하여 잔당들의 기세를 꺾었다.[1] 217년에는 오환의 노석이 반란을 일으키자, 선비족을 이용하여 이를 성공적으로 토벌하기도 했다(『위략』).[1] 이러한 활동 덕분에 흉노선우조조 정권에 입조하고 서북 변경 지역이 안정되는 데 양습의 공이 컸다고 평가받았다.[1]

조비 (위 문제)가 황제로 즉위한 후 병주가 다시 설치되자, 양습은 다시 병주자사로 임명되었으며, 신문정후로 봉해지고 식읍 100호를 받았다.[1] 이 시기에도 양습의 통치는 천하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1] 225년에는 선비족의 가비능을 토벌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삼국지』 위지 「문제기」).[1]

228년, 조예 (위 명제)에 의해 중앙으로 소환되어 대사농에 임명되었다.[1] 양습은 20년 이상 자사로 재직했음에도 사리사욕을 채우지 않아 집안이 가난했는데, 위 명제는 그의 청렴함과 공적을 높이 평가하여 후하게 대우하고 많은 하사품을 내렸다.[1]

230년에 사망하였고, 아들 양시가 그의 뒤를 이었다.[1]

2. 4. 조비, 조예 시대의 활동

조비가 즉위하여 병주가 다시 설치되자, 양습은 다시 병주 자사로 임명되었고, 신문정후(新門亭侯)로 봉해져 식읍 백 호를 받았다. 그의 병주 통치는 당시 천하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225년, 선비의 부족장 가비능을 토벌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228년, 조예는 양습을 중앙으로 불러들여 대사농에 임명했다. 양습은 20년 넘게 자사로 재직하면서도 사리사욕을 채우지 않고 청렴하게 생활했기에, 명제는 그를 높이 평가하여 후하게 대우하고 하사품을 내리며 공적을 치하했다.

230년에 사망했으며, 아들 양시(梁施)가 뒤를 이었다.

2. 5. 사망

228년, 조예(명제)에게 부름을 받아 대사농으로 임명되었다. 양습은 20년 넘게 자사를 지냈지만 사리사욕을 채우지 않아 청렴하고 가난하게 살았다. 이에 명제는 양습을 높이 평가하여 후하게 대우하고 하사품을 내리며 그 공적을 치하했다.

230년에 세상을 떠났으며, 아들 양시(楊市)가 그의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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