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복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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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엄복동은 일제강점기 시대의 자전거 선수로, 1892년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그는 수많은 자전거 대회에서 우승하며 민중들의 스타로 떠올랐으나, 1922년 대회에서 일본 심판의 판정에 항의하며 우승기를 꺾는 사건으로 영웅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이후 절도 장물사보 혐의로 수감되기도 했으며, 광복 이후에는 불우한 삶을 살다 한국 전쟁 중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자전거는 대한민국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그의 삶은 드라마와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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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복동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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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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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엄복동 |
출생일 | 1892년 6월 20일 |
출생지 | 한성부 중구역 오장방 (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오방동) |
사망일 | 1951년 7월 20일 (59세) |
사망지 | 대한민국 경기도 양주군 이담면 (지금의 경기도 동두천시) |
국적 | 한국인 |
활동 기간 | 1910년 - 1951년 |
직업 | 사이클 선수 |
부모 | 엄선양(부), 김씨 부인(모) |
2. 경력
엄복동은 경기도 진위(현 평택시)의 자전거 가게에서 배달원으로 일하며 자전거를 배웠다. 1910년 자전거 경기 대회, 1913년 4월 13일 경성일보사와 매일신문사가 용산 연병장에서 개최한 자전거 경주 대회 등에서 우승하며 수많은 대회에서 활약하였다. 1918년 장충단공원 경기에서는 빨간 유니폼을 입고 우승하여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켰다.
"떴다 보아라 안창남 비행기, 내려다 보아라 엄복동의 자전거..."라는 유행가가 나올 정도로 조선 민중들의 스타였던 엄복동은 초청 선수로 여러 자전거 대회에서 우승을 휩쓸었다.
1922년 경성시민대운동회 전 조선 자전거 대회에서는 일본 심판들이 날이 저물었다는 이유로 경기를 중단시키는 등 비상식적인 판정을 내렸다. 이에 격분한 엄복동은 우승기를 꺾어 항의했고, 이 사건은 조선인과 일본인 관객 간의 다툼으로 이어질 만큼 엄복동은 조선인들에게 영웅적인 존재였다.
1932년 4월, 40세의 나이로 전 조선 남녀자전거대회 1만m 경주에 참여하여 우승하였다.
2. 1. 삶의 봄
1892년(고종 29년) 한성부(현 서울특별시 중구 오장동 143번지)에서 태어났다.[2] 아버지는 선양이며, 어머니는 김씨라는 것만이 알려져 있다.엄복동은 경기도 진위(현 평택시)의 자전거 가게 일미상회에서 배달점원으로 일하면서 자전거를 배웠다. 1910년 자전거 경기대회, 1913년 4월 13일 경성일보사와 매일신문사가 개최한 자전거 경주대회(용산 연병장)에서 우승하는 등 수많은 자전거 대회에서 활약하였다. 1918년 장충단공원 경기에서도 우승했는데, 당시 엄복동은 빨간 유니폼을 입고 경기하여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켰다.
“떴다 보아라 안창남 비행기, 내려다 보아라 엄복동의 자전거….”라는 유행가가 만들어질만큼 조선 민중들의 스타가 된 엄복동은 자전거 대회에서 초청선수로 참여하여 우승을 휩쓸었다.
1922년 경성시민대운동회에서 개최된 전 조선 자전거 대회에서 우승할 기미를 보이자, 일본 심판들은 날이 저물었다는 빌미로 경기를 중단시키는 등 비상식적인 판정을 내렸다. 이에 격분한 엄복동은 본부석으로 뛰어든 뒤, 우승기를 잡고 꺾어버림으로써 항의했다. 이 일로 일본인 관객과 조선인 관객 사이에서 다툼이 일어났을 정도로 엄복동은 조선인들에게는 영웅이었다.
1932년 4월에도 40세의 나이에 전 조선 남녀자전거대회 1만m 경주에 참여하여 당당히 우승하였다.
2. 2. 범죄 혐의
1926년 엄복동은 리효진이라는 사람이 훔친 자전거를 맡아서 팔아줬다는 혐의(절도장물사보)로 징역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3] 엄복동은 자신이 판 자전거가 훔친 물건인 줄 몰랐다고 주장했으며[4] 항소하였으나 취하했다.[5]1950년에는 자전거를 훔쳐서 입건됐다가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당시 기사에는 그가 양주 회천면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지만 생활이 궁핍해 끼니를 잇기 어려웠다고 기록되어 있다.[6][7]
2. 3. 말년
엄복동의 죽음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8·15 광복 후 엄복동은 집이 없어 동두천, 의정부 일대를 떠돌았으며, 1951년 한국 전쟁 때 동두천의 야산에서 폭격기의 폭격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설이 있다. 한편 엄복동 동상의 현판 정보에 따르면 1952년 7월 20일에 생을 마감한 것으로 쓰여 있다. 둘째 아들을 만나러 가던 중 북한군 비행기에 폭격을 당하여 사망했다는 설도 있다. 집도 있었고 부인과 두 아들이 같이 살았다는 이야기도 있다.당시에는 해방까지 워낙 유명한 사람이었으나 금전적으로 궁핍한 삶을 살았고 한국전쟁까지 비참한 삶을 살았다고 전해지고 있어서 여러 가지 목격담이 많았다.
일부 문헌에서는 부인과 첫째 아들은 전쟁통에 사망을 하였고 둘째 아들은 지금까지도 생사에 대한 정보가 전무하다고 한다.
3. 출전 대회
연도 | 대회명 | 장소 | 결과 |
---|---|---|---|
1910년 | 자전거 경기 | 우승 | |
1913년 4월 13일 | 전조선자전차경기대회 | 용산 일본군 육군연병장 | 우승 |
1913년 4월 27일 | 평양 | ||
1918년 | 자전거 경기 | 장충단 공원 | 우승 |
1920년 5월 2일 | 경성시민대운동회 | 경복궁 | 자전거 부분 우승[8] |
1920년 5월 21일 | 진주 덕진운동장 | ||
1921년 5월 | 춘계 대운동회 | 대구 | 우승[9] |
1921년 9월 | 자전차 운동회 | 논산 | 2등[10] |
1921년 10월 21일 | 자전차 운동댕회 운동회 | 이리 | 우승[11] |
1922년 5월 21일 | 윤업대회 주최 자전차경주대회 | 장충단 | 우승[12] |
1922년 6월 1일 | 전선(全鮮) 자전거 경주 대회 | 평양 | 2등[13] |
1923년 | 전조선자전차경기대회 | 마산 | 우승[14] |
1925년 | 조선팔도자전거대회 | 상주 | 우승 |
1928년 | 전국운수조합대회 | 우승 | |
1932년 | 전조선 남녀 자전거 대회 | 1만미터 경기 우승 |
4. 기념사업
대한사이클연맹은 1977년부터 1999년까지 엄복동을 기념하는 엄복동배 전국사이클경기대회를 열었다.[1] 1986년에는 경기도 의정부시에 엄복동 동상이 세워졌다.[15] 문화재청은 엄복동이 사용한 자전거를 대한민국의 등록문화재 제466호로 지정했다.[1]
4. 1. 엄복동배 전국사이클경기대회
대한사이클연맹은 1977년부터 1999년까지 엄복동을 기념하는 엄복동배 전국사이클경기대회를 열었다.[1]4. 2. 엄복동 동상
1986년 대한사이클연맹의 건의를 받아들여 경기도 의정부시 녹양동 공설운동장 주차장 입구에 동상이 세워졌다.[15] 남산미술원 원장이던 원로조각가 이일영이 조각한 작품으로, 좌대 높이는 2.8m, 동상 높이는 3m의 청동입상이다.4. 3. 엄복동 자전거 (대한민국 등록문화재 제466호)
엄복동이 사용한 자전거는 영국 러지휘트워스(Rudge-Whitworth)사가 1910년에서 1914년 사이에 제작하여 일본에 수출한 것으로, 대한민국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자전거이다. 문화재청은 2010년 8월 24일 이 자전거를 대한민국의 등록문화재 제466호로 지정하였다.[16] 문화재청은 전면 상표 일련번호 '1065274'를 통해 이 자전거가 세계적으로 희귀한 기종임을 확인했다고 밝혔다.엄복동은 1920년 경기 당시 일미상회가 소유하고 있던 이 자전거를 우승 후 증여받아 선수 생활 동안 사용하다 후배에게 물려주었다. 한국 전쟁 때 이 자전거를 물려받은 선수가 자전거를 들쳐메고 피난했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로, 엄복동의 자전거는 한민족의 수난을 함께 한 자전거로 잘 알려져 있다.
이 자전거가 등록문화재로 지정되기까지 하웅용 한국체육대학교 교수의 공이 컸다. 제조 회사가 1930년대 폐업하고 관련 인물들이 모두 세상을 떠난 상황에서, 영국 국립 자전거 박물관의 스콧퍼드 로런스가 생산 시기 확인에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였고, 대한민국 자전거 원로들의 증언을 통해 이 자전거가 실제 엄복동이 사용했던 자전거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현재 이 자전거는 서울특별시 강동구에서 개인이 소장하고 있으며, 사진 속 자전거와 실물의 자전거는 핸들과 페달 모양이 다르다. 대한자전거연맹은 1977년부터 1999년까지 엄복동을 기리는 전국 사이클 대회를 개최했다. 문화재청은 엄복동의 자전거를 한국 근대사 유산으로 지정했다.[1]
4. 3. 1. 주요 제원
5. 대중문화 속 엄복동
참조
[1]
웹사이트
'엄복동 자전거' 근대문화재 된다
http://www.hani.co.k[...]
2010-06-08
[2]
뉴스
"[위원석의 삼위일체]사이클② '자전거 대왕' 엄복동을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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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원석의 삼위일체]사이클② 엄복동, 민족주의자 또는 근대스포츠의 선구자"
https://sports.news.[...]
위원석 칼럼
2019-04-10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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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gwanbo.mois.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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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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