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타임라인 바로가기

에바 페론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타임라인 바로가기

1. 개요

에바 페론은 1919년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배우로 활동하다가, 1944년 후안 페론을 만나 결혼한 후 퍼스트레이디로서 정치에 참여했다. 그녀는 에바 페론 재단을 설립하여 자선 사업을 펼치고 여성 참정권을 지지하며 대중의 큰 지지를 얻었으나, 경제 정책과 독재에 대한 비판도 받았다. 1951년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으나 사퇴하고, 이듬해 자궁암으로 사망했다. 그녀의 삶은 뮤지컬, 영화 등 다양한 문화 콘텐츠로 제작되었으며, 현재까지도 아르헨티나의 중요한 문화적 아이콘으로 남아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아르헨티나의 배우 출신 정치인 - 이사벨 페론
    무용수 출신 이사벨 페론은 후안 페론의 부인이자 아르헨티나 대통령으로, 남편 사망 후 대통령직을 승계받았으나 경제 위기, 정치 폭력, 권력 다툼 속에 군부 쿠데타로 실각, 이후 망명하여 논란 속에 여생을 보냈다.
  • 아르헨티나의 대통령 배우자 -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는 아르헨티나의 정치인으로 2007년부터 2015년까지 대통령을 역임하며 에너지, 농업, 인권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정책 변화를 추진했고, 남편의 뒤를 이어 대통령에 당선, 부부가 연이어 대통령직을 수행한 최초의 사례를 기록했으며, 2019년에는 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재임 중 부정부패 혐의로 기소되기도 했다.
  • 아르헨티나의 여성주의자 - 마리아 베세라
    아르헨티나의 싱어송라이터이자 배우인 마리아 베세라는 유튜브 활동으로 인지도를 쌓은 후 2019년 데뷔하여 어반 팝을 기반으로 다양한 장르를 소화하며 활동하고 있으며, 워너 뮤직 라티나와 계약하고 에스타디오 모누멘탈에서 매진 기록을 세운 최초의 아르헨티나 여성 가수로 알려져 있다.
  • 아르헨티나의 여성주의자 - 알리시아 모로 데 후스토
    알리시아 모로 데 후스토는 아르헨티나의 사회 개혁가, 교사, 의사, 언론인으로서 여성 권리 신장, 빈민 진료, 사회주의 운동에 헌신하며 아르헨티나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에바 페론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48년의 에바 페론
이름마리아 에바 두아르테
로마자 표기법Maria Eva Duarte
별칭에비타
직함국가의 정신적 지도자
배우자후안 페론 (1945년 10월 18일 결혼)
출생일1919년 5월 7일
출생지부에노스아이레스 주 후닌 또는 헤네랄비아몬테 파르티도의 시골 지역
사망일1952년 7월 26일
사망 장소부에노스아이레스 운수에 궁전
사망 원인''
안장 장소레콜레타 묘지
서명
부모후안 두아르테 (아버지), 후아나 이바르구렌 (어머니)
정치 경력
정당정의당 , 여성 페론주의당
직책아르헨티나의 퍼스트 레이디
재임 기간1946년 6월 4일 ~ 1952년 7월 26일
대통령후안 페론
이전콘라다 빅토리아 파렐
이후메르세데스 로나르디 (1955년)
직책1에바 페론 재단 회장
재임 기간11948년 7월 8일 ~ 1952년 7월 26일
이전1직책 설립
이후1델리아 파로디
직책2여성 페론주의당 회장
재임 기간21949년 7월 29일 ~ 1952년 7월 26일
이전2직책 설립
이후2델리아 파로디

2. 출생과 초기 생애

에바 페론은 1919년 5월 7일 부에노스아이레스주의 작은 마을 로스톨도스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본명은 '마리아 에바 두아르테'였으나, 세례 증명서에는 '에바 마리아 이바르구렌'으로 기록되어 있다.[10][11] 아버지 후안 두아르테는 프랑스 바스크계 이민자 후손이었고, 어머니 후아나 이바르구렌은 스페인 바스크계 이민자 후손이었다.[13][14]

1926년 첫 영성체를 받은 에바 두아르테


후안 두아르테는 인근 치빌코이의 부유한 목장주였지만, 이미 법적인 부인과 가정이 있었다. 당시 아르헨티나 시골에서는 부유한 남성이 여러 가정을 꾸리는 것이 드문 일은 아니었다.[15] 에바가 한 살 때, 두아르테는 본처에게 돌아갔고, 에바의 어머니와 아이들은 극심한 빈곤 속에 남겨졌다. 이들은 후닌의 가장 가난한 지역으로 이사해야 했다.[16]

어머니는 옷을 만들어 팔며 생계를 유지했지만, 가족은 아버지에게 버림받았다는 사실과 사생아라는 신분 때문에 사회적으로 고립되었다.[16] 이러한 과거를 지우려는 욕망이 훗날 에바가 자신의 출생 증명서를 파기하게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다.[12][17]

에바는 어린 시절 후닌에서 보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학창 시절 학교 연극과 공연에 참여하며 배우의 꿈을 키웠다.

2. 1. 부에노스아이레스로의 상경

15세 때인 1934년에 배우가 되기 위해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상경했다.[9] 처음에는 모델로 활동하다가, 연극배우, 영화배우, 라디오 성우 등으로 차츰 이름을 알렸다.[100]

1944년 25세의 에바 두아르테. 안네마리 하인리히(Annemarie Heinrich) 촬영


수영복 화보를 장식한 에바(1939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한 에바 두아르테는 정식 교육이나 인맥 없이 살아남는 어려움에 직면했다. 대공황으로 인한 이주로 이 시기 도시는 특히 과밀해졌다. 1935년 3월 28일, 코메디아스 극장에서 연극 ''페레스 부인(la Señora de Pérez)''으로 데뷔했다.

1936년 에바는 극단과 함께 전국 순회 공연을 하고 모델로 일했으며 몇 편의 B급 영화 멜로드라마에 출연했다. 1942년 비누 제조업체가 후원하는 ''칸딜레하스(Candilejas)''라는 회사가 당시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라디오 방송국인 ''라디오 엘 문도(Radio El Mundo)''(세계 라디오)에서 방송되는 라디오 드라마 ''무이 비엔(Muy Bien)''에서 매일 역할을 맡게 되면서 경제적 안정을 누리게 되었다.[22] 같은 해 그녀는 ''라디오 벨그라노(Radio Belgrano)''와 5년 계약을 맺었고, 인기 있는 역사 드라마 프로그램 ''위대한 역사 속의 여성들''에서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 사라 베르나르, 그리고 러시아의 마지막 황후인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를 연기하는 역할을 보장받았다.

1943년까지 에바는 한 달에 5000USD에서 6000USD를 벌어 전국에서 가장 고액을 받는 라디오 여배우 중 한 명이 되었다. 에바 두아르테와 함께 ''라디오 엘 문도''를 운영했던 파블로 라시오피는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녀가 "매우 믿음직스러웠다"고 언급했다고 한다.[23] 에바는 짧은 영화 경력도 있었지만, 그녀가 출연한 영화는 크게 성공한 영화가 없었다. 그녀의 마지막 영화 중 하나인 ''라 카발가타 델 시르코(La cabalgata del circo)''(서커스 행렬)에서 에바는 영화의 주연 배우인 나이 많은 여성과 경쟁하는 젊은 시골 소녀를 연기했다. 리베르타드 라마르케(Libertad Lamarque).

라디오 드라마와 영화에서의 성공으로 에바는 어느 정도 재정적 안정을 얻었다. 1942년 그녀는 레콜레타의 고급 주택가에 있는 포사다스 거리 1557번지(현재 호텔 멜리아 레콜레타 플라자 위치) 아파트로 이사할 수 있었다. 다음 해 에바는 아르헨티나 라디오 노조(ARA)의 창립자 중 한 명으로 정계에 입문했다.[12]

3. 연예계 활동

1930년대 후반 무렵부터 에바는 라디오 드라마 성우와 영화 배우로 활동하기 시작했다.[12] 1935년 3월 28일, 코메디아스 극장에서 연극 ''페레스 부인(la Señora de Pérez)''으로 데뷔했다. 1936년에는 극단과 함께 전국 순회 공연을 하고 모델로 일했으며 몇 편의 B급 영화 멜로드라마에 출연했다.[22]

1945년 영화 ''라 카발가타 델 시르코(La Cabalgata del Circo)''에 출연한 에바 두아르테와 리베르타드 라마르케(Libertad Lamarque)


1942년, 에바는 비누 제조업체가 후원하는 ''칸딜레하스(Candilejas)''라는 회사가 당시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라디오 방송국인 ''라디오 엘 문도(Radio El Mundo)''(세계 라디오)에서 방송되는 라디오 드라마 ''무이 비엔(Muy Bien)''에서 매일 역할을 맡게 되면서 경제적 안정을 누리게 되었다.[22] 같은 해, ''라디오 벨그라노(Radio Belgrano)''와 5년 계약을 맺고, 인기 있는 역사 드라마 프로그램 ''위대한 역사 속의 여성들''에서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 사라 베르나르, 러시아의 마지막 황후인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를 연기하는 역할을 맡았다. 에바 두아르테는 라디오 회사의 공동 소유주가 되었고, 1943년에는 한 달에 5,000페소에서 6,000페소를 벌어 전국에서 가장 고액을 받는 라디오 여배우 중 한 명이 되었다.[23]

라디오 드라마와 영화에서의 성공으로 1942년 레콜레타의 고급 주택가에 있는 아파트로 이사할 수 있었다. 다음 해인 1943년, 에바는 아르헨티나 라디오 노조(ARA)의 창립자 중 한 명으로 정계에 입문했다.[12]

4. 후안 페론과의 만남과 결혼

1944년 산후안에서 지진이 발생하여 6천명 이상이 사망하는 참사가 일어났다. 육군 대령 출신으로 당시 정부의 노동부 장관이던 후안 페론은 이재민 구호를 위한 기금을 마련하려고 했으며, 이때 에바 두아르테와 후안 페론은 처음 만났다. 후안 페론의 첫 부인인 아우렐리아 티손은 1938년 자궁암으로 사망했기 때문에, 당시 후안 페론은 독신이었다. 후안 페론은 에바 두아르테의 젊음과 미모에 빠져들었으며, 두 사람은 곧 함께 살게 되었다.[24] 후안 페론과 에바는 새벽 2시경 함께 행사장을 떠났다.[26]

1944년 산후안 지진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돕기위해 후안 페론이 기획한 "예술 축제"에 에바는 라디오와 영화 배우로 초청받았다. 일주일간의 모금 활동 후 모든 참가자들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루나 파크 스타디움에서 열린 자선 행사에 모였다. 이 행사에서 1944년 1월 22일 에바 두아르테는 후안 페론을 처음 만났으며,[24] 에바는 즉시 후안 페론의 여자친구가 되었다. 에바는 훗날 남편을 만난 날을 "경이로운 날"이라고 불렀다.[25]

에바 두아르테는 페론을 만나기 전까지 정치에 대해 아는 바도, 관심도 없었다. 따라서 그녀는 페론이나 그의 측근과 논쟁하지 않았고, 단지 들은 것을 흡수했다.[27] 후안 페론은 나중에 자신의 회고록에서 에바를 의도적으로 제자로 삼아 "제2의 나"를 만들고자 했다고 주장했다.[28]

1944년 5월, 방송 연예인들은 노동조합을 결성해야 하며, 이 노동조합이 아르헨티나에서 유일하게 허용되는 노동조합이 될 것이라는 발표가 있었다. 노동조합 결성 직후, 에바 두아르테가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후안 페론이 연예인들에게 노동조합 결성을 제안했고, 다른 연예인들은 그의 정부를 회장으로 뽑는 것이 정치적으로 유리하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노동조합 회장으로 선출된 직후, 에바 두아르테는 "더 나은 미래를 향하여"라는 일일 프로그램을 시작했는데, 이 프로그램은 연속극 형식으로 후안 페론의 업적을 극화했다. 종종 페론의 연설이 프로그램 중에 방송되었다. 에바 두아르테가 말할 때, 그녀는 후안 페론에 대해 자신이 믿는 것을 청취자들이 믿도록 하려는 평범한 여성으로서 평이한 언어를 사용했다.[29]

1945년 10월, 중남미에 강한 영향력을 가진 미국의 지원을 받은 에두아르도 아바로스(Eduardo Avalos) 장군에 의한 쿠데타가 발생하여 페론은 군사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10월 11일) 투옥되었지만, 에바는 페론 지지자들의 지시 아래 라디오를 통해 국민들에게 페론의 석방을 호소했다.

이러한 움직임을 받아들여 지지 기반이 약했던 아바로스가 10월 21일에 정권을 포기했기 때문에 페론은 석방되었고, 10월 26일에 페론과 결혼했다.

5. 퍼스트레이디로서의 활동

1946년 후안 페론이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에바 페론은 아르헨티나의 퍼스트레이디가 되었다. 에바는 남편의 선거 유세에 동행하며 대중으로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고, '에비타'라는 애칭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에바는 남편의 지위를 배경으로 적극적으로 국정에 개입했다. 정의당 지지표를 늘리기 위해 여성부를 조직하고, 노동자용 주택, 고아원, 양로원 등의 시설 정비를 명목으로 에바 페론 재단을 설립했다. 또한, 미싱, 담요, 식량 등을 배포하는 등 재분배를 통해 페론 정권의 안정에 크게 기여했다.

이러한 활동으로 에바는 특히 아르헨티나 국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블루칼라 노동자 계급으로부터 지지를 받아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되었다. 하지만 에바의 재분배 자금은 세금뿐만 아니라 노동자와 기업으로부터 반강제적으로 거둬들인 헌금으로 충당되었기 때문에 아르헨티나 경제에 큰 악영향을 미쳤다. 또한, 재단을 이용한 축재와 부정 의혹도 받고 있다.

하층 계급 출신으로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했고, 선거로 선출된 것도 아닌데 국정에 참여했던 점, 경제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공사를 혼동한 재분배를 실시했던 점 등으로부터 중산층 이상의 지식 계급과 부유층, 군 상층부로부터 큰 비판을 받았다. 또한 수영복 모델이자 전 고급 매춘부, 정치인이라는 경력 때문에 "매춘부", "벼락부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가톨릭교회 신자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보수적인 라틴 아메리카의 토양에서는, 여성으로서 정치적으로 너무 활동적인 인물로 여기는 사람도 많았다.

5. 1. 자선 사업과 여성 운동

에바는 정부 내에서 공식적인 직책은 없었으나, 사실상 보건부 장관 역할을 하며 노동자와 하층민을 위한 정책을 펼쳤다.[44] 1947년에는 유럽 순방을 통해 스페인에서 가난한 아동들을 위한 구호 활동을 펼쳤고, 프랑스에서는 샤를 드 골을 만나 식량 지원을 약속받았다.[44]

에바 페론 재단에서의 활동


한편, 정의당의 여성 페론당을 결성하여 여성 참정권 도입 등 여성 운동에 기여하였다.[44] 에바 페론 재단을 설립하여 학교, 병원, 양로원 등을 건립하고 각종 자선사업을 하며 민중의 지지를 받았다.[44] 그러나 이로 인해 상류층 및 군부와의 관계는 악화되었다.[44]

페론이 여성 군중에게 연설하는 모습


에바 페론은 아르헨티나 여성의 투표권 획득에 큰 공헌을 했다.[51] 비록 에바는 여성 참정권을 지지하는 라디오 연설을 하고 자신의 신문인 ''데모크라시아''에 기사를 게재했지만,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법안은 에바의 권한 밖이었다. 에바는 에두아르도 콜롬이 제출한 법안을 지지했지만, 이 법안은 폐기되었다. 이후 새로운 여성 참정권 법안이 제출되었고, 1947년 9월 9일 법률 13010호에 의해 아르헨티나에서 남녀의 정치적 권리 평등과 보통선거가 확립되었다.[51]

대통령궁 「로사다 저택」에서 연설하는 에바 페론(1951년)


에바 페론은 아르헨티나 최초의 대규모 여성 정당인 페론주의 여성당을 창당했다. 1951년까지 이 당은 전국에 50만 명의 당원과 3600개의 지부를 두었다. 에바 페론은 자신을 페미니스트로 여기지 않았지만, 그녀의 정치 활동은 수천 명의 여성이 정치에 참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여성 참정권과 페론주의 여성당의 결성은 1951년 대통령 선거에서 후안 페론에게 63%의 압도적인 지지율을 가져다주었다.

몇 년 만에 에바 페론 재단은 현금과 물품으로 30억달러가 넘는 자산을 보유하게 되었는데, 이는 1940년대 후반 환율로 2억달러가 넘는 금액이다.[47] 1만 4천 명의 직원을 고용했으며, 매년 40만 켤레의 신발, 50만 대의 재봉틀, 20만 개의 솥을 구입하여 배포했다.[47] 재단의 사업과 보건 서비스 덕분에 아르헨티나 의료 서비스에서 최초로 불평등이 사라졌다.[48]

6. 부통령 후보 지명과 사퇴

1950년 자궁암 진단을 받은 에바 페론은 1951년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그러나 군부는 에바 페론의 영향력 증대를 우려하여 부통령 지명을 철회하도록 압력을 가했고, 결국 10월에 후보직에서 물러났다.[5]

에바 페론의 부통령 출마는 특히 노동 계급 여성들 사이에서 큰 지지를 받았다. 1951년 8월 22일, 노동조합은 '카빌도 아비에르토(Cabildo Abierto)'라는 대규모 집회를 열어 에바 페론의 부통령 출마를 지지했다. 이 집회는 역사상 여성 정치인에 대한 최대 규모의 공개 지지 표현으로 여겨진다.[21]

1951년, 후안 페론-에바 페론 조합을 지지하는 약 200만 명의 군중이 모였다.


1951년 합동 유세에서 페론은 부통령직 출마를 요구하는 대중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남편을 껴안고 있다.


그러나 에바 페론은 대중 연설을 통해 부통령직 출마 제안을 거절했다. 그녀는 자신의 유일한 야망은 국민의 희망과 꿈을 대통령에게 전달하고, 그 희망과 꿈을 현실로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페론주의 수사학에서 이 사건은 '사퇴(The Renunciation)'로 불리며, 에바 페론을 이타적인 여성으로 묘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페론의 부통령직 사퇴 연설(스페인어). 출처: [https://web.archive.org/web/20110712164914/http://www.radionacional.com.ar/audios Radio Nacional. RTA. Argentina
]

7. 사망

1950년 자궁암 진단을 받았다. 건강이 악화되는 가운데, 1951년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으나 군부의 압력으로 사퇴했다. 11월 대선에서 남편 후안 페론은 재선에 성공했지만, 에바의 건강은 더욱 악화되었다. 두 번째 임기가 시작되기 전, 남편은 에바를 '영적 지도자'로 임명했다. 에바 페론은 자신의 병을 숨겨왔으나, 암이 악화되어 1952년 7월 26일 33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99]

사망 직후 정부는 수일간 모든 공식 행사를 중단하고 10일간 국기를 반기로 게양했다. 영화 상영 중단, 식당 영업 중단 등 사업 활동이 중단되었고, 국민들은 큰 슬픔에 빠졌다. 에바가 사망한 대통령 관저 앞에는 인파가 몰려들어 거리가 사방 10블록까지 막혔다.

거의 300만 명이 부에노스아이레스 거리에서 열린 에비타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다음 날, 에바의 시신이 노동부 건물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인파에 깔려 8명이 사망했고, 2,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부상으로 시립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19] 그 후 2주 동안 조문객들은 에비타의 시신을 보기 위해 수 시간씩 기다리며 도시 블록 여러 개에 걸쳐 긴 줄을 섰다. 부에노스아이레스 거리는 엄청난 양의 꽃으로 넘쳐났고, 하루 만에 도시의 모든 꽃집의 재고가 바닥났다. 전국 각지와 칠레에서까지 꽃이 공수되었다.[19]

에바 페론은 정치직을 역임한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 원수에게만 허용되는 국장[64]과 가톨릭 레퀴엠 미사가 거행되었다. 1952년 하계 올림픽 기간 중 아르헨티나 선수단을 위해 헬싱키에서 추모식이 거행되기도 했다.[65]

8월 9일 토요일, 시신은 의회 건물로 옮겨져 하루 더 일반인에게 공개되었고, 아르헨티나 입법부 전체가 참석한 추모 예배가 거행되었다. 다음 날, 마지막 미사 후 관은 총포차에 실려 CGT 관계자들이 운구했다. 페론, 내각, 에바의 가족과 친구들, 여성 페론당 대표들, 에바 페론 재단의 노동자, 간호사, 학생들이 뒤를 따랐고, 발코니와 창문에서 꽃이 뿌려졌다.

에바 페론 사망에 대한 국민들의 애도에 대해, 일부는 진심으로 받아들였지만, 다른 일부는 페론 정권의 "열정극"에 굴복한 것으로 보았다. ''타임''지는 페론 정부가 매일 라디오 방송 후 5분간 애도 시간 준수를 강제했다고 보도했다.[66]

페드로 아라와 에바 페론의 미라


에비타 사후, 페드로 아라(Pedro Ara)가 시신 염장 처리를 의뢰받았다. 에비타가 염장을 원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후안 페론의 결정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아라는 장기를 보존하고 혈액을 글리세린으로 대체하여 시신을 "예술적으로 연출된 수면" 상태처럼 보이게 했다.[69]

8. 사망 이후

에바 페론의 장례식


국민의 애도 속에 국장이 치러졌고, 이후로도 국민들은 그를 외경스러운 존재로 기억했다. 아르헨티나는 그에 대한 평가로 이후 큰 혼란을 겪게 되며 노동자와 민중에서는 그를 성녀로 추대하려는 시도를 한 반면, 그의 정적들은 국민들에게서 그의 흔적을 없애기 위하여 노력했다. 이런 가운데 개혁의 결함으로 인하여 남편은 정치적 궁지에 몰렸으며, 결국 1955년 쿠데타로 축출되었다.[99] 쿠데타로 집권한 새 정부는 페론주의의 상징인 그를 아르헨티나 정계에서 몰아내는 것을 우선 과제로 삼았다. 이에 따라 방부 처리되어 있던 그의 시신을 은닉하여 이탈리아로 빼돌렸다. 1971년 시신은 스페인에 망명 중이던 후안 페론 측에 인도되었고, 1975년 후안 페론의 다음 부인인 이사벨 페론이 대통령이 된 후 아르헨티나로 송환하여 대통령궁에 안치하였다. 그러나 다시 쿠데타가 일어난 후 군사정권은 유해를 제거했으며, 유해는 부에노스아이레스 레콜레타 묘지의 두아르테 가족묘지에 안장되었다.[72]

에바 페론의 묘


9. 평가

에바 페론에 대한 평가는 찬반 양론이 극명하게 갈린다. 약자를 위한 복지 정책과 여성 참정권 도입 등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아르헨티나 경제를 악화시키고 후안 페론의 독재를 옹호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100]

에바 페론 재단을 통한 빈곤층 구제와 여성 참정권 운동은 긍정적으로 평가되지만, 아르헨티나 경제에 부담을 주고 후안 페론의 독재를 옹호했다는 비판도 받는다.[100]

일각에서는 에바 페론과 후안 페론을 파시스트나치와 연관 짓기도 한다. 1947년 에바 페론이 유럽 순방 중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초청을 받은 것이 이러한 인식을 강화했을 수 있다.[84] 그러나 타임 지에 따르면, 에바 페론이 파시스트나 나치였다는 비난은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87]

9. 1. 긍정적 평가

에바 페론은 빈곤층과 노동자 계층의 삶의 질 개선에 크게 기여했다. 에바 페론 재단을 설립하여 학교, 병원, 양로원 등을 건립하고 각종 자선사업을 펼쳐 민중의 지지를 받았다.[8] 에바는 정부 내 공식 직책은 없었으나, 노동자와 하층민을 위한 정책을 추진하여 사실상 보건부 장관 역할을 수행했다.[8]

에바는 정의당의 분파인 페론주의 여성당을 결성하여 여성 참정권 도입 등 여성 운동에 기여하며 여성의 권익 신장과 정치 참여 확대에도 공헌했다.[8] 여성 참정권을 지지하는 라디오 연설을 하고, 자신의 신문인 ''데모크라시아''에 남성 페로니스트들에게 여성의 투표권을 지지할 것을 요청하는 글을 기고하였다. 비록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법안은 에바의 권한 밖의 일이었지만, 에바의 노력으로 1947년 법률 13010호가 통과되어 아르헨티나에서 남녀의 정치적 권리 평등과 보통선거가 확립되었다.[51] 페론주의 여성당을 창당하여 여성의 정치 참여를 독려했다. 1951년에는 50만 명의 당원과 3600개의 지부를 확보했다. 에바 페론의 영향으로 많은 여성들이 처음으로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으며, 이는 1951년 대통령 선거에서 후안 페론에게 63%의 압도적인 지지율을 가져다주었다.

9. 2. 부정적 평가

에바 페론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와 부정적인 평가가 공존한다. 그녀는 약자를 위한 복지 정책을 펼쳐 대중의 칭송을 받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아르헨티나 경제를 악화시키고 후안 페론의 독재를 옹호했다는 비판을 받는다.[100]

특히, 에바 페론의 포퓰리즘 정책은 아르헨티나 경제에 큰 부담을 준 것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그녀는 권위주의적인 통치 방식에 협조했으며, 에바 페론 재단 운영 과정에서 부정부패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일부에서는 에바 페론과 후안 페론 부부를 파시스트 또는 나치와 연관 짓기도 한다. 1947년 에바 페론이 유럽 순방 중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초청을 받은 것이 이러한 인식을 강화했을 수 있다.[84] 그러나, 타임지에 따르면, 에바 페론이 파시스트나 나치, 도둑이라는 비난은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87]

10. 문화적 묘사

에바 페론의 삶은 문학, 영화, 연극 등 다양한 매체로 다루어졌다. 주요 작품은 다음과 같다.


  • 에비타 (뮤지컬) - 팀 라이스와 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뮤지컬로, 1976년 컨셉 앨범으로 시작되었다. 런던 웨스트엔드 극장 초연에서 일레인 페이지가 주연을 맡아 1978년 올리비에상 뮤지컬 최우수 공연상을 수상했다. 1980년 브로드웨이 극장 공연에서는 패티 루폰이 주연으로 토니상 뮤지컬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으며, 최우수 뮤지컬상도 받았다.[92] 일본에서는 극단 시키(劇団四季)가 공연하고 있다.
  • 에비타 (영화) - 마돈나 주연의 1996년 영화로, 골든 글로브상 뮤지컬 또는 코미디 부문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주제가 아르헨티나여 울지마라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아르헨티나에서는 반미 감정과 영화 내용에 대한 반감으로 "마돈나, 돌아가라"는 낙서가 많았다.[93][94]
  • 에바 페론: 진실된 이야기 (Eva Perón: The True Story) - 1996년 아르헨티나 영화로, 에스테르 고리스가 주연을 맡았다. 아르헨티나가 아카데미상 최우수 외국어 영화 부문에 출품했지만 후보로 지명되지는 않았다.[93][94]
  • 에비타 - 1981년 미국 TV 드라마로, 페이 더너웨이가 주연을 맡았다.[91]
  • 에비타 망자의 행방 - 2022년 아르헨티나 TV 드라마.


1993년 리자 미넬리가 에바 페론의 무덤 비문을 읽고 있다.


니콜라스 프레이저는 에바 페론이 대중문화 아이콘이 된 이유로, 그녀의 경력이 20세기 후반 유명인사 숭배와 공공 정치 생활의 변화를 예고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95] 알마 기예르모프리에토는 에바 페론의 인기가 계속될 것이라고 전망했다.[96]

에바 페론은 2012년과 2022년에 발행된 100 페소 지폐에 등장한다.[97]

2017년 일본에서는 뮤지컬 '라스트 댄스 -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성녀라 불린 악녀 에비타의 이야기'가 제작되었다. 연출은 이시마루 사치코(石丸さち子), 주연은 미즈나츠키(水夏希)가 맡았다.

11. 유산

에바 페론은 아르헨티나뿐만 아니라 라틴 아메리카 전체에서 중요한 문화적 아이콘으로 여겨진다.[76] 그녀는 탱고의 신데렐라이자 라틴 아메리카의 잠자는 숲속의 미녀로 묘사되기도 하며, 체 게바라와 같이 더 나은 세상을 위한 희망을 상징하는 인물로 여겨진다.[76]

에바 페론의 사망 기념일은 정부 공휴일은 아니지만, 매년 많은 아르헨티나인들이 추모하고 있다.[77] 그녀의 모습은 아르헨티나 동전과 지폐에 등장하며,[77] '에비타스'라는 아르헨티나 통화도 그녀를 기리기 위해 명명되었다.[77] 또한, 에바 페론 재단이 1947년에 설립한 부에노스아이레스 외곽의 시우다드 에비타(에비타 시)가 있다.

2002년 7월 26일, 에바 페론 사망 50주년을 기념하여 그녀의 증손녀 크리스티나 알바레스 로드리게스가 '에비타 박물관'(Museo Evita)을 개관했다.[78] 이 박물관은 에바 페론의 의상, 초상화, 그녀의 삶을 묘사한 예술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으며, 인기 있는 관광 명소가 되었다.[78]

모스크바의 러시아 국가 역사 박물관에 있는 "에비타: 평화의 대사" 전시회에 참석한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 대통령


아르헨티나 역사상 최초의 여성 대통령인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는 페론주의자이며, 종종 "새로운 에비타"라고 불리기도 한다.[7] 그러나 키르치네르는 자신을 에비타와 비교하는 것을 원치 않으며, 에비타는 아르헨티나 역사상 독특한 현상이었다고 말한다.[7]

문화 인류학자 줄리 M. 테일러는 에바 페론이 아르헨티나에서 중요한 인물로 남아 있는 이유를 여성성, 신비주의, 혁명적 지도력의 조합과, 사망한 여성으로서 대중의 상상력에 미치는 영향력 때문이라고 분석했다.[79][80]

2011년에는 9월 7일 가에 위치한 현 사회개발부 건물 외벽에 에바 페론의 거대한 벽화 두 점이 공개되었고, 2012년 7월 26일에는 에바 페론 사망 60주년을 기념하여 100페소짜리 지폐가 발행되었다.[77] 이 지폐에는 훌리오 아르헨티노 로카를 대신하여 에바 페론의 초상화가 사용되어, 그녀는 아르헨티나 통화에 등장한 최초의 여성이 되었다.

참조

[1] harvp
[2] harvp
[3] 뉴스 A nation seeks salvation in Evita http://www.scotsman.[...] 2002-11-18
[4] harvp
[5] harvp
[6] 뉴스 In London, a Pious 'Evita' for a Star-Struck Age https://www.nytimes.[...] 2006-07-03
[7] 잡지 Interview: Cristina Fernandez de Kirchner of Argentina https://content.time[...] 2007-09-29
[8] 간행물 My Mission in Life and Evita by Evita 1952
[9] harvp
[10] harvp
[11] 서적 Act 495, from the Church "Capellanía Vicaria de Nuestra Señora del Pilar" registry of Baptisms for the year 1919 1919-11-21
[12] harvp
[13] 서적 Eva Perón. Leben und Sterben einer Legende C.H. Beck, München
[14] 뉴스 Evita convenció a Franco para conmutar una pena de muerte http://www.abc.es/20[...] 2011-04-28
[15] harvp
[16] 뉴스 Two Faces of Evita https://www.nytimes.[...] 1996-11-24
[17] harvp
[18] 서적 Evita, First Lady: A Biography of Evita Peron https://books.google[...] Open Road + Grove/Atlantic 2007-12-01
[19] harvp
[20] harvp
[21] harvp
[22] harvp
[23] harvp
[24] harvp
[25] harvp
[26] harvp
[27] harvp
[28] 서적 Yo, Juan Domingo Perón: Relato autobiográfico Editorial Planeta
[29] harvp
[30] harvp
[31] 뉴스 17 de octubre de 1945 https://www.infobae.[...] Infobae 2019-10-17
[32] harvp
[33] 에피소드 Evita: The Woman Behind the Myth A&E
[34] 웹사이트 Meio século sem Perón: quem foi o político mais importante da Argentina https://www.cnnbrasi[...]
[35] 웹사이트 Argentina: por que Perón segue tão influente (e polêmico) 50 anos após sua morte https://www.bbc.com/[...] 2024-07-06
[36] 웹사이트 Maria Eva Peron - https://awpc.cattcen[...] 2024-11-10
[37] 논문
[38] 논문
[39] 서적 God Save The Queen
[40] 논문
[41] 논문
[42] 논문
[43] 웹사이트 13 Things You Might Not Know About Eva Perón http://mentalfloss.c[...] 2019-03-06
[44] 논문
[45] 논문
[46] 논문
[47] 논문
[48] 논문
[49] 논문
[50] 논문
[51] 학술지 Si Evita Viviera 1974
[52] 논문
[53] 뉴스 Famous Patients, Famous Operations, 2002 – Part 6: The Case of the Politician's Wife http://www.medscape.[...] Medscape Today 2002-12-05
[54] 논문
[55] 학술지 George T. Pack, M.D., 1898–1969, a tribute 1969-10
[56] 논문
[57] 학술지 New Evidence of Prefrontal Lobotomy in the Last Months of the Illness of Eva Perón 2012-03-01
[58] 학술지 Prefrontal lobotomy on Evita was done for behavior/personality modification, not just for pain control 2015-07
[59] 학술지 Psychosurgery: past, present, and future, including prefrontal lobotomy and Connecticut's contribution 2014-09
[60] 학술지 Evita's lobotomy 2015-12
[61] 뉴스 The gruesome, untold story of Eva Peron's lobotomy https://www.bbc.com/[...] BBC News 2015-07-10
[62] 학술지 Prefrontal lobotomy on Evita was done for behavior/personality modification, not just for pain control. 2015-07
[63] 기타
[64] 논문
[65] 서적 1952 Summer Olympics official report http://www.la84found[...] 2010-08-01
[66] 뉴스 In Mourning https://web.archive.[...] Time 2006-11-09
[67] 웹사이트 Rice University: Julie M. Taylor https://web.archive.[...] Ruf.rice.edu 2011-01-27
[68] 서적 Eva Perón: Intimate Portrait Lifetime Television
[69] 논문
[70] 논문
[71] 서적 Necromanía: Historia de una pasión argentina Sudamericana 2010
[72] harvp 1996
[73] harvp 2002
[74] harvp 2001
[75] harvp 1993
[76] 웹사이트 Evita Or Madonna: Whom Will History Remember? Interview with Tomas Eloy Martinez http://www.lasmujere[...] 2009-11-09
[77] 뉴스 Argentines swap pesos for 'Evitas' http://news.bbc.co.u[...] BBC 2002-04-27
[78] 웹사이트 Evita Museum http://www.evitapero[...] 2006-10-13
[79] harvp 1979
[80] harvp 1979
[81] 웹사이트 Interview with sir John Balfour in the documentary Eva Perón Queen of Hearts https://www.imdb.com[...] 1972-10-24
[82] 서적 Populism and Ethnicity: Peronism and the Jews of Argentina https://books.google[...] McGill-Queen's University Press
[83] 서적 Populism and Ethnicity: Peronism and the Jews of Argentina https://books.google[...] McGill-Queen's University Press
[84] harvp 1996
[85] harvp
[86] harvp 1987
[87] 잡지 The Woman Behind the Fantasy: Prostitute, Fascist, Profligate – Eva Perón Was Much Maligned, Mostly Unfairly http://www.time.com/[...] 1997-01-20
[88] 논문 The Jews and Perón: Communal Politics and National Identity in Peronist Argentina, 1946–1955 http://rave.ohiolink[...] 2008-05-02
[89] 서적 Fascism: A Very Short Introduction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90] harvp 1996
[91] 웹사이트 Evita Peron (1981) https://movies.nytim[...] 2016
[92] harvp 1996
[93] 기관 Margaret Herrick Library, Academy of Motion Picture Arts and Sciences
[94] 웹사이트 39 Countries Hoping for Oscar Nominations //www.oscars.org/pre[...] Academy of Motion Picture Arts and Sciences 1996-11-13
[95] harvp 1996
[96] harvp 2002
[97] 웹사이트 Eva Peron On Argentinian Banknotes https://www.banknote[...] 2022-06-29
[98] 뉴스 Condecorada com a Ordem Nacional do Mérito a Senhora Eva Peron http://memoria.bn.br[...] 1952-04-23
[99] 웹사이트 Famous Patients, Famous Operations, 2002 - Part 6: The Case of the Politician's Wife https://www.medscape[...] WebMD 2002-12-05
[100] 웹사이트 언론을 바꾸자 세상을 바꾸자 - 인터넷 경향신문 http://lady.khan.co.[...]

관련 사건 타임라인

( 최근 20개의 뉴스만 표기 됩니다. )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