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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백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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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 백작은 잉글랜드,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등에서 사용된 귀족 작위이다. 어원은 고대 영어 단어 'eorl'에서 유래되었으며, 앵글로색슨 시대에는 셔의 최고 관료에게 부여되었다. 노르만 정복 이후에는 프랑스어 'count'에 해당하는 작위로 자리 잡았으며, 잉글랜드에서는 윌리엄 1세에 의해 백작령의 규모가 축소되었다. 백작은 국왕의 권위를 상징하며, 13세기까지는 국왕과 왕족 다음의 사회적 지위를 가졌다. 백작은 관습적으로 딸기잎과 은색 공으로 장식된 관을 사용하며, '로드 [성씨]' 또는 '레이디 [성씨]'로 불린다.

2. 어원

7세기, 귀족을 지칭하는 일반적인 고대 영어 용어는 eorl|얼ang 또는 eorlcund man|얼쿤드 만ang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나중에 "테인"이라는 용어로 대체되었다. 11세기, 덴마크의 영향으로 고대 영어 칭호인 "앨더먼"은 고대 노르드어 단어 jarl|야를non에서 유래한 "earl"이 되었다. 원시 노르드어 "eril" 또는 이후의 고대 노르드어 jarl|야를non은 지도자의 지위를 나타내게 되었다.

노르만 정복 이후 잉글랜드에는 노르만어에서 파생된 동등한 용어 "count"(라틴어 comes|코메스la에서 유래)가 도입되지 않았지만, 여성 칭호로는 "countess"가 사용되었으며 현재도 사용되고 있다. 제프리 휴즈는 "영국의 노르만 프랑스어 칭호 'Count'가 게르만어 'Earl'을 선호하여 버려진 것은 [...] 'cunt'와 불쾌한 음성적 근접성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썼다.

영국아일랜드의 다른 언어에서는 이 용어가 다음과 같이 번역된다. 웨일스어 iarll|이아를cy, 아일랜드어스코틀랜드 게일어 iarla|이아를라ga, 스코트어 erle|얼sco, eirle|에이를sco 또는 earle|얼sco, 콘월어 yurl, yarl, yerl|유를, 야를, 예를kw.

3. 잉글랜드

7세기 고대 영어에서 귀족을 칭하는 용어는 eorl|이얼ang 또는 eorlcund man|이얼쿤드 만ang이었으나, 이후 "테인"으로 대체되었다. 11세기 덴마크의 영향으로 고대 노르드어 jarl|야를non에서 유래한 "earl"(얼)이 "이얼도르만"을 대체했다. 노르만 정복 이후 노르만어에서 파생된 "count"(카운트, 라틴어 comes|코메스la에서 유래)가 잉글랜드에 도입되지 않았지만, 여성 칭호인 "countess"(카운테스)는 현재도 사용된다.[1] 제프리 휴즈는 "영국의 노르만 프랑스어 칭호 'Count'가 게르만어 'Earl'을 선호하여 버려진 것은 [...] 'cunt'와 불쾌한 음성적 근접성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썼다.

영국아일랜드의 다른 언어에서는 이 용어가 웨일스어 iarll|이아를cy, 아일랜드어스코틀랜드 게일어 iarla|이아를라ga, 스코트어 erle|얼리sco, eirle|얼리sco 또는 earle|얼리sco, 콘월어 yurl, yarl, yerl|유를, 야를, 예를kw로 번역된다.

앵글로색슨 시대 잉글랜드 왕은 '이얼도르만(ealdorman)'을 셔(shire)의 최고 관료로 임명했다.[1] 크누트 대왕 통치 기간(1016–1035년)에 'ealdorman'은 'earl'(백작)로 변경되었다.[4][5][6] 참회왕 에드워드 (1042–1066) 재위 기간 동안, 백작들은 더 많은 자율성을 가지면서 왕권을 위협하기도 했다. 노르만 정복 이후 1135년 7명이었던 백작의 수는 스테판 왕(재위 1135년~1154년)이 무정부 시대 동안 지지자들에게 보상하기 위해 12명의 새로운 백작을 임명하면서 1141년에는 20명으로 증가했다.[1][2]

3. 1. 앵글로색슨 시대

앵글로-색슨 시대에 잉글랜드 왕은 '이얼도르만(ealdorman)'을 셔(shire)의 최고 관료로 임명했다.[1] 이들은 지역 군대를 지휘하고, 셔 법정에서 주교와 함께 재판을 주재했으며, 셔 법정 수익의 3분의 1과 자치구 수입을 보상으로 받았다.[1] 처음에는 하나의 셔를 다스렸지만, 에드워드 1세 때부터는 여러 셔를 함께 관리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2]

크누트 대왕 통치 기간(1016–1035년)에 'ealdorman'은 'earl'(백작)로 변경되었고,[4][5][6] 라틴어로는 duxla[5] 또는 comesla로 표기되었다.[7] 크누트는 북해 제국을 다스리기 위해 백작들에게 권한을 위임했다. 백작들은 국왕을 대신해 통치하고, 평화를 유지하며, 정의를 시행하고, 군대를 소집하는 일종의 총독이었다. 초기 'ealdorman'처럼, 백작들은 관할 구역에서 세 번째 페니를 받았다. 이들은 위탄에서 국왕의 수석 고문 역할을 했다.

백작의 직위는 자동 세습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국왕만이 백작을 임명할 수 있었다. 크누트는 잉글랜드를 여러 백작령으로 나누었는데, 웨섹스 백작령은 1018년 고드윈에게 주어졌다.[5] 백작령은 영구적인 영토 분할이 아니었고, 국왕은 샤이어를 한 백작령에서 다른 백작령으로 이전할 수 있었다.

F. W. 메이틀랜드는 백작의 재산과 공적 재산을 구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보았고, 스티븐 벡스터는 '백작 장원'이 국왕에 의해 백작들 사이에서 비교적 쉽게 이전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7]

참회왕 에드워드 (1042–1066) 재위 기간 동안, 백작들은 여전히 왕실 관리였지만, 더 많은 자율성을 가지면서 왕권을 위협하기도 했다. 고드윈 가문, 머시아의 레오프릭, 노섬브리아의 시워드와 같은 강력한 귀족 가문들이 등장했다. 이론적으로 백작은 국왕에 의해 해임될 수 있었고, 실제로 1055년 노섬브리아 백작의 세습이 중단되기도 했다. 웨섹스와 머시아 백작령은 세습화되었는데, 머시아는 4대에 걸쳐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졌다.[1]

1066년 둠즈데이 북에 따르면, 고드윈 가문의 재산은 7000GBP, 머시아 백작 레오프릭은 2400GBP, 노섬브리아 백작 시워드는 350GBP였다. 국왕의 토지는 5000GBP로 평가되었다. 백작들, 특히 한 가문에 집중된 토지와 부는 왕권의 권위를 약화시켰지만, 해럴드 고드윈슨이 왕이 되면서 왕권이 회복될 수 있었다.[5]

3. 1. 1. 이얼도르만 (Ealdorman)

얼(earl)의 직위는 앵글로-색슨 정부의 직위였던 이얼도르만(ealdorman)에서 유래했다.[1] 잉글랜드 왕은 이얼도르만을 셔의 최고 관료로 임명했다.[1] 그는 지역 피르드(fyrd)를 지휘했고 셔 법정에서 주교와 함께 재판을 주재했다.[1] 보상으로 그는 세 번째 페니, 즉 셔 법정 수익의 3분의 1과 자치구 수입을 받았다.[1] 처음에는 이얼도르만이 하나의 셔를 다스렸다.[2] 에드워드 1세 ()부터 하나의 이얼도르만이 세 개 또는 네 개의 셔를 이얼도르만리로 함께 관리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2]

3. 1. 2. 크누트 대왕

크누트 대왕의 통치 기간(1016–1035년) 동안, 'ealdorman'(고대 영어 eorlang 및 스칸디나비아어 jarlnon와 관련됨)은 'earl'(백작)로 변경되었다.[4][5][6] 라틴어로는 duxla[5] 또는 comesla로 표기되었다.[7] 크누트의 왕국인 북해 제국은 잉글랜드를 넘어 확장되었고, 그는 백작들에게 권력을 위임해야 했다. 백작들은 국왕의 이름으로 통치하고, 평화를 유지하며, 정의를 시행하고, 군대를 소집하는 총독 또는 총독이었다. 초기의 'ealdorman'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관할 구역에서 세 번째 페니를 받았다. 백작들은 테인보다 선임되었으며, 위탄 (국왕의 자문회)의 수석 고문이었다.

백작의 직위는 세습되지 않았다. 백작의 아들이 아버지의 직위를 물려받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지만,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오직 국왕만이 누군가를 백작으로 만들 수 있었다.

초기에 크누트는 웨섹스를 직접 소유했고, 잉글랜드의 나머지를 세 개의 백작령으로 나누었다. 그는 동앵글리아 백작령을 토르켈 데톨에게, 노섬브리아 백작령을 에릭에게 주었다.[5] 에드릭 스트레오나는 1007년부터 (백작 에어플레어의 재임 기간에 서부 머시아와 통합된) 머시아 백작령을 유지했다.[4] 크누트는 1018년에 고드윈에게 웨섹스 백작령을 주었다. 고드윈은 1018년에 동부 웨섹스를 통치하는 백작이 되었고, 1020년 이후 웨섹스 전체를 얻었다.[5] 결국 고드윈은 켄트 백작령도 받았다.[6] 토르켈은 1023년 이후 기록에서 사라졌고, 고드윈이 선두 백작이 되었다.[5]

백작령은 영구적인 영토 분할이 아니었다. 국왕은 샤이어를 한 백작령에서 다른 백작령으로 이전할 수 있었다. 샤이어 외에는 지방 정부 행정이 없다는 사실 또한 백작의 자율성을 제한했다. 그들은 과세를 부과하거나, 동전을 주조하거나, 헌장을 발행하거나, 자체 법정을 열 수 없었다(백작이 주재하는 샤이어 법정은 국왕의 이름으로 열렸다).

F. W. 메이틀랜드는 "백작의 재산과 함께, 우리는 사유 재산과 공적 재산을 구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썼다. 그는 직위 소유자가 아닌 직위에 속하는 "샤이어의 장원]"과 "백작

3. 1. 3. 참회왕 에드워드

참회왕 에드워드 (1042–1066) 재위 기간 동안, 백작들은 여전히 국왕의 이름으로 자신의 백작령을 다스리는 왕실 관리였지만, 더 많은 자율성을 가지게 되면서 왕권을 위협하기도 했다. 이 시기 웨섹스의 고드윈 가문, 머시아의 레오프릭, 노섬브리아의 시워드와 같은 강력한 귀족 가문들이 등장했다.

이론적으로 백작은 국왕에 의해 해임될 수 있었다. 1055년 시워드 백작이 사망했을 때, 에드워드는 노섬브리아의 세습적 계승을 의도적으로 깨뜨렸다. 그는 시워드의 아들인 노섬브리아 백작 왈테오프의 주장을 무시하고 토스티그 고드윈슨을 백작으로 임명했다. 이스트앵글리아 백작령은 새로운 백작을 위한 훈련장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웨섹스와 머시아의 백작령은 세습화되었다. 머시아는 4대에 걸쳐 아버지에서 아들로 넘어갔다: 휘체의 앨더만 레오프윈, 머시아 백작 레오프릭, 머시아 백작 앨프가르, 머시아 백작 에드윈.[1]

에드워드는 고드윈의 지지에 대한 보상으로 1043년 그의 장남 스웨인 고드윈슨을 백작으로 임명했다. 스웨인의 백작령은 서남부 미들랜즈의 서머싯, 헤리퍼드, 글로스터, 옥스퍼드, 버크셔 지역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드윈의 둘째 아들 해럴드 고드윈슨은 이스트앵글리아의 백작이 되었다. 1045년에는 고드윈의 조카 베른 에스트리손을 위해 백작령이 만들어졌다. 1047년 스웨인이 불명예스럽게 잉글랜드를 떠난 후, 그의 영지 일부는 해럴드와 베른이 차지했다. 에드워드의 노르만족 조카 망테의 랄프는 이전에 스웨인의 백작령 일부였던 헤리퍼드 백작이 되었다.[2]

1053년 해럴드는 그의 아버지의 뒤를 이었고, 레오프릭 백작의 아들 앨프가르가 이스트앵글리아의 백작이 되었다. 1057년 레오프릭과 랄프가 모두 사망한 후 대대적인 개편이 있었다. 앨프가르는 머시아에서 그의 아버지를 계승했고, 기르트 고드윈슨이 이스트앵글리아를 차지했다. 레오프윈 고드윈슨을 위해 해럴드에 속한 남동부 지역에서 백작령이 만들어졌다. 그 대가로 해럴드는 랄프의 백작령을 받았다.[3]

1065년 반란으로 토스티그가 폐위되었고, 머시아 백작 에드윈의 형제 모카르가 노섬브리아의 새로운 백작으로 인정받았다. 국왕은 이를 받아들였고, 토스티그는 잉글랜드에서 추방되었다.[4]

1066년 둠즈데이 북에 따르면, 고드윈 가문의 재산은 7000GBP, 머시아 백작 레오프릭은 2400GBP, 노섬브리아 백작 시워드는 350GBP로 평가되었다. 이에 비해 국왕의 토지는 5000GBP로 평가되었다. 백작들, 특히 한 가문에 집중된 토지와 부는 왕권의 권위를 약화시켰다. 그러나 해럴드 고드윈슨이 왕이 되면서 상황은 역전되었고, 그는 왕권의 권위를 회복할 수 있었다.[5]

3. 2. 노르만 정복

1135년 7명에서 시작된 백작의 수는 잉글랜드의 스테판 왕(재위 1135년~1154년)이 사촌 마틸다 황후와의 잉글랜드 왕위 쟁탈전인 무정부 시대 동안 지지자들에게 보상하기 위해 12명의 새로운 백작을 임명하면서 1141년에는 20명으로 증가했다.[1][2] 1138년, 스테판은 8개의 새로운 백작령을 창설했다.[3]

  • 왈레란 드 보몽은 이미 노르망디의 뫼랑 백작이었고, 레스터 백작 2대의 쌍둥이 형제였으며, 워체스터 백작이 되었다.
  • 왈레란의 남동생 휴 드 보몽은 베드포드 백작이 되었다.
  • 길버트 드 클레어는 펨브로크 백작이 되었다.
  • 펨브로크 백작의 조카인 길버트 드 클레어는 하트퍼드 백작이 되었다.
  • 윌리엄 드 오말은 표준 전투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요크 백작이 되었다.
  • 로버트 드 페러스는 표준 전투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더비 백작이 되었다.
  • 윌리엄 드 오비니는 링컨 백작이 되었다.
  • 윌리엄 드 루마레는 케임브리지 백작이 되었다.


1140년, 루마레는 케임브리지를 대신하여 링컨 백작령을 받았고, 윌리엄 드 오비니는 서식스 백작령(일반적으로 아룬델로 알려짐)을 받았다. 같은 해 제프리 드 멘빌은 에식스 백작이 되었고, 그의 창설 칙서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칙서이다. 비슷한 시기에 휴 비고드는 노퍽 백작이 되었다.[3]

1141년 2월, 스테판은 링컨 전투에서 포로로 잡혔고, 마틸다 황후는 4월에 "잉글랜드의 여주인"으로 선출되었다. 이때 그녀는 자신의 지지자들을 위해 3개의 백작령을 창설했다. 그녀의 사생아 형제 레지날드 드 던스탠빌은 콘월 백작이 되었다. 볼드윈 드 레버는 데번 백작이 되었고, 던스터의 영주인 윌리엄 드 모훈은 서머셋 백작이 되었다. 오브리 드 베어는 1142년에 옥스퍼드 백작이 되었다. 1143년경, 마틸다의 기병대장 솔즈베리의 패트릭은 솔즈베리 백작이 되었다.[4]

무정부 시대 동안 백작들은 권력 공백을 이용하여 왕실의 권리를 차지했다. 글로스터의 로버트, 솔즈베리의 패트릭, 레스터의 로버트, 노섬브리아의 헨리는 모두 자체적으로 화폐를 주조했다. 백작들과 남작들은 또한 불법 성채 (왕실의 허가 없이 건설된 성)를 건설했다.[5]

3. 3. 스테판과 마틸다

이 시기에 개별 백작이 실제로 소유했던 권력은 그가 후원과 영향력으로 전환할 수 있는 토지와 재산의 양에 달려 있었다. 한 지역에 토지와 자원이 더 많이 집중될수록 백작의 영향력은 더 커졌다. 가장 강력했던 자들은 13세기 중반 체스터 백작으로, 팔라틴 백작으로 묘사되었다. 그들의 권력은 체셔 대부분의 토지를 소유하는 데서 비롯되었다. 결과적으로, 주 법원과 백작의 장원 법원은 동일했으며, 보안관은 백작에게 복종했다. 옥스포드 백작은 옥스퍼드셔에 1에이커 미만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고(그의 토지 대부분은 에섹스에 있었다), 따라서 그 카운티에서는 아무런 권력도 없었다.[3]

백작령과 그 토지는 일반적으로 장자 상속에 따라 상속되었다. 유일한 상속인이 여성일 경우, 토지는 공동 상속인들 사이에 동일하게 분할되며, 가장 나이가 많은 공동 상속인이 백작위를 받게 된다. 1204년, 레스터 백작 로버트 드 보몽 4세는 자녀 없이 사망했다. 그의 상속인은 그의 여동생 아미스와 마가렛이었다. 아미스의 아들 레스터 백작 시몽 드 몽포르 5세는 레스터 백작으로 계승했고, 마가렛의 남편 윈체스터 백작 사에르 드 퀸시 1세는 1207년에 윈체스터 백작으로 임명되었다. 이는 스티븐 재위 이후 처음으로 만들어진 새로운 세습 백작령이었다.[4]

백작령은 여러 분할로 인해 극적으로 영향을 받을 수 있었다. 1232년 체스터 백작 라눌프 드 블론데빌 6세는 자녀 없이 사망했다. 그의 토지는 그의 네 자매에게 분할되었고, 백작위는 맏딸의 아들 헌팅던 백작 존에게 넘어갔다. 존은 1237년에 사망했고, 다시 한번 영지는 다섯 명의 공동 상속인(맏언니의 두 딸과 그의 세 명의 생존한 여동생) 사이에 분할되어야 했다. 토지가 분할되기 전에, 스코틀랜드 왕 알렉산더 2세는 헌팅던 백작령을 주장했다. 국왕의 의회는 이 주장을 기각했지만, 스코틀랜드 국왕은 헌팅던에 부속된 토지를 받았지만, 백작위는 받지 못했다. 이것은 존의 공동 상속인에게 이용 가능한 토지를 줄였고, 사실상 토지가 없는 백작의 가능성을 만들었다. 라눌프 백작은 잉글랜드에서 가장 큰 토지 소유자였지만, 5년 만에 두 번의 분할을 거치면서 각 공동 상속인에게 주어진 토지는 작았다. 앨버말 백작 윌리엄 드 포르 4세는 수석 공동 상속인의 남편이었는데, 체스터 백작령이 팔라틴 백작령으로서 분할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지만, 이 주장은 국왕의 법원에서 기각되었다. 결국, 국왕 자신은 공동 상속인과의 일련의 토지 교환을 통해 체스터 백작령에 부속된 모든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다.[5]

3. 4. 플랜태저넷 왕조

최초의 아일랜드 백작위는 1205년 잉글랜드 왕이자 아일랜드 영주인 존 1세가 노르만 기사 휴 드 레이시에게 수여한 얼스터 백작이었다. 다른 초기 백작위로는 캐릭 백작 (1315년), 킬데어 백작 (1316년), 데스몬드 백작 (1329년) 및 워터포드 백작 (1446년, 현존) 등이 있었다.

4. 아일랜드

영국아일랜드에서 백작(Earl)은 다른 언어로 다음과 같이 번역된다.

5. 스코틀랜드

영국아일랜드의 다른 언어에서는 이 용어가 스코틀랜드 게일어로 iarlaga, 스코트어로 erlesco, eirlesco 또는 earlesco로 번역된다.[1]

6. 웨일스

영국아일랜드에서 백작(earl)이라는 용어는 웨일스어로는 iarllcy, 아일랜드어스코틀랜드 게일어로는 iarlaga, 스코트어로는 erlesco, eirlesco 또는 earlesco, 콘월어로는 yurl, yarl, yerlkw로 번역된다.

7. 영국

백작 작위는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 영국 총리가 서임되는 귀족 작위의 기본 등급이 되었다. 백작 작위를 수락한 마지막 총리는 1984년 스톡턴 백작이 된 해럴드 맥밀런이었다.

8. 상징 및 호칭

영국 백작은 여덟 개의 딸기 잎(네 개가 보임)과 테두리를 따라 여덟 개의 색 공(또는 진주)(다섯 개가 보임)이 있는 을 착용할 자격이 있다. 실제 관은 새로운 군주의 대관식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착용되지 않지만, 문장학에서 백작은 그의 문장 방패 위에 그의 계급 관을 올릴 수 있다.[1]

백작은 작위가 지명에서 유래한 경우 '[X] 백작'(Earl of [X])이라는 칭호를 가지며, 성씨에서 유래한 경우에는 '[X] 백작'(Earl [X])이라는 칭호를 갖는다. 어느 경우든, 그는 '로드 [X]'(Lord [X])로 불리고, 그의 아내는 '레이디 [X]'(Lady [X])로 불린다. 자신의 권리로 백작위를 소유한 백작 부인 역시 '레이디 [X]'(Lady [X])를 사용하지만, 그녀의 남편은 (자신의 권리로 작위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작위를 갖지 않는다.[1]

스코틀랜드 귀족 작위에서는, 예우 작위가 관련되지 않은 경우, 백작위 상속자는 '[X]의 마스터'(Master of [X])로 불린다.[1]

8. 1. 관(Coronet)

영국 백작의 관


영국 백작은 여덟 개의 딸기 잎(네 개가 보임)과 테두리를 따라 여덟 개의 색 공(또는 진주)(다섯 개가 보임)이 있는 을 착용할 자격이 있다. 실제 관은 새로운 군주의 대관식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착용되지 않지만, 문장학에서 백작은 그의 문장 방패 위에 그의 계급 관을 올릴 수 있다.

8. 2. 호칭 (Forms of address)

백작은 작위가 지명에서 유래한 경우 '[X] 백작'(Earl of [X])이라는 칭호를 가지며, 성씨에서 유래한 경우에는 '[X] 백작'(Earl [X])이라는 칭호를 갖는다. 어느 경우든, 그는 '로드 [X]'(Lord [X])로 불리고, 그의 아내는 '레이디 [X]'(Lady [X])로 불린다. 자신의 권리로 백작위를 소유한 백작 부인 역시 '레이디 [X]'(Lady [X])를 사용하지만, 그녀의 남편은 (자신의 권리로 작위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작위를 갖지 않는다.

백작의 장남은 비록 귀족은 아니지만, 예우 작위를 사용할 권리가 있으며, 보통 그의 아버지의 더 낮은 작위 중 가장 높은 것을 사용한다(만약 있다면). 예를 들어, 웨섹스 백작의 장남은 그의 아버지가 에든버러 공작으로 승격되기 전에는 제임스, 세번 자작으로 불렸다. 백작의 장남의 장남은 할아버지의 더 낮은 작위 중 하나, 보통 두 번째로 높은 더 낮은 작위를 사용할 권리가 있다. 차남 이하의 아들들은 ''명예로운'' ['이름'] ['성'](The Honourable ['Forename'] ['Surname'])으로 불리고, 딸들은 ''레이디'' ['이름'] ['성'](The Lady ['Forename'] ['Surname'])으로 불린다. (레이디 다이애나 스펜서는 잘 알려진 예시이다).

백작의 자녀와, 자신의 권리로 백작위를 가진 백작 부인의 자녀에게 주어지는 예우 작위에는 차이가 없으며, 백작 부인의 남편이 그녀보다 낮은 계급을 가지고 있는 경우에 한정된다. 만약 그녀의 남편이 더 높은 계급을 가지고 있다면, 그들의 자녀들은 그의 계급에 따라 작위를 받게 된다.

스코틀랜드 귀족 작위에서는, 예우 작위가 관련되지 않은 경우, 백작위, 그리고 사실 어떤 계층의 귀족 작위의 상속자도 '[X]의 마스터'(Master of [X])로 불리며, 그 다음 아들들은 ''명예로운 [이름 성]''(The Honourable [Firstname Surname])으로 불린다.

참조

[1] 웹사이트 Earl http://www.collinsdi[...] Collins Dictionary 2014-09-23
[2] 웹사이트 Earl https://www.oed.com/[...] 2020-03-24
[3] 웹사이트 Dictionaries of the Scots Language:: DOST :: erle n https://www.dsl.ac.u[...]
[4] ODNB Eadric [Edric] Streona
[5] ODNB Godwine [Godwin], earl of Wessex (d. 1053), magnate https://www.oxforddn[...]
[6] 웹사이트 The Godwine charter, granting to Leofwine the Red the swine-pasture of Swithraedingden (probably Southernden, Kent) for the rent of forty pence and two pounds and an allowance of corn, in Anglo-Saxon, single-sheet document on vellum [Kent (probably Christ Church, Canterbury), 1013-20] https://www.sothebys[...] 2024-05-14
[7]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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