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 만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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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남 만인소는 1792년부터 1881년까지 총 7차례에 걸쳐 작성된 만인소 중 하나로, 특히 1881년 이만손 등이 올린 상소를 지칭한다. 이만손 등 영남 유생들은 김홍집이 가져온 《조선책략》의 내용을 비판하며, 개화 정책에 반대하고 서학을 배척하며 김홍집을 처벌할 것을 요구했다. 이러한 상소는 위정척사 운동의 확산에 영향을 미쳤으며, 조선의 개화 정책과 관련된 갈등을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만인소는 조선 시대에 유생들이 집단적으로 올린 상소로, 정치적 현안에 대한 여론을 반영하고 사회적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880년 8월, 2차 수신사로 일본에 갔던 김홍집은 귀국하면서 황준헌(황쭌셴)이 쓴 《조선책략》을 가져왔다. 황준헌은 조선책략에서 러시아를 막는 것이 조선의 가장 급한 일이며, 이를 위해 중국, 일본, 미국과 연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
1880년 10월 1일, 병조정랑 유원식은 2차 수신사로 귀국한 김홍집을 탄핵하는 상소문을 올렸으나, 조정을 비방했다는 죄목으로 평안도 철산부로 유배되었다.[1] 이는 위정척사론자들에게 김홍집 개인에 대한 공격과 아울러 개항 이후 무분별한 문호개방정책을 추진한 정부의 실정을 규탄하는 빌미가 되었다.
2. 배경
조선책략은 조선의 개화 정책 추진에 영향을 주었으나, 1881년 이만손을 중심으로 하는 경상도 지역 유생들은 정부의 개화 정책에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렸다.[1]
2. 1. [[조선책략]]과 그 영향
1880년 8월, 제2차 수신사로 일본에 갔던 김홍집이 귀국하면서 청나라 외교관 황준헌(황쭌셴)이 쓴 《조선책략》을 가져와 퍼뜨렸다. 《조선책략》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1]
《조선책략》이 퍼지면서 고종과 대신, 관료들은 미국과 수교하는 데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1881년(고종 16년)에 유생 이만손을 중심으로 하는 경상도 지역 유생들이 정부의 개화 정책에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리기도 하였다.[1]
2. 2. 국제 정세와 러시아의 남하 정책
1880년 8월, 2차 수신사로 일본에 갔던 김홍집이 귀국하면서 청나라 외교관 황준헌이 쓴 《조선책략》을 가져와 유포하였다. 《조선책략》은 러시아를 막는 것을 가장 시급한 과제로 제시하며, 이를 위해 중국, 일본, 미국과 연합하여 스스로의 힘을 길러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1]
《조선책략》의 유포는 고종과 대신, 관료들이 미국과 수교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1] 그러나 1881년, 이만손을 비롯한 경상도 유생들은 정부의 개화 정책에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렸다.[1]
3. 영남 만인소 운동의 전개
1881년 2월 26일, 경상도 예안의 유생 이만손을 필두로 영남 유생들이 만인소를 올렸다.[1] 이들은 상소에서 김홍집이 가져온 《조선책략》에 대해 "머리카락이 곤두서고 쓸개가 흔들리며 통곡하고 눈물을 흘렸다"고 표현하며, 청나라, 일본, 미국과 연합하여 러시아 제국을 견제한다는 주장을 비판했다. 또한, 천주교에 대해 "우리에게는 예로부터 좋은 법과 훌륭한 규칙이 있으므로 서학에 종사할 필요가 없다"고 반박하며, 황준헌을 "일본의 앞잡이이며 야소(耶蘇)의 충실한 신봉자"라 비난하고, 김홍집 처벌과 조선책략을 불태울 것을 주장했다.[1]
이 상소는 김홍집을 탄핵하는 동시에 정부를 공격하는 글이기도 했다. 이에 민씨 정권은 이만손에게 주의를 주고, 3월에 재차 상소를 기도하자 신지도(薪智島)로 유배시키고, 나머지 사람들은 교외로 축출했다.[1] 그러나 영남만인소로 촉발된 위정척사운동은 전국적인 유생들의 운동으로 확산되어 갔다.[1]
3. 1. 유원식의 상소와 그 영향 (1880년)
1880년 10월 1일, 병조정랑 유원식은 2차 수신사로 귀국한 김홍집을 탄핵하는 상소문을 올렸으나, 조정을 비방했다는 죄목으로 평안도 철산부로 유배되었다.[1] 이는 개항 이후 무분별한 문호개방정책을 추진한 정부의 실정을 규탄하는 동시에, 위정척사론자들에게 김홍집 개인에 대한 공격 빌미를 제공했다.[1]
그 후 1881년 2월 26일, 경상도 예안의 유생 이만손을 필두로 하는 영남유생들이 만인소를 올렸다.[1] 이 상소는 김홍집을 탄핵하는 동시에 정부를 공격하는 글이기도 했다.[1] 유생들은 상소문에서 김홍집이 가져온 《조선책략》에 대해 "저절로 머리카락이 곤두서고 쓸개가 흔들리며 통곡하고 눈물을 흘렸다"고 표현하며, 청나라, 일본, 미국과 연합하여 러시아 제국을 견제한다는 주장을 비판했다.[1]
또한, 서학(천주교)에 종사하여 치재(致財)·권농(勸農)·통공(通工)에 진력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에게는 고래로 양법(良法) 선규(善規)가 있으므로 서학에 종사할 필요가 없다"고 반박하며, "황준헌이란 자는 중국인이라 하지만 일본의 설객이며 야소(耶蘇)의 선신(善神)이며, 그와 같은 사서(邪書)를 가져온 김홍집을 처벌하고 그 책자를 불 속에 던져 위정척사의 대도(大道)를 명시하라"고 주장했다.[1]
이에 민씨 정권의 중심 인물인 민태호는 이만손에게 주의를 주었고, 3월에 재차 상소를 기도하자 이만손을 체포하여 전라도 강진현 신지도(薪智島)로 유배시키고, 나머지 사람들은 교외로 축출했다.[1] 그러나 영남만인소로 촉발된 위정척사운동은 전국적인 유생들의 운동으로 확산되어 갔다.[1]
3. 2. 이만손 등 영남 유생들의 상소 (1881년)
1880년 10월 1일, 병조정랑 유원식이 2차 수신사로 귀국한 김홍집을 탄핵하는 상소문을 올렸으나, 조정을 비방했다는 죄목으로 평안도 철산부로 유배되었다.[1] 그 후 1881년 2월 26일, 경상도 예안의 유생 이만손을 필두로 하는 영남 유생들이 '만인소'(1만 명의 상소라는 뜻)를 올렸다.[1]
이들은 상소문에서 수신사 김홍집이 가져온 《조선책략》이 유포되는 것을 보고 "저절로 머리카락이 곤두서고 쓸개가 흔들리며 통곡하고 눈물을 흘렸다"고 표현하며, 청나라, 일본, 미국과 연합하여 러시아 제국을 견제한다는 주장의 불합리함을 지적했다.[1]
또한 유생들은 천주교에 종사하여 재물 모으기, 농사 권장, 기술 장려 등에 힘쓴다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에게는 예로부터 좋은 법과 훌륭한 규칙이 있으므로 서학에 종사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더불어 황준헌에 대해 "중국인이라 하지만 일본의 앞잡이이며, 야소(耶蘇)의 충실한 신봉자"라고 비판하며, "그와 같은 사악한 책을 가져온 김홍집을 처벌하고 그 책자를 불 속에 던져 위정척사의 큰 도리를 명확히 하라"고 주장했다.[1] 이 상소문은 김홍집을 탄핵하는 동시에 정부를 공격하는 글이기도 했다.[1] 이에 민씨 정권의 중심 인물인 민태호는 이만손을 불러 주의를 주었다.[1] 그리고 이들이 3월에 재차 상소를 기도하자 결국 이만손을 체포하여 전라도 강진현 신지도(薪智島)로 유배시키고, 나머지 사람들은 교외로 축출했다.[1]
3. 3. 정부의 대응과 위정척사 운동의 확산
1880년 10월 1일, 병조정랑 유원식은 김홍집을 탄핵하는 상소문을 올렸으나, 조정을 비방했다는 죄목으로 평안도 철산부로 유배되었다.[1] 1881년 2월 26일, 경상도 예안의 유생 이만손을 필두로 하는 영남유생들이 《만인소》를 올리자, 민태호는 이만손을 불러 주의를 주었다.[1] 이들이 3월에 재차 상소를 기도하자 결국 이만손은 전라도 강진현 신지도(薪智島)로 유배되고, 나머지 사람들은 교외로 축출되었다.[1]
그러나 영남만인소로 촉발된 위정척사운동은 전국적인 유생들의 운동으로 확산되어 갔다.[1]
4. 만인소의 역사와 종류
1792년 처음 등장한 만인소는 조선 시대에 총 7차례 씌어졌다.[2] 만인소는 수많은 사람이 연명하여 상소를 올리는 형태로, 가까운 중국이나 일본을 비롯해 전 세계적으로도 유래가 없는 일이었다.[2] 현존하는 만인소는 사도세자 추존 만인소와 복제 개혁 반대 만인소 두 가지다.[2]
4. 1. 만인소의 기원과 의미
1792년 처음 등장한 만인소는 총 7차례 씌어졌다. 그 가운데 현존하는 만인소는 사도세자 추존 만인소와 복제 개혁 반대 만인소 두 가지다. 만인소와 같은 연대에 서명 상소는 가까운 중국이나 일본을 비롯해 전 세계적으로도 유래가 없는 일이었다.[2]4. 2. 역대 주요 만인소
1792년 처음 등장한 만인소는 18세기 후반부터 총 7차례 작성되었다.[2] 현존하는 만인소는 '사도세자 추존 만인소'와 '복제 개혁 반대 만인소' 두 가지다.[2] 만인소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연명하여 상소를 올리는 것은 가까운 중국이나 일본을 비롯해 전 세계적으로도 유래가 없는 일이었다.[2]순서 | 연도 | 내용 |
---|---|---|
1차 영남만인소 | 1792년 | 사도세자의 무죄를 주장하고, 군주의 권한 강화와 개혁을 요구했다. |
2차 영남만인소 | 1792년 | 1차 만인소에 대한 정조의 긍정적인 반응에 고무되어 다시 한번 사도세자 문제를 제기했다. |
서얼 차별 철폐 만인소 | 1823년 | 서얼에 대한 차별을 철폐하고 능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할 것을 요구했다. |
사도세자 추존 만인소 | 1855년 | 사도세자를 추존할 것을 청원하는 내용이었다. |
영남 만인소 | 1881년 | 김홍집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유배된 유원식 사건에 반발하여 이만손 등 영남 유생들이 올린 상소였다. |
4. 2. 1. 1차 영남만인소 (1792년)
1792년 정조 16년 윤 4월 27일, 영남 선비들 만 명이 넘는 인원이 연명한 상소가 올라왔다. 조선왕조 역사상 상소 하나에 1만 명 이상이 서명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상소의 내용은 사도세자가 영조에게 충성했을 뿐 아무런 죄가 없다는 것을 선포하여, 군주의 권한을 강화하고 강력한 개혁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3]1788년(정조 12년) 8월부터 영남 선비들은 이인좌의 난에 영남인이 동조했다는 것에 대한 항변으로 연명상소를 올리기 위해 1만 5천 명이 모여 복합 서명하였으나, 승정원에서 봉소(捧疏)해주지 않았다. 그해 11월 왕이 안동 도산서원을 방문했을 때 소두 이진동이 신문 밖에서 대전별감을 통해 상소를 올렸다. 이진동의 상소는 기사환국(1689) 이후 영남 남인의 형편과 무신란 당시 영남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등 수십 년간 묻혀있던 정치적인 문제들을 언급한 내용이었다.
1792년 윤 4월, 영남 선비들은 남인과 가까웠던 홍문관 관원 김진동을 통해 만인소를 전달했다. 왕에게 직접 상소를 전달하려면 관직에 있거나 근기지역 양반이어야 가능성이 높았다. 또한 왕에게 보내는 상소의 소두[4]는 최소 5품 이상의 홍문관, 예문관의 현직 관원이거나 전직 관원 출신이어야 했다. 그러나 상소의 소두 이우는 아버지가 참봉과 교관을 지낸 인물로, 이에 해당되지 않았다. 하지만 홍문관 관원 김진동을 통해 상소가 정조에게 전달되면서, 왕에게 보내는 상소의 소두는 최소 5품 이상의 홍문관, 예문관 현직 또는 전직 관원 출신이어야 한다는 전례가 깨지게 되었다.
상소는 이인좌의 난 당시 영남 선비들이 자발적으로 반란군과 싸웠으며, 반란군은 소론과 남인 과격파이고 영남과는 무관한 충청도 출신이었다는 점을 전제했다. 이어 영남 사림들이 임오의리 문제(사도세자 아사 문제)의 진실을 알고 있으나 노론의 탄압으로 비밀리에 간직하던 중, 30여 년이 지나도록 감히 입을 열지 못하였다고 했다. 그러다 안동 도산서원을 방문한 정조를 여악과 향락을 찾으러 갔다는 유성한의 흉소와, 윤구종이 "우리 노론은 경종에게는 신하의 의리가 없다"라는 망언을 전해 듣고 상경했다고 밝혔다. 또한 사도세자의 평소 현명한 언행과 학식으로 보아 정신이상자일 리가 없고, 세자와 영조의 원만한 관계를 언급하면서, 벽파의 반역 사악한 무리들에 의해 이간질당하고 끝내 원통하게 죽었으니, 마땅히 사도세자에게 누명을 씌운 역도들을 찾아내 처단,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임오의리문제는 부자 또는 조손 간의 차마 말하지 못하고 차마 듣지 못하는 사안이지만,[5] 영조가 금등 문서를 남긴 것처럼 충역을 가리고 시비곡직을 가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더 차원 높은 효와 의리를 찾을 수 있다고 하였다. 또한 전하께서 영남을 특별히 잊지 않고 권념해 주시고 파격적인 예우를 해주시니, 영남의 사림들은 모두 전하를 위해 몸 바쳐 보답할 각오가 되어 있으므로 선세자(先世子, 사도세자)를 위해 왕에게 아부하기 위하여 변무하는 것이며, 죽음을 무릅쓰고 직간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유성한·윤구종의 경종에 대한 불충은 선세자에 대한 불충과 다를 바 없으니, 여러 신하의 주청대로 그들을 역률로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상소를 읽고 정조는 말을 잇지 못하고 오열하였다. 정조는 소두에게 상을 내리고 상소를 소중히 간직했다. 이는 노론 벽파에게 충격적인 상소였다.
4. 2. 2. 2차 영남만인소 (1792년)
1792년(정조 16년) 5월 7일에 올라온 2차 영남 만인소는 1차 영남 만인소에 정조가 깊이 공감하자 10,368명이 연명한 상소였다.[1] 정조는 1차 영남 만인소에 감격하였고, 이에 고무된 영남 유생들은 다시 1만 명이 넘는 연명 상소를 올렸다.[1] 정조는 특별히 이우에게 참봉직을 제수하였다.[1] 그러나 정조는 김한동·이우 등을 불러 대면하였으나 목이 메어 제대로 대화할 수 없었고, 이들에게 여비를 주어 고향으로 되돌려 보냈다.[1] 결국 3차 상소를 준비하던 유생들은 정조의 간곡한 설득으로 귀향하게 되었다.[1]4. 2. 3. 서얼 차별 철폐 만인소 (1823년)
1823년 순조 23년에 경기, 호서, 호남, 영남, 해서, 관동의 유생 9,996명이 庶孼|서얼중국어도 차별없이 임용할 것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6]4. 2. 4. 사도세자 추존 만인소 (1855년)
1855년 철종 6년 이휘병을 소수(疏首)로 하여 사도세자 추존을 청원하는 내용으로 봉헌된 '만인소'이다.[6] 경북 안동에 위치한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문화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길이는 99.25m이다.4. 2. 5. 영남 만인소 (1881년)
1881년 고종 16년 2월 26일, 경상도 예안의 유생 이만손을 필두로 하는 영남 유생들이 《만인소》를 올렸다.[6] 이는 김홍집이 귀국하고 1개월 뒤인 1880년 10월 1일, 병조정랑 유원식이 김홍집을 탄핵하는 상소문을 올렸으나, 조정을 비방했다는 죄목으로 평안도 철산부로 유배되자 이에 반발하여 올린 것이다.5. 역사적 평가 및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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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1]
서적
정조실록
[2]
뉴스
1만명 유생의 서명, 100m 상소문 ‘만인소’란?(역사스페셜)
http://www.newsen.co[...]
[3]
웹인용
영남만인소
https://web.archive.[...]
2011-01-04
[4]
문서
대표자
[5]
인용구
[6]
블로그
만인소
http://blog.naver.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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