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보 동맹
1. 개요
영보 동맹은 1756년 영국과 프로이센 간에 체결된 동맹으로, 당시 유럽의 세력 균형 유지를 목표로 했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이후 오스트리아가 프랑스와 동맹을 맺자, 영국은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와 웨스트민스터 조약을 맺고 하노버에 대한 프랑스의 공격을 막으려 했다. 이 동맹은 7년 전쟁 동안 프로이센에 대한 영국의 재정 지원을 포함했으며, 엠덴 탈환과 같은 군사적 협력도 이루어졌다. 그러나 7년 전쟁 말기, 영국의 지원 축소로 인해 동맹은 붕괴되었고, 이후 미국 독립 전쟁 시기에도 양국은 동맹을 맺지 못했다. 이후 관계가 회복되어 프랑스 혁명 시기 대프랑스 동맹에 참여했으나, 영국에 대한 프로이센의 불신은 장기간 지속되었다.
| 동맹명 | 영보 동맹 |
|---|---|
| 다른 이름 | 1756년 동맹 |
| 유형 | 군사 동맹 |
| 체결 | 1756년 1월 16일 |
|---|---|
| 종료 | 1762년 |
| 존속 기간 | 6년 |
| 주요 동맹국 |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프로이센 왕국 |
|---|
| 주요 원인 | 외교 혁명 (1756) 오스트리아-영국 동맹 관계 종료 프로이센의 외교적 고립 심화 |
|---|
| 주요 목표 | 유럽 대륙에서의 세력 균형 유지 프로이센의 안전 보장 하노버 보호 |
|---|
| 주요 분쟁 | 7년 전쟁 (1756년 ~ 1763년) |
|---|---|
| 역할 | 프로이센에 대한 재정 지원 하노버 방어 |
| 주요 결과 | 프로이센의 7년 전쟁 지속 능력 강화 영국과 프로이센 간의 관계 강화 유럽 외교 질서 재편 |
|---|---|
| 해산 | 표트르 3세의 친프로이센 정책 러시아의 7년 전쟁 이탈 영국, 프로이센에 대한 재정 지원 중단 |
| 주요 인물 | 조지 2세 프리드리히 2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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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6년 조약 -
웨스트민스터 조약
웨스트민스터 조약은 1462년부터 1756년까지 잉글랜드-스코틀랜드 귀족, 영국-네덜란드, 영국-프로이센 간에 체결된 여러 조약들을 지칭하며, 영국의 해상 패권, 유럽 세력 균형, 식민지 경쟁 등 다양한 목표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
영국-프로이센 관계 -
영보 협정
영보 협정은 7년 전쟁 중 영국과 프로이센이 체결하여 상호 지원과 유럽 내 세력 균형 유지를 약속한 동맹 협정으로, 영국은 프로이센에 보조금을 지급하고 엠덴에 군대를 주둔시키며, 프로이센은 하노버 방어를 위한 군대를 지원하기로 했다. -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의 조약 -
제이 조약
제이 조약은 미국 독립 전쟁 후 미해결 문제를 해결하고 미영 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해 1794년 미국과 영국이 체결한 조약으로, 미국 내에서 논쟁을 일으키고 정치적 갈등을 심화시켰다. -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의 조약 -
영보 협정
영보 협정은 7년 전쟁 중 영국과 프로이센이 체결하여 상호 지원과 유럽 내 세력 균형 유지를 약속한 동맹 협정으로, 영국은 프로이센에 보조금을 지급하고 엠덴에 군대를 주둔시키며, 프로이센은 하노버 방어를 위한 군대를 지원하기로 했다.
2. 성립 배경
18세기 초, 영국은 오스트리아와 영오 동맹을 맺고 있었고, 프로이센은 프랑스와 동맹 관계에 있었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이후, 오스트리아는 슐레지엔을 프로이센에 빼앗겼다. 황후 마리아 테레지아는 이 지역을 되찾기 위해 영국의 지원을 요청했으나, 영국은 이를 거부했다. 이에 마리아 테레지아는 영국에 실망하여 1756년에 프랑스와 동맹을 맺는 '외교 혁명'을 단행했다.
유럽 대륙에서 주요 동맹국을 잃은 영국은 세력 균형을 유지하고 전쟁을 막기 위해 프로이센과 동맹을 맺었다. 당시 영국의 유력 정치인 대 피트는 프로이센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2.1. 웨스트민스터 조약 (1756년)
1756년 1월 16일,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와 그레이트브리튼의 조지 2세 (하노버 선제후 자격) 사이에 체결된 중립 조약이다. 영국은 하노버에 대한 프랑스의 공격을 우려하여 이 조약을 체결했다. 조약에 따르면 프로이센과 그레이트브리튼은 외국 군대가 신성 로마 제국을 통과하는 것을 막기 위해 노력하기로 했다. 이는 외교 혁명의 일부였다.
1731년 이후 영국은 프로이센의 적국인 오스트리아와 영오 동맹을 맺고 있었고, 프로이센은 영국의 적국인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있었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 오스트리아가 슐레지엔을 잃자,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는 영국의 지지를 얻어 이를 되찾기 위한 군사 행동을 일으키려 했다. 영국이 지지를 거부하자, 마리아 테레지아는 영국에 실망하여 1756년에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다. 갑작스럽게 대륙 유럽에서의 동맹국을 잃은 영국은 당황하여 프로이센 왕국의 프리드리히 2세와 동맹을 다시 맺고, 유럽에서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여 전쟁을 막으려 했다. 또한 영국에서는 대 피트 등이 열렬히 프로이센을 지지했다.
3. 7년 전쟁 (1756년 ~ 1763년)
프리드리히 2세는 영국이 전쟁을 피하려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1756년 8월 오스트리아를 선제 공격하여 작센과 보헤미아를 점령했다. 그러나 프랑스, 오스트리아, 스웨덴, 러시아의 맹공을 받아 철수해야 했다. 1757년까지 영국의 지원이 없으면 프로이센이 붕괴될 것이 분명해졌다. 프리드리히 2세의 군대는 정예병이었고 군기도 좋았지만, 자금이 부족했다.
1759년 이후 전쟁은 영국과 프로이센에게 매우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영국은 1759년 '기적의 해'를 경험하며 유럽, 북아메리카, 아시아에서 프랑스를 격파했고, 프랑스의 본토 침공 계획도 격퇴했다. 1762년에는 스페인이 참전했지만 영국에 연이어 패배했고, 같은 해 러시아의 여제 엘리자베타가 사망하면서 러시아는 전쟁에서 이탈했다.
3.1. 영국의 지원
프리드리히 2세는 영국이 전쟁을 피하려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1756년 8월 오스트리아를 선제 공격하여 작센과 보헤미아를 점령했다. 그러나 프랑스, 오스트리아, 스웨덴, 러시아의 맹공을 받아 철수해야 했다. 1757년까지 영국의 지원이 없으면 프로이센이 붕괴될 것이 분명해졌다. 프리드리히 2세의 군대는 정예병이었고 군기도 좋았지만, 자금이 부족했다.
이 때문에 영국은 1758년 4월 11일 영보 협정을 체결하여 막대한 지원금을 보내기 시작했고, 단독으로 강화하지 않을 것을 약속했다. 엠덴이 프랑스에서 탈환되자 영국군은 프로이센 군인 페르디난트 공자와 함께 엠덴에 주둔하여 프로이센 서부를 지켰고, 프리드리히 2세는 오스트리아와의 전투에 집중할 수 있었다. 또한, 하노버 정부는 프로이센의 압력으로 클로스터-체벤 협정을 파기하고 다시 프로이센과 동맹을 맺고 전투에 참여했다. 그러나 연합군이 민덴 전투 등에서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프로이센은 1759년에 붕괴 직전에 이르렀다.
3.2. 전황의 변화
1759년 이후 전쟁은 영국과 프로이센에게 매우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영국은 1759년 '기적의 해'를 경험하며 유럽, 북아메리카, 아시아에서 프랑스를 격파했고, 프랑스의 본토 침공 계획도 좌절시켰다. 1762년에는 스페인이 참전했지만 영국에 연이어 패배했고, 같은 해 러시아의 여제 옐리자베타가 사망하면서 러시아는 전쟁에서 이탈했다.
4. 동맹의 붕괴와 이후
1762년, 영국은 재정난으로 프로이센에 대한 지원을 줄이고 군대를 철수시켰다. 영국은 파리 조약을 통해 프랑스와 스페인으로부터 식민지를 획득했고, 프로이센은 슐레지엔을 확보했지만 추가적인 영토 확장은 없었다. 양국은 각각 단독 강화를 맺었고, 이후 관계는 악화되었다.
미국 독립 전쟁과 프랑스 혁명 시기에 양국은 다시 협력 관계를 회복하기도 했지만, 영국에 의한 동맹 해체는 프로이센에게 영국에 대한 불신을 심어주었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19세기 후반, 프로이센인들이 프리드리히 대왕을 버린 일 때문에 여전히 영국을 불신한다고 기록했다.
4.1. 미국 독립 전쟁 시기
미국 독립 전쟁 당시 영국은 프로이센에 동맹을 제안했지만, 프로이센은 이를 거절했다. 대신 프로이센은 무장 중립 동맹과 1764년 러시아-프로이센 동맹을 맺었고, 영국은 외교적으로 고립되었다.
4.2. 관계 회복
미국 독립 전쟁 이후, 영국과 프로이센 양국은 다시 관계를 회복했다. 1787년 바타비아 혁명에 협력했고, 1788년 네덜란드 공화국과 함께 삼국 동맹을 체결했다. 프랑스 혁명 발발 이후, 양국은 대프랑스 동맹에 참여하여 협력했다.
5. 평가 및 영향
영보 동맹은 7년 전쟁에서 양국이 승리하고 강대국으로 성장하는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1762년 영국이 일방적으로 동맹을 해체하고 프로이센을 버렸다는 인식은 19세기 후반까지 프로이센인들 사이에 남아 있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뷰트 백작이 프로이센을 파괴하려는 음모를 꾸몄다고 비난했다.
7년 전쟁 이후 몇 년 동안 양국 관계는 악화되었다. 프로이센은 미국 독립 전쟁 전과 도중에 영국이 제안한 동맹을 거부했다. 프로이센은 대신 1764년 러시아-프로이센 동맹을 체결했고, 영국은 외교적으로 고립되었다.
미국 독립 전쟁 이후, 영국과 프로이센은 다시 긴밀한 관계를 회복했다. 1787년 네덜란드 애국당 봉기 동안 협력했으며, 1788년 삼국 동맹의 일원이 되어 네덜란드 공화국과 동맹을 맺었다. 프랑스 혁명 발발 후, 영국과 프로이센은 프랑스에 대항하여 결성된 여러 연합에 참여했다.
19세기 후반,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인들이 프리드리히 대왕을 버린 일 때문에 여전히 영국을 불신한다고 기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