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피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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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르피즘은 입체주의에서 파생된 예술 운동으로, 순수한 서정적 추상을 지향하며 형태와 색채에 집중하여 인식 가능한 대상을 제거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신인상주의의 색채 이론과 상징주의의 오르페우스 신화에서 영향을 받았으며, 기욤 아폴리네르가 명칭을 부여했다. 로베르 들로네와 소니아 들로네 부부가 핵심 인물로 활동했으며, 1912년 살롱 드 라 섹시옹 도르를 통해 대중에게 처음 소개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전 해체되었지만, 미국 화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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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피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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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종류 | 미술 운동 |
스타일 | 추상, 입체주의 |
기원 | 프랑스 |
창시자 | 기욤 아폴리네르 |
창립 연도 | 1912년 |
주요 인물 | 로베르 들로네 소니아 들로네 프란티셰크 쿠프카 페르낭 레제 마르셀 뒤샹 |
영향 받은 운동 | 입체주의, 미래주의, 색면 추상 |
영향을 준 운동 | 신조형주의, 절대주의, 구성주의, 오피 아트 |
상세 정보 | |
특징 | 순수 추상 밝은 색채 빛 색의 동시성 |
어원 | 그리스 신화의 음악가 오르페 |
관련 용어 | 동시주의 |
미술사적 중요성 | |
영향 | 20세기 초 추상 미술 발전에 기여 |
평가 | 색채와 빛의 표현 실험 시각적 리듬 창조 시도 짧은 존속 기간에도 불구, 미술사에 중요한 위치 차지 |
2. 역사적 배경
오르피즘은 입체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었지만, 순수한 서정적 추상을 지향했다. 상징주의자들은 그리스 신화의 오르페우스를 이상적인 예술가로 보았다. 1907년 기욤 아폴리네르는 오르페우스를 신비롭고 영향력 있는 시인이자 예술가로 묘사한 ''동물지 또는 오르페우스의 행렬''을 썼다. 아폴리네르는 그의 시에서 '빛의 목소리'를 '내면의 경험'에 대한 은유로 사용했다.[2]
2. 1. 입체주의의 영향과 탈피
입체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었지만 순수한 서정적 추상을 지향했던 오르피즘은 예술을 감각과 색채의 통일로 보았다. 감각에 더 관심을 기울였기에, 추상적인 구조로 묘사된 인식 가능한 대상을 시작으로 했다. 오르피즘은 오로지 '형태'와 '색채'에 집중함으로써 인식 가능한 주제를 없애는 것을 목표로 했다. 또한 동시주의의 이상, 즉 끝없이 상호 관련된 존재의 상태를 추구했다.[3]신인상주의의 색채 이론에서 폴 시냐크와 샤를 앙리가 분광광을 분해한 것은 오르피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로베르 들로네, 알베르 글레즈, 지노 세베리니는 모두 앙리를 개인적으로 알고 있었다.[4] 수학자, 발명가이자 미학자인 앙리는 상징주의 작가인 펠릭스 페네옹과 구스타브 칸의 가까운 친구였으며, 쇠라, 시냐크, 피사로와도 알고 지냈다. 이들은 1886년 제8회이자 마지막 인상주의 전시회에서 만났다. 앙리는 '감정 연상 이론'을 예술 영역으로 가져왔고, 이는 신인상주의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앙리와 쇠라는 예술의 기본 요소(선, 색, 형태)를 단어처럼 독립적으로 취급할 수 있으며, 각자 고유의 추상적 양을 가지고 서로 독립적이거나 예술가의 의도에 따라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데 동의했다. 신인상주의의 근본적인 이론은 들로네의 작품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4] 신인상주의자들은 색채 영역에서 자신들의 회화에 대한 객관적인 과학적 기반을 확립하는 데 성공했지만, 이는 빛의 스펙트럼에 관해서만 해당되었다(페인트 안료의 경우 결과는 덜 과학적이었다). 입체주의자들은 궁극적으로 이 이론을 색채, 형태, 그리고 '역학'에 어느 정도 사용했다.[4]
2. 2. 신인상주의의 색채 이론
신인상주의의 색채 이론, 특히 폴 시냐크와 샤를 앙리의 분광광 분해는 오르피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로베르 들로네, 알베르 글레즈, 지노 세베리니는 모두 앙리를 개인적으로 알고 있었다.[4] 수학자이자 발명가, 미학자인 앙리는 상징주의 작가 펠릭스 페네옹, 구스타브 칸과 가까운 친구였다. 그는 쇠라, 시냐크, 피사로와도 알고 지냈으며, 이들은 1886년 제8회이자 마지막 인상주의 전시회에서 만났다. 앙리는 '감정 연상 이론'을 예술 영역으로 가져왔고, 이는 신인상주의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앙리와 쇠라는 예술의 기본 요소(선, 색, 형태)를 단어처럼 독립적으로 다룰 수 있으며, 각 요소는 고유한 추상적 양을 가지고 서로 독립적이거나 예술가의 의도에 따라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데 동의했다. 페네옹은 1889년에 "쇠라는 선이 지형학적 역할과 별개로, 색채 입자와 감상자의 감정과의 관계 외에도 평가 가능한 추상적 가치를 가지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고 썼다. 신인상주의의 근본 이론은 들로네의 작품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4] 신인상주의자들은 색채 영역에서 자신들의 회화에 대한 객관적인 과학적 기반을 확립하는 데 성공했지만, 이는 빛의 스펙트럼에만 해당되었다(페인트 안료의 경우 덜 과학적이었다). 입체주의자들은 이 이론을 색채, 형태, 그리고 '역학'에 어느 정도 사용했다.[4]2. 3. 상징주의와 오르페우스 신화
상징주의자들은 그리스 신화의 오르페우스를 이상적인 예술가로 인식했다. 1907년 아폴리네르는 오르페우스를 상징주의자처럼 신비롭고 영향력 있는 시인 및 예술가로 묘사한 ''동물지 또는 오르페우스의 행렬''을 썼다. 아폴리네르는 그의 시에서 '빛의 목소리'를 '내면의 경험'에 대한 은유로 사용했다.[2]3. 아폴리네르와 오르피즘
기욤 아폴리네르는 1912년 황금 분할 살롱 강연에서 프란티셰크 쿠프카의 '순수한 회화'를 지칭하며 오르피즘이라는 용어를 처음 언급했다.[5]
3. 1. '순수 회화'의 정의
아폴리네르는 1912년 황금 분할 살롱 강연에서 오르피즘이라는 용어를 언급하며, 프란티셰크 쿠프카의 '순수한 회화'를 지칭했다.[5] 1913년 저서 ''입체파 화가들, 미학적 명상(Les Peintres Cubistes, Méditations Esthétiques)''에서 오르피즘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화가가 시각적 현실에서 가져온 것이 아니라 스스로 완전히 창조한 요소들로 새로운 전체성을 그리는 예술. [...] 오르피즘 화가의 작품은 '평온한 미적 즐거움', 의미 있는 구조, 숭고한 의미를 전달해야 한다." 오르피즘은 문학에 대한 음악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예술 형태를 나타냈다. 이러한 비유는 쿠프카의 ''아모르파: 두 가지 색상의 푸가''(1912), 프란시스 피카비아의 ''근원에서 춤추다''(1912), 바실리 칸딘스키의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1912)와 같은 그림 제목에서 찾아볼 수 있다. 칸딘스키는 소리와 색채의 관계를 설명했고, 로베르 들로네는 색채와 음악에 관심을 가졌으며, 칸딘스키의 요청으로 청기사파와 함께 전시했다. 페르낭 레제와 마르셀 뒤샹의 점점 더 추상적인 그림들도 아폴리네르에 의해 오르피스트로 간주되었다.[2]3. 2. 오르피즘의 특징
기욤 아폴리네르는 1913년 저서 ''입체파 화가들, 미학적 명상(Les Peintres Cubistes, Méditations Esthétiques)''에서 오르피즘을 "화가가 시각적 현실에서 가져온 것이 아니라 스스로 완전히 창조한 요소들로 새로운 전체성을 그리는 예술"이라고 정의하며, 오르피즘 화가의 작품은 '평온한 미적 즐거움', 의미 있는 구조, 숭고한 의미를 전달해야 한다고 묘사했다.[5] 오르피즘은 문학에 대한 음악처럼 새로운 예술 형태를 나타냈는데, 이러한 비유는 프란티셰크 쿠프카의 ''아모르파: 두 가지 색상의 푸가''(1912), 프란시스 피카비아의 ''근원에서 춤추다''(1912), 바실리 칸딘스키의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1912)와 같은 그림 제목에서 찾아볼 수 있다. 칸딘스키는 소리와 색채의 관계를 설명했으며, 로베르 들로네는 색채와 음악에 관심을 가지고 칸딘스키의 요청으로 청기사파와 함께 전시했다. 페르낭 레제와 마르셀 뒤샹의 추상적인 그림들도 아폴리네르에 의해 오르피스트로 간주되었다.[2]4. 주요 전시
오르피즘은 1912년 살롱 드 라 섹시옹 도르 전시회를 통해 처음으로 대중에게 알려졌다.[1] 이후 1913년 3월, 파리 살롱 데 쟁데팡당에 전시되었고, 기욤 아폴리네르는 오르피즘을 옹호하며 큐비즘을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 같은 해 베를린에서 열린 데어 슈투름의 가을 살롱(제1회 독일 가을 살롱)에는 로베르 들로네, 소니아 들로네, 장 메챙제, 알베르 글레즈 등의 작품과 여러 미래주의 작품이 전시되었다.[1]
4. 1. 살롱 드 라 섹시옹 도르 (1912)
1912년 살롱 드 라 섹시옹 도르(Salon de la Section d'Or)는 오르피즘을 일반 대중에게 처음으로 선보인 전시회였다.[1] 1913년 3월, 오르피즘은 파리 살롱 데 쟁데팡당(Salon des Indépendants)에서 전시되었다.[1] 아폴리네르는 《몽주아(Montjoie)》(1913년 3월 29일)에서 살롱을 검토하며 오르피즘을 옹호하며 큐비즘의 폐지를 주장했다. "큐비즘이 죽었다면, 큐비즘 만세. 오르페우스 왕국이 눈앞에 있다!"[1]1913년 베를린에서 데어 슈투름의 헤르바르트 발덴이 조직한 1913년 가을 살롱(제1회 독일 가을 살롱)에는 로베르 들로네와 소니아 들로네의 많은 작품, 장 메챙제의 《푸른 새》(1913년, 파리 시립 근대 미술관), 알베르 글레즈의 《축구 선수들(Les Joueurs de football)》(1912-13, 국립 미술관), 피카비아, 레제의 그림, 그리고 여러 미래주의 작품이 전시되었다.[1] 이 전시회 이후 아폴리네르는 '동시성'의 모호성에 대한 움베르토 보치오니의 언급에 따라 R. 들로네와의 관계가 냉랭해졌다.[1] 아폴리네르는 이후 저술에서 더 이상 오르피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고, 대신 피카비아, 알렉산더 아르키펜코 및 미래주의 개념을 홍보하기 시작했다.[1]
4. 2. 살롱 데 쟁데팡당 (1913)
1913년 3월, 오르피즘은 파리 살롱 데 쟁데팡당에서 전시되었다. 기욤 아폴리네르는 "몽주아(Montjoie)"(1913년 3월 29일)에서 이 전시회를 평론하며 오르피즘을 옹호하고 큐비즘을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큐비즘이 죽었다면, 큐비즘 만세. 오르페우스 왕국이 눈앞에 있다!"[1]4. 3. 데어 슈투름의 가을 살롱 (1913)
헤르바르트 발덴(Herwarth Walden)이 1913년 베를린에서 조직한 데어 슈투름(Der Sturm)의 가을 살롱(제1회 독일 가을 살롱(Erster Deutscher Herbstsalon))에는 로베르 들로네와 소니아 들로네의 많은 작품, 장 메챙제(Jean Metzinger)의 《푸른 새》(1913년, 파리 시립 근대 미술관), 알베르 글레즈(Albert Gleizes)의 《축구 선수들(Les Joueurs de football)》(1912-13, 국립 미술관), 프란시스 피카비아(Francis Picabia), 페르낭 레제(Fernand Léger)의 그림, 그리고 여러 미래주의 작품이 전시되었다.[1] 이 전시회 이후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는 '동시성'의 모호성에 대한 움베르토 보치오니(Umberto Boccioni)의 언급에 따라 R. 들로네와의 관계가 냉랭해졌다.[1] 아폴리네르는 이후 저술에서 더 이상 오르피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고, 대신 피카비아, 알렉산더 아르키펜코(Alexander Archipenko) 및 미래주의 개념을 홍보하기 시작했다.[1]5. 들로네 부부와 오르피즘
로베르 들로네와 소니아 테르크 들로네 부부는 오르피즘 운동의 핵심 인물이었다. 이들은 초기에는 야수파의 영향을 받았으나, 점차 독자적인 화풍을 발전시켰다. 들로네는 피카소의 입체주의가 색채를 제한하고 구상적 이미지를 유지하는 것에 비판적이었으며, 1912년에는 공식적으로 입체주의와 결별했다.[6]
오르피즘은 제1차 세계 대전 이전에 사실상 해체되었지만, 들로네의 제자였던 미국 화가 패트릭 헨리 브루스와 아서 버데트 프로스트는 1912년부터 유사한 형태의 예술을 시도했다. 신색채주의 화가 모건 러셀과 스탠턴 맥도널드-라이트는 들로네 부부의 오르피즘과 차별성을 두기 위해 자체적인 선언문을 작성했다.[7]
5. 1. 초기 작품: 야수파의 영향
로베르 들로네와 그의 아내 소니아 테르크 들로네는 오르피즘 운동의 주요 인물이었다. 그들의 초기 작품은 야수파의 색채에 집중했으며, 소니아의 1907년 작품 《핀란드 소녀》와 로베르의 1906년 작품 《원반 풍경》처럼 다양하게 추상적이었다. 《핀란드 소녀》는 순수한 색채에 의존했고, 《원반 풍경》은 당시 장 메챙제의 영향을 받아 색채와 모자이크와 같은 붓 터치를 사용했는데, 메챙제 역시 신인상주의자(매우 분할주의와 야수파적 요소 포함)였다.[4]5. 2. 입체주의와의 결별
로베르 들로네는 피카소가 정물화의 색상을 갈색과 회색의 차분하고 수수한 톤으로 제한하고, 구상적인 이미지를 유지한 점을 비판하며, 1912년 공식적으로 입체주의와 결별했다.[6]5. 3. 신색채주의 (Synchromism)와의 관계
로베르 들로네와 그의 아내 소니아 테르크 들로네는 오르피즘 운동의 주요 인물이었다. 그들의 초기 작품은 야수파 색채에 집중했으며, 소니아의 1907년 작품인 《핀란드 소녀》와 로베르의 1906년 작품인 《원반 풍경》과 같이 다양하게 추상적이었다. 전자는 순수한 색채에 의존했고, 후자는 당시 장 메챙제의 영향을 받아 색채와 모자이크와 같은 붓 터치를 사용했는데, 메챙제 역시 신인상주의자(매우 분할주의와 야수주의적 요소 포함)였다.[4]들로네는 1912년 공식적으로 입체주의와 결별했는데, 피카소가 정물화의 색상을 갈색과 회색의 차분하고 수수한 톤으로 제한하고, 구상적인 이미지를 유지한 점을 비판했다.[6]
오르피즘은 제1차 세계 대전 이전에 사실상 해체되었지만, 로베르 들로네의 제자였던 미국 화가 패트릭 헨리 브루스와 아서 버데트 프로스트는 1912년부터 유사한 형태의 예술을 시작했다. 신색채주의 화가인 모건 러셀과 스탠턴 맥도널드-라이트는 들로네 부부의 오르피즘과 차별성을 두기 위해 자체적인 선언문을 작성했다.[7]
참조
[1]
웹사이트
Tate Glossary
http://www.tate.org.[...]
2014-07-31
[2]
웹사이트
The Collection | MoMA
https://www.moma.org[...]
[3]
웹사이트
Tate glossary
http://www.tate.org.[...]
2010-12-28
[4]
서적
Neo-Impressionism
The Solomon R. Guggenheim Foundation
1968
[5]
서적
"The Cubist Painters (Les Peintres Cubistes: Méditations esthétiques)"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4-10-25
[6]
웹사이트
Celebrating the Art Movement That Wasn't
https://www.nytimes.[...]
2024-11-28
[7]
서적
Oxford Art Online
https://doi.org/10.1[...]
2003
[8]
웹사이트
Tate gloss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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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28
[9]
문서
ピカソと共に「アンリ・ルソーを讃える宴」を開催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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