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면직
1. 개요
오면직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 1894년 6월 15일 황해도 안악에서 태어났다. 3·1 운동에 참여하고 《조선일보》, 《동아일보》 기자로 활동했으며, 독립군 자금 모금 및 진남포 경찰서 폭탄 투척을 시도했다. 1922년 김구의 지시로 김립을 사살하고, 한국노병회에 가입, 남화한인청년연맹에서 활동하며 친일파 처단에 참여했다. 1934년 한국독립군 특무대장 비서로 활동하다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고 1938년 4월 14일 순국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이미지 준비중입니다.
| 출생 | 1876년 7월 23일 (음력 6월 3일) |
|---|---|
| 사망 | 1945년 8월 15일 |
| 본관 | 능성(綾城) |
| 호 | 해정(海庭) |
|---|
| 주요 경력 | 대한제국 군부 군무국장 대한제국 육군 보병 정령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
|---|
| 맹혈단 조직 | 1919년 |
|---|---|
| 활동 지역 | 만주 |
|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 | 2009년 |
|---|---|
| 훈격 | 건국훈장 애족장 (2022년 추서) |
| 배우자 | 정부인(貞夫人) 경주 이씨(慶州 李氏) |
|---|---|
| 자녀 | 2남 3녀 |
-
아나키스트 -
헨리 데이비드 소로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미국의 작가이자 철학자, 자연주의자로서, 월든 연못에서의 자급자족 생활을 담은 『월든』과 시민 불복종 사상으로 미니멀리즘, 비폭력 저항 운동, 환경 보호 운동 등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미쳤다. -
아나키스트 -
에밀리아노 사파타
에밀리아노 사파타는 1879년 멕시코에서 태어나 농민들의 토지 권리를 위해 멕시코 혁명에 참여하여 남부 해방군을 이끌었고, 농민 자치 정부를 수립했으나 1919년 암살당했으며 멕시코 국민 영웅으로 존경받는다. -
건국훈장 독립장 수훈자 -
현진건
현진건은 일제강점기의 사실주의 소설가로, 대표작으로는 「빈처」, 「술 권하는 사회」, 「운수 좋은 날」 등이 있으며, 일제강점기 언론 탄압을 받기도 했다. -
건국훈장 독립장 수훈자 -
정인승
정인승은 일제강점기 국어학자로서 국어사전 편찬에 기여하고, 해방 후에는 여러 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후학을 양성했으며,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후 건국훈장과 국민훈장을 수훈받았다. -
1894년 출생 -
전영택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소설가이자 개신교 목사인 전영택은 1919년 한국 최초의 문학 동인지 《창조》를 창간하고, 단편소설 〈화수분〉, 〈소〉 등의 대표작을 남겼으며, 개신교 관련 간행물 발행, 중앙신학교 및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 한국문인협회 초대 회장 등을 역임했다. -
1894년 출생 -
김형직
김형직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김일성의 아버지로, 조선국민회에 참여하고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으며, 북한에서는 항일 독립운동 지도자로 추앙받지만 반공주의적 성향을 가졌다는 증언도 있다.
2. 생애
오면직은 1894년 6월 15일 황해도 안악에서 태어나, 1938년 4월 14일 평양감옥에서 순국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1 운동에 참가한 것을 시작으로, 1936년까지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기자로 활동하며 민족주의 인사들과 교류하고 독립군 자금을 모금하거나, 김구의 지시로 김립을 사살하는 등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1937년 체포되어 해주지방법원과 평양복심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38년 평양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2.1. 생애 초반 (1894~1919)
1894년 6월 15일 황해도 안악에서 태어났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대성중학을 중퇴하였고, 공훈전자사료관에 따르면 양산학교 중학부를 중퇴하였다.
경성측량강습소에서 3개월 간 수학한 후, 평양 대성중학에 들어갔지만 중퇴하였다. 1911년 6월 평양 사동광업소 고방(高坊)출장소에서 약 1년간 측량기술 견습으로 근무하였다. 사직 후 귀향하여 농업에 종사하며 구장(區長)을 역임하였다.
1917년경 사동광업소에 다시 취직하고자 평양에 갔다가 1919년 1월경 귀향하였다.
2.2. 독립운동기 (1919~1936)
오면직은 1919년부터 1936년까지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하위 섹션에서 상세히 다루는 내용은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요약할 수 있다.
* 3.1 운동 참여와 언론 활동 (1919~1920): 3·1 운동에 참가하고,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기자로 활동하며 민족주의 인사들과 교류했다. 독립군 자금 모금, 진남포경찰서 폭탄 투척 등의 활동을 했다.
* 상하이 망명과 한국노병회 가입 (1921~1922): 김구의 권유로 한국노병회에 가입하고, 하난성 군관학교에 입학했다.
* 김립 암살 (1922): 김구의 지시로 김립을 사살했다.
* 남화한인청년연맹 활동 (1930~1933): 남화한인청년연맹의 맹원으로 활동하며 친일파 처단에 힘썼다.
* 한국독립군 특무대장 비서 활동 (1934~1935): 김구가 조직한 한국독립군 특무대의 비서로 활동했다.
1935년, 오면직은 김구의 휘하를 떠났다.
2.2.1. 3.1 운동 참여와 언론 활동 (1919~1920)
1919년 3·1운동에 참가하였고, 이후 독립운동에 종사하였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안악지국 기자로 활동하면서, 김동우, 한정교 등 민족주의 인사들과 교류하고 해외에서 들어온 독립신문을 탐독하였다.
1920년 독립군 자금을 모금하고 진남포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였다.
2.2.2. 상하이 망명과 한국노병회 가입 (1921~1922)
1922년 김구와 조상섭의 권유로 한국노병회에 가입하고, 한국노병회 파견원으로 하난성 군관학교에 입학하였다. 그 후 펑위샹이 경영하던 육군병공창(陸軍兵工廠) 좌도부(銼刀部)에 들어갔다.
2.2.3. 김립 암살 (1922)
1921년 9월 23일 베를린에서 코민테른은 한형권에게 '임정의 내부분열 타개'를 조건으로 200000루블을 지원하였다. 한형권은 200000루블을 상하이로 가지고 왔지만 임정에 거의 내지 않고 이동휘 계열끼리만 비밀리에 사용했다. 이에 김구는 김립을 임정 공금 횡령범으로 단정하여 오면직, 노종균을 파견해 1922년 2월 6일 김립을 사살한 것이다.
2.2.4. 남화한인청년연맹 활동 (1930~1933)
1930년 4월 20일 중국 상하이에서 무정부주의운동단체인 남화한인청년연맹이 조직되었다. 남화한인청년연맹은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이 상하이로 철수하여 전투체제로 개편한 단체로, 유자명, 유기석(柳基石, 일명 柳絮), 장도선(張道善), 정해리(鄭海理), 정화암, 안공근, 오면직, 이현근(李炫謹) 등이 맹원(盟員)이었다. 남화한인청년연맹은 김구의 한인애국단과 협력하여 친일부역자들의 처단을 위해 투쟁했다. 1933년 상해에서 일본군과 내통한 옥관빈의 처단과, 엄형순, 이규호(李圭虎)의 친일분자 이용노 처단 등이 그것이다. 그밖에도 친일주구에 대한 총살 처단이 있었다.
2.3. 생애 후반 (1937~1938)
1937년 체포된 오면직은 해주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공소하였으나, 평양복심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었다. 1938년 평양감옥에서 순국하였다.
2.3.1. 체포, 사형 선고 및 순국
체포된 후 국내로 압송되어 1937년 4월 16일 황해도 해주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오면직은 이에 공소하였으나, 평양복심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었다.
1938년 4월 14일 평양감옥 사형장에서 오면직에 대한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3. 상훈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