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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수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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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수알데는 7세기 노섬브리아 왕국의 왕으로, 기독교 전파에 기여하고 성인으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604년경 출생하여 망명 생활을 거쳐 노섬브리아 왕국을 재통일하고 패권을 확립했다. 특히 헤븐필드 전투에서 승리하며 기독교적 가치를 실현하고, 주변 국가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642년 메이서필드 전투에서 머시아의 펜다에게 죽임을 당했으나, 사후 성인으로 추앙받았으며, 그의 유해는 여러 곳으로 옮겨져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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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수알데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더럼 대성당의 성 오수알데 12세기 그림
더럼 대성당의 성 오수알데 12세기 그림
이름오수알데
로마자 표기Osuwalde
영어 표기Oswald
IPA/ˈoːzwɑɫd/
통치
브레트왈다재위 기간: 633년–642년
전임자: 에아드위네 오프 데이라
후임자: 오스위그
데렌리체 국왕재위 기간: 633년–642년
전임자: 오스리치
후임자: 오스위그
베오르니체 국왕재위 기간: 634년–642년
전임자: 에안프리스
후임자: 오스위그
생애
출생604년경, 노섬브리아, 데렌리체
사망641년/642년 8월 5일
배우자퀴네길스 오브 웨식스
자녀에셀왈데 오브 데이라
에셀프리스
아차
종교
종교기독교
전투
참전헤븐필드 전투
메이서필드 전투

2. 초기 생애와 망명

오수알데는 베오르니체애설프리스와 데렌리체 왕녀 아차 사이에서 604년경 태어났다.[44] 부왕 애설프리스는 베오르니체와 데렌리체를 통합한 노섬브리아의 초대 왕으로 여겨지지만, 당시에는 "노섬브리아인"이라는 민족 정체성은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42]

마트하이우스 파리시엔시스의 연대기 삽화(13세기 초)의 우서 펜드래건(좌상), 애설버트(우상), 아서왕(좌하), 오수알데(우하).


애설프리스는 616년 아이들강에서 동앵글인의 왕 래드왈드에게 전사했다.[46] 이로 인해 데렌리체에서 쫓겨났던 왕족이자 오수알데의 외삼촌인 에아드위네가 노섬브리아 국왕이 되면서, 오수알데와 그 형제들은 북쪽의 달 리어타로 망명했다.[46] 오수알데는 달 리어타에서 유년기를 보내며 기독교로 개종했다.[46] 망명 기간 동안 아일랜드섬에서 전투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얼스터 대계의 「다 데르가 여관의 파괴」에 언급되는 세 명의 색슨인 왕자들 중 "오살트(Osalt)"가 오수알데라는 설이 있다.[47][48]

2. 1. 한국과의 연관성 (가상)

3. 노섬브리아의 통일과 패권

633년, 귀네드의 카드왈론 압 카드반과 머시아의 펜다 연합군이 햇필드 추격전에서 에아드위네를 격파하면서 노섬브리아는 다시 분열되었다.[46] 오수알데의 형 앤프리스가 베오르니체 국왕이 되었으나 634년 카드왈론에게 죽었다.[46] 이후 오수알데는 소규모 군대를 이끌고[46](아마 스코트인이나 픽트인 등 북방인들의 도움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49]), 헥삼 근교 헤븐필드에서 카드왈론과 대치했다.

;헤븐필드 전투와 십자가

헤븐필드 전투 직전, 오수알데는 나무 십자가를 세우고 병사들에게 기도를 명했다.[50] 이는 훗날 십자군 원정에서 나타나는 종교적 열정의 초기 형태로 볼 수도 있다. 아돔나누스 히엔시스가 쓴 콜룸바 성인전에는 좀 더 긴 이야기가 있는데, 이오나 수도원장 세게너 막 피어크니가 오수알데 본인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라고 한다. 오수알데는 전투 전날 밤 성자 콜룸바의 환영을 보았으며, 콜룸바가 자신에게 적들이 달아날 것이고 카드왈론은 오수알데의 손아귀에 떨어질 것이며, 전투에 승리하고 행복하게 다스릴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51] 오수알데는 자신의 환영을 신하들에게 이야기했고, 신하들은 전투가 끝난 뒤 자신들도 모두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기로 했다.[52] 이후 벌어진 헤븐필드 전투에서 브리튼인들은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패주했으며, 카드왈론 본인도 전사했다.[46]

600년경 브리타니아의 앵글로색슨인 정착지들.


;노섬브리아의 패권과 펜다

헤븐필드 전투의 승리 이후, 오수알데는 노섬브리아를 재통합하고 에아드위네[53]에 의해 중간에 끊겼던 베오르니체[53]의 지배를 재건했다. 베다는 오수알데가 통치 8년 동안 "패권(임페리움)"을 가졌다고 말하며,[53] 브리튼에서 가장 강력한 왕이었다고 한다. 9세기의 ''앵글로색슨 연대기''에서는 그를 브레트왈다라고 언급한다. 아도므난은 오수알데를 "모든 브리튼의 황제로 신이 임명했다"고 묘사했다.[54]

오수알데는 그 권위의 정도는 불확실하지만, 광범위하게 대군주(overlord)로 인정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베다는 오수알데가 "브리타니아의 모든 국가와 지역을 지배하에 두었다"고 주장하는데, 베다는 언급했듯이 브리타니아는 앵글로색슨인, 브리튼인, 스코트인, 픽트인 사이에서 언어로 분열되어 있었다.[55] 그러나 그는 자신의 역사에서 오수알데의 동생 오스위그픽트인스코트인에게 공물을 바치게 했다고 언급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약화시키는 듯하다.[55] 아일랜드 자료인 티거르나흐 연대기에는 오수알데 통치 초기에 앵글로-색슨족이 연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아마도 험버강 남쪽에서 오수알데의 종주를 끝내려는 시도였을 것이며, 아마도 실패했을 것이다.[56]

머시아는 633년 에아드위네를 패사시키는 데도 참여했던 강국으로,[57] 험버 강 이남에서 오수알데의 권위에 가장 큰 방해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57] 비록 오수알데가 헤븐필드 이후 머시아를 어느 정도 지배했다고 일반적으로 생각되지만, 펜다가 에아드위네의 사로잡힌 아들(오수알데에게는 외사촌이며 왕위의 경쟁자)[57]인 애드프리스를 죽인 것은 오수알데를 달래기 위한 것일 수도 있지만, 펜다가 살해할 만한 자기 동기를 가졌을 수도 있다.[57]

험버 강 바로 남쪽의 소왕국 린데세게는 확실히 오수알데의 통제하에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58] 베다의 기록에서 오수알데의 유골이 린데세게의 수도원으로 이장되었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58] 베다에 따르면 수도사들은 오수알데를 자신들을 지배한 외세의 왕으로 여겨 그 유골을 안치하기를 처음에는 거부했다.[58] 북쪽으로 보면 고도딘을 정복했을 가능성이 있다. 아일랜드 쪽 편년사서들에 보면 638년에 고도딘의 왕도인 에든버러에 대한 공성전이 있었으며, 이 공성전의 결과 고도딘 왕국이 망한 것으로 보이는 기록들이 있기 때문이다.[58] 650년대에 오수알데의 동생 오스위그가 이 일대의 통제권을 가지고 있었음으로 미루어, 이 에든버러 공성전을 오수알데가 주도했을 가능성이 있다.[58]

오수알데는 서색슨인들과는 우호적 관계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서색슨인의 왕 퀴네길스가 세례를 받는 것을 후원했고, 퀴네길스의 딸과 결혼했다.[59] 그 딸의 이름은 12세기의 베네딕토회 수도사 레지널드 더럼이 쓴 오수알데 성인전에만 등장하는데, 퀴네부르가(Kyneburga)라고 기록되어 있다.[60] 오수알데는 아들 외셀왈드를 두었는데,[49] 이 아들이 퀴네길스의 딸의 소생인지 아니면 그 전에 있었을 아내 소생인지는 불확실하다. 외셀왈드는 651년부터 데렌리체를 다스렸는데, 퀴네부르가의 아들이라면 이 때 너무 젊어서 그런 중책을 맡기기는 힘들다.[49] 그렇다면 외셀왈드는 망명시기에 낳은 아들일 것이다.[49]

3. 1. 헤븐필드 전투와 십자가

오수알데는 헤븐필드 전투 직전, 나무 십자가를 세우고 병사들에게 기도를 명했다.[50] 이는 훗날 십자군 원정에서 나타나는 종교적 열정의 초기 형태로 볼 수도 있다. 아돔나누스 히엔시스가 쓴 콜룸바 성인전에는 좀 더 긴 이야기가 있는데, 이오나 수도원장 세게너 막 피어크니가 오수알데 본인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라고 한다. 오수알데는 전투 전날 밤 성자 콜룸바의 환영을 보았으며, 콜룸바가 자신에게 적들이 달아날 것이고 카드왈론은 오수알데의 손아귀에 떨어질 것이며, 전투에 승리하고 행복하게 다스릴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51] 오수알데는 자신의 환영을 신하들에게 이야기했고, 신하들은 전투가 끝난 뒤 자신들도 모두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기로 했다.[52] 이후 벌어진 헤븐필드 전투에서 브리튼인들은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패주했으며, 카드왈론 본인도 전사했다.[46]

600년경 앵글로-색슨족의 일반적인 위치를 보여주는 지도


헤븐필드의 승리 이후, 오수알데는 노섬브리아를 재통합하고 귀네드의 왕 카드왈론과 머시아의 왕 펜다와의 동맹에 의해 햇필드 추격전에서 오수알데의 외삼촌인 에아드위네가 사망하여 중단되었던 버니시아의 지배를 재건했다. 베다는 오수알데가 8년간 "임페리움(패권)"을 행사하여 당대 브리타니아에서 가장 강력한 왕이었다고 기록했다.[53] 9세기의 『앵글로색슨 연대기』에서는 브레트왈다 중 한 명으로 거론되기도 했다. 아돔나누스는 오수알데를 “하나님께서 전브리튼의 황제 되도록 점지하신” 존재라고 기록했다.[54][16]

3. 2. 노섬브리아의 패권과 펜다

헤븐필드 전투의 승리 이후, 오수알데는 노섬브리아를 재통합하고 에아드위네[53]에 의해 중간에 끊겼던 베오르니체[53]의 지배를 재건했다. 베다는 오수알데가 통치 8년 동안 "패권(임페리움)"을 가졌다고 말하며,[53] 브리튼에서 가장 강력한 왕이었다고 한다. 9세기의 ''앵글로색슨 연대기''에서는 그를 브레트왈다라고 언급한다. 아도므난은 오수알데를 "모든 브리튼의 황제로 신이 임명했다"고 묘사했다.[54]

오수알데는 그 권위의 정도는 불확실하지만, 광범위하게 대군주(overlord)로 인정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베다는 오수알데가 "브리타니아의 모든 국가와 지역을 지배하에 두었다"고 주장하는데, 베다는 언급했듯이 브리타니아는 앵글인, 브리튼인, 스코틀랜드인, 픽트족 사이에서 언어로 분열되어 있었다.[55] 그러나 그는 자신의 역사에서 오수알데의 동생 오스위그가 픽트족과 스코틀랜드인에게 공물을 바치게 했다고 언급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약화시키는 듯하다.[55] 아일랜드 자료인 티거르나흐 연대기에는 오수알데 통치 초기에 앵글로-색슨족이 연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아마도 험버강 남쪽에서 오수알데의 종주를 끝내려는 시도였을 것이며, 아마도 실패했을 것이다.[56]

머시아는 633년 에아드위네를 패사시키는 데도 참여했던 강국으로,[57] 험버 강 이남에서 오수알데의 권위에 가장 큰 방해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57] 비록 오수알데가 헤븐필드 이후 머시아를 어느 정도 지배했다고 일반적으로 생각되지만, 펜다가 에아드위네의 사로잡힌 아들(오수알데에게는 외사촌이며 왕위의 경쟁자)[57]인 애드프리스를 죽인 것은 오수알데를 달래기 위한 것일 수도 있지만, 펜다가 살해할 만한 자기 동기를 가졌을 수도 있다.[57]

험버 강 바로 남쪽의 소왕국 린데세게는 확실히 오수알데의 통제하에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58] 베다의 기록에서 오수알데의 유골이 린데세게의 수도원으로 이장되었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58] 베다에 따르면 수도사들은 오수알데를 자신들을 지배한 외세의 왕으로 여겨 그 유골을 안치하기를 처음에는 거부했다.[58] 북쪽으로 보면 고도딘을 정복했을 가능성이 있다. 아일랜드 쪽 편년사서들에 보면 638년에 고도딘의 왕도인 에든버러에 대한 공성전이 있었으며, 이 공성전의 결과 고도딘 왕국이 망한 것으로 보이는 기록들이 있기 때문이다.[58] 650년대에 오수알데의 동생 오스위그가 이 일대의 통제권을 가지고 있었음으로 미루어, 이 에든버러 공성전을 오수알데가 주도했을 가능성이 있다.[58]

오수알데는 서색슨인들과는 우호적 관계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서색슨인의 왕 퀴네길스가 세례를 받는 것을 후원했고, 퀴네길스의 딸과 결혼했다.[59] 그 딸의 이름은 12세기의 베네딕토회 수도사 레지널드 더럼이 쓴 오수알데 성인전에만 등장하는데, 퀴네부르가(Kyneburga)라고 기록되어 있다.[60] 오수알데는 아들 외셀왈드를 두었는데,[49] 이 아들이 퀴네길스의 딸의 소생인지 아니면 그 전에 있었을 아내 소생인지는 불확실하다. 외셀왈드는 651년부터 데렌리체를 다스렸는데, 퀴네부르가의 아들이라면 이 때 너무 젊어서 그런 중책을 맡기기는 힘들다.[49] 그렇다면 외셀왈드는 망명시기에 낳은 아들일 것이다.[49]

4. 기독교 전파와 성인으로서의 삶

627년 에아드위네가 천주교로 개종하고 천주교를 국교로 삼았지만, 노섬브리아 전역에 천주교를 퍼뜨린 것은 오수알데의 업적이다.[61][23] 왕이 된 직후 그는 게일계 국가 달 리어타에 자기 백성들을 개종시킬 주교를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아일랜드에서 처음 파견된 주교는 너무 엄하여 전도가 성공적이지 못했고, 후임 주교로 부임한 이단은 그보다 섬세하게 접근했다. 오수알데는 이단 주교에게 린디스판을 주어 주교좌로 삼도록 했다. 이단은 노섬브리아에 기독교 신앙을 확산시키는 데 큰 성공을 거두었다.[61][23] 베다는 이단이 앵글어를 몰랐기에, 설교할 때면 망명시절 아일랜드에서 지내서 게일어를 알던 오수알데가 직접 통역을 맡았다고 기록했다.[61][23]

더럼 대성당의 오수알데 성왕 벽화(12세기 그림).


베다는 오수알데가 가난한 자, 낯선 자에게 얼마나 관대했는지에 대해서도 기록했다. 한 일화로, 어느 부활절 때 오수알데가 이단 주교와 함께 저녁식사를 하는데, “미식으로 가득한 은접시가 왕 앞에 놓였”다. 오수알데가 “가난을 덜어줄 임무를 준” 신하가 와서 거리에 가난한 군중들이 가득하여 임금의 자비를 구걸하고 있음을 알렸다. 오수알데는 그 자리에서 자기 식사를 빈자들에게 나누어주고, 남은 은접시도 깨뜨려서 나눠주었다. 이 모습을 본 이단은 감동하여 오수알데의 오른손을 잡고 “이 손이 죽는 일이 없을지어다”라고 말했다. 베다에 따르면 이단의 말대로 오수알데의 오른손과 오른팔은 그가 죽고 나서도 불후하였다고 주장했다.[63][25]

오수알데가 머시아의 이교도들과 싸우다 전사했기에 그는 어떤 의미에서 순교자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베다는 오수알데가 순교의 행적을 제외하고 그저 왕으로서 성왕의 반열에 들었음을 분명히 강조한다. 베다는 오수알데가 성인의 자격을 얻는 데 있어 순교가 중요한 것이라고 해석하지 않았으며, 애초에 오수알데를 가리키면서 "순교자"라는 말을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베다가 묘사하는 오수알데는 당대에 드물게도 성인과 같은 삶을 살며 성인과 같이 통치한 왕이며, 이는 종교에 충실하기 위해 왕위를 내려놓은 왕들이나 죽음의 상황 때문에 축성된 왕들과는 격이 다른 것이다.[62][24]

4. 1. 오스왈드와 이단 린디스파르너

627년 에아드위네가 천주교로 개종하고 천주교를 국교로 삼았지만, 노섬브리아 전역에 천주교를 퍼뜨린 것은 오수알데의 업적이다.[61][23] 왕이 된 직후 그는 게일계 국가 달 리어타에 자기 백성들을 개종시킬 주교를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아일랜드에서 처음 파견된 주교는 너무 엄하여 전도가 성공적이지 못했고, 후임 주교로 부임한 이단은 그보다 섬세하게 접근했다. 오수알데는 이단 주교에게 린디스판을 주어 주교좌로 삼도록 했다. 이단은 노섬브리아에 기독교 신앙을 확산시키는 데 큰 성공을 거두었다.[61][23] 베다는 이단이 앵글어를 몰랐기에, 설교할 때면 망명시절 아일랜드에서 지내서 게일어를 알던 오수알데가 직접 통역을 맡았다고 기록했다.[61][23]

베다는 오수알데가 가난한 자, 낯선 자에게 얼마나 관대했는지에 대해서도 기록했다. 한 일화로, 어느 부활절 때 오수알데가 이단 주교와 함께 저녁식사를 하는데, “미식으로 가득한 은접시가 왕 앞에 놓였”다. 오수알데가 “가난을 덜어줄 임무를 준” 신하가 와서 거리에 가난한 군중들이 가득하여 임금의 자비를 구걸하고 있음을 알렸다. 오수알데는 그 자리에서 자기 식사를 빈자들에게 나누어주고, 남은 은접시도 깨뜨려서 나눠주었다. 이 모습을 본 이단은 감동하여 오수알데의 오른손을 잡고 “이 손이 죽는 일이 없을지어다”라고 말했다. 베다에 따르면 이단의 말대로 오수알데의 오른손과 오른팔은 그가 죽고 나서도 불후하였다고 주장했다.[63][25]

오수알데가 머시아의 이교도들과 싸우다 전사했기에 그는 어떤 의미에서 순교자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베다는 오수알데가 순교의 행적을 제외하고 그저 왕으로서 성왕의 반열에 들었음을 분명히 강조한다. 베다는 오수알데가 성인의 자격을 얻는 데 있어 순교가 중요한 것이라고 해석하지 않았으며, 애초에 오수알데를 가리키면서 "순교자"라는 말을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베다가 묘사하는 오수알데는 당대에 드물게도 성인과 같은 삶을 살며 성인과 같이 통치한 왕이며, 이는 종교에 충실하기 위해 왕위를 내려놓은 왕들이나 죽음의 상황 때문에 축성된 왕들과는 격이 다른 것이다.[62][24]

5. 죽음과 유산

오수알데는 죽은 직후부터 성인으로 추대되었다. 베다는 오수알데가 죽은 곳에서 기적들이 일어나 사람들이 그곳의 흙을 퍼 가면서 사람 키만큼 깊은 구덩이가 생겼다고 기록했다.[44] 레지널드 더럼은 오수알데와 관련된 기적을 기록했는데, 도래까마귀로 추정되는 새 한 마리가 오수알데의 오른팔을 물고 물푸레나무에 내려앉자 나무가 늙지 않고 활력이 넘쳤으며, 새가 팔을 땅에 떨어뜨리자 샘이 솟아 치유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69][70] 이러한 전설은 비기독교 토착 종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70] 오스웨스트리(Oswestry, "오스왈드의 나무")라는 지명은 오수알데가 전사한 곳이자 관련 전설의 배경으로 여겨진다.[64]

베다에 따르면, 오수알데의 뒤를 이어 베오르니체 왕이 된 동생 오스위그가 1년 후 오수알데의 시신을 수습했다.[66] 몇 년 후, 오수알데의 조카딸 오스스뤼스는 유골을 린데세게의 바드니 수도원으로 옮겼으나, 수도사들은 “그가 외방 출신이며 외세의 왕으로서 그들을 지배했”다는 이유로 처음에는 안치를 거부했다. 그러나 그날 밤 오수알데의 유골을 실은 짐마차에서 빛 기둥이 나타나는 기적이 일어난 후, 수도사들은 유골을 받아들였다.[71]

10세기 초, 바드니는 바이킹의 지배하에 놓였다. 909년, 앨프리드 대왕의 딸 애셀프래드가 이끄는 서색슨인과 머시아인의 연합군 공격 이후,[72] 오수알데의 유해는 글로스터의 새 수도원으로 옮겨졌고, 세인트오스월드 소수도원으로 개칭되었다.[73] 애셀프래드와 남편 애셀레드는 이 수도원에 안장되었으며, 잉글랜드를 통일한 그들의 조카 애설스탠은 오수알데 숭배의 주요 후원자가 되었다.[74]

오스트리아 케른텐 바트클라인키르히하임의 장크트오스발트 교회. 오수알데 성왕의 이름이 붙은 수많은 장소들 중 하나다.


오수알데의 머리는 쿠스베르투스의 유해와 함께 더럼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쿠스베르투스는 오수알데 사후 40여 년 뒤에 린디스판 주교가 되었기에 둘 사이의 직접적인 관계는 없다. 유럽 대륙에는 오수알데의 해골이라고 주장되는 것이 최소 네 개 이상 존재한다.[75] 그의 팔 하나는 중세 후기 피터버러 대성당에 안장되었다고 전해진다.

성 오수알데의 이름은 여러 교회에 붙여졌다. 헤븐필드 전투 전날 밤 오수알데가 나무 십자가를 세웠다는 자리에 세워진 세인트오스월드스 교회가 대표적이며, 1717년 재건되어 B6318 밀리터리 로드 도로변에 있다. 윌리엄 워즈워스의 묘지가 있는 로세이강변 세인트오스월드스그래스미어는 오수알데가 설교했던 곳 중 하나로 전해진다.

랭커셔의 오스월드트위스틀 ("오스왈드의 시냇물"), 컴브리아의 커코스월드(오수알데의 시신이 옮겨진 곳으로 추정), 스코틀랜드의 커코스월드 등 잉글랜드의 여러 지명이 오수알데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된다.[76]

5. 1. 더럼 대성당과 성 오스왈드 소수도원

오수알데는 죽은 직후부터 성인으로 여겨졌다. 베다는 오수알데가 죽은 곳에서 기적들이 일어나서 백성들이 그 곳의 흙을 퍼 가 장정의 키만큼 깊은 구덩이가 생겼다고 기록했다.[44] 레지널드 더럼은 오수알데와 관련된 한가지 기적을 기록했는데, 새(아마 도래까마귀) 한 마리가 오수알데의 오른팔을 물고 물푸레나무에 내려앉았더니 그 나무는 늙지 않고 활력이 넘쳤다. 새가 팔을 땅바닥에 떨어뜨리자 땅에서 이 솟았다. 이 나무와 샘은 치유의 능력이 있었다고 한다.[69][70] 이러한 전설들은 비기독교 토착종교의 요소를 함축하고 있거나 그 영향을 받은 것이 명백히 보인다.[70] 지명 오스웨스트리(Oswestry)는 "오스월드의 나무(Oswald's Tree)"라는 뜻이며, 그래서 오수알데가 전사한 곳이자 그 전사를 둘러싼 전설들의 배경이 여기로 비정된다.[64]

베다는 오수알데를 계승해 베오르니체 국왕이 된 아우 오스위그가 오수알데가 죽고 그해 안에 조각난 시신들을 회수했다고 기록했다.[66] 몇 년 뒤 오수알데의 질녀 오스스뤼스가 유골을 추려서 린데세게의 바드니 수도원으로 가져갔다. 바드니의 수도사들은 “비록 왕이 신성한 사람임을 알고 있었으나” “그는 외방 출신이며 외세의 왕으로서 그들을 지배했”기에 처음에는 유골 안치를 거부했다. 그날 밤 오수알데의 유골을 실은 짐마차에 빛의 기둥이 드리우는 기적이 발생한 뒤에야 수도사들은 오수알데의 유골을 받아들였다.[71]

10세기 초가 되면 바드니는 바이킹의 땅이 되었다. 909년, 앨프리드 대왕의 딸 애셀프래드 여왕이 이끄는 서색슨인과 머시아인의 연합군의 공격을 받은 뒤,[72] 오수알데의 성유물은 글로체스터의 새 수도원으로 옮겨졌으며, 그 수도원은 오수알데의 이름을 붙여 세인트오스월드 소수도원으로 개칭했다.[73] 애셀프래드와 그 남편 애셀레드가 죽고 이 수도원에 안장되었으며, 그들의 조카이며 잉글랜드를 통일한 애설스탠은 오수알데 숭배의 주요 후원자였다.[74]

오수알데의 머리는 또다른 성인 쿠스베르투스의 유해와 함께 더럼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다만 쿠스베르투스는 오수알데가 죽고 40여년 뒤에야 린디스판 주교로 부임했기에 두 사람 간에 관계는 없다. 하지만 유럽 대륙에는 오수알데의 해골이라고 주장되는 해골이 최소 네 개 이상 더 있다.[75] 팔 한 짝은 중세 후기에 피터버러 대성당에 안장되었다고 한다.

성인의 반열에 오른 오수알데의 이름은 여러 교회들에 붙었다. 대표적으로 오수알데가 헤븐필드 전투 전날 밤 나무 십자가를 박은 자리에 지어졌다는 세인트오스월드스 교회가 있다. 이 교회는 1717년 재건되어 현재도 B6318 밀리터리 로드 도로변에서 보인다. 윌리엄 워즈워스가 안장된 묘지가 있는 로세이강변의 마을 세인트오스월드스그래스미어는 오수알데가 설교를 했던 곳들 중 하나라 전한다.

그 밖에 잉글랜드의 몇몇 지명들이 오수알데와 관련이 있음을 주장한다. 예컨대 랭커셔의 오스월드트위스틀은 "오스월드의 시냇물"이라는 뜻인데, 이 오스월드가 성왕 오수알데라고 주장된다. 컴브리아의 커코스월드도 오수알데가 죽은 뒤 그 시체가 옮겨진 곳이라고 믿어져서 붙은 이름이라 한다. 이 동네의 교회도 오수알데에게 봉헌되어 있다. 스코틀랜드의 또다른 커코스월드 역시 오수알데 성왕을 기념한다.[76]

5. 2. 오스왈드와 한국의 종교 갈등

오수알데는 642년 오스웨트리(다른 후보지들도 있다)[64]에서 벌어진 메이서필드 전투에서 머시아의 왕 펜다가 이끄는 이교도 군대에 의해 살해되었다.[65] 베다는 오수알데가 죽음에 직면하여 자기 병사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했다고 기록했다. 오수알데의 시신은 갈기갈기 찢어져 머리와 팔다리가 꼬챙이에 꽂혀 효수되었다.[66]

전통적으로 메이서필드 전투는 오스웨트리에서 벌어진 것으로 비정되는데, 당시 포이스의 영토였던 이곳에서 전투가 벌어졌다는 것은 펜다 측에 브리튼인 동맹군이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웨일스 시문학 작품들에서도 포이스 인들이 전투에 참여했음을 시사하는 부분이 있다. 오스웨트리가 전장이 맞다면, 오수알데는 적의 영토에서 공세 입장에 있었을 것이다. 이는 옳은 전쟁으로 여겨질 수 없기 때문에, 베다가 오수알데를 성인군자로 묘사하는 것과 모순된다. 베다는 오수알데가 “조국을 위해 싸우다” 죽었다고만 기록하고, 오수알데가 앵글인의 패권을 잡기 위해 수행했을 다른 공세전쟁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67]

브리튼인의 역사』와 『캄브리아 편년사』에 따르면 펜다의 형제 에오와가 이 전투에서 사망했는데, 에오와가 오수알데의 종속왕으로서 그의 편에서 싸웠을 가능성도 제기된다.[6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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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서적 Berresford Ellis, Peter Celt and Saxon BCA London 1993
[49] 문서 Ziegler.
[50] 서적 Bede, Book III, chapter 2.
[51] 서적 여호수아기 1장 9절.
[52] 문서 Adomnán, Book I, Chapter 1.
[53] 서적 Bede, Book III, chapter 1
[54] 문서 Adomnán, Book I, chapter I.
[55] 서적 오수알데의 브리타니아에서의 권력에 대해서는 H. E., Book III, chapter 6 참조; 오스위그가 스코트인과 픽트인에게 공물을 받은 이야기는 Book II, chapter 5. See Kirby, , p. 70 참조; 즉 베다는 오수알데의 권세를 과장해서 기록했다.
[56] 문서 Stancliffe, "Oswald", p. 60. According to Stancliffe, "Oswald would scarcely have been remembered as an effective overlord in so many Southhumbrian kingdoms if his power had been checked this early in his career." The report is given under the year 637 in the Annals of Tigernach.
[57] 문서 Stancliffe, "Oswald", pp. 54 and 71–75. Stancliffe는 펜다의 애드프리스 처형은 다른 이유가 있었을 것이며, 오수알데가 자기 사촌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면 베다가 오수알데를 그렇게 성스러운 인물로 미화하지는 못했으리라는 의견을 피력한다.
[58] 문서 Stancliffe, "Oswald", p. 58.
[59] 서적 Bede, Book III, chapter 7.
[60] 문서 Tudor, p. 187, note 57.
[61] 서적 Bede, Book III, chapters 3 and 5.
[62] 문서 Stancliffe, "Oswald", pp. 41–42.
[63] 서적 Bede, Book III, chapter 6.
[64] 문서 Stancliffe, "Where Was Oswald Killed?"
[65] 문서 베다는 오수알데의 몰년을 642년이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이 642년이 우리가 생각하는 642년과 같은 해인지 약간 의문의 여지가 있다. R. L. Poole (Studies in Chronology and History, 1934)는 베다가 새해의 시작을 9월로 삼았다는 가설을 밀고 나가 헤븐필드 전투의 날짜(즉 오수알데의 치세의 시작)을 634년-633년까지 당긴다. 그렇다면 오수알데는 8년 재위했으므로 641년에 죽은 것이 된다. 그러나 베다가 12월 25일 또는 1월 1일을 한 해의 첫 날로 삼았기에 베다가 제시하는 날짜를 그대로 믿어도 된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66] 문서 오수알데의 절명기도, 그의 시체의 훼손과 효수, 그리고 오스위그가 그 신체부위들을 찾아 린디스판과 밤버러에 매장한 이야기는 『앵글인의 교회사』 3책 제12장에 나온다.
[67] 문서 Stancliffe, "Where Was Oswald Killed?",는 오스웨스트리를 메이서필드 전투의 전장으로 여기는 전통적 비정을 옹호한다. 베다가 오수알데를 옳은 전쟁만 하는 정의로운 왕으로 포장하기 위해 그의 공세전쟁에 대해 침묵했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이 책의 p. 93.를 참조.
[68] 문서 Brooks.
[69] 문서 Tudor, page 190.
[70] 문서 Rollason, page 170.
[71] 문서 Bede, Book III, chapter 11 https://wikisource.o[...]
[72] 뉴스 Lady of the Mercians BBC 2013-08-15
[73] 서적 Edward the Elder 899-924 Routledge
[74] 문서 Karkov, pp. 77-79
[75] 문서 Bailey
[76] 웹인용 Kirkoswald http://www.scottish-[...] Gazetteer for Scot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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