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령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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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왕령모는 생몰년 미상의 인물로, 서지고의 막료로 활동하다가 오나라 재상에 오른 인물이다. 912년 서지고의 손님이 되었고, 판관, 내추밀사를 거쳐 927년 서지고가 서지순을 꺾는 데 기여했다. 이후 동중서문하평장사에 임명되어 재상이 되었고, 931년에는 상서우복야 겸 문하시랑을 역임했다. 934년에는 사도와 충무군 절도사에 제수되었다. 937년 서고에게 양부로부터 선양을 받도록 권유했으나, 서고가 선양을 받기 전에 사망했다.

왕령모
지도
기본 정보
한자王令謀
간체자王令谋
병음Wáng Lìngmóu
출생1950년 9월
사망2023년 7월 20일 (향년 72세)
국적중화인민공화국
경력
직업정치인
소속 정당중국 공산당
주요 직책제12기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
광둥성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주임
학력
출신 학교화남 이공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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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37년 사망 - 즈엉딘응에
    즈엉딘응에는 10세기 초 안남에서 곡호 휘하의 장군으로 활동하며 931년 남한을 배경으로 자립하여 교주자사 이진을 축출했으나 937년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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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왕령모는 오나라 말기와 남당 건국 초기에 활동했던 인물이다. 그는 서지고(훗날 남당 열조)가 승주 자사로 있을 때부터 그의 막료가 되어 송제구, 왕굉 등과 함께 핵심 참모로 활동했다. 919년에는 내추밀사에 임명되었고, 927년 서지고가 그의 양동생 서지순과의 권력 다툼에서 승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서지고가 실권을 장악한 직후 동중서문하평장사 직함을 받아 재상이 되었으며, 이후 사도, 충무군 절도사 등의 직함을 받았다. 말년에는 병과 노령에도 불구하고 서지고에게 오나라 황제 양부로부터 제위를 선양받으라고 적극적으로 권유하는 등 남당 건국에 힘썼으나, 937년 서지고가 황제로 즉위하기 직전에 세상을 떠났다.

2.1. 서지고의 막료로서

912년, 당시 서지고의 양부 서온오나라섭정이었다. 그 결과, 서지고는 승주(昇州, 지금의 장쑤성 난징시)자사가 되었고, 그는 자신의 주변에 유능한 인사들로 막료진을 만들었다. 왕령모는 언젠가 서지고의 가객(家客)이 되었고, 결국에는 그의 판관이 되었다. 왕령모는 송제구, 왕굉(王翃중국어)과 함께, 그를 위한 핵심 참모가 되었다.

918년, 서온은 승주에 머물며 오나라 정치를 원격으로 통제하고 있었고, 서지고는 윤주(潤州, 지금의 장쑤성 전장 시) 단련사(團練使)로 있었다. 당시 서온의 아들 서지훈이 오나라 수도 광릉에서 소섭정을 맡고 있었다. 그 해, 서지훈이 대장 주근에게 암살되자 서온의 다른 아들들은 모두 어려서, 서온은 서지고를 광릉의 소섭정으로 삼았다. 이때 왕령모는 양주(揚州, 지금의 장쑤성 양저우 시) 좌사마(左司馬)가 된 것으로 보인다. 이듬해인 919년, 당시 오나라 이었던 양융연이 서온의 권고로 오나라 국왕의 존호를 사용하게 되자, 왕령모는 내추밀사(內樞密使)에 임명되었다.

927년, 서온이 사망하자 서지고는 서온의 아들인 서지순과 권력 다툼을 시작하였다. 서지고는 광릉에서 조정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서지순은 당시 승주에서 오나라의 대군을 장악하고 있었다. 왕령모는 서지고에게 전략을 제공하며, 서지순은 어리고 다른 관료들과의 대인관계 관리에 미숙하므로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지적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서지고는 서지순을 속여 여러 혐의에 대해 해명한다는 명목으로 광릉으로 오게 하여 구금하고 그의 군대를 장악하였다. 이로써 섭정 자리를 둘러싼 서지순의 도전은 끝나게 되었다.

2.2. 재상으로서

서지고가 서지순을 이긴 직후, 왕령모는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중국어)의 직함을 받아 재상이 되었다. 931년, 서지고가 광릉을 떠나 금릉(승주의 후신)으로 옮겨가면서, 자신의 아들 서경통을 광릉에 남겨 섭정을 맡겼다. 이때 왕령모는 상서우복야(상서성의 장관 중 하나) 겸 문하시랑(문하성의 차관)에 임명되어 송제구와 함께 재상으로 계속 활동했다.

934년, 왕령모는 사도(삼공 중 하나)의 직함과 충무군 절도사(본부는 현재 허난성 쉬창 시) 직함을 추가로 받았다. 충무군은 당시 오나라의 북서쪽 이웃 나라인 후당의 영토였기 때문에 절도사 직함은 명예직에 불과했다.

937년, 왕령모는 당시 서고(서지고)로 이름을 바꾸고 제왕에 봉해져 있던 서지고에게 직접 금릉으로 가서, 당시 오나라 황제 양부에게서 제위를 선양받으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서고는 바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 왕령모는 병을 앓고 있었고 나이가 많아 치아도 없는 상태였다고 전해진다. 주변에서 은퇴를 권했지만, 그는 "제왕을 위한 대업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내가 어찌 쉴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며 거절했다. 그는 다시 서고에게 선양을 권하는 진정서를 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서고는 양부에게 제위를 넘기라는 칙명을 내리게 했고, 오나라의 고위 관료들이 광릉에서 금릉으로 가 서고에게 즉위를 권했다. 하지만 왕령모는 서고가 제위를 넘겨받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