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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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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왕유는 중국 당나라 시대의 시인이자 화가, 음악가였다. 그는 산수시의 대가로 맹호연과 함께 '왕맹'으로 불렸으며, 만년에는 선불교에 심취하여 '시불'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왕유는 15세에 시인으로 이름을 알렸으며, 721년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으나, 안사의 난 때 포로가 되기도 했다. 그의 시는 자연을 묘사하고 불교적 세계관을 담고 있으며, 특히 절구에 뛰어났다. 왕유는 수묵화에도 능했으며, 소식은 그의 시와 그림을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고 평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상사'와 '망천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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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유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왕유
왕유
이름왕유
로마자 표기Wang Wi
출생699년
출생지산시성 진중시 치현
사망761년
사망지시안시, 산시성
직업음악가, 화가, 시인, 정치인
시대당나라
영향해당 없음
영향을 받은 인물해당 없음
가족왕진 (형제)
중국어 정보
간체자王维
번체자王維
병음Wáng Wéi
웨이드-자일스Wang² Wei²
표준 중국어 발음 (IPA)/wǎŋ wěɪ̯/
광둥어Wong4 Wai4
예일 음역Wòhng Wàih
광둥어 발음 (IPA)/wɔːŋ²¹ wai²¹/
민난어Ông Uî
중고한어 발음 (IPA)/ɦuang jwi/
자(字)해당 없음
호(號)모힐(摩詰)
병음 (호)Mójié
민난어 (호)Môo-khiat
표준 중국어 발음 (호, IPA)/mwǒ tɕʰjě/
일본어 정보
이름왕유
이미지'250px'
이미지 설명왕유, 『만소당죽장화전』에서
출생701년 (장안 원년)
사망761년 (상원 2년)
출신지타이위안 군치현
직업시인, 화가, 서예가, 음악가
간체자왕유
번체자왕維
병음Wáng Wéi
주음부호ㄨㄤˊ ㄨㄟˊ
일본어 발음완 웨이
로마자 표기Wang² Wei²
기타 정보
영향해당 사항 없음
영향 받은 인물해당 사항 없음

2. 경력

한족 귀족 가문 출신으로 어린 시절부터 시와 음악, 그림 등 다방면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4] 721년 과거 시험에 장원으로 급제하여[6] 태악승(太樂丞) 관직을 받으며 관료 생활을 시작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소한 문제로 인해 기주의 사창참군(司倉參軍)으로 좌천되는 등[7][8] 순탄치 않은 출발을 보였다.

이후 유력 정치인이자 시인이었던 장구령의 도움으로 중앙 정계에 복귀하여[9] 우습유(右拾遺) 등의 관직을 역임했으나, 이림보와의 정치적 대립 과정에서 장구령이 실각하자[9] 왕유 역시 영향을 받아 양주 절도판관(節度判官)으로 임명되어 변경 지역으로 파견되기도 했다.[12] 그는 관직 생활 중에도 망천 별장에 머물며 자연을 벗 삼아 창작 활동에 몰두했으며,[14] 맹호연 등 당대의 저명한 문인들과 깊은 교유 관계를 맺었다.[10]

천보 연간에는 이부랑중(吏部郎中), 급사중(給事中) 등 여러 관직을 거쳤다. 그러나 안사의 난이 발발하면서 그의 삶은 다시 한번 큰 전환점을 맞이했다. 756년 반란군에게 사로잡혀 낙양으로 압송되었고,[18][19] 강요에 의해 안록산 정권에서 급사중 직책을 맡게 되었다.[20]

757년 당나라 군대가 낙양을 수복하자 왕유는 투항했으나,[21] 반란 정권에 부역한 죄로 처벌받을 위기에 놓였다. 다행히 당시 형부시랑으로 있던 동생 왕진의 적극적인 구명 활동과,[22] 포로 시절 안록산 정권에 항거하다 죽은 악사 뇌해청을 추모하며 지었던 시가 그의 충성심을 증명해 준 덕분에 사형을 면하고 태자중윤(太子中允)으로 강등되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23]

사면 이후 숙종의 신임을 회복하여 다시 관직에 복귀했으며, 집현학사, 중서사인, 급사중 등을 거쳐 최종적으로 상서우승(尚書右丞)의 지위에 올랐다. 만년에는 불교에 더욱 깊이 귀의하여[24] 관직 생활과 신앙생활을 병행했으며, 기근이 들자 자신의 녹봉을 내어 백성을 구휼할 것을 청하기도 했다. 761년(혹은 759년) 7월, 람전의 망천장에서 세상을 떠났다.[26]

2. 1. 젊은 시절

한족 귀족 가문 출신으로, 본래 치현(현재 산시성 진저우시 치현)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는 분주사마(汾州司馬)[53]를 지낸 뒤 황하 동쪽 하동(현재 산시성 용지시)으로 이주한 왕처렴(王処廉)이다. 어머니 최씨(崔氏)는 북종선(北宗禪) 제2조(祖) 보적(普寂)을 스승으로 삼았던 독실한 불교 신자였으며, 왕유는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의 자인 마힐(摩詰) 역시 《유마경》(維摩經)의 주인공 유마힐거사(維摩詰居士)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4] 왕유는 다섯 형제 중 장남이었다.[5]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9세에 시 짓는 법을 알았고, 15세 무렵부터 수도 장안에서 학문을 익혔다. 현종(玄宗) 개원 연간에는 이미 시인으로서 명성이 자자하여, 현종의 형인 영왕(寧王) 헌(憲)과 동생 설왕(薛王) 업(業) 등 왕족들로부터 스승이나 벗처럼 대우받았고, 귀족들의 모임에 자주 초청받는 등 예술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15세 무렵 지은 시도 현재 전해지고 있다.

왕유는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간 우애가 깊었으며, 아내와도 금슬이 좋았다고 전해진다. 초서예서 등 서예에 능했을 뿐만 아니라, 음악, 특히 비파 연주에 조예가 깊었고 그림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그의 음악적 재능에 대해서는, 연주하는 악사를 그린 그림을 보고 그 악사가 연주하던 곡이 '예상우의곡'의 제3첩 첫 박자라고 즉시 알아맞혔다는 일화가 있다.

《집이기》(集異記)에 따르면, 왕유는 현종의 또 다른 동생인 기왕(岐王) (範)의 집을 자주 드나들었다. 그곳에서 장구령(張九齢)의 동생 장구고(張九皐)와 부시(府試, 과거 시험의 예비 시험)[54]의 장원 자리를 두고 경쟁하게 되었다. 장구고는 연줄이 있는 어느 권세 있는 공주(이름은 불명)를 통해 이미 장원으로 내정되어 있었다. 이를 알게 된 왕유가 기왕에게 도움을 청하자, 기왕은 왕유에게 시 20여 수를 지어 닷새 뒤에 다시 오라고 한 뒤, 악사로 변장시켜 그 공주에게 보냈다. 뛰어난 용모와 비파 실력, 시 재능, 그리고 풍류 넘치는 말솜씨를 갖춘 왕유를 본 공주는 결국 장구고 대신 왕유를 장원으로 삼도록 했다고 한다. 또한 《본사시》(本事詩)에는 영왕 헌의 저택에서 있었던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영왕이 총애하던 여인이 자신을 영왕에게 보낼 수밖에 없었던 옛 남편을 만나 눈물 흘리는 장면을 보고 문인들에게 시를 짓도록 명했는데, 왕유만이 '식부인(息夫人)'이라는 시를 지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19세에 과거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수도 장안으로 간 왕유는[4] 시험 전부터 이미 시와 음악적 재능, 특히 비파 연주 실력으로 궁정에서 호감을 얻었다.[6] 그는 721년 장원으로 급제하여 유망한 관료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왕유의 관직 생활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처음에는 궁중 악사인 "부악사"로 임명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자춤 공연으로 예법을 어겼다는 이유로[8] 이전 기주(현재 허베이성 지저우시)의 곡창을 감독하는 직책으로 좌천되었다.[7] 이는 그의 경력에 작은 차질이었지만, 오히려 여행할 기회를 제공하는 측면도 있었다. 이후 그의 승진은 저명한 대신이자 시인이었던 장구령과의 관계 덕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9] 이 관계는 장구령이 727년 징저우로 좌천될 때까지 이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728년경 장안으로 돌아온 왕유는 시인 맹호연을 만나[10] 깊은 우정을 나누고 시적인 교류를 이어갔다. 이 시기에 감찰어사 직을 얻었으나, 장구령에 대한 황제의 신임이 줄어들고 이임보의 정치적 영향력이 커지면서 다시 좌천되었다. 731년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11] 그는 다시 결혼하지 않았다. 이후 량저우로 파견되어[12] 당 제국의 북서쪽 변경 지역에서 근무했으며, 738년 또는 739년 초에 장안으로 돌아왔다.[13]

2. 2. 중앙과 지방, 관직과 재야

한족 귀족 가문 출신인 왕유는 어릴 때부터 재능이 뛰어났다.[4] 그는 다섯 형제 중 장남이었으며,[5] 19세에 과거를 준비하기 위해 수도 장안으로 갔다. 시험 전 장안에 머무는 동안 시와 음악, 특히 비파 연주 실력으로 궁정에서 좋은 평판을 얻었다.[6]

개원 7년(719년) 왕유는 진사에 급제하였고, 동생 왕진(王縉)과 함께 뛰어난 재능으로 명성을 얻었다. 그는 대악승(大楽丞) 관직을 받았으나,[7] 이듬해인 개원 8년(720년) 사소한 문제로 인해 기주의 제주사창참군(済州司倉参軍)으로 좌천되었다.[7] 《집이기》에 따르면, 황제만 출 수 있는 춤인 '황사자'(黄師子)를 왕유가 관리하던 악공이 함부로 추었기 때문에 연대 책임을 진 것이라고 한다.[8] 다른 한편으로는, 왕유가 황족들과 가까웠기 때문에 당 현종이 그를 황족들로부터 멀리 떨어뜨려 놓으려 했다는 해석도 있다. 이는 그의 경력에 작은 차질이었지만, 여행할 기회를 얻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개원 14년(726년) 무렵 왕유는 관직을 버리고 장안으로 돌아왔다. 이 시기 그는 저명한 재상이자 시인인 장구령과 교류했으며, 시인 맹호연으로부터 시 재주에 대한 칭찬을 받았다.[9] 왕유와 맹호연은 이후 긴밀한 우정을 나누며 시를 통해 교류했다.[10] 개원 19년(731년) 무렵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11] 왕유는 재혼하지 않고 종남산 근처 망천(輞川)에 땅을 사 별장을 짓고 한동안 은거했다. 이곳에서 그는 동료 시인 배적과도 우정을 쌓았다.[14]

얼마 지나지 않아 여러 사인들의 추천으로 다시 중앙 정계에 복귀했다. 장구령의 발탁으로 개원 22년(734년) 우습유(右拾遺) 관직을 받았다.[9] 그는 과거 출신 관료 중심의 사족(士族) 파벌에 속했으며, 위항(韋恒)과 위제(韋済) 형제와 친하게 지냈다. 그들의 아버지 위사립(韋嗣立)이 세운 별장에서 열린 모임에 장구령, 배요경(裴耀卿), 한휴(韓休) 등과 함께 참석하기도 했다. 도사 윤음(尹愔)과도 가까이 지냈다고 전해진다. 이 무렵 맹호연을 궁궐로 불러 시를 읊던 중 갑자기 현종이 방문하자 맹호연이 당황하여 책상 밑에 숨었으나, 왕유가 솔직하게 상황을 아뢰고 맹호연을 현종에게 소개해 알현하게 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러나 개원 24년(736년) 장구령이 귀족 파벌의 이림보와의 정치 싸움에서 패배하여 실각하자,[9] 왕유의 관직 생활도 영향을 받았다. 개원 25년(737년), 왕유는 양주(涼州)의 하서절도사 최희일(崔希逸)의 절도판관(節度判官)으로 임명되어 장안을 떠나 변경 지역으로 부임했다.[12] 그곳에서 감찰어사(監察御史)로 승진했으며, 738년 또는 739년 초까지 근무했다.[13] 개원 28년(740년)에는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로 장안에 돌아왔으나, 곧 다시 남방으로 파견되었다. 이 과정에서 양양에서 맹호연과 재회했지만, 왕유가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맹호연은 이미 사망한 후였다. 이후 왕유는 현종을 위한 응제시(応制詩)를 짓거나 권력자 이림보를 위한 시를 짓기도 했다.

천보 연간(742년 이후)에 들어서 왕유는 좌보궐(左補闕), 원외랑(員外郎), 고부랑중(庫部郎中)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 이 시기 그는 망천의 별장에서 친구들과 시를 지으며 지내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정부 급여 외에도 예술 활동으로 수입을 얻어 시인 송지문이 소유했던 람전(藍田)의 왕천(輞川) 땅을 구입할 수 있었다.[15] 천보 9재(750년)에 어머니 최씨가 사망하자,[16] 왕유는 망천 별장의 일부를 사찰로 희사하고 3년간 상을 치렀다. 그는 슬픔에 잠겨 몸이 극도로 쇠약해졌다고 전해진다.[16] 상을 마친 천보 11재(752년)에 조정에 복귀했다. 같은 해 이림보가 사망하고 새로 정권을 잡은 양국충에게 중용되어 이부랑중(吏部郎中)이 되었다. 천보 12재(753년)에는 일본 견당사로 와서 당나라 관직에 있던 아베노 나카마로가 귀국할 때 송별시를 지어주었다. 천보 14재(755년)에는 요직인 급사중(給事中)에 임명되었다.

2. 3. 포로 생활과 만년

안사의 난이 발발하고 지덕 원년(756년), 왕유는 쓰촨으로 피난 간 현종 황제를 뒤따르려 했으나 따라잡지 못하고 숨어 지내다 결국 안록산의 반란군에게 사로잡혔다.[18] 당시 그는 이질을 앓고 있어 몸져누운 상태였기에 험준한 산길을 따라 피난 행렬에 합류하기 어려웠다.[18] 반란군은 그를 수도로 삼은 낙양으로 압송했고,[19] 병을 핑계로 관직을 사양하려 했으나 강요에 못 이겨 안록산이 세운 대연 정권에서 급사중 직책을 맡게 되었다.[20] 일부 기록에 따르면, 왕유는 반란군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귀가 들리지 않는 척하거나 목소리를 상하게 하는 약을 먹었다고도 전해진다.[20]

낙양에 억류되어 있을 때, 왕유는 과거 당나라 궁중 악단이었던 이원의 악공들이 안록산을 위해 연주하도록 강요받는 상황을 목격했다. 그중 악사 뇌해청이 안록산을 위한 연주를 거부하며 비파를 땅에 내던져 부수고 항거하다 처형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왕유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시를 지었다. 이 시는 훗날 그의 충성심을 증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23]

지덕 2년(757년), 당나라 군대가 낙양을 되찾자 왕유는 진희열 등과 함께 당군에 귀순했다.[21] 그러나 현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숙종은 왕유가 자의든 타의든 반란 정권에 부역한 책임을 엄중히 물으려 했다.[21] 왕유는 투옥되었으나, 형부 시랑으로 있던 동생 왕진의 적극적인 구명 노력과[22] 앞서 뇌해청의 죽음을 애도하며 지었던 시가 널리 알려져 그의 충성심을 입증해 준 덕분에 사형을 면하고 태자중윤(太子中允)으로 강등되는 선에서 처벌이 마무리되었다.[23] 왕진은 태원 방어에 공을 세워 충성심을 인정받고 있었다.[22]

사면된 후 왕유는 불교에 귀의하여 출가하고자 했으나 숙종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24] 이 무렵 두보로부터 격려하는 시를 받기도 했다. 건원 원년(758년), 그는 다시 관직에 복귀하여 집현학사로 임명되었고,[25] 처음에는 반란 이전보다 낮은 지위인 '태자중충'()으로 태자의 조정에서 일했다. 같은 해 중서사인을 거쳐 다시 급사중( )으로 승진했다. 이 시기 그는 두보, 가지, 잠삼 등 동료 문인들과 시를 주고받으며 교류했다.

상원 2년(761년), 왕유는 상서우승( )에 임명되었다. 그해 기근이 들자, 그는 자신의 직전(職田, 관리에게 지급되던 토지)에서 나는 곡식을 내어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하는 데 사용해 줄 것을 조정에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와 함께 자신의 은퇴를 청하면서, 당시 촉주자사로 있던 동생 왕진을 자신 대신 중앙으로 불러들여 중용해 줄 것을 간청하는 「책궁천제표」(責躬薦弟表, 자신을 책망하며 아우를 천거하는 글)를 올렸다. 이 표문으로 왕진은 좌산기상시로 임명되어 중앙 정계로 복귀할 수 있었다.

기마 인물도, 북제 시대 작품. 안사의 난의 중심지였던 지역의 이전 시기 모습을 보여준다.


화산의 현대 사진. 친링 산맥에 위치하며, 왕유가 만년에 즐겼을 법한 험준하고 아름다운 자연 풍경을 보여준다.


왕유는 안사의 난이 완전히 종결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761년(혹은 759년) 7월에 세상을 떠났다.[26] 임종 직전, 그는 봉상(鳳翔)에 있던 동생 왕진과 다른 친구들에게 이별을 고하는 편지를 여러 통 쓴 뒤 조용히 붓을 놓고 숨을 거두었다고 전해진다.[26] 그의 유해는 생전에 그가 아꼈던 람전의 별장인 왕천장(輞川莊)에 묻혔다.[27] 만년에 그는 이곳에서 불교 수행과 창작 활동에 몰두하며 비교적 평온한 시간을 보냈다.

왕유가 죽은 후, 동생 왕진은 형의 유고를 모아 편집하여 대종 황제에게 헌상했다. 대종은 왕유의 시를 극찬하며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3. 시의 특징

그의 시는 교류가 있던 맹호연과 유사한 면이 있지만, 맹호연의 시보다 날카롭다는 평가를 받는다. 불교 신자로서 공(空)의 세계에 대한 동경을 노래한 시들도 남겼다. 관직에서 물러나 망천(輞川, 현재의 산시성)에 별장을 짓고 그곳의 풍경을 노래한 〈죽리관(竹里館)〉과 〈녹채(鹿柴)〉(모두 오언절구)는 특히 유명하다.

왕유는 시뿐만 아니라 그림에도 뛰어나 남종화(南宗畵)의 시조로 추앙받는다. 송(宋)의 문인 소식은 "왕유의 시를 보면 시 속에 그림이 있고(詩中有畫), 그의 그림을 보면 그림 속에 시가 있다(畫中有詩)"라고 평했다.[28] 그는 동료 시인 맹호연과 함께 산수시 장르의 대표적인 인물로 꼽히며, 두 사람을 합쳐 "왕맹(王孟)"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의 산수화는 이씨 부자()의 화풍과 강한 필치의 화풍, 두 가지 장르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의 작품 ''왕천도''는 후자에 속하지만 원본은 남아있지 않다. ''설계도''와 ''제남 부생 초상화''는 모두 대상의 사실적인 묘사가 특징이다.

왕유의 ''설계도''. 베이징 만주 가족 소장품이었으나 현재는 분실됨.


왕시민 (1668)의 ''왕유의 '강과 산 위의 눈' 이후'', 국립고궁박물원


만년에는 정치에 대한 관심을 줄이고 불교, 특히 선불교 수행에 몰두했다. 이러한 경향은 그의 시에 깊은 영향을 미쳤고, 사후에는 "시불(詩佛)"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현재 그의 작품 약 420여 편이 전해지며, 이 중 370여 편이 진품으로 여겨진다.[29]

왕유는 절구, 특히 사구(四句) 형식의 시에서 뛰어난 성취를 보여 "절구의 대가"로 평가받는다.[30] 그의 절구 다수는 세부 묘사를 줄이고 인적이 드문 고요한 물과 안개의 풍경을 그린다. 그의 시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긍정하면서도 그 궁극적인 실재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특징을 보인다. 또한, 겉보기에는 단순하지만 치밀하게 구성되어 있어, 마치 의식적인 노력 없이 자연스럽게 선(禪)의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보여주는 듯하다는 평가도 있다.

왕유의 시는 본질적으로 자연시의 성격을 띤다. 동진 시대 도연명의 전원시와 남조 송 시대 사령운의 산수시를 계승하면서도,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다 생동감 있게 노래하는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고 평가받는다.

다음은 그의 대표적인 시 중 일부이다.

식부인(息夫人)
원문한자음해석
莫以今時寵막이금시총지금 총애를 받는다 한들
能忘舊日恩능망구일은옛 은혜를 잊지 못하네
看花滿眼淚간화만안루꽃을 보며 고이던 눈물에
不共楚王言불공초왕언초왕과는 말 한 마디 못 하니



녹채(鹿柴) - 사슴 농장의 울타리
원문한자음해석
空山不見人공산불견인조용한 산에 사람이라곤 없이
但聞人語響단문인어향어디선가 말소리만 들려오는데
返景入深林반경입심림저무는 햇빛이 숲속 깊이 들어와
復照靑苔上복조청태상다시금 푸른 이끼 위에 비춘다



송원이사안서(送元二使安西) - 안서로 가는 원이를 전송하며
원문한자음풀이
渭城朝雨裛輕塵위성조우읍경진위성의 아침 비가 먼지를 적시고
客舍青青柳色新객사청청류색신객사에는 푸르디 푸른 버들빛이 새로워라
勸君更盡一杯酒권군경진일배주권하노니 그대여 이 술 한 잔 더 들라
西出陽關無故人서출양관무고인서쪽으로 양관 떠나면 아는 이도 없을 테니.



'''상사()'''



紅豆生南國 (홍두생남국)

春來發幾枝 (춘래발기지)

願君多采擷 (원군다채힐)

此物最相思 (차물최상사)

붉은 구슬덩굴 남쪽 나라에 자라나니

봄 오면 가지마다 얼마나 돋아날까

그대여, 부디 많이 따두소서

이것이 가장 그리움을 나타낸다오



'''종남별업(終南別業)'''[32][33]



中歲頗好道 (중세파호도)

晚家南山陲 (만가남산수)

興來每獨往 (흥래매독왕)

勝事空自知 (승사공자지)

行到水窮處 (행도수궁처)

坐看雲起時 (좌간운기시)

偶然值林叟 (우연치림수)

談笑無還期 (담소무환기)

나이 들어 도(道)를 꽤 좋아하게 되어

늦게 남산(南山) 기슭에 집을 지었네.

흥이 나면 늘 혼자 가니

좋은 일은 나 홀로 알 뿐.

걷다가 물길 다한 곳에 이르면

앉아서 구름이 피어나는 것을 바라보네.

우연히 숲 속 노인을 만나면

웃고 이야기하느라 돌아갈 기약 잊는다네.


4. 그림의 특징과 평가

왕유는 시인이자 화가로서 수묵화에 뛰어났다. 동시대 화가들은 그의 필치를 하늘로부터 내려온 재능, 즉 '천기(天機)'라 칭하며 사람이 배워서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라고 평가했다. 그는 먹으로만 흰 고양이 그림을 그리고 채색은 장인들에게 맡겼다고 전해진다. 왕유의 화풍은 오도현과 유사했지만, 그만의 뛰어난 격조를 지녔다는 평가를 받았다. 정건, 필굉과 함께 삼절(三絶)로 불렸으며, 동시대 화공 이사훈에 버금가거나 혹은 더 뛰어나다는 평가도 있다.[28]

후대의 평가는 다양하다. 만당(晩唐) 시기의 장언원은 《역대명화기》에서 왕유의 그림에 대해 필력은 강하지만 기교에 치우쳤다고 비판적으로 평가했다. 반면, 같은 시기의 주경현은 《당조명화록》에서 왕유의 그림을 제4위 '묘품상(妙品上)'으로 평가하며 극찬했다. 북송의 문인 소식은 왕유의 시와 그림을 아울러 "시 속에 그림이 있고(詩中有畫), 그림 속에 시가 있다(畫中有詩)"라고 평하며 그의 예술 세계를 높이 평가했다.[28]

대에 이르러 왕유는 산수화 분야에서 이사훈북종화의 시조로 보는 것과 대비하여 남종화(문인화)의 시조로 여겨지게 되었다.[34] 남종화는 강한 필획과 수묵화의 담백한 먹 사용이 특징적인 화풍이다. 왕유는 인물, 대나무 숲, 산과 강의 풍경을 그리는 데 뛰어났으며, 그의 산수화는 이씨 부자(李氏父子zho) 화풍과 강한 필치 화풍의 두 가지 경향이 있었다고 기록된다. 그의 작품 ''왕천도''는 후자에 속하지만 원본은 전해지지 않는다. ''설계도''와 ''제남 부생 초상화''는 대상의 사실적인 묘사가 특징적인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왕유는 시와 그림 모두에 능통했는데, 동료 시인 맹호연과 함께 산수시 장르, 즉 "산수" 시파의 대표적인 인물로 꼽힌다. 두 사람은 종종 시적 기량이 비슷하다는 의미에서 "왕맹"(王孟)으로 함께 불리기도 했다. 만년에 왕유는 정치에서 멀어져 불교, 특히 선불교 수행에 몰두했으며, 이는 그의 시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쳐 사후 '시불(詩佛)'이라는 칭호를 얻게 했다. 현재 약 420편의 시가 왕유의 작품으로 전해지며, 이 중 370여 편이 진작으로 여겨진다.[29] 그는 특히 중국 시 형식인 절구의 대가로 평가받는다.[30]

또한, 왕유는 그림으로 유명한 화가 한간의 재능을 젊은 시절에 알아보고 자금을 지원하여 그가 그림 공부에 전념하고 대성할 수 있도록 도왔다는 일화로도 알려져 있다. 왕유 자신도 그림 그리는 방법에 대해 논한 "화학비결(画学秘訣)"이라는 글을 남겼다.[42]

5. 망천(輞川)

왕유의 장원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망천(輞川zho)은 장안 동남쪽 남전현(藍田縣)에 위치하며, 남전산(藍田山)과 요산(嶢山) 사이를 흘러 하수(혹은 황하)로 흘러드는 강 이름이다. 왕유는 이 강의 원류에서 남쪽으로 30리 정도 떨어진 곳에 있던 당나라 시인 송지문(宋之問)의 옛 별장 터를 사들여 자신의 별장을 지었다.[31] 당시 장안의 많은 명사들이 이 근처에 별장을 지었는데, 이는 도교불교 사상이 융합된 산간 은거 풍습의 영향이었으며, 왕유가 이러한 유행을 이끌었다고 알려져 있다.

왕유는 개원 연간부터 망천에 살기 시작하여 천보 9년(750년) 무렵 별장을 거의 완성했다. 그는 이곳에서 마찬가지로 별장을 짓고 있던 전기(錢起) 등과 교류했으며, 그의 청정하고 결벽한 성품을 보여주는 일화도 전해진다. 왕유가 친구 배적(裴迪)과 주고받은 시들은 《망천집》(輞川集)이라는 이름으로 묶여 20수가 남아 있다. 이 시들은 왕유의 청정(淸淨)에 대한 동경과 유원(幽遠)한 정취를 일관되게 표현하고 있다. 《망천집》에는 왕유의 시 다음에 배적의 시가 실려 있다.

왕유의 망천 별장에는 다음과 같은 다양한 건물과 자연물이 있었으며, 이들은 《망천집》 시의 제목이 되기도 했다.

왕유 망천 별장의 주요 구성 요소
구분명칭 (한자)
택원(宅院)북타(北垞)
남타(南垞)
누정(樓亭)문행관(文杏館)
죽리관(竹里館)
임화정(臨湖亭)
언덕화자강(華子岡)
근죽령(斤竹嶺)
울타리녹시(鹿柴)
목란시(木蘭柴)
원림(園林)칠원(漆園)
초원(椒園)
도로신이오(辛夷塢)
궁괴맥(宮槐陌)
명적(名跡)맹성요(孟城坳)
금설천(金屑泉)
호수의호(欹湖)
명소수유반(茱萸沜)
유랑(柳浪)
난가뢰(欒家瀬)
백석탄(白石灘)



이 별장을 그린 그림은 「망천도」(輞川圖)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며, 이를 베낀 그림들이 널리 퍼져 당나라 말기에는 사람들이 감상하거나 몸에 문신으로 새기기도 하고, 그림 속 경치를 본뜬 요리가 만들어지기도 했다고 한다.

왕유는 특히 관중 출신의 친구 배적과 망천에서 주로 교류했다. 또한 두보와도 교류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아래는 《망천집》에 실린 왕유의 시 일부이다.

"사슴 울타리" (鹿柴|Lù Cháizho)

> 쓸쓸한 산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고,

> 말소리만 메아리친다.

> 햇빛은 깊은 숲 속으로 반사되어 들어와

> 다시 푸른 이끼를 비춘다.

>

> 空山不見人,

> 但聞人語響。

> 返景入深林,

> 復照青苔上。zho

"궁궐 회나무 길" (宮槐陌|Gōng Huái Mòzho)

> 궁궐 회나무 그늘 아래 비스듬한 길,

> 숨겨진 그림자 속에는 푸른 이끼가 많다.

> 문지기는 방문객만을 쓸어주니,

> 산속 스님이 올까 두렵다.

>

> 仄逕蔭宮槐,

> 幽陰多綠苔。

> 應門但迎埽,

> 畏有山僧來。zho

"호수를 바라보는 정자" (臨湖亭|Lín Hú Tíngzho)

> 가벼운 배가 귀한 손님을 맞이하니,

> 호수 건너 멀리서 오셨네.

> 우리는 발코니에서 술을 마주하며 앉으리니

> 사방에는 연꽃이 피어 있네.

>

> 輕舸迎上客,

> 悠悠湖上來。

> 當軒對尊酒,

> 四面芙蓉開。zho

"난나무 곁 급류" (欒家瀨|Luán Jiā Làizho)

> 가을비 속 바람 소리 흐느끼고,

> 빠른 물이 돌 위로 졸졸 흐른다.

> 튀어 오르는 물결이 서로 부딪히니—

> 흰 왜가리가 놀라 날아올랐다가 다시 내려온다.

>

> 颯颯秋雨中,

> 淺淺石溜瀉。

> 跳波自相濺,

> 白鷺驚復下。zho

"대나무 숲 속의 오두막" (竹里館|Zhú Lǐ Guǎnzho)

> 나를 가리는 대나무 속에 홀로 앉아,

> 거문고를 뜯고 긴 휘파람을 분다.

> 깊은 숲 속에 아무도 모르니—

> 밝은 달이 나를 비추러 오네.

>

> 獨坐幽篁裏,

> 彈琴復長嘯。

> 深林人不知,

> 明月來相照。zho

6. 인물상

왕유는 자를 마힐(摩詰)이라 썼는데, 이는 불교 경전유마경(Vimalakirti Sutra)의 중심 인물인 재가 신자 유마힐(維摩詰, Vimalakīrti)에서 따온 것이다.[3] 이름 '유(維)'와 자 '마힐(摩詰)'을 합치면 '유마힐'이 되며, 이는 그의 깊은 불교 신앙을 보여준다. 그의 어머니 최씨 역시 독실한 불교 신자로, 당대 유명한 승려 보적을 스승으로 모셨으며, 왕유는 어머니의 영향을 강하게 받으며 성장했다. 그는 안사의 난 중에는 하택신회의 지지자가 되어 '향수전(香水銭)'이라는 수계(受戒)를 통한 군비 조달 방식을 지지하기도 했다.[55] 이러한 신앙심 때문에 오신채를 먹지 않고 화려한 복장을 피했으며, 아내가 일찍 세상을 떠난 후 30년 동안 재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지냈다고 전해진다.

왕유는 풍채가 세련되고 고상하며 박학다식했고,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애가 깊었으며 아내와의 사이도 매우 좋았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문학적 재능이 뛰어나 9세에 시를 지었고, 15세 무렵 수도 장안에서 유학하며 개원 연간에 이미 시인으로서 명성을 떨쳤다. 그의 재능은 왕족과 귀족들에게 큰 환영을 받았으며, 현종의 형인 영왕 이헌과 동생 설왕 이업은 그를 스승이나 친구처럼 대했다.

왕유는 시뿐만 아니라 초서·예서 등 서예에도 능했으며,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특히 비파 연주에 뛰어났다. 음악 연주 그림을 보고 즉석에서 곡명(예상우의곡)과 박자를 알아맞혔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이다. 또한 그림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여 후대에 남종화의 시조로 불리기도 한다.

젊은 시절, 현종의 동생 기왕 이범의 집에도 드나들었는데, 《집이기》(集異記)에는 과거의 예비 시험인 부시(府試)에서 장구령의 동생 장구고(張九皋)와 경쟁하게 되자, 기왕의 도움으로 악사로 변장하여 권세 있는 공주의 연회에 참석한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이 자리에서 왕유는 뛰어난 외모, 비파 연주 실력, 시 재능, 그리고 재치 있는 말솜씨를 선보여 공주의 환심을 샀고, 결국 부시 수석을 차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본사시》(本事詩)에는 영왕 이헌의 저택에서, 이헌이 총애하던 여인이 옛 남편을 만나 눈물 흘리는 장면을 보고 왕유만이 즉석에서 '식부인(息夫人)'이라는 시를 지어 좌중을 감동시켰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후대에 왕유는 고결하고 청아한 성품과 뛰어난 예술성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의 시와 그림은 자연을 섬세하게 묘사하며 선적인 정취를 담아낸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비판적인 평가도 존재한다. 남송의 주희는 그의 시가 "시들거리고 약하며 기골이 별로 없다"고 혹평했다.[55] 청대의 서증(徐增)은 이백을 천재, 두보를 지재(地才)에 비유하며 왕유를 인재(人才)로 평가했다.[55] 일본의 학자 고바야시 다이치로(小林太市郎)는 왕유를 "고매했지만 평범했다", "세상의 오탁(汚濁)을 싫어하면서도 떨쳐내지 못한 채 안이한 허송세월로 일생을 보낸 평범한 사람"이라고 평가하며 그의 소극적인 삶의 태도를 지적했다.[55][39] 대체로 귀족 제도에 대한 비판 정신과 예술적 성취는 높이 평가받지만, 정치적으로 귀족과 사족 사이에서 보인 소극적인 태도나 작품 전반에 나타나는 은둔자적 성향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7. 한국과의 관계

왕유의 시는 한국에서도 번역되어 소개되었다. 박삼수 교수가 왕유의 시 308편 376수 전체를 주제별로 나누어 번역했으며, 지식을만드는지식 출판사에서 총 6권으로 완간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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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문서 Ch'en and Bull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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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서적 杜詩詳註 中華書局 1979
[52] 서적 小林太市郎著作集 淡交社 1974
[53] 문서 분주는 지금의 중국 산시 성(山西省) 분양 시(汾陽市)이다.
[54] 문서 장안에서 열리는 예비 과거 시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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