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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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왕회는 전한 무제 시기의 대홍려로, 흉노와의 외교 및 군사 작전에 관여했다. 그는 민월과 동월 정벌에 참여했으며, 흉노와의 화친을 반대하고 공격을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마읍지계에 참여하여 흉노를 공격하려 했으나 실패하였고, 이 일로 인해 사형에 처해질 위기에 놓이자 뇌물을 통해 구명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자결했다.
왕회는 전한 시대의 인물로, 흉노와의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건원 6년(기원전 135년), 민(閩)·동월(東越)이 난리를 일으켰다. 대행 왕회는 대농령 한안국과 함께 진압에 나섰으나, 월에 도착하기 전에 그곳 사람들이 왕을 죽이고 항복하였다.
왕회는 기원전 136년부터 기원전 134년까지 전한의 대행령을 역임하였다. 과기의 뒤를 이어 이 직책을 맡았으며, 이후 구에게 인계되었다.
2. 생애 및 활동
건원 6년(기원전 135년), 민월과 동월이 서로 공격했을 때 무제는 왕회와 한안국을 파견했으나, 이들이 도착하기 전에 동월 사람들이 왕을 죽이고 항복했다. 같은 해 흉노가 화친을 청했을 때, 왕회는 흉노를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한안국 등은 화친을 주장하여 무제는 화친을 허락했다.
원광 원년(기원전 134년), 왕회는 섭옹일을 통해 흉노를 공격할 계책을 세웠으나, 마읍 전투는 실패로 끝났다. 이 전투에서 왕회는 이식, 이광과 함께 흉노의 치중대를 공격하기로 했으나, 작전이 실패하고 흉노의 선우가 돌아가자 싸움을 포기했다.
마읍 전투 실패의 책임을 지고 왕회는 처형될 위기에 처했다. 그는 승상 전분에게 뇌물을 주고 왕태후를 통해 구명을 요청했지만, 무제는 "왕회를 죽이지 않으면 천하에 사과할 방법이 없다"라며 거절했다. 결국 왕회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2. 1. 초기 활동 및 민월·동월 정벌
건원 6년(기원전 135년), 민월과 동월이 서로 공격하였다. 무제는 대행 왕회와 대농령 한안국을 파견하여 진압하게 하였으나, 이들이 도착하기 전에 동월 사람들이 왕을 죽이고 항복하였다.
같은 해, 흉노가 화친을 청하였다. 무제는 대신들에게 의견을 구하였는데, 왕회는 흉노를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한안국은 화친을 주장하였고, 대신들 역시 한안국을 지지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리하여 무제는 화친을 허락하였다.
원광 원년(기원전 134년), 왕회는 섭옹일을 무제에게 보내 흉노를 칠 계책을 바쳤다. 섭옹일은 흉노의 첩자로 들어가 선우를 꾀어내었고, 조정에서는 왕회와 이광, 공손하, 이식, 한안국을 장군으로 삼고 30만 병력을 주어 흉노를 급습하게 하였다. 왕회는 이식, 이광과 함께 대나라에서 흉노의 치중대를 치기로 하였다. 그러나 작전이 실패하여 선우는 돌아갔고, 왕회 등의 병력 3만 명은 선우가 작전을 알아차렸다는 소식을 듣고 싸움을 포기하여, 아무도 공을 세우지 못하였다.
2. 2. 흉노와의 관계 및 마읍 전투
왕회는 흉노와의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전한의 관리였다. 건원 6년(기원전 135년), 흉노가 화친을 청했을 때, 왕회는 이를 반대하고 흉노를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어사대부 한안국은 화친을 주장했고, 대신들 대다수가 한안국의 의견에 동조하여 무제는 흉노와 화친하게 되었다.
원광 원년(기원전 134년), 왕회는 섭옹일을 통해 흉노를 칠 계책을 무제에게 제안했다. 이에 따라 섭옹일은 흉노의 첩자로 들어가 선우를 꾀어냈고, 조정에서는 왕회와 이광, 공손하, 이식, 한안국을 장군으로 삼아 30만 병력으로 흉노를 급습하게 했다. 왕회는 이식, 이광과 함께 대나라에서 흉노의 치중대를 공격하기로 했으나, 작전이 실패하여 선우는 돌아갔고, 왕회 등은 싸움을 포기하여 아무런 공을 세우지 못했다.
마읍 전투의 실패로 무제의 분노를 산 왕회는 정위에게 넘겨져 참수형을 선고받았다. 왕회는 승상 전분에게 뇌물을 주어 목숨을 구하려 했으나, 무제는 "왕회를 죽이지 않으면 천하에 사과할 방법이 없다"라며 거절했고, 결국 왕회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2. 3. 죽음
건원 6년(기원전 135년), 민(閩)·동월(東越)이 난리를 일으켰다. 대행 왕회는 대농령 한안국과 함께 진압에 나섰으나, 월에 도착하기 전에 그곳 사람들이 왕을 죽이고 항복하였다.
같은 해, 흉노가 화친을 청하였다. 무제는 대신들에게 의견을 구하였는데, 왕회는 "화친한다 하여도 몇 년 지나지 않아 또 흉노가 약속을 어길 테니, 군대를 일으켜 치는 것이 낫습니다."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어사대부 한안국은 화친할 것을 주장하였고, 대신들 가운데 한안국의 의견에 찬성하는 이가 많았기 때문에 무제는 흉노와 화친하였다.
원광 원년(기원전 134년), 왕회는 섭옹일을 무제에게 보내 흉노를 칠 계책을 바쳤다. 섭옹일은 흉노의 첩자로 들어가 선우를 꾀어내었고, 조정에서는 왕회와 이광·공손하·이식·한안국을 장군으로 삼고 30만 병력을 주어 흉노를 급습하게 하였다. 왕회는 이식·이광과 함께 대나라에서 흉노의 치중대를 치기로 하였다. 그러나 작전이 실패하여 선우는 돌아갔고, 왕회 등의 병력 3만 명은 선우가 작전을 알아차렸다는 소식을 듣고 싸움을 포기하여, 아무도 공을 세우지 못하였다.
무제의 노여움을 산 왕회는 정위에게 넘겨져 참수형 판결을 받았다. 왕회는 목숨을 부지하려고 승상 전분에게 1000근을 뇌물로 바쳤고, 전분은 무제에게 직접 말하지 못하고 왕태후에게 왕회의 구명을 청원하였다. 왕태후가 무제에게 왕회를 살려주라고 하였으나, 무제는 "처음으로 마읍의 일을 주도한 자는 왕회였고, 때문에 천하의 군사 수십만 명을 동원하여 그의 말대로 움직였습니다. 비록 선우는 잡지 못했더라도 왕회가 치중대를 쳤다면 자못 소득이 있었을 테고, 그로써 사대부들을 위로할 수 있었을 겁니다. 지금 왕회를 죽이지 않으면, 천하에 사과할 방법이 없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왕회는 이 말을 듣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3. 관련 기록
같은 해, 흉노가 화친을 청하였다. 무제는 대신들에게 의견을 구하였는데, 왕회는 화친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어사대부 한안국은 화친할 것을 주장하였고, 대신들 가운데 한안국의 의견에 찬성하는 이가 많았기 때문에 무제는 흉노와 화친하였다.
원광 원년(기원전 134년), 왕회는 섭옹일을 무제에게 보내 흉노를 칠 계책을 바쳤다. 섭옹일은 흉노의 첩자로 들어가 선우를 꾀어내었고, 조정에서는 왕회와 이광·공손하·이식·한안국을 장군으로 삼고 30만 병력을 주어 흉노를 급습하게 하였다. 왕회는 이식·이광과 함께 대나라에서 흉노의 치중대를 치기로 하였다. 그러나 작전이 실패하여 선우는 돌아갔고, 왕회 등의 병력 3만 명은 선우가 작전을 알아차렸다는 소식을 듣고 싸움을 포기하여, 아무도 공을 세우지 못하였다.
무제의 노여움을 산 왕회는 정위에게 넘겨져, 참수형 판결을 받았다. 왕회는 목숨을 부지하려고 승상 전분에게 1000금을 뇌물로 바쳤고, 전분은 감히 무제에게 직접 말하지 못하고 왕태후에게 왕회의 구명을 청원하였다. 왕태후가 무제에게 왕회를 살려주라고 하였으나, 무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왕회는 이 말을 듣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사마천, 《사기》 권108 한장유열전
4. 관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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