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다 겐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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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시다 겐코는 1283년경에 태어난 일본의 승려이자 작가로, 대표작은 수필집 《쓰레즈레구사》이다. 그는 황궁의 경비대 장교로 근무하다가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으며, 다양한 주제를 다룬 《쓰레즈레구사》를 통해 삶의 덧없음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요시다 겐코의 출생과 관련된 여러 설과, 그의 작품이 대중문화에 미친 영향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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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다 겐코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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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겐코 (兼好) |
다른 이름 | 요시다 겐코 (吉田 兼好) 우라베 겐코 (卜部 兼好) 겐코 호시 (兼好法師) |
로마자 표기 | Kenkō |
인물 정보 | |
출생 | 1283년경 |
사망 | 1350년 (66~67세) |
국적 | 일본 |
직업 | 불교 승려 작가 화가 |
경력 | |
시대 | 무로마치 시대 가마쿠라 시대 |
분야 | 수필 |
대표작 | 쓰레즈레구사 (徒然草) |
관직 | |
관위 | 종5위하 |
직책 | 좌병위사 |
주군 | 고후시미 천황 고니조 천황 |
가계 | |
씨족 | 우라베 씨 |
부 | 우라베 가네아키라 |
형제 | 겐코 지헨 가네오 |
배우자 | 없음 |
자녀 | 없음 |
2. 생애
겐코는 1283년경 행정 관리의 아들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요시다 신토 관련 문서에 따르면 그의 원래 이름은 우라베 가네요시(卜部兼好)였고, 나중에 요시다(吉田)로 성을 바꾸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오가와 타케오의 연구에 따르면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2] 겐코는 황궁 경비대 장교로 근무하다가 은퇴하여 불교 승려이자 은둔자가 되었다. 은퇴 이유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가 국 지사의 딸과의 불행한 사랑이나 고우다 천황의 죽음에 대한 슬픔 때문이라는 추측이 있다.
겐코는 시를 짓기도 했으며, 황궁에서 열린 시 대회에 참가한 기록(1335년, 1344년)도 남아있다. 그의 대표작은 쓰레즈레구사이다.
2. 1. 출자
겐코는 고대부터 점술을 관장하며 신기관의 관직을 맡아온 우라베 씨 가문 출신이다. "우라베 씨 계도"[3] (『존비분맥』)에 따르면, 겐코의 아버지는 지부소우라베 겐켄이며, 형제로는 대승정지헨, 종5위하민부대보 우라베 겐유가 있다고 한다. 겐코의 조부인 종4위하우쿄노다이부 우라베 겐명의 대에 요시다 신사의 신직을 맡는 요시다류 우라베 씨에서 갈라져 나온 서류에 해당한다고 여겨진다.그러나 오가와 타케오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기존의 통설에 대해 부정설을 제시하며, 겐코의 출자를 불명으로 본다.[2]
- 육위의 창고계원이라면 겐코가 공가 일기에 등장해도 이상하지 않지만 발견되지 않는다.
- 천황을 보좌하고 있을 시기에 가마쿠라에 장기 체류하고 있다.
- 우라베 씨의 가계는 낮고, 겐코만 육위의 창고계원·좌병위좌라는 고관에 임명된 것은 부자연스럽다.
- 아버지로 여겨지는 겐켄, 형제인 겐유·지헨은 실존 인물이지만, 동시대 사료에서는 그들은 혈연관계가 아니다.
- 「우라베 씨 계도」는 『존비분맥』과는 원래 관계가 없고, 15세기 말경에 편찬된 것이 나중에 찬입된 것이다.
- 겐코는 겐오 2년(1320년)에 성립된 『속천재집』 이후 7개의 칙찬 와카집에 입집하고 있지만, 제대부 (오위) 이상이라면 속명으로 표기되는 원칙에 반하여, 모두 「겐코 법사」이다.
- 겐코 본인을 아는 후지와라 모리노리 (겐세이 법사)에 의한 『칙찬 작가 부류』에서는 겐코는 「범승」으로 분류되어, 세계 관력의 기재는 없다.
오가와 설에서는 겐코의 출자를 젊은 시절에 우라베 성을 칭한 것 외에는 불명으로 한다. 단, 쇼와 5년 (1316년)에 사망한 신궁 제주·오나카토미 사다타다의 추선을 위해 결연경 와카를 읊고 있는 것 (가집·26번)으로 보아, 요시다 류 우라베 씨보다는 히라노 류 우라베 씨 (히라노 신사의 신주를 맡고, 오나카토미 씨와 인척 관계가 있다)의 계통에 가깝다고 보고, 겐코의 간토 하향도 이세국수호·가나자와 류 호조 씨와의 관계라고 추측한다.
2. 2. 출가 전
겐코는 1283년경 행정 관리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추정된다. 요시다 신토 측 자료에 따르면 그의 원래 이름은 우라베 가네요시(卜部兼好)였고, 후에 요시다(吉田)로 성을 바꾸었다고 하나, 오가와 타케오의 연구에 따르면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2]겐코가 황궁의 경비대 장교였다는 설이 있으나, 오가와 타케오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부정적인 견해를 제시한다.
- 겐코가 육위(六位)의 관리였다면 공가(公家)의 일기에 등장해야 하지만, 그러한 기록이 없다.
- 천황을 보좌해야 할 시기에 가마쿠라에 장기간 체류했다.
- 우라베 가문의 가계가 낮은데, 겐코만 고위 관직에 임명된 것은 부자연스럽다.
- 겐코의 아버지로 여겨지는 인물 등은 실존 인물이지만, 동시대 사료에는 혈연관계가 나타나지 않는다.
- 「우라베 씨 계도」는 15세기 말경에 편찬된 것으로, 나중에 내용이 추가되었다.
- 『쇼테츠 이야기』에는 겐코가 타키구치라고도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제대부(오위)라는 기술과 모순된다.
- 겐코는 여러 칙찬 와카집에 입집되었지만, 모두 "겐코 법사"로 표기되어 있어 제대부 이상의 원칙에 어긋난다.
- 겐코를 아는 후지와라 모리노리는 겐코를 "범승"으로 분류하고, 관직 경력을 기재하지 않았다.
오가와 타케오는 「우라베 씨 계도」가 요시다 겐구에 의해 날조된 것으로 보고, 겐코의 출신은 젊은 시절 우라베 성을 칭한 것 외에는 불분명하다고 주장한다. 다만, 쇼와 5년(1316년)에 사망한 신궁 제주·오나카토미 사다타다를 위해 와카를 읊은 것으로 보아, 요시다 류 우라베 씨보다는 히라노 류 우라베 씨(히라노 신사의 신주를 맡았고, 오나카토미 씨와 인척 관계)에 가깝다고 추측한다.
『겸양가집(兼好歌集)』에 따르면, 겐코는 적어도 두 번 간토 지방으로 내려갔으며, 한 번은 가마쿠라 · 가나자와에 일정 기간 거주했다.
겐코의 간토행은 연경 원년(1308년) 11월 11일자 로쿠하라 단다이 · 가나자와 사다아키가 쇼묘지 장로 · 겐아에게 보낸 서장[4](가나자와 문고 문서)에서도 확인된다. 이 서장은 겐코가 가마쿠라에서 교토로 가져온 겐아의 편지에 대한 답장으로, 당시 에치고노카미쇼고이게였던 사다아키가 "겐코"라고 이름을 부른 것으로 보아, 겐코가 종5위하 · 사효에노스케의 지위에 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가나자와 문고에는 "우라베노카네요시"라는 이름이 나타나는 서장[5]이 있는데, 겐아를 "묘닌(명인)의 어방"이라고 부르고 있어 겐아가 쇼묘지 장로로 취임(1308년)하기 이전의 것으로 보인다. 이 서장에서 "시로타로"가 공양하는 분으로 "우라베노카네요시"의 이름을 언급하고 있어, 오가와 타케오는 "시로타로"가 우라베 겐코의 가명이었다고 추정한다.
또한, 가나자와 문고에는 겐코 자신이 겐아에게 보낸 서장의 봉투 종이도 2통[6][7] 현존하며, 모두 "우라베 겐코"로 서명하고 위계 관명을 적지 않은 것으로 보아, 겐코가 출가 전까지 정식 관직에 오르지 않았다고 추측할 수 있다.
겐코가 교토로 돌아온 연경 원년(1308년)은 고니조인이 사망한 해이기도 하다. 사이카몬인이 추선 공양을 위해 겐코에게 읊게 한 다음 와카는 제작 연대가 분명한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2. 3. 출가와 둔세
겐코는 30세 전후에 출가하여 속명을 음독한 "겐코(兼好)"라 칭했다. 출가 동기는 쇼테츠 이야기(正徹物語)에서 겐코(元亨) 4년(1324년) 고우다 원의 붕어 때문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쇼와 2년(1313년) 이전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출가 동기는 명확하지 않지만, 고우다 천황의 죽음에 대한 슬픔이나 불행한 사랑 때문이라는 추측이 있다.출가 후 겐코가 살았던 곳으로는 슈가쿠인(현 교토시사쿄구)과 히에이 산 요카와 등이 『겐코 가집(兼好家集)』에 나타난다. 닌나지 남쪽의 소가오카(双ヶ丘)는 겐코와 관련된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나란히 언덕에 묘소를 마련하고, 곁에 벚꽃을 심게 한다"라고 겐코 자신이 썼지만, 거주했음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자료는 없다.[2]
2. 4. 니조파 가인
겐코는 니조 타메요에게 와카를 배웠으며, 쇼테츠가 쓴 『쇼테츠 이야기』에서는 타메요 문하의 와카 사천왕 중 한 명으로 꼽힌다. 겐코가 니조 타메요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았다는 사실은 겐코 4년(1324년)에 겐코가 베껴 쓰고 타메요로부터 가설을 전수받았다고 기록된 산조니시 사네타카의 『고금와카집』(호소카와 문고 소장)의 오쿠가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2]당시 가단은 니조파와 교고쿠파의 대립이 두드러졌으며, 다이카쿠지통의 고우다 상황·고니조 천황 아래에서 니조 타메요가 『신 후센집』을 편찬하고, 지묘인통의 후시미인·하나조노 천황 아래에서 교고쿠 타메카네가 『옥엽화가집』을 편찬하는 등, 양통의 정치 상황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쇼와 4년(1315년)에 교고쿠 타메카네가 로쿠하라 탄다이에 체포되어 토사국으로 유배되고, 분포 2년(1318년)에 다이카쿠지통의 고다이고 천황이 즉위하면서 니조파는 전성기를 맞이했다.[2] 니조 타메요가 『속 천재집』을 편찬하면서 겐코도 처음으로 칙찬 와카집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2]
겐코는 다이카쿠지통 황족과 관계를 맺었는데, 고우다 상황이 겐코의 노래를 불렀고(가집·104번),[2] 겐코 3년(1323년)과 쇼추 2년(1325년)에는 쿠니요시 친왕의 우타아와세에서도 노래를 불렀다(가집·157-161번, 108-109번).[2]
2. 5. 남북조 시대
겐무의 난 이후, 겐코는 무로마치 막부 성립 이후 북조의 요인들과 관계를 맺었다. 아시카가 다카우지, 아시카가 다다요시, 고노 모로나오, 니조 요시모토 등과 교류한 기록이 있다.[2]고에이(康永) 2년(1343년) 겐코는 겐지 모노가타리 기리쓰보(桐壺) 권을 "노리나"(宣名)라는 인물과 교합(校合)했다(궁내청 서릉부(宮内庁書陵部) 소장 오쿠가키(奥書)).[2] 노리나는 오나카토미 씨(大中臣氏)로서,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측근 아이바 미코마루(饗庭命鶴丸)의 아버지 등 혈연자일 가능성이 있다.[2]
조와(貞和) 2년(1346년) 10월부터 11월에 걸쳐, 다이고 사(醍醐寺) 좌주(座主)・산보인(三宝院) 겐슌(賢俊)은 겐코 등을 동반하여 이세(伊勢) 참궁을 했다(『겐슌 소조 니키(賢俊僧正日記)』).[2]
북조에서 태정대신을 역임한 토인 킨카타(洞院公賢)의 일기 『소엔다이략(園太暦)』에는 겐코가 3곳에 등장한다. 조와 4년(1348년) 12월 26일 조에서는 고노 모로나오(高師直)의 사자로서 카리키누(狩衣) 착용에 대해 묻기 위해 킨카타를 방문했다.[2]
북조의 관백・니조 요시모토(二条良基)의 오시코지카라스마루도노(押小路烏丸殿)에서 조와 연간에 개최되었던 월례 3도의 가회(歌会)에도 겐코는 톤아(頓阿)・케이운(慶運)과 함께 출석했다(『킨라이후타이쇼(近来風体抄)』).[2]
2. 6. 사망
겐코의 마지막 행적은 분화 원년(1352년) 8월 니조 요시모토가 지은 『후후코겐인덴 어백수(後普光園院殿御百首)』에 톤아, 쿄운과 함께 합점을 찍은 것으로 확인된다.[2]그러나 분화 원년 이후에도 생존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근거들이 존재한다.
- 이마가와 료슌은 『료슌 가학서(了俊歌学書)』에서 겐코가 레이제이 타메히데의 문하생이 되었다고 기록했다. 쇼헤이의 일통으로 남조에 가담했던 니조 타메사다가 칩거하고, 레이제이 타메히데가 북조 가단의 중심에 서면서 겐코도 타메히데에게 예를 다해야 했던 상황을 료슌이 과장했을 가능성이 있다.
- 『겐코 가집(兼好家集)』의 가필에는 다음과 같은 와카가 있다.
> 와카의 우라에 3대의 자취가 있는 해변 갈매기, 여전히 그 수를 더해가는 소리가 들려오네
이는 '3대'의 가집(『속천재집』, 『속후습유집』, 『풍아집』)에 입선했어도, 4대의 가집 작가가 될 수 없다고 탄식한 것이다. 겐코는 『신천재집』(1356년) 하명 이후, 『풍아집』(1359년) 주람 이전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3. 겐코의 인물상 생성과 유포
겐코의 인물상은 그의 작품과 그를 둘러싼 여러 설화를 통해 다양하게 형성되고 유포되었다.
겐코는 본래 우라베 가네요시라는 이름으로 행정 관리의 아들로 태어났으나(1283년경), 후에 요시다 겐코로 불리게 되었다. 요시다 신토 측 주장에 따르면 성씨가 바뀌었다고 하지만, 최근 연구에서는 이러한 주장이 거짓으로 밝혀졌다.[2] 겐코는 황궁 경비대 장교로 일하다 은퇴하여 불교 승려이자 은둔자가 되었다. 그 이유는 명확하지 않지만, 이가 국 지사의 딸과의 사랑이나 고우다 천황의 죽음에 대한 슬픔 때문이라는 추측이 있다.
겐코는 시를 짓고 황궁의 시 대회에도 참가했지만(1335년과 1344년), 그의 명성은 사후 출판된 243편의 단편 에세이 모음집인 ''쓰레즈레구사''를 통해 확고해졌다. 즈이히쓰 스타일로 쓰여진 이 작품은 자연의 아름다움, 삶의 덧없음, 전통, 우정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며, 15세기부터 인기를 얻어 17세기에는 고전으로 자리 잡았다. ''쓰레즈레구사''는 현대 일본 고등학교 교육 과정에도 포함되어 있다. 그의 또 다른 작품인 ''벚나무 아래 술잔''은 삶의 덧없는 즐거움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다.
겐코의 인물상은 태평기와 같은 군담 소설, 요시다 겐구에 의한 계보 날조, 이가 거주설, 남조 충신설 등 다양한 이야기를 통해 더욱 풍부해졌다.
3. 1. 『태평기』
군담 태평기 권 21에는 겐코가 고노 모로나오의 연애편지를 대필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8] 무로마치 막부의 집사였던 고노 모로나오는 시쥬노츠보네라는 여관에게서 시오야 타카사다의 아내가 미인이라는 말을 듣고 연정을 품게 되었다. 시쥬노츠보네에게 중매를 부탁했지만 잘 되지 않자, 겐코에게 연애편지를 대필하게 하여 전달했다. 하지만 타카사다의 아내는 편지를 열어보지도 않고 정원에 버렸고, 이에 화가 난 모로나오는 겐코의 저택 출입을 금지했다고 한다.그러나 『태평기』의 겐코, 고노 모로나오, 시오야 타카사다에 관한 기술은 각색이 많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기 어렵다.[8] 『태평기』에서는 모로나오가 와카에 대해 무지한 인물로 그려지지만, 실제로는 그의 와카가 칙찬집 『풍아화가집』에 실릴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사실과 다르다.
이 이야기는 에도 시대의 「가나데혼 충신장」의 원형이 된 『겐코 호시 모노미구루마』, 『고반 태평기』 등 후세의 연극이나 소설에서 많이 다루어졌다. 겐코가 모로나오에게 미모의 여성에 대한 연애편지를 대필해주는 이야기는 겐코를 "세련된 법사"의 이미지로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8]
이 설화에 대해 하야시 가호는 『본조둔사』에서 겐코 일생의 과실이라 평했고, 겐세이는 『부상은일전』에서 융통무애의 경지가 낳은 업이라고 평가했다. 도이 쓰네히라는 『춘졸랑화』에서 아시카가 가문의 약화를 꾀한 겐코의 책략이라고 주장했고, 『선진수상옥석잡지』는 태평기에 나오는 겐코는 동명이인이라는 설을 제기하는 등 다양한 평가가 존재한다.
3. 2. 요시다 겐구에 의한 계보·관력의 날조
15세기, 요시다 신토를 제창한 요시다 겐코는 자신의 가문의 영향력을 높이기 위해 후지와라노 사다이에, 가모노 조메이, 겐쇼, 니치렌 등 과거의 저명한 인물과 가인이 자신의 선조의 제자였다고 주장했다.[2] 또한, 요시다 신도에 영향을 준 『구사혼기 겐기』의 저자 지헨을 요시다류 우라베 씨의 계도에 포함시켰다. 분메이 12년(1480년)에는 지헨을 겐유의 손자, 겐켄의 아들로 하는 계도를 문하생에게 제시했지만, 훗날의 「우라베 씨 계도」와는 다를 뿐만 아니라, 겐코는 계도에 들어 있지 않았다. 겐코는 당시 지명도를 높이고 있던 겐코가 우라베 씨를 칭한 시기가 있었던 것을 이용하여, 겐코를 요시다류 우라베 씨의 계보에 포함시킨 「우라베 씨 계도」를 날조한 것으로 보인다.겐코의 적자 가네무치는 간쇼 5년(1464년)에 육위 장인에 임명되었다. 이를 위한 선례로서 겐코가 제시한 것은 겐코·겐코가 육위 장인으로 출사했다는 것이었다(『지쓰타카 공기』에이쇼 6년(1509년) 8월 6일 조항). 그러나 겐코는 이미 출가했으며, 「겐타카」에 이르러서는 실존조차 불분명하다. 가네무치는 메이오 7년(1498년)에는 좌병위좌에 임명되지만, 이때도 우라베노 가네나오가 좌병위독, 가네시게가 사콘노쇼쇼, 겐코가 우병위좌에 임명된 것을 겐코는 선례로 주장한다. 이것들도 거의 역사적 사실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이러한 「선례」는 겐코가 적자를 임관시키기 위한 날조라고 할 수 있다.
3. 3. 이가 거주설
중세의 연가 작가이자 《만수일로》의 저자인 노토 에이칸이 쓴 것으로 알려진 《[https://www.digital.archives.go.jp/file/1241792 이가국 명소기]》의 "고쿠미산" 부분에는 타이라는 마을에 겐코 호시의 암자 터가 있고 석탑 등이 있었다고 적혀 있다.[9] 그러나 이러한 기록은 믿기 어렵다고 여겨진다.에도 시대에 퍼진 『소엔다이략』이라는 위서(僞書, 거짓으로 꾸며 쓴 책)에는 겐코가 이가국에서 생을 마감했다는 내용이 있다. 키쿠오카 뇨겐이 편찬하여 1687년에 번주에게 바쳐졌다는 《이수온고》에는 "겐코즈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9]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겐코 호시의 아버지는 우라베 가네아키이다.
- 처음 이름은 사효에 가네유키였으나, 나중에 겐코로 이름을 바꾸었고, 고우다인 호쿠멘이었다.
- 머리를 깎고 겐코라는 법명을 얻어 요시다 산에 살았다.
- 이가노카미 타치바나 나리타다는 겐코와 친하게 지냈으며, 겐코는 이가로 가서 코쿠미 산 기슭의 타이다이 쇼에 암자를 지었다.
- 17, 8세의 나리타다의 딸에게 겐코는 몇 년 동안 드나들며, "시노부 산, 다시 코토카타의 길도 바라노니, 흐르는 자취는 사람도 알 것이다"라는 시를 읊었다.
- 이세 신궁의 쇼 네기 종사위상 조 나오가 암자를 찾아와 와카를 배웠다.
- 1362년 5월 23일, 63세로 병으로 세상을 떠나 고쿠미 산 기슭에 묻혔다.
하지만 이 내용은 현존하는 《소엔다이략》에는 없을 뿐만 아니라, 1362년은 도인 킨카겐이 사망한 이후이므로 거짓으로 꾸며 쓴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소엔다이략》 위서는 내용과 형태를 바꾸면서, 최종적으로 26조에 달하는 분량으로 늘어났다.
26개 조로 이루어진 최종적인 《소엔다이략》 위서 중, 연도가 명확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1711년에 간행된 카가미 시코의 《[http://codh.rois.ac.jp/iiif/iiif-curation-viewer/index.html?manifest=http://codh.rois.ac.jp/pmjt/book/200019689/manifest.json&canvas=http://codh.rois.ac.jp/pmjt/iiif/200019689/canvas/00017&lang=ja 츠레즈레의 찬]》에 나오는 것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1343년 8월 25일
- * 천연두 가명을 위해 남조의 천황에게 불려감.
- 1349년 7월 1일
- * 이가국 타이다이 쇼의 밀승원에 거주함.
- 1350년 2월 3일
- * 이가국에서 병을 앓음.
- 같은 해 2월 25일
- * 겐코의 이력 및 타치바나 나리타다의 딸 코벤과 관계를 맺었던 일, 이가국 코쿠미 산 기슭에 암자를 지어 타이다이 쇼에서 68세로 사망함.
이러한 위서설은 17세기 후기에 구로카와 요시즈미가 《츠레즈레구사 슈이쇼》에서 "문체의 형태가 의심스럽게 위서일 것이다"라고 주장하면서 처음 제기되었다. 쇼코칸의 사카이 치쿠켄은 1699년의 편지에서 "겐코의 사망 연도가 소엔다이략에 있다고 말하는 것은 의심스러운 일입니다"라고 하였고, 결국 《대일본사》 권221 "가인전"의 겐코 항목에서는 위서의 내용은 채택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소엔다이략》 위서의 내용은 메이지 20년대의 《츠레즈레구사》 주석서에서도 자주 인용되었고, 이 내용을 부정하는 의견이 일반적이 된 것은 후지오카 사쿠타로의 《[https://dl.ndl.go.jp/pid/871949/1/159 도호 ika 유고 권3 가마쿠라 무로마치 문학사]》(1915년) 이후였다.
3. 4. 남조 충신설
에도 시대 중기 오카야마번의 와가쿠(일본학) 학자 도이 쓰네히라는 『고금저문집(徒然草)』과 『엔타이랴쿠(園太暦)』 위서의 내용을 근거로 겐코가 남조의 충신이었다는 설을 제창했다. 도이 쓰네히라는 『[http://codh.rois.ac.jp/iiif/iiif-curation-viewer/index.html?manifest=http://codh.rois.ac.jp/pmjt/book/200020192/manifest.json&canvas=http://codh.rois.ac.jp/pmjt/iiif/200020192/canvas/00105&lang=ja 춘항랑화](春湊浪話)』의 「고금저문집」, 「고노 모로요리의 염서를 겐코가 초고했다」에서 다음과 같은 근거를 제시했다.- 『고금저문집』에서는 고다이고 천황이 요시노로 옮긴 후에도 「선제」가 아닌 「당대」라고 기록한다.
- 『고금저문집』에서는 남조에 헌신한 공경의 일을 많이 언급한다.
- 『엔타이랴쿠』에 요시노에 가지 기도를 하러 참상한 것이 보인다.
- 『엔타이랴쿠』에서 교토를 피해 이가에서 생애를 마친 것도 남조에 마음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도이는 또한, 『태평기』에 나오는 고노 모로요리의 염서를 겐코가 대필했다는 일화에 대해, 겐코가 남조에 마음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아시카가 가문의 내부가 혼란스러워질 것을 속으로 기뻐하며" 모로요리의 부탁을 받아들였고, 그 결과 아시카가 가문은 혼란에 빠져 모로요리 형제는 살해당하고 고 일족은 몰락했다고 주장한다.
4. 대표작
겐코는 시에도 능하여 개인 와카집인 『겐코가집(兼好歌集)』을 남겼으며, 대표작으로는 즈이히쓰 문학의 효시로 여겨지는 《쓰레즈레구사》와 《벚나무 아래 술잔》이 있다.
4. 1. 《쓰레즈레구사(徒然草)》
겐코의 변치 않는 명성은 사후에 출판된 243편의 단편 에세이 모음집인 《쓰레즈레구사》에 기인한다. "게으름 속의 수필"로 번역되기도 하지만, "한가한 시간의 기록" 또는 "한가한 시간의 메모"가 더 정확한 번역이다. 이 에세이의 주제에는 자연의 아름다움, 삶의 덧없음과 무상함, 전통, 우정 및 기타 추상적인 개념이 포함된다.[2] 이 작품은 작가의 붓이 생각의 흐름에 따라 한 주제에서 다음 주제로 넘어갈 수 있도록 하는 의식의 흐름의 일종인 ''즈이히쓰''(붓 가는 대로) 스타일로 쓰여졌다. 어떤 글들은 한두 문장으로 된 짧은 언급이고, 다른 글들은 몇 페이지에 걸쳐 이야기를 서술하며, 종종 담론적인 개인적 논평이 덧붙여진다. ''쓰레즈레구사'' 외에도 겐코의 또 다른 작품으로 ''벚나무 아래 술잔''이 있는데, 이는 삶의 덧없는 즐거움에 대해 주로 논하는 그의 생각에 대한 반성과 에세이 모음집이다.''쓰레즈레구사''는 이미 15세기에 인기를 얻었으며 17세기부터 고전으로 여겨졌다. 이 작품은 현대 일본 고등학교 교육 과정의 일부이며, 일부 국제 바칼로레아 학교에서도 사용된다.
4. 2. 기타 작품
겐코의 개인 와카집인 『겸양가집(兼好歌集)』이 있다. 『속천재집』 이후 7개의 칙찬 와카집에 18수가 수록되어 있다.[2]5. 대중문화 속 겐코
요시다 겐코는 여러 대중문화 작품에서 다루어지고 있으며, 그의 인물됨과 작품은 현대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5. 1. 교육 프로그램
- 1989년 NHK 종합에서 방영된 《만화로 읽는 고전》의 「고려사」 편에 타테카와 시노스케가 출연하였다.
- 2021년 4월 13일, NHK E 텔레에서 방영된 《선인들의 저력 지혜의 샘》의 「혼자 즐기기: 겐코 법사 자신만의 자리를 만드는 비결」 편에 미야자와 텐이 출연하였다.
5. 2. 만화 및 애니메이션
겐코와 《쓰레즈레구사》를 소재로 한 만화 및 애니메이션 작품은 다음과 같다.참조
[1]
서적
Legends of the Samurai
Overlook Duckworth
[2]
ISBN
[3]
웹사이트
卜部氏系図
https://www.digital.[...]
国立公文書館デジタルアーカイブ
2024-06-06
[4]
웹사이트
金沢貞顕書状 · 国宝 金沢文庫文書データベース
https://kanazawabunk[...]
2024-06-05
[5]
웹사이트
氏名未詳書状 · 国宝 金沢文庫文書データベース
https://kanazawabunk[...]
2024-06-05
[6]
웹사이트
卜部兼好書状懸紙 · 国宝 金沢文庫文書データベース
https://kanazawabunk[...]
2024-06-05
[7]
웹사이트
卜部兼好書状懸紙 · 国宝 金沢文庫文書データベース
https://kanazawabunk[...]
2024-06-05
[8]
문서
夕腸亭馬齢『[[近松門左衛門]]著 兼好法師物見車』
[9]
웹사이트
国立国会図書館デジタルコレクション
https://dl.ndl.go.jp[...]
2024-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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