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요한 테첼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요한 테첼은 1465년 작센에서 태어나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공부한 후 도미니코 수도회에 들어간 인물이다. 그는 면죄부 설교가로 명성을 얻어 교황 레오 10세로부터 면죄부 설교를 위임받았으며, 1517년에는 마인츠 대주교 알브레히트 폰 브란덴부르크를 위한 면죄부 판매 위원이 되었다. 테첼은 면죄부 판매 과정에서 "금화가 헌금함에서 울리는 순간, 구원받은 영혼은 천국으로 날아오른다"는 과장된 주장을 펼쳐 논란을 일으켰고, 마르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 발표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그는 부도덕 행위 혐의로 기소되기도 했으나 무죄 판결을 받았으며, 1519년 사망했다. 테첼은 가톨릭 교리를 과장했다는 비판을 받았으며, 루터와의 갈등은 종교 개혁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라이프치히 논쟁 - 마르틴 루터
    마르틴 루터는 1483년 독일에서 태어난 신학자이자 종교 개혁가로, '오직 믿음으로' 칭의 교리를 확립하고 95개 논제를 발표하여 종교 개혁을 촉발했으며, 독일어 성경 번역과 성직자 결혼 허용에 기여했으나 후기에는 반유대주의적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 라이프치히 논쟁 - 안드레아스 카를슈타트
    안드레아스 카를슈타트는 16세기 독일의 신학자이자 종교 개혁가로, 마르틴 루터와 함께 종교 개혁에 참여했으나 성찬례와 성상 파괴에 대한 견해 차이로 갈등을 겪었으며, 비텐베르크에서 급진적인 개혁을 주도하다 루터와의 불화로 추방된 후 스위스에서 목회 활동을 하다 말년에는 바젤 대학교에서 히브리어 교수로 재직했다.
  • 1465년 출생 - 숙용 심씨
    숙용 심씨는 조선 성종의 후궁으로, 개국공신 심덕부의 증손녀이며 경순옹주, 숙혜옹주, 이성군, 영산군을 낳았고, 1515년에 사망하여 묘표가 국내로 반환되었다.
  • 1465년 출생 - 쇼신왕
    쇼신왕은 류큐왕국 제2 쇼씨 왕조의 제3대 국왕으로, 중앙 집권 체제 확립, 지방 제도 개혁, 문화적 번영, 영토 확장, 외교 관계 안정 등 왕국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 종교계 논란 - 라이프치히 논쟁
    라이프치히 논쟁은 1519년 라이프치히에서 마르틴 루터, 안드레아스 카를슈타트 등 종교 개혁 진영과 요하네스 에크를 중심으로 한 로마 가톨릭 진영 간에 벌어진 공개 신학 논쟁으로, 교황의 권위, 성경의 권위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며 종교 개혁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 종교계 논란 - 10·27 법난
    1980년 10월 27일 신군부가 불교계 정화를 명분으로 일으킨 10·27 법난은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단이 전국 사찰을 수색하고 승려들을 강제 연행, 폭력과 고문을 자행한 전두환 신군부의 권력 남용 사건으로, 2007년 국가권력 남용사건으로 규정되었고 피해자 명예회복 특별법이 공포되었으나 불교계는 미흡함을 지적했다.
요한 테첼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요한 테첼
요한 테첼
이름요한 테첼
출생일1465년경
출생지작센 선제후국, 피르나
사망일1519년 8월 11일
사망지라이프치히, 작센 선제후국
국적독일
직업도미니크 수도회 수도사, 설교가
소속도미니크 수도회
주요 활동면죄부 판매

2. 생애

요한 테첼은 1465년 작센 공국의 피르나에서 태어나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1489년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회하여 유명한 설교가가 되었으며, 1502년에는 추기경 조반니 데 메디치(훗날 교황 레오 10세)로부터 희년 면죄부 설교자로 위임받았다. 1509년에는 폴란드에서 종교 재판관으로 활동했다.

1517년 1월, 마인츠 대주교 알브레히트 폰 브란덴부르크를 위한 면죄부 판매 위원이 되면서 그의 활동은 큰 논란을 낳기 시작했다. 그는 면죄부 교리를 옹호하며 마르틴 루터와 대립했고, 이를 위해 1517년 비아드리나 유럽 대학교에서 신학 학사 학위를, 1518년에는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테첼의 면죄부 판매 방식, 특히 아직 짓지 않은 죄까지 사면해 준다는 주장은 큰 스캔들이 되었고, 이는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작성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루터는 테첼의 주장을 강하게 비판했다.

27. 돈이 궤짝에 짤랑거리는 소리가 나자마자 영혼이 연옥에서 날아간다고 말하는 자들은 인간의 교리만을 설교하는 것이다.


28. 돈이 궤짝에 짤랑거릴 때 탐욕과 탐욕이 증가할 수 있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교회가 중재할 때 그 결과는 오직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


테첼이 모금한 자금은 성 베드로 대성당 재건과 알브레히트 대주교의 부채 상환에 사용된 것으로 알려졌다.

테첼은 부도덕 행위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무죄 판결을 받았고, 카를 폰 밀티츠로부터 사기 및 횡령 혐의로 고발당하기도 했다. 이후 그는 논쟁에 지쳐 라이프치히의 도미니코 수도원으로 물러나 1519년 8월 11일 사망했다. 루터는 테첼이 임종을 앞두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 문제(면죄부 판매)는 그의 책임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는 내용의 위로 편지를 보냈다고 전해진다. 그는 사후 라이프치히 도미니코 교회 제단 앞에 안치되었다.[3] 그의 면죄부 판매 활동은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을 촉발한 주요 원인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2. 1. 수도회 입회와 초기 활동

피르나 작센에서 태어났으며,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1489년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회하였고 유명한 설교가가 되었다. 1502년에는 당시 추기경이었던 조반니 데 메디치로부터 희년 면죄부 설교를 하도록 위임받았다. 1509년에는 폴란드에서 종교 재판관으로 활동했다.

2. 2. 면죄부 판매와 논란

1517년 1월, 마그데부르크할버슈타트 교구에서 마인츠 대주교 알브레히트 폰 브란덴부르크를 위한 면죄부 판매 위원이 되었다. 그는 마르틴 루터에 맞서 면죄부 교리를 옹호하기 위해 1517년 비아드리나 유럽 대학교에서 신학 학사 학위를, 1518년에는 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테첼이 면죄부 판매로 모금한 돈은 성 베드로 대성당의 재건 비용과, 알브레히트 대주교가 대주교직을 확보하기 위해 발생한 부채를 갚는 데 절반씩 사용되었다.

테첼은 면죄부 판매를 촉진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구절을 사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금화가 헌금함에서 울리는 순간,

구원받은 영혼은 천국으로 날아오른다.



이 구절은 So bald der Gülden im Becken klingt,
Im huy die Seel im Himmel springt.de[5] 라는 독일어 원문으로 전해지며, 자주 인용되지만 이는 면죄부에 대한 공식적인 가톨릭 교리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며, 테첼 개인의 과장된 표현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특히 죽은 자를 위한 면죄부와 관련하여 가톨릭 교리를 과장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요한 테첼의 헌금함, 성 니콜라이 교회 (위터보크) 전시


가톨릭 역사가 루드비히 폰 파스터에 따르면, 테첼은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한 면죄부에 대해서는 순수한 가톨릭 교리를 가르쳤다. 즉, 면죄부는 이미 뉘우치고 고백한 죄에 대한 현세적 형벌에만 적용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죽은 자들을 위한 면죄부에 대해서는 '돈을 내기만 하면 뉘우침이나 고백 없이도 면죄부를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등 교리를 과장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이는 당시 신학계의 한 의견이었을 뿐 교회의 공식적인 교리는 아니었다.

테첼의 면죄부 판매 방식은 마르틴 루터의 강한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루터는 테첼의 활동에 부분적으로 영향을 받아 그의 유명한 ''95개조 반박문''을 작성했으며, 여기서 면죄부 판매를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27. 돈이 궤짝에 짤랑거리는 소리가 나자마자 영혼이 연옥에서 날아간다고 말하는 자들은 인간의 교리만을 설교하는 것이다.


28. 돈이 궤짝에 짤랑거릴 때 탐욕과 탐욕이 증가할 수 있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교회가 중재할 때 그 결과는 오직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


특히 테첼이 아직 저지르지 않은 미래의 죄에 대해서도 완전한 사면을 판매했다는 주장은 큰 스캔들을 일으켰다. 또한 부도덕 행위 혐의로 기소되기도 했으나 무죄 판결을 받았다. 카를 폰 밀티츠로부터 사기 및 횡령 혐의로 고발당하기도 했으나, 밀티츠의 주장은 나중에 신뢰성을 잃었다.

요한 테첼 선서 (1717)


루터는 테첼과 관련된 다음과 같은 일화를 전하기도 했다. 한 귀족이 미래에 저지를 죄에 대한 면죄부를 돈을 주고 산 뒤, 라이프치히를 떠나는 테첼을 공격하고 돈을 빼앗으며 이것이 자신이 사면받고자 했던 미래의 죄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나, 테첼이 할레에서 성모 마리아를 강간한 죄도 면죄부로 용서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그러나 성모 마리아 관련 발언에 대해서는, 테첼 본인이 할레의 시민 및 교회 당국으로부터 그러한 주장을 한 적이 없다는 내용의 진술서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테첼의 면죄부 판매 활동과 그를 둘러싼 논란은 종교 개혁의 중요한 도화선 중 하나가 되었다.

2. 3. 말년

1519년 8월 11일 라이프치히에서 사망했다.

3. 테첼의 주장과 가톨릭 교리

테첼은 죽은 자에 대한 면죄부와 관련하여 가톨릭 교리를 과장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는 자신에게 귀속된 다음의 구절로 유명해졌다.





금화가 헌금함에서 울리는 순간,

구원받은 영혼은 천국으로 날아오른다.





이 자주 인용되는 말은 면죄부에 대한 공식적인 가톨릭 가르침을 대표하지 않으며, 오히려 테첼의 과장된 선전 능력을 보여주는 사례로 여겨진다. 그러나 테첼이 죽은 자에 대한 면죄부와 관련하여 문제를 과장했다면, 산 자에 대한 면죄부에 대한 그의 가르침은 순수한 가톨릭 교리에 부합했다는 주장도 있다. 독일 가톨릭 역사가인 루드비히 폰 파스터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무엇보다도, 산 자에 대한 면죄부와 죽은 자에 대한 면죄부 사이에는 가장 명확한 구분이 이루어져야 한다.


산 자에 대한 면죄부에 관해서, 테첼은 항상 순수한 (가톨릭) 교리를 가르쳤다. 그가 면죄부를 죄의 현세적 형벌의 사면뿐만 아니라 죄책의 사면으로 제시했다는 주장은, 그가 뉘우침과 고백에 대한 언급조차 없이 돈을 받고 죄의 용서를 팔았다는 또 다른 비난만큼이나 근거가 없다. 또한 그는 돈을 받고 미래에 저지를 수 있는 죄로부터 면죄를 해주었다는 비난도 마찬가지다. 그의 가르침은 사실 매우 명확했으며, 당시와 현재의 (가톨릭) 교회의 신학과 완전히 일치했다. 즉, 면죄부는 "이미 뉘우치고 고백한 죄에 대한 현세적 형벌에만 적용된다"...

죽은 자에 대한 면죄부는 상황이 매우 달랐다. 이에 관해서는 테첼이, 그가 권위 있는 지침이라고 여긴 것에 따라, 뉘우침이나 고백에 대한 질문 없이, 죽은 자에 대한 면죄부를 얻기 위해서는 돈을 바치는 것만 필요하다는 것을 기독교 교리로 선포했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는 또한 당시의 의견에 따라 면죄부가 어떤 영혼에게든 틀림없이 효과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이 가정을 바탕으로, 그의 교리가 그 유명한 극단적인 격언의 실질적인 내용이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교황의 면죄 칙서는 이 제안에 대해 어떠한 승인도 부여하지 않았다. 이것은 1482년과 1518년에 소르본 대학교에서 거부된 모호한 스콜라적 의견이었으며, 교회의 교리는 아니었다. 따라서 부적절하게 교리적 진실로 제시되었다. 로마 교황청 신학자들 중 첫 번째인 카예탄 추기경은 그러한 과장의 적이었으며, 신학자와 설교자들이 그러한 의견을 가르치더라도 그들을 믿을 필요가 없다고 강조했다. "설교자들은", 그는 말했다, "그들이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의 교리를 선포하는 한 교회의 이름으로 말한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단지 자신의 상상력일 뿐인 것을 가르친다면, 그들은 교회의 대변인으로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 이들이 오류에 빠진다고 해서 아무도 놀라서는 안 된다."



요한 테첼이 배포한 면죄부는 부유한 시민에게는 6 굴덴, 그 외 일반 시민에게는 1 굴덴, 마을 주민에게는 1/2 굴덴 혹은 1/4 굴덴이었다고 전해진다. 그의 선전 문구가 여러가지로 인용되어 유명해졌는데, 그것은 운율을 맞춘 대구의 독일어로,



So bald der Gülden|굴덴de im Becken klingt,


Im huy die Seel im Himmel springt.[5]



이었다고 한다. 이것을 영어로는



As soon as a coin in the coffin|코핀영어 rings,


The soul from purgatory|퍼거토리영어 springs.



또는 일본어로는



굴덴 금화가 관에서 쨍 하고 울리면,


영혼은 지옥에서 (천국으로) 퐁 하고 뛰어오른다.



등으로 번역되지만, 그가 공손하게 라틴어로 말했는지, 운율을 맞춘 대구였는지, 과연 이런 말을 실제로 했는지는 알 수 없다.[6]

4. 마르틴 루터와의 관계

마르틴 루터테첼의 면죄부 판매 방식에 반대하며 공개적으로 설교하기 시작했고, 테첼의 활동은 루터가 그의 유명한 ''95개조 반박문''을 작성하는 데 부분적인 영향을 미쳤다. 루터는 반박문에서 다음과 같이 테첼의 주장을 비판했다.

: 27. 돈이 궤짝에 짤랑거리는 소리가 나자마자 영혼이 연옥에서 날아간다고 말하는 자들은 인간의 교리만을 설교하는 것이다.

: 28. 돈이 궤짝에 짤랑거릴 때 탐욕과 탐욕이 증가할 수 있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교회가 중재할 때 그 결과는 오직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

테첼은 루터에 맞서 면죄부 교리를 옹호하고자 1517년 비아드리나 유럽 대학교에서 신학 학사 학위를, 1518년에는 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루터와 두 차례 논쟁을 벌였다.

테첼이 아직 저지르지 않은 미래의 죄에 대해서도 완전한 사면을 팔았다는 주장은 큰 논란을 일으켰다. 테첼이 모금한 돈은 성 베드로 대성당 재건에 사용될 것으로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절반이 마인츠 대주교 알브레히트 폰 브란덴부르크 추기경에게 전달되어 그가 대주교직을 얻기 위해 진 빚을 갚는 데 사용되었다.

테첼은 죽은 자를 위한 면죄부와 관련하여 가톨릭 교리를 과장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는 다음과 같은 구절로 유명해졌다.

: 금화가 헌금함에서 울리는 순간,

: 구원받은 영혼은 천국으로 날아오른다.

이 구절은 면죄부에 대한 공식적인 가톨릭 가르침이라기보다는 테첼 개인의 과장된 표현으로 여겨진다. 독일 가톨릭 역사가 루드비히 폰 파스터는 테첼이 산 자를 위한 면죄부에 대해서는 가톨릭 교리를 충실히 따랐지만, 죽은 자를 위한 면죄부에 대해서는 '돈만 내면 뉘우침이나 고백 없이도 면죄부를 얻을 수 있다'고 설파하며 문제를 과장했다고 지적했다. 파스터는 이것이 당시에도 논란이 있던 스콜라적 의견일 뿐 교회의 공식 교리는 아니었으며, 카예탄 추기경과 같은 로마 교황청 신학자들은 이러한 과장을 비판했다고 설명했다.

루터는 테첼에 관한 두 가지 일화를 전했다. 첫 번째는 라이프치히에서 한 귀족이 미래에 저지를 죄에 대한 면죄부를 테첼에게 돈을 주고 샀다는 이야기다. 귀족은 면죄 증서를 받은 후 도시를 떠나는 테첼을 습격하여 돈을 빼앗고는, 이것이 자신이 계획했던 '미래의 죄'였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테첼이 할레에서 성모 마리아를 강간한 죄라도 면죄부로 용서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테첼 측은 할레의 시민 및 교회 당국으로부터 테첼이 그런 발언을 한 적이 없다는 진술서를 받아 이 주장을 부인했다.[3]

이후 카를 폰 밀티츠가 테첼을 사기 및 횡령 혐의로 고발하자, 테첼은 라이프치히의 도미니코 수도원으로 물러났다. 루터는 테첼이 병들어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위로하는 편지를 보냈다. 편지에서 루터는 "면죄부 문제는 그의 책임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고 전하며 그를 안심시키려 했다. 테첼은 자신을 둘러싼 논쟁에 지쳐 1519년 사망했고, 라이프치히의 도미니코 교회 제단 앞에 안치되었다.[3]

5. 평가 및 영향

요한 테첼은 마인츠의 브란덴부르크의 알브레히트 추기경을 위해 면죄부를 판매하는 중심 인물 중 하나로 활동하면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그의 이러한 활동은 훗날 마르틴 루터가 주도한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1517년)의 주요 계기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5]

테첼이 판매한 면죄부의 가격은 부유한 시민에게는 6 굴덴, 일반 시민에게는 1 굴덴, 마을 주민에게는 1/2 또는 1/4 굴덴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그는 면죄부 판매를 촉진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독일어 선전 문구를 사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 So bald der Gülden im Becken klingt,
Im huy die Seel im Himmel springt.|de [5]

이 문구는 "동전이 헌금함에 쨍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영혼은 연옥에서 뛰어오른다"는 의미로 해석되며, 영어일본어 등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알려졌다. 하지만 테첼이 실제로 이 문구를 라틴어가 아닌 운율을 맞춘 독일어로 사용했는지, 심지어 이런 말을 실제로 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다.[6] 그의 면죄부 판매 방식은 당시 가톨릭교회의 문제점을 드러내는 사례로 지적되며, 종교 개혁의 불씨를 지피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

6. 대중문화에서의 묘사

요한 테첼은 종교 개혁의 주요 원인 중 하나인 면죄부 판매 행위로 인해 여러 영화와 연극에서 탐욕스럽고 부정적인 인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그가 등장하는 주요 작품과 담당 배우는 다음과 같다.

연도작품 유형작품명배우
1928년영화루터야코프 티에트케
1953년영화마틴 루터알렉산더 게이지
1961년연극루터 (존 오스본 작)피터 불 (초연)
1973년영화루터 (1961년 연극 기반)휴 그리피스
1983년영화마틴 루터, 이단자클라이브 스위프트
2001년연극루터 (국립극장 부활 공연)리처드 그리피스
2003년영화루터알프레드 몰리나


참조

[1] 웹사이트 Johann Tetzel https://www.britanni[...] 2018-11-23
[2] 웹사이트 Johann Tetzel http://www.newadvent[...] New Advent 2018-11-23
[3] 웹사이트 Johann Tetzel http://www.newadvent[...] New Advent 2018-10-31
[4] 웹사이트 Johann Tetzel https://www.britanni[...]
[5] 웹사이트 Predigt zur Absicherung im Jenseits – Johann Tetzel, Ablasspredigt (ca. 1517) http://germanhistory[...]
[6] 웹사이트 Did Tetzel Really Say "As soon as the coin in the coffer rings, the soul from purgatory springs"? http://beggarsallref[...]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