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원짜오
1. 개요
우원짜오는 중국의 사회학자이자 인류학자로, 1917년 칭화대학교에 입학하여 미국 유학 후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화민국 시기 옌징대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중일 전쟁 이후에는 일본에서 전후 문제 조사를 담당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베이징으로 돌아갔으나, 1957년 '우파'로 지목되어 하방되었다. 이후 중앙민족대학에 우원짜오 장학금이 설치되어 그의 공로를 기리고 있다. 그는 또한 량치차오의 제자인 장쥔마이의 '인생관' 강연에 참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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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사회학자 -
페이샤오퉁
페이샤오퉁은 중국 사회 연구에 큰 영향을 미친 사회학자이자 인류학자로, 중국 농촌 사회의 특징을 분석하고 사회 관계가 사회적 네트워크를 통해 작동한다는 개념을 제시했으며, 중국 사회학 및 인류학 재건과 중국 민족 정책에도 기여했다. -
중국의 사회학자 -
판광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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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시시 출신 -
저우융캉
저우융캉은 중국의 정치인으로,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을 역임하며 사법, 정보, 공안 기관을 총괄했지만, 퇴임 후 권력 남용 등의 혐의로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
우시시 출신 -
예찬
원말명초의 은둔 화가이자 시인인 예찬은 부유한 지주 출신으로 관직에 나가지 않고 혼란기에 유랑 생활을 하며 결벽증과 기행으로 유명하며, 독자적인 평원 산수 화풍인 "소산체"를 확립했다. -
컬럼비아 대학교 동문 -
염홍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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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럼비아 대학교 동문 -
버락 오바마
버락 후세인 오바마는 미국 최초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대통령으로, 시민 운동가 및 법률가, 일리노이 주 상원의원, 미국 상원의원을 거쳐 2008년과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여 2임기를 역임하며 의료보험 개혁법 추진, 이라크 전쟁 종식, 오사마 빈 라덴 사살 작전 등의 업적을 남겼다.
2. 생애
우원짜오는 장쑤성 우시시에서 태어나 1917년 칭화대학교에 입학했다. 1923년 칭화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다트머스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1929년 컬럼비아대학교에서 인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같은 해 중화민국 베이핑으로 돌아와 문학 작가 빙신과 결혼했고, 사립 옌징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1933년부터 학과 주임 및 법학원 원장 등을 역임했다.
1939년에는 윈난대학교에 사회학과를 설립했고, 1940년부터 충칭에서 국민 정부 국방 최고위원회 간사로 활동하며 중국의 문화 사회 전반과 소수 민족의 문화 양식을 연구했다. 중일 전쟁 이후 1946년에는 전후 문제 처리를 위한 조사위원으로 일본에 파견되었다.
1949년, 장제스의 국민 정부가 타이완으로 이동할 때, 우원짜오는 미국 대학 교수직 제안을 거절하고 한국 전쟁 초기에 빙신과 함께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의 중국 공산당 정권에 의해 옌징대학교와 칭화대학교 사회학과가 폐교된 후, 1953년부터 베이징 중앙민족학원 민속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1957년 민속학 학제가 폐지되자 "우파"로 몰려 판광단, 우쩌린, 페이샤오퉁 등 다른 칭화대학교 출신 교수들과 함께 하방되었다.
1923년 2월 14일, 우원짜오는 칭화대학교가 장쥔마이를 '인생관(人生觀)' 주제의 특강 교수로 초빙하는 데 참여했다. 장쥔마이는 독일의 철학자이자 심리학자인 한스 드리슈를 대동하고 톈진과 베이징을 순회 강연하던 량치차오의 제자였다. 장쥔마이의 강연은 칭화대학교의 미국 유학 준비생들을 대상으로 한 유명한 강연이었으며, 우원짜오의 미국 유학 동기생인 구위슈, 왕화청, 쑨리런 등도 함께 청취했다.
1996년,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중앙민족대학에 '우원짜오 장학금'을 설치하여 그의 사회 인류학적 공로를 기렸다.
2.1. 초기 생애 및 교육
우원짜오는 중국 장쑤성 우시시에서 태어났다. 1917년 칭화대학교에 입학하여 1923년 졸업 후 미국으로 유학하였다. 다트머스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1929년 컬럼비아대학교 사회학과에서 인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같은 해 중화민국 베이핑으로 귀국한 후 유명 문학 작가 빙신과 결혼하였다. 1929년부터 사립 옌징대학교 사회학과에서 교편을 잡았고, 1933년 이후 옌징대학교 사회학과 주임, 법학원 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2.2. 중화민국 시기 활동
1929년 중화민국 베이핑에 귀국한 후 유명 문학 작가 빙신과 결혼하였다. 같은 해 사립 옌징대학교 사회학과에서 교편을 잡았고, 1933년 이후 옌징대학교 사회학과 주임, 법학원 원장 등을 지냈다. 1939년에는 윈난대학교에 건너가 사회학과를 세웠고, 1940년부터는 국민 정부의 전시 수도 충칭에서 국민 정부 국방 최고위원회 간사 직을 맡아 중국 문화 사회 전반과 중화민국의 소수 민족 문화 양식을 연구하였다. 중일 전쟁 승전 이후인 1946년에는 전후 문제 처리를 위한 조사위원으로 일본 정부에 파견되어 머물렀다.
2.3. 중화인민공화국 시기 활동
1949년 장제스 위원장의 국민 정부가 타이완으로 이동할 때, 우원짜오는 미국 대학 교수직 제안을 사절하고 한국 전쟁 초기에 빙신과 함께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있는 베이징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마오쩌둥, 저우언라이의 중국 공산당 마르크스-레닌주의 정권에 의해 옌징대학교와 칭화대학교 사회학과가 폐교된 후, 1953년부터 베이징 중앙민족학원의 민속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1957년 민속학 학제가 폐지되면서 "우파"로 지목되어 판광단, 우쩌린, 페이샤오퉁 등 다른 칭화대 출신 교수들과 함께 하방되었다. 1996년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중앙민족대학에 '우원짜오 장학금'을 설치하고 그의 사회 인류학적 공로를 기렸다.
2.4. 사후
우원짜오는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에 의해 "우파"로 지목되어 판광단, 우쩌린, 페이샤오퉁 등 다른 칭화대학교 출신 교수들과 함께 하방되었다. 1996년에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중앙민족대학에 '우원짜오 장학금'을 설치하고, 우원짜오의 사회 인류학적 공로를 기렸다.
3. 인생관 강연
1923년 2월 14일, 미국 유학 직전 우원짜오는 량치차오의 제자이자 법학자 겸 철학자인 장쥔마이를 칭화대학교 '인생관(人生觀)' 특강 교수로 초빙하는 데 참여하였다. 독일의 철학자이자 심리학자였던 한스 드리슈는 톈진과 베이징에서 순회 강연을 하였다. 장쥔마이의 '인생관' 강연은 칭화대학교의 미국 유학 준비생들을 대상으로 한 유명한 강연이었다(<칭화주간(淸華週刊)>, 1923년). 장쥔마이는 인생관과 자유 의지, 생의 철학, 개인과 사회, 국가와 세계 등의 문제에 관하여 강연하였으며, 우원짜오의 미국 유학 동기생이었던 구위슈(칭화대학교 전 공학 교육자), 왕화청(칭화대학교 전 법학 교수), 쑨리런(중화민국 국민 정부 전 미국 군사학교 유학파 출신 장군) 등도 '인생관' 강연을 함께 청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