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광렬 (1898년)
1. 개요
유광렬은 일제강점기에 언론인으로 활동하며 친일 행적을 보였으나, 해방 이후 독립유공자 심사위원으로 활동하고 문화훈장을 수여받아 논란이 된 인물이다. 그는 청년 운동에 참여하고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에서 사회부장을 지냈으며, 일제강점기 말에는 조선임전보국단과 조선언론보국회에 가담하고 친일 논설을 기고했다. 해방 후에는 국회의장 비서실장과 국회의원을 역임했으며, 언론 활동과 보수주의 계열에서 활동했다. 이러한 행적과 상반되게 독립유공자 심사위원으로 활동하고 문화훈장을 수여받아 비판을 받았으며,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 의해 친일 행위자로 규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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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대한민국 사람 -
김웅 (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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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대한민국 사람 -
정진석 (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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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인명사전 수록자 -
최남선
최남선은 1890년에 태어나 1957년에 사망한 대한민국의 문인이자 독립운동가, 언론인, 역사학자이며, 《소년》을 창간하고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하여 현대 한국 문학의 선구자로 평가받으며, 3·1 운동 독립선언서 기초, 친일 행적, 단군 연구, 《단군론》, 《불함문화론》 저술 등의 활동을 했다. -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
이원수 (작가)
이원수는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아동문학가로서 1926년 동시 〈고향의 봄〉으로 등단하여 동요, 동시, 동화, 소년소설 등 다양한 작품을 발표하고 한국아동문학가협회 초대 회장을 역임하며 아동문학 발전에 기여했으나, 친일 작품으로 논란이 있다. -
경기도의 국회의원 -
추미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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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의 국회의원 -
이학영
2. 일제 강점기 활동
경기도 파주군의 양반 가문 출신으로 태어났으나, 어려운 환경 때문에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한학을 공부한 뒤 독학으로 외국어를 익혔다.
1917년 방정환과 함께 청년구락부를 조직하고 기관지 《신청년》을 발행하며 청년 운동에 뛰어들었다. 1919년에는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입사하여 언론계에 입문했다. 1920년 《동아일보》가 창간될 때 합류하여 후에 사회부장에 올랐다. 1924년에는 《조선일보》로 옮겨 사회부장을 지냈고, 《중외일보》 편집국 차장과 매일신보 편집국장을 역임했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조선임전보국단과 조선언론보국회에 가담하였고, 《조광》의 주요 필진이기도 했다. 중일 전쟁 때 중국 전선에 종군하고 기록을 남긴 것을 비롯하여, 조광에 기고한 〈대동아전쟁 3년〉(1944) 등 친일 논설이 다수 남아 있다.
이러한 친일 행적은, 그가 해방 이후 독립유공자를 심사하는 심사위원으로 활동하고, 심지어 문화훈장 대한민국장까지 수여받았다는 점에서 더욱 비판받을 만하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언론/출판 분야에 유광렬을 선정했으며,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또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그를 포함시켰다.
2.1. 청년 운동 및 언론 활동
1917년 방정환과 함께 청년구락부를 조직하고 기관지 《신청년》을 발행하며 청년 운동에 참여했다. 1919년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입사하여 언론계에 입문했다. 1920년 《동아일보》 창간에 합류하여 사회부장을 역임했고, 1924년에는 《조선일보》로 옮겨 사회부장을 지냈다. 이후 《중외일보》 편집국 차장과 매일신보 편집국장을 역임했다.
2.2. 친일 행적
일제 강점기 말기 조선임전보국단과 조선언론보국회에 가담했다. 중일 전쟁 때 중국 전선에 종군하고 기록을 남겼으며, 《조광》에 〈대동아전쟁 3년〉(1944) 등 친일 논설을 다수 기고했다. 이러한 친일 행적에도 불구하고,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걸쳐 독립유공자 심사위원으로 활동하고 문화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받았다. 이를 두고 '변신의 귀재'로서 일제 강점기의 행적을 의도적으로 감추고 언론계와 정치계에서 경력을 쌓았다는 비판이 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언론/출판 분야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3. 해방 이후 활동
태평양 전쟁 종전 후에는 1949년 국회의장 신익희의 비서실장으로 임명되어 정계에 뛰어들었다. 두 차례 낙선 끝에 1960년에는 제5대 민의원으로 당선되었으며, 《자유신문》 주필과 《한국일보》 논설위원 등을 지내며 보수주의 계열에서 언론 활동을 병행하였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 친일 행적이 있음에도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걸쳐 꾸준히 독립유공자를 심사하는 심사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문화훈장 대한민국장도 수여받았다. 이러한 점을 들어 유광렬이 '변신의 귀재'로서 일제 강점기의 행적을 의도적으로 감추고 언론계와 정치계에서 화려한 경력을 쌓았다는 비판도 있다.
3.1. 정치 활동
유광렬은 1949년 신익희 국회의장 비서실장으로 임명되어 정계에 입문했다. 1954년 대한민국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 고양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11,111표를 얻어 47.37%의 득표율로 2위를 기록하여 낙선했다. 1960년 대한민국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고양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6,634표를 얻어 22.72%의 득표율로 당선되어 국회의원이 되었다.
3.2. 언론 활동 및 기타
자유신문 주필과 한국일보 논설위원 등을 지내며 보수주의 계열에서 언론 활동을 병행하였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걸쳐 꾸준히 독립유공자를 심사하는 심사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문화훈장 대한민국장도 수여받았다. 이러한 점을 들어 유광렬이 '변신의 귀재'로서 일제 강점기의 행적을 의도적으로 감추고 언론계와 정치계에서 화려한 경력을 쌓았다는 비판도 있다.
4. 논란 및 비판
유광렬은 일제 강점기 말기에 친일 행적이 있음에도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걸쳐 꾸준히 독립유공자를 심사하는 심사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러한 점을 들어 '변신의 귀재'로서 일제 강점기의 행적을 의도적으로 감추고 언론계와 정치계에서 화려한 경력을 쌓았다는 비판도 있다. 조선임전보국단과 조선언론보국회에 가담하였고, 《조광》의 주요 필진이기도 했다. 중일 전쟁 때 중국 전선에 종군하고 기록을 남긴 것을 비롯하여, 조광에 기고한 〈대동아전쟁 3년〉(1944) 등 친일 논설이 다수 남아 있다.
2008년 공개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언론/출판 분야에 선정되었으며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