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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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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윤지충은 1759년 전라도 진산에서 태어난 조선 후기의 천주교 신자이다. 1783년 생원시에 합격한 후 천주교를 접하고 입교하여, 1790년 제사 금지령에 따라 권상연과 함께 제사를 폐지했다. 1791년 모친상을 천주교식으로 치른 것이 진산사건의 발단이 되어 체포되었고, 1791년 12월 8일 전주 남문 밖에서 참수형을 받았다. 윤지충은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한국 천주교 순교자 124위 중 첫 번째 복자로 서품되었으며, 2021년 유해가 발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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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충
발견 정보
발견 위치전라북도 완주군 이서면 남관 마을 뒷산
발견 시기2021년
관련 인물윤지충
권상연
윤지헌
시대조선 시대
윤지충 (바오로)
본관파평 윤씨
출생1759년
사망1791년 (신해박해)
시호문정(文貞)
세례명바오로
신분한국 천주교회 첫 번째 순교자

2. 생애

2. 1. 출생과 가계

윤지충은 1759년 전라도 진산군 장고치(현 충청남도 금산군 벌곡면 도산리)에서 태어났다.[45] 본관은 해남 윤씨이다. 6대조는 윤선도이며, 증조부는 윤두서이다. 조상 대대로 해남에 살았는데, 아버지 윤경은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대둔산 밑 조용한 마을에서 평범한 선비로 살았다.[4] 고모 윤소온이 정약용의 부친인 정재원과 혼인하여 정약용은 윤지충의 고종사촌 동생이 된다.[5] 이런 인연으로 정약용의 형제 그리고 그의 매부인 이승훈과도 자연스럽게 교제할 수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남인에 속했는데, 당시 시대적 분위기는 정조가 남인을 중용하여 서인을 견제하는 탕평책을 펼침으로 인해 남인들에게도 관직 진출의 기회가 열리기 시작했다. 윤지충은 벼슬에 뜻을 품고 과거 시험에 응시하여 1783년(정조 7)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2. 2. 천주교 입교

윤지충은 1783년 생원시에 합격한 후 상경하여 고종사촌인 정약용을 통해 천주학을 접한 뒤 역관 김범우의 집에서 열리는 '명례방공동체'에도 참여하였다.[6] 《천주실의》와 《칠극》을 얻어 고향으로 내려와[7] 교리를 독학하며 부족한 부분은 정약종으로부터 배웠다. 1787년에 정약전을 대부로 하여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고 교인이 되었다.[8][9] 1789년 북경에 가서 견진성사를 받고 귀국하였는데[10] 명례방 사건(1785년)과 반회사건(1787년)이후 천주교 서적 소각 등 천주교 신자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자 낙향하여 조용히 지냈다. 이 시기에 어머니와 동생 윤지헌, 외종사촌 권상연에게 교리를 가르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했다.

2. 3. 진산사건과 순교

1790년 북경 교구장 구베아 주교의 제사 금지령에 따라, 윤지충은 권상연과 함께 신주를 불태우고 제사를 폐지했다.[14] 1791년 5월, 모친 안동 권씨가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일은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사망했으나, 전염병으로 인해 바로 장례를 치르지 못했다.[13] 8월 그믐날에 전통 의식대로 장례를 치렀으나, 신주를 만들지 않고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13] 조문객이 적은 것을 수상히 여긴 사람들에 의해, 천주교식으로 비밀리에 장례를 치렀다는 소문이 퍼져나갔고, 심지어 모친의 시신을 버렸다는 헛소문까지 돌았다.[13]

이 소문은 서울까지 퍼져나가 조정 대신들 간 당파 싸움의 빌미가 되면서 사건이 증폭되었다. 진산군수 신사원에게 윤지충과 권상연을 체포하라는 어명이 떨어졌고, 체포령에 윤지충은 경기도 광주로, 권상연은 한산으로 도피했다.[14] 윤지충은 숙부 윤등이 잡혔다는 소식에 10월에 자수했고, 권상연도 체포되었다.[14]

윤지충과 권상연은 사회도덕을 문란케 하고 사교를 신봉했다는 죄명으로 1791년 12월 8일(음력 11월 13일) 전동성당 자리인 전주 남문 밖에서 참수형에 처해졌다.[21][22] 윤지충은 32세, 권상연은 40세였다. 이 사건으로 이승훈과 권일신이 구속되었는데, 이승훈은 배교를 변론하여 석방되었으나 관직은 박탈당했고,[23][24] 권일신은 노모의 간청으로 배교하여[25][26] 귀양지가 제주에서 예산으로 변경되었으나 이동 중 장독으로 죽었다.[27] 진산군은 5년 동안 현으로 강등되었고, 진산군수 신사원은 유배형에 처해졌다.[28][29]

3. 진산사건의 전개

1791년 5월, 윤지충의 모친 안동 권씨가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일은 무엇이든지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사망하였다.[13] 그런데 하필 그때 지역 일대에 전염병이 돌아 관아에서 통행을 금지하자 윤지충은 초상을 치를 수 없었다.[13] 8월 그믐날에야 겨우 장사를 치렀는데, 모든 것을 전통 의식대로 진행하였으나 신주를 만들지 않았고 제사 또한 지내지 않았다. 장례를 치르는 동안에는 전염병의 여파로 인해 조문이 적었고 조객록(弔客錄)에 기록이 많지 않았다.[13] 이를 수상히 여긴 조문객들에 의해 신주를 만들지 않았다는 사실과 함께 조문을 고의로 방해하며 천주교식으로 비밀리에 장례를 치렀다는 유언비어가 퍼져나갔다. 심지어 모친의 시신을 버렸다는 식으로 부풀려진 해괴망측한 괴소문이 돌아다니기까지 했다.[13]

이런 흉흉한 소문은 서울에까지 퍼져나가 조정 대신들 간 당파 싸움의 빌미가 되면서 사건이 증폭되었다. 결국 진산군수 신사원에게 윤지충과 권상연을 체포하여 진상을 조사하라는 어명이 떨어졌다. 체포령이 떨어지자 윤지충은 경기도 광주로, 권상연은 한산으로 도피하였다. 진산군수가 윤지충의 숙부 윤등을 잡아들였다는 소식을 접한 윤지충은 그해 10월에 자수하였고 곧 권상연도 체포되었다.[14]

3. 1. 제사 폐지와 갈등

1790년 북경 교구장 구베아 주교가 조선 천주교인들에게 제사 금지령을 내리자, 윤지충은 외종사촌 권상연과 함께 유교식 제사를 폐지했다.[11][12] 권상연은 신주를 불태워 땅에 묻었으나, 윤지충은 신주를 그대로 두었다.[12] 이로 인해 종친들과 주변 선비들의 비난이 쏟아졌다.

윤지충은 평민들은 신주를 모시지 않는 것을 나라에서 엄히 단속하지 않고, 살림이 어려운 선비가 제향을 못하는 것은 예에 어긋하지 않는다는 논리로 항변했다.[13] 유교적 제례는 법으로 규정한 것이 아니라 사대부의 관례라는 것이었다.[13]

진산군수 신사원이 배교를 강요하며 모진 고문을 가했으나 윤지충과 권상연은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15] 회유에 실패한 진산군수는 이들을 전주의 전라 감영으로 이송했다.[16] 윤지충은 전라감사 정민시의 심문에 모든 것을 토설한 후, 천주교 신봉으로 양반 칭호를 박탈당해도 천주께 죄를 짓지 않겠다고 주장했다. 또한 신주를 모시지 않는 서민들이 정부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고, 가난한 양반들도 제사를 다 지내지 못해도 책망받지 않음을 고려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신주를 모시지 않고 천주교를 신봉하는 것이 국법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17] 그러나 윤지충의 항변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8]

3. 2. 모친상과 천주교식 장례

3. 3. 체포와 심문

진산 군수 신사원은 윤지충과 권상연에게 배교를 강요하며 모진 고문을 가했으나, 이들은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15] 두 사람을 회유하는 데 실패한 진산 군수는 이들을 전주의 전라 감영으로 이송했다.[16] 윤지충은 전라 감사 정민시의 심문에 모든 것을 솔직하게 이야기한 후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천주교를 신봉하여 양반 칭호를 박탈당해야 한다 해도 저는 천주께 죄를 짓기는 원치 않습니다. 신주를 모시지 않는 서민들이 정부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고, 가난 때문에 모든 제사를 규정대로 지내지 못하는 양반들도 엄한 책망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고려하여 주십시오. 신주를 모시지 않고 죽은 이들에게 제사를 드리지 않으면서도 제 집에서 천주교를 충실히 신봉하는 것은 결코 국법을 어기는 것이 아닌 듯합니다."[17] 그러나 윤지충의 항변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8]

3. 4. 처형과 그 이후

전라 감사는 조정에 장계를 올려 윤지충과 권상연에 관해 보고했다. 조정에서는 두 사람을 처형해야 한다는 여론이 커졌다.[19] 정조는 처형을 윤허하고, 이승훈과 권일신의 추포를 명했다. 조상에게 제사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유학의 핵심인 '효'를 부정하는 일로써, 이는 곧 나라의 어버이 되는 왕에 대한 '충'을 부정하는 행위였다. 이러한 무부무군(無父無君) 사상의 신봉은 유교이념으로 떠받쳐져 있는 조선의 지배체제 자체를 부정하고 도전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천주교도들은 '나라를 원망하며 세상을 뒤엎고자 하는 무리'로 규탄받아야 하고 역모사건 차원에서 다스려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야만 했다. 이렇듯 조선 지배층이 바라본 천주교는 체제와 정통에 대해 도전하는 사악한 종교였다.[19] 지난 1787년 반회사건 이후 정조 역시 사교로 규정했었기[20] 때문에 사형으로 처결함에는 문제 될 것이 없었다.

4. 진산사건의 영향

4. 1. 천주교 박해의 심화

4. 2. 당파 싸움의 격화

정조는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를 더 이상 확대시키지 않고 마무리 짓기를 원했다. 이는 자신의 측근 중에 천주교에 가까이 간 자들이 많았던 이유도 있었다.[36] 아울러 홍문관에 소장되어 있던 한역 서양서적을 소각하는 등 천주교의 전파를 억제하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정조의 생각과는 달리, 조정은 이 사건을 둘러싸고 남인 계통이면서 당시의 상국(相國)인 채제공을 중심으로 한 신서파와 이에 반대하는 홍의호 등의 공서파가 대립하였다. 진산사건으로 인한 갈등과 당쟁은 1801년 신유박해로 신서파가 결정적 타격을 입을 때까지 10여 년간 계속되었다.[37]

4. 3. 천주교 교세의 변화

신해박해로 인해 천주교가 정치적·종교적 박해의 대상이 되자 많은 양반 계층 교인들이 동요하여 배교 후 이탈했다.[38] 그 공백은 중인 계층이 메워나갔는데, 탄압에도 불구하고 1794년 무렵 신도 수가 4천여 명으로 증가하자 중국 교회의 구베아 주교는 진산사건으로 보류되었던 선교사 파견을 다시 추진하였다.[39] 1795년 초 서울에 잠입한 중국인 신부 주문모는 이내 체포령이 떨어져[40] 은밀히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강완숙 등의 도움에 힘입어 5년 후 교세는 1만 명에 육박하게 되었다.[41]

4. 4. 정약용 집안의 시련

이번 사건으로 정약용의 집안은 큰 충격에 휩싸였다. 윤지충이 정약용의 외사촌이었기 때문이다.[42] 정약용과 둘째형 정약전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배교하며 천주교와 관계를 완전히 청산했으나 윤지충과 친척이라는 사실과 윤지충에게 천주교를 소개한 자가 정약용이었기 때문에 서인들로부터 공격을 받았다.[42] 셋째 형인 정약종은 신앙을 지키며 교리에 따라 집안에 제사를 거부하며 갈등하다가 처자식을 데리고 한강 건너 양근의 분원으로 이사를 가버렸다.[43]

조상제사 거부 교리가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향후 천주교 탄압의 명분으로 활용되었다.

5. 유산

5. 1. 전동성당

현재 전동성당이 위치한 자리는 윤지충을 비롯한 권상연, 윤지헌, 유항검 등 많은 천주교인들이 순교한 자리이다.[30][31][32] 1908년 보두레 신부가 이들의 순교를 기리기 위해서 전동성당을 건축하였다. 일제강점기중 도로를 개설하며 전주읍성의 풍남문 인근 성벽을 철거했는데, 이때 윤지충이 참수될 당시 피가 튀었던 돌을 가져와 주춧돌로 삼았다고 한다. 전동성당은 명동성당, 대구성당과 더불어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 건축물로 국가 기념물 사적 288호로 지정되어있으며, 성당 한쪽에는 윤지충의 순교 모습이 동상으로 제작되어 있다.[33] 2014년 8월 한국을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한국 천주교 순교자 124위에 대한 시복 선언을 했는데, 윤지충은 124위 중 첫 번째 복자로 서품되었다.[34]

5. 2. 시복

5. 3. 윤지충 일기 (실전)

윤지충은 투옥 기간 중에 일기를 기록하였으나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다. 자신의 천주교 봉행과 체포 후의 신문 과정, 옥중 생활 등을 기록하였는데, 순교 후 필사되어 널리 읽혔다고 한다. 이 수기는 1801년 신유박해 때 관변 측 기록인 《사학징의》에 천주교도들로부터 압수한 서적 목록 가운데 《죄인지충일기》라는 기록이 들어 있으나, 현재까지 한문본, 한글본 모두 발견되지 않고 있다. 다만 달레(Dallet)가 저술한 《한국천주교회사》에 일부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35]

6. 유해 발굴

2021년 3월, 전북 완주군 초남이성지 바우배기에서 성역화 작업 중 윤지충, 권상연, 윤지헌의 유해가 발굴되었다.[2] 발굴된 유해는 방사성탄소연대측정, 성별검사, 치아와 골화도를 통한 연령검사, 해부학적 조사, Y염색체 부계 확인검사(Y-STR)를 통해 순교자들의 유해임을 확인했다.[2]

윤지충과 권상연의 유해 목뼈 부분에서는 날카로운 도구로 잘린 '예기 손상'이 발견되어 참수되었음을 확인했다.[2]

윤지충과 권상연의 묘를 찾는 것은 한국 천주교의 과제였다. 조선 정부 측 기록인 <사학징의(邪學懲義)>에는 윤지충과 권상연의 무덤이 존재한다는 사실만 기록되었고 구체적인 장소는 없었다.[3] 바우배기에 순교자 묘소가 있다는 구전만 존재했는데, 230년 만에 발굴되었다.

7. 가계

윤지충의 증조부는 윤두서(1668년 ~ 1715년)이고, 증조모는 전주 이씨(이형징(李衡徵)의 딸)이다.[44] 조부는 윤두서의 5남 윤덕렬(1698~1745)이며,[44] 조모는 순흥 안씨(진사(進士) 안제만(安濟萬)의 딸)이다.[44] 아버지는 한의업에 종사한 윤경(尹憬)이고, 어머니는 안동 권씨(권기징(權沂徵)의 딸)이다.[44][45][46] 부인은 연안 이씨(이종연(李宗延)의 딸)이다.[44][45][46]

참조

[1] 웹사이트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복자 124위 약전 https://web.archive.[...]
[2] 웹인용 한국 천주교 첫 순교자 유해 사후 200여 년만에 발견 https://news.naver.c[...] 연합뉴스 2021-09-01
[3] 웹인용 윤지충과 권상연, 윤지헌 유해 230여 년만에 찾았다…참수형과 능지처참의 흔적 확인 https://www.khan.co.[...] 경향신문 2021-09-01
[4] 서적 한국사 이야기 15 한길사 2009-04-10
[5] 서적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1 김영사 2004
[6] 서적 한국사 이야기 15 한길사 2009-04-10
[7] 서적 한국사 이야기 15 한길사 2009-04-10
[8] 서적 한국사 이야기 15 한길사 2009-04-10
[9] 웹사이트 전동성당 역사, 전동성당의 유래 http://www.jeondong.[...]
[10] 백과사전 윤지충 [尹持忠] 두산백과
[11] 서적 한국사 이야기 15 한길사 2009-04-10
[12] 서적 한국사 이야기 15 한길사 2009-04-10
[13] 서적 한국사 이야기 15 한길사 2009-04-10
[14] 서적 한국사 이야기 15 한길사 2009-04-10
[15] 백과사전 윤지충 [尹持忠] 두산백과
[16] 백과사전 진산사건 [珍山事件] https://terms.naver.[...] 두산백과
[17] 서적 한국 기독교의 역사1 기독교문사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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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서적 한 권으로 보는 한국사 가람기획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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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웹사이트 [그림으로 보는 순교자 열전]-(1) 윤지충 http://www.cpbc.co.k[...]
[22] 웹사이트 [그림으로 보는 순교자 열전]-(3) 권상연 http://www.cpbc.co.k[...]
[23] 문서 정조실록 1805 http://sillok.histor[...]
[24] 문서 정조실록 1805 http://sillok.histor[...]
[25] 백과사전 권일신 [權日身]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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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백과사전 권일신 [權日身]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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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서적 한국사 이야기 15 한길사 2009-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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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웹사이트 전동성당 역사, 역동성당의 유래 http://www.jeond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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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웹사이트 정조 [正祖] https://terms.naver.[...]
[37] 백과사전 신해사옥
[38] 서적 한국 근대사 산책 1 인물과 사상사 2011-03-31
[39] 서적 이덕일의 여인열전 김영사 2003
[40] 서적 이덕일의 여인열전 김영사 2003
[41] 서적 이덕일의 여인열전 김영사 2003
[42] 웹사이트 진산사건 [珍山事件] https://terms.naver.[...]
[43] 서적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2 김영사 2004
[44] 웹사이트 1717년 윤덕렬(尹德烈) 등(等) 간찰(簡札) http://jsg.aks.ac.kr[...]
[45] 웹인용 최초 천주교 순교자 윤지충과 정약용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07-03-19
[46] 웹인용 천주교 첫 순교자 尹持忠의 최후진술과 기적 http://haenamyoon.ne[...] 해남윤씨 광주 종친회 2004-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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