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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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유박해는 1801년 순조 즉위 후 수렴청정을 시작한 정순왕후가 노론 벽파와 연합하여 천주교를 탄압한 사건이다. 정조 사후, 정순왕후는 권력 강화를 위해 천주교를 사교로 규정하고 남인과 시파를 숙청했다. 이 과정에서 이승훈, 정약종 등 천주교 지도자들이 처형되었고,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천주교는 매국 종교로 낙인찍혔다. 박해는 지방으로 확산되었고, 주문모 신부의 순교, 황사영의 처형, 토사교문 반포로 이어졌다. 이 사건은 천주교를 배척하는 사회 분위기를 조성하고, 조선의 쇄국 정책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천주교가 민중 신앙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정순왕후의 퇴진과 정치적 변화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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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박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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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박해 | |
로마자 표기 | Sinyu Bakhae |
한글 | 신유박해 |
한자 | 辛酉迫害 |
로마자 표기법 (다른 이름) | Sinyu Saok |
한글 (다른 이름) | 신유사옥 |
한자 (다른 이름) | 辛酉邪獄 |
2. 시대적 배경
천주교는 예수회 선교사들이 쓴 책을 통해 중국에서 한국으로 전래되었다. 한국 학자들은 베이징과의 접촉을 통해 얻은 중국어 책들을 읽었는데, 대부분은 책에 표현된 사상을 거부했지만, 소수는 흥미를 느꼈다. 특히 남인들은 천주교의 도덕 발전에 대한 사상을 연구 분야로 보았다. 광주의 남인 학자들은 다른 사상에도 개방적이었으며, "나라를 다스리는 데 사용되었던 주자학 정책의 허점을 메울 수 있기를 바라며 천주교를 연구했다".[2]
정조는 남인의 지지를 필요로 했고, 천주교 서적을 불태우고 주자학을 장려하는 것으로 천주교에 대한 반대 활동을 제한했다.[3]
2. 1. 천주교 전래와 초기 수용
천주교는 종교가 아닌 학문으로 받아들여졌으며,[7] 보유론(補儒論)적 관점에서[8][9] 실학이라는 흐름과 맞물려 학자들의 탐구 대상이 되었다. 또한 부패한 지배 체제에 반발한 민중 속으로 퍼져나갔다.[10] 이승훈은 북경에서 조선 최초로 세례를 받고 귀국한 후 은밀히 신앙 모임을 만들었으나,[11] 1785년 형조에 적발되어 유생들의 거센 반발을 샀다.(명례방 사건) 이 사건으로 김범우가 유배지에서 사망하고, 모임을 이끌던 이벽이 문중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자진하면서 '명례방공동체'는 와해되었다. 곧 조직이 재건되어 교세가 성장했으나, 제사 금지라는 교리 속에 배교자가 속출하였고, 이 교리는 천주교 탄압의 좋은 명분이 되었다. 1787년 반회사건으로 천주학 서적이 색출된 후 불태워지고 탄압의 강도가 점차 증가하였다.천주교는 중국에 있던 예수회 선교사들이 쓴 책을 통해 한국에 전래되었다. 한국 학자들은 베이징과의 접촉을 통해 얻은 중국어 책들을 읽었다. 대부분은 책에 표현된 사상을 거부했지만, 소수는 흥미를 느꼈다. 특히 남인들은 천주교의 도덕 발전에 대한 사상을 연구 분야로 보았다. 광주의 남인 학자들은 다른 사상에도 개방적이었으며, "나라를 다스리는 데 사용되었던 주자학 정책의 허점을 메울 수 있기를 바라며 천주교를 연구했다".[2]
외국인과 그들의 사상과의 교류는 좋지 않게 여겨졌지만, 1776년부터 1800년까지 통치한 정조는 남인의 지지를 필요로 했고, 천주교 서적을 불태우고 주자학을 장려하는 것으로 천주교에 대한 반대 활동을 제한했다.[3]
2. 2. 천주교 탄압의 시작
진산사건으로 최초의 순교자가 발생한 1791년 이전에도 유사한 사건이 있었으나, 촌락 노인의 무지한 행동으로 치부되었다.[12] 그러나 이번 사건의 당사자가 남인이었기 때문에 당쟁으로 번지자, 천주교에 대해 관대했던 정조도 강경하게 대처했다. 1795년에는 은밀하게 활동하던 중국인 선교사 주문모 체포 작전이 실패했고, 도주와 잠행을 도운 신자들이 체포되어 순교하였다.(을묘박해) 한편, 남인들이 이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을 제기한 노론 벽파의 공격으로 이승훈은 유배되었고, 이가환과 정약용은 좌천되었다.[13] 도주한 주문모 신부는 강완숙의 집에 숨어 지내며 은밀하게 활동을 지속했다. 그의 전교 활동으로 1794년에 4,000명이었던 신자 수가 1800년에는 1만 명에 육박하게 되었다.[14]당쟁과 궁중 정치는 종종 천주교도에 대한 폭력 사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정조가 1800년에 사망하자 열 살 된 그의 아들 순조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왕실 최고 어른이었던 대왕대비 정순왕후는 그의 서증손의 섭정을 맡았다. 정순왕후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천주교의 확산을 위협으로 보았던 노론 세력과 연합하였다.[3] 그 후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801년 4월 8일부터 시작된 이러한 움직임은 정부 내에서 정순왕후에게 반대하고 천주교에 대해 덜 적대적인 세력들을 정치적으로 탄압하기 위한 구실이었다.
윤지헌(Francis Yun Ji-heon)은 살해되어 시체가 훼손되었다. 그는 1791년에 한국 전통 장례 의식에 사용되는 위패를 파괴하고 대신 천주교 의식을 거행한 죄로 처형된 윤지충(Paul Yun Ji-chung)의 형제였다. 권상연(James Kwon Sang-yeon) 또한 함께 처형되었다. 세 사람의 유해는 2021년 완주군 천남리 성지 보수 공사 중 발견되었다.[4]
3. 발단
1800년 정조가 승하한 후, 11세의 어린 순조가 즉위하면서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시작했고, 노론 벽파가 정권을 장악하였다. 벽파는 정순왕후를 움직여 남인과 시파에 대한 숙청 작업을 시작했다.
1801년 2월 22일(음력 1월 10일) 정순왕후는 천주교 엄금에 관해 하교를 내렸다. 그 내용은 "천주교 신자는 인륜을 무너뜨리는 사학(邪學)을 믿는 자들이니, 마음을 돌이켜 개전하지 않으면 역률로 처벌하라"는 것이었다. 정순왕후는 이 하교에서 오가작통법을 언급하며, 다섯 집 중 한 집에서 천주교 신자가 적발되면 모두 처벌하는 가혹한 연좌제를 예고했다.
정순왕후는 사도세자 제거에 앞장섰던 탓에 정조의 즉위를 반대했었다. 정조 즉위 후 집안이 몰락하고 오라비 김귀주마저 사망하자, 정조와 남인에 대한 앙심을 품게 되었다. 정순왕후의 목표는 정조 재위기에 성장한 남인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었다.
정조는 노론 벽파를 견제하기 위해 남인을 중용하며 탕평책을 펼쳤는데, 정조가 총애했던 진보적인 남인 소장파들이 천주교에 가까운 자가 많았으니 이는 좋은 명분이 되었다. 정조 조차 1788년에 천주교를 사교로 규정했었기 때문에 노론 벽파에게는 거칠것이 없었다. 정순왕후의 하교 직후 벽파 영의정 심환지와 공서파 대사간 목만중이 남인, 시파, 신서파를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사교 철폐는 빌미일 뿐이고, 실제 목표는 정조의 총애를 받던 이가환, 권철신, 정약용 3인의 제거에 있었다. 이가환과 권철신은 채제공 사후 남인을 이끌었고, 정약용은 남인을 이끌 차세대 주자였기 때문이다.
3. 1. 정순왕후의 수렴청정과 노론 벽파의 집권
1800년 8월 18일(음력 6월 28일) 정조가 승하한 후,[15] 1800년 8월 23일(음력 7월 4일) 순조가 11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면서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시작했고,[16] 노론 벽파가 정권을 장악하였다.[17][18] 이후 벽파는 정순왕후를 움직여 사학엄금을 명분으로 남인과 시파에 대한 숙청작업을 시작했다.[19][20]1801년 2월 22일(음력 1월 10일) 정순왕후는 천주교 엄금에 관해 하교를 내렸다.[21] 그 내용은 “천주교 신자는 인륜을 무너뜨리는 사학(邪學)을 믿는 자들이니, 인륜을 위협하는 금수와도 같은 자들이니 마음을 돌이켜 개학하게 하고, 그래도 개전하지 않으면 역률로 처벌하라”는 것이었다.[22] 정순왕후는 이 하교에서 오가작통법의 적용을 언급하였는데,[23][24] 다섯 집 중 한 집에서 천주교 신자가 적발되면 모두 처벌하는 가혹한 연좌제를 예고한 것이었다.
정조가 죽고 순조가 즉위하면서 왕실 최고 어른이었던 대왕대비 정순왕후는 그의 서증손의 섭정을 맡았다.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그녀는 천주교의 확산을 위협으로 보았던 노론 세력과 연합하였다.[3] 그 후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801년 4월 8일부터 시작된 이러한 움직임은 정부 내에서 그녀에게 반대하고 천주교에 대해 덜 적대적인 세력들을 정치적으로 탄압하기 위한 핑계였다.
3. 2. 정치적 보복과 남인 숙청
정순왕후는 사도세자 제거에 앞장섰던 탓에[25][26] 정조의 즉위를 반대했었다. 정조 즉위 후 집안이 몰락하고 오라비 김귀주마저 사망하자,[27][28] 정조와 남인에 대한 앙심을 품게 되었다.[29] 정순왕후의 목표는 정조 재위기에 성장한 남인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었다.[29]정조는 노론 벽파를 견제하기 위해 남인을 중용하며 탕평책을 펼쳤는데,[30] 정조가 총애했던 진보적인 남인 소장파들이 천주교에 가까운 자가 많았으니 이는 좋은 명분이 되었다. 정조 조차 1788년에 천주교를 사교로 규정했었기[31][32] 때문에 노론 벽파에게는 거칠것이 없었다. 정순왕후의 하교 직후 벽파 영의정 심환지와 공서파 대사간 목만중이 남인, 시파, 신서파를 잡아들이기 시작했다.[33]
사교철폐는 빌미일 뿐이고, 실제 목표는 정조의 총애를 받던 이가환, 권철신, 정약용 3인의 제거에 있었다.[34] 이가환과 권철신은 채제공 사후 남인을 이끌었고, 정약용은 남인을 이끌 차세대 주자였기 때문이다. 특히 이가환은 노론 벽파와 악연이 깊은 가문 출신으로, 증조부 이하진은 경신환국 때 억울하게 죽었고,[35] 종조부 이잠은 노론을 공격하다 장살당했다.[36]
이런 이유로 노론은 이가환을 가장 기피하는 인물로 여겼다.[37] 이가환이 당대 제일가는 천재로 정조의 총애를 받았으며, 재상으로 등용될 가능성이 있었다는 점도[38] 노론 벽파에게는 큰 위협이었다. 이가환이 1791년 진산사건 직후 배교하고 천주교 탄압에 앞장섰음에도 불구하고,[39] 노론 벽파는 그의 목숨을 원했다.[39] 이가환과 권철신은 모진 고문 끝에 4월 8일에 옥사하였고, 시신은 목이 베인 채 길거리에 버려졌다.[40]
당쟁과 궁중 정치는 종종 천주교도에 대한 폭력 사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1800년 정조가 사망하고 순조가 즉위하자, 대왕대비 정순왕후는 섭정을 맡아 천주교 확산을 위협으로 보았던 노론과 연합하였다.[3] 1801년 4월 8일부터 시작된 탄압은 정부 내 반대 세력과 천주교에 덜 적대적인 세력들을 제거하기 위한 정치적 핑계였다.
4. 전개
1800년 정조가 사망하고 10살의 순조가 즉위하자, 왕실 최고 어른인 대왕대비 정순왕후가 섭정을 맡았다. 정순왕후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천주교를 위협으로 간주한 노론 세력과 연합하였고,[3] 1801년부터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는 정순왕후에게 반대하고 천주교에 대해 덜 적대적인 세력들을 정치적으로 탄압하기 위한 핑계였다.
1791년에 한국 전통 장례 의식에 사용되는 위패를 파괴하고 천주교 의식을 거행한 죄로 처형된 윤지충의 형제 윤지헌(프란치스코)은 살해되어 시체가 훼손되었다. 권상연(야고보) 또한 함께 처형되었다. 이 세 사람의 유해는 2021년 완주군 천남리 성지 보수 공사 중 발견되었다.[4]
4. 1. 책롱 사건과 지도층 체포
정약종은 이미 죽을 각오를 하고 있었으나 성상과 교리 서적, 주문모 신부의 편지 등은 후대에 전해져야 한다고 생각하여 좀 더 안전한 곳으로 옮겨 감추기로 하였다. 1801년 1월 19일에 이것들을 작은 책롱(冊籠)에 넣어 나뭇짐으로 위장한 후 머슴을 시켜 옮겨놓게 했으나, 운반 도중에 밀도살한 쇠고기를 운반하는 것으로 오인받아 포도청에 끌려가고 말았다.[41] 이 사건으로 예상 밖의 소득을 얻은 조정은 탄압에 박차를 가하는 계기가 되었고, 곧 이승훈, 최창현 등 지도자급 인사들을 연이어 잡아들였다. 1801년 2월 11일(음)에 체포된 정약종은 책롱 속의 내용물이 모두 자기 것임을 시인하였고, 국문이 진행되자 조정에 의한 천주교 박해의 부당함을 항변하였다.[42] 정약종은 1801년 2월 26일(음) 서소문 밖에서 이승훈, 최필공, 최창현, 홍낙민, 홍교만 등과 함께 순교하였다.[43] 정약종의 아들 정철상도 구속되었고, 1801년 4월 2일(음)에 사형에 처해졌다.4. 2. 정약용의 구속과 유배
정약용은 책롱 적발 소식을 들은 후, 마음의 준비를 하던 중 2월 8일에 형 정약전과 함께 체포되었다. 국문장에서 정약용은 학문적 관심으로 천주교를 접했을 뿐이며, 1791년 진산사건 이후 천주교와 결별했다고 주장했다.[44][45][46] 1797년에 천주교도로 오해받자 《자명소》를 써서 반박했고, 1799년에는 《책사방략》을 저술하여 배교를 분명히 했다는 사실을 밝혔다.[47] 또한 천주교 지도자인 권철신, 황사영 등을 고발하였다.[48]천주교 신도를 색출하려면 믿음이 약한 노비나 학동을 신문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으나,[48]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체념하였다. 조선인 최초로 세례를 받은 후 천주교 선교 활동을 주도했던 이승훈은 정약용의 매형이고,[49] 천주교 교리 연구회장인 정약종은 셋째 형이며, 진산사건(1791년)을 일으킨 윤지충은 외사촌이라는 점이 불리하게 작용했다.[50] 여러 신자들의 국문이 거듭될수록 정약용의 배교 사실에 대한 증거들이 쏟아져 나왔다.[51] 정약용과 정약전은 구속된 지 18일 만에 감형되어 유배를 떠났다.
4. 3. 지방 교회 탄압
2월 9일(음), 충청도에서 '내포의 사도'로 불리던 이존창이 공주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서울로 압송되어 심문을 받았고, 2월 26일(음) 사형이 확정된 후 공주로 다시 이송되어 처형되었다. 이 외에도 지방에서 체포된 많은 천주교인들이 서울로 압송되었다가 고향으로 돌려보내져 처형되었는데, 이는 일반 대중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52] 3월 13일(음) 여주에서 5명, 양근에서 10여 명이 처형되었고, 4월 2일(음)에는 최필제 등 6명이 처형되었다. 전주에서는 3월(음)부터 박해가 시작되었다. 유항검의 가족을 비롯한 200여 명이 옥에 갇혔는데, 대부분은 신앙을 버리고 풀려났다. 유항검은 9월 17일 순교했고, 그의 아들을 비롯한 가족들 중 많은 이들도 순교했다.[53]4. 4. 주문모 신부의 자수와 순교
주문모 신부가 1801년 3월 12일(음)에 자수하자 천주교 탄압이 다시 활기를 띄었다. 주문모는 1795년에 밀입국한 이래, 주로 서울에 있는 강완숙의 집에 거처하면서 전교에 힘써왔다. 6년간 이어진 그의 은밀한 활동은 교세 확장에 큰 기여를 했는데, 지방에도 내려가 내포의 이존창과 전주 유항검의 집에서 머물면서 지방에서의 선교활동에도 힘썼다.[54] 주문모는 박해가 전국적으로 벌어지자 거처를 여러 번 옮겨 다녔으며 경희궁에 숨기도 했다.[55] 한때는 중국으로 탈출하기 위해 국경 지역까지 갔으나 자신 때문에 천주교인들이 고통을 받자 마음을 돌려 의금부에 자수를 결심하였다.[52]당시 조선 조정에서는 중국과의 외교 관계를 우려하여 추방령으로 감형하자는 주장도 있었으나,[56] 사형으로 결론이 내려졌다. 주문모는 4월 19일(음)에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그 이튿날에는 김건순, 김백순, 이희영 등이 서소문 밖 형장에서 처형되었다. 주문모를 6년간 헌신적으로 도왔던 강완숙도 궁녀 강경복, 문영인, 최인철, 김현우 등 8명과 함께 5월 24일(음)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었다. 같은 날 사형 언도를 받은 고광성, 이국승, 윤점혜, 정순매 등 4명은 각기 고향으로 이송되어 처형되었다. 주문모를 한때 궁 안으로 피신시킨 사실과 세례를 받은 일이 드러난 은언군의 부인 송씨와 그의 며느리 신씨에게는 사약이 내려졌고, 그 여파로 강화에 유배 중이던 은언군(정조의 이복동생)에게도 사약이 내려졌다.[57]
4. 5. 황사영 백서 사건
1801년 9월 29일(음), 황사영이 체포되자 신유박해는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다. 황사영은 정약용의 고발로 이미 2월 11일에 체포령이 내려졌고, 이후 정순왕후에 의해 여러 차례 특별 체포령이 내려졌으나, 7개월이 넘도록 그의 행방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52] 황사영은 박해가 시작되자 2월에 서울을 빠져나와 충북 제천 봉양면 배론(舟論)이라는, 토기를 만드는 천주교 신자들의 마을에 가서 토굴 속에 숨어 지냈다.[58]숨어 지내는 동안 황사영은 김한빈과 황심을 통하여 박해 상황을 파악하여 자료를 정리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베이징에 있는 구베아 주교에게 보낼 밀서를 작성하였다. 훗날 《황사영 백서》라고 불리는 이 밀서에는 주문모 신부의 순교 사실을 비롯한 조선에서 벌어지고 있는 박해 상황과 중국이나 서양 군대의 무력을 통해서라도 신앙의 자유를 찾아달라는 요청 등이 담겨 있었다. 유교 지식인들인 조정 대신들은 황사영이 유교 윤리에 어긋나는 천주교를 믿으면서, 나라를 외국에 팔아넘기려 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52]

황사영은 11월 5일에 대역죄로 서소문 밖에서 온몸이 찢기는 능지처참을 당했다.[59] 황사영이 외세의 힘을 빌려 종교의 자유를 얻고자 했기 때문에, 조선 천주교회는 '대역모반의 매국종교'라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황사영의 처삼촌이었던 정약용과 정약전은 밀서 작성의 배후로 지목되었고 유배지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러나 관련 증거가 나오지 않았고 노론 벽파 내 의견이 갈리면서[60] 극형은 면하게 되었다. 정약용은 강진,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를 다시 떠났다.
4. 6. 토사교문 반포
1801년 12월 22일(음), 대왕대비 정순왕후는 토사교문(討邪敎文)을 반포하였다.[61] 토사교문은 위정척사(衛正斥邪)라는 유교적 이념에 근거하여 천주교를 사학(邪學)으로 규정하고, 신유박해의 상황 및 결과와[62] 함께 다시는 천주교를 믿는 무리가 없도록 하라는 취지를 담고 있었다. 또한, 청나라에 가는 사신의 수를 200명 이내로 줄이고, 40일 이상 머물지 못하게 하는 등 서학이나 서양 문물을 접촉할 수 없도록 엄격한 쇄국정책을 시행했다.[63]토사교문에는 12월 22일 이전에 죄를 지은 자 중 사형을 선고받은 자를 제외하고 모두 석방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었다. 사교를 믿는 자는 엄벌에 처하겠다는 언급도 있었으나, 이는 역률로 다스리겠다는 예전의 지시를 뒤엎는 것이었다.[64] 정순왕후는 토사교문을 발표한 뒤 더 이상 천주교도를 잡아들이지 못하게 하였으며, 이가환, 권철신 등의 가족에게 형벌을 내리지 못하게 하였다.[65] 이미 검거된 천주교인들에 대한 처결도 해를 넘기기 전에 마무리할 것을 명했다.
한편, 지난 1년간의 박해로 약 300명 정도가 사망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유배를 떠났다.
5. 박해 진행 일지
- 3월 17일 - 은언군의 부인 송씨와 며느리 신씨가 천주교 신자임이 밝혀져 사약형을 받았다.
- 4월 8일 - 이승훈(충청도 예산군에 유배 중이었음), 정약종, 최필공, 최창현, 홍교만, 홍낙민이 서대문 형장에서 사형되었다.[66]
- 4월 24일 (음력 3월 12일) -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황해도 황주에서 한양으로 되돌아온 뒤 의금부에 자수하였다.
- 4월 28일 (음력 3월 16일) - 김건순이 체포되었다.
- 5월 31일 (음력 4월 19일) - 주문모가 한강 새남터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 6월 1일 (음력 4월 20일) - 김건순이 서소문 밖에서 참수당하였다.
- 6월 30일 - 은언군이 유배지 강화도에서 사약을 받고 사사되었다.
- 7월 2일 (음력 5월 22일) - 강완숙과 자신이 전교한 궁녀들이 함께 서소문에서 참형으로 순교하였다.
- 10월 4일 - 홍필주가 서소문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 10월 29일 - 황사영이 충북 제천에서 체포되었다.
- 그 외에도 고광성(1839년 기해박해로 순교한 고순이의 부친)이 사형당하였다.
6. 여파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조정은 천주교를 사학(邪學)으로 규정하는 입장을 확고히 했고, 천주교는 매국 종교라는 낙인이 찍혔다.[67] 경상도와 전라도에서는 서원을 중심으로 천주교 배척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68]
조선 정부는 1801년(순조 1) 10월(음력)에 동지사를 청나라에 파견하면서 천주교 탄압의 정당성을 설명하고, 황사영 백서 사건 이후 주문모 신부의 처형 사실이 알려질 가능성에 대한 우려를 전달했다.[71] 진주사 조윤대 일행은 토사교문과 함께 황사영 백서의 내용을 축소한 가백서(假帛書)를 전달하여, 서양 선박과 군대 파견을 요청한 사실을 알려 박해의 정당성을 주장했다.[73]
주문모, 이승훈, 정약종 등 조선 천주교회 1세대 지도자들과 '내포교회의 사도' 이존창, 전주교회 유항검, 유관검 형제 등 지방 지도급 인사들이 순교하였다.[74] 살아남은 천주교도들은 태백산맥, 소백산맥의 깊은 산중과 계곡에 숨어, 천주교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신유박해를 전후하여 조선 천주교회는 지식인 중심에서 서민사회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75]
1803년(순조 3) 정순왕후는 계속되는 가뭄과 화재로 민심이 흉흉해지자 수렴청정에서 물러났다.[76][77] 김조순이 안동 김씨 세도정치를 시작하면서 신유박해로 전멸한 남인 시파는 재기 불능 상태에 이르렀고,[79] 조선의 정치는 당파 중심에서 외척 중심으로 나아가게 되었다.[80]
6. 1. 천주교 배척과 매국 종교 낙인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인해 조정은 천주교를 사학으로 규정하는 입장을 확고히 했고, 천주교는 매국 종교라는 낙인이 찍히게 되었다.[67] 백서의 내용이 알려지면서 재야 유생들은 조정에 천주교를 성토하는 글을 올렸고, 경상도와 전라도에서는 서원을 중심으로 천주교 배척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68]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천주교 박해는 더욱 심해졌다. 민중들은 천주교를 믿으면 패가망신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천주교도를 '천주학쟁이' 또는 '서학쟁이'라 부르며 손가락질했다.[69] 이처럼 반천주교적인 분위기는 천주교와 서양 학문 모두를 배척하게 만들어 조선의 자주적 근대화를 좌절시켰고, 결과적으로 식민지화의 한 원인이 되었다.[70]6. 2. 동지사 파견과 외교적 노력
조선 정부는 1801년 10월(음력)에 동지사를 파견하면서 천주교 탄압의 정당성을 청나라에 설명하는 진주사(陳奏使)의 임무도 함께 부여했다.[71] 조정에서는 황사영 백서 사건 이후 청나라 출신 주문모 신부의 처형 사실이 청나라에 알려질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71]이에 조선 정부는 진주사를 통해 신유박해 전반에 대한 청나라의 이해를 구하고, 주문모 신부가 청나라 사람인 줄 모르고 처형했다고 거짓 해명했으며, 더 이상의 천주교 탄압은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72] 진주사 조윤대 일행은 토사교문과 함께 황사영 백서의 내용을 16행 922자로 축소하여 청나라에 전달했다.[73] 이 축소본은 흔히 가백서(假帛書)라고 불리는데, 여기에는 조선 조정에 불리한 내용이 삭제되었고, 서양 선박과 군대 파견을 요청한 사실을 적어 박해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6. 3. 천주교 확산과 민중 신앙으로의 변화
탄압으로 인해 조선 천주교회의 1세대 선구자이자 지도자였던 주문모, 이승훈, 정약종, 최창현, 강완숙, 최필공, 홍교만, 김건순 등이 순교하였다.[74] 지방에서도 지도급 인사들이 다수 순교하였는데, '내포교회의 사도'로 불리던 이존창과 전주교회의 지도적 교인이던 유항검, 유관검 형제가 순교했다. 이로써 조선 천주교회는 큰 타격을 받았다. 그러나 살아남은 천주교도들은 위험을 피해 경기도의 야산지대나 강원도나 충청도의 산간지방, 태백산맥, 소백산맥의 깊은 산중과 계곡에 숨어, 천주교의 전국적 확산을 촉진하였다. 한편, 신유박해를 전후하여 종래 지식인 중심의 조선 천주교회가 서민사회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75]6. 4. 정순왕후 퇴진과 정치적 변화
1803년(순조 3) 여름, 큰 가뭄이 들었고 평양부와 함흥부에 큰 불이 났다. 그해 11월에는 사직악기고, 12월 13일에는 창덕궁 선정전과 인정전에도 큰 화재가 발생했다.[76][77] 닷새 후에는 장안의 종루 거리에서 다시 큰 불이 났다. 백성들은 대궐을 향하여 손가락질을 했고, 낮은 벼슬아치들도 대왕대비를 두고 중얼거렸다.[78] 민심이 흉흉해지자 정순왕후는 1804년 1월에 수렴청정에서 물러났다. 순조의 친정이 시작되자 장인 김조순이 득세하여 벽파를 숙청하고 안동 김씨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신유박해로 남인 시파는 전멸하여 재기 불능 상태에 이르렀고,[79] 이는 개혁을 향해 나아가던 조선의 역사를 퇴보시켰으며 조선의 정치가 당파 중심에서 외척 중심으로 나아가도록 만들었다.[80]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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