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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일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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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권일신은 조선 후기 천주교 신자이다. 그는 안동 권씨 가문 출신으로, 형 권철신과 함께 천주교에 입교하여 전교 활동을 펼쳤다. 1777년부터 정약전, 정약용 등과 함께 천주교 교리를 연구했으며,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고 명례방공동체에서 활동했다. 열렬한 전도자로 활동하며 이단원, 이존창, 유항검 등을 입교시켰다. 가성직 제도 수립 당시 사제로 선임되었으나 평신도로 돌아섰고, 신해박해 때 체포되어 배교했으나 귀양길에 사망했다.

2. 생애

권일신은 본관이 안동 권씨이며, 자는 성오(省吾), 호는 이암(移菴)이다.[1] 할아버지는 대군사부를 지낸 권적(權蹟)이고, 아버지는 권암(權巖)이다.[1] 어머니는 풍산 홍씨이며, 권철신은 그의 형이다.[2] 증조부 때 갑술옥사로 인해 관직을 잃고 낙향하여 양근(현 양평군) 땅에서 살았다.[2]

권일신은 남인 출신으로, 조부 권적이 인조 때 이이와 성혼의 문묘 배향을 비판하는 논의를 주도하여 노론과 소론 모두에게 견제를 받았다.[3] 그는 몰락한 양반 가문 출신으로 일찍이 과거를 포기하고 안정복의 문하에서 학문 연구에 전념했으며, 안정복의 딸 광주 안씨와 결혼했다.

성호 이익의 제자인 정약전, 정약용, 권철신, 이덕조 등과 함께 1777년(정조 1)부터 천진암과 주어사에 모여 천주교 교리를 연구하는 신앙 운동을 전개했다.[4] 1783년(정조 7), 이승훈이 북경에서 영세를 받고 돌아온 후, 이벽은 권철신과 권일신 형제를 천주교에 입교시켰다.[4][5][6] 1785년(정조 9)에는 한양 명례동(명동) 김범우 집에서 열린 신앙 모임인 '명례방공동체'에 참여했다.

권일신은 세례를 받은 후 형과는 달리 열렬한 전도자가 되어 전교에 힘썼다. 중인 이단원을 전교하여 훗날 조선 천주교의 중심지가 된 충청 내포 지역 천주교회의 기틀을 마련하게 했고,[7] 이존창과 유항검을 입교시켜 중인 중심의 천주교 확산에 기여했다.[7]

1787년 가성직 제도 수립 당시 사제로 선임되었으나, 교리에 위배됨을 알고 평신도로 돌아가 베이징에 성직자 파견을 요청했다.[8][9] 1791년 윤유일이 귀국하여 제사 금지령을 전하자 이승훈은 배교했으나, 권일신은 잔류하여 전교 활동을 계속했다.[10] 양근 일대(현 양평군)에 열심히 전도하여 그곳을 서학의 요람으로 만들었다.

1791년 (정조 15) 신해박해권상연, 윤지충이 잡혀간 후, 권일신도 이승훈과 함께 서학책을 간행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이승훈은 배교하여 석방되었으나 관직은 박탈당했고,[11][12] 권일신은 노모의 간청으로 배교를 약속하고 제주도에서 예산군으로 귀양지가 변경되었으나, 예산으로 가던 중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13][14][15]권철신은 동생의 죽음에 슬퍼하며 10여 년간 집 밖을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16]

2. 1. 어린 시절

권일신은 본관이 안동 권씨이며, 자는 성오(省吾), 호는 이암(移菴)이다.[1] 할아버지는 대군사부를 지낸 권적(權蹟)이고, 아버지는 권암(權巖)이다.[1] 어머니는 풍산 홍씨이며, 성호좌파를 대표하는 학자인 권철신은 그의 형이다.[2] 증조부 때 갑술옥사로 인해 관직을 잃고 낙향하여 양근 땅에서 살았다.[2]

권일신은 남인 출신으로, 조부인 권적이 인조 때 이이와 성혼의 문묘 배향을 비판하는 논의를 주도하여 그의 가문은 노론과 소론 모두에게 견제를 받았다.[3] 그는 몰락한 양반 가문 출신으로 일찍이 과거를 포기하고 안정복의 문하에서 학문 연구에 전념했으며, 안정복의 딸인 광주 안씨와 결혼했다.

2. 2. 천주교 입교

성호 이익의 제자인 정약전, 정약용, 권철신, 이덕조 등과 함께 1777년(정조 1)부터 천진암과 주어사에 모여 천주교 교리를 연구하는 신앙 운동을 전개했다.[4] 1783년(정조 7), 이승훈이 아버지 서장관 이동욱(李東郁)을 따라 북경에 갔다가 이듬해 봄에 영세를 받고 돌아왔다.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은 이벽은 권철신과 같이 학덕이 높은 학자를 포섭하여 천주교의 기반을 굳힐 생각을 하였다.[4] 1784년 9월(음), 이벽은 먼저 양근에 사는 권씨 가문을 찾아가 입교를 권고하였다. 셋째인 권일신(權日身)은 즉시 입교하였고, 맏이인 권철신은 처음에는 주저했으나 결국 입교하여[5] 이벽에게서 세례를 받았다.[6] 1785년(정조 9), 이승훈의 주재(主宰)로 한양 명례동(明禮洞 : 명동) 김범우 집에서 열린 집회에 참여하며 신앙 모임인 '명례방공동체'에서 활동하였다.

2. 3. 전교 활동

세례를 받은 후 권일신은 형인 권철신과 달리 열렬한 전도자가 되어 전교에 매우 열정을 불태웠다. 권일신은 중인이던 이단원을 전교했는데, 천안 출신인 이단원은 충청일대를 전교하여 훗날 조선 천주교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충청 내포 지역 천주교회의 기틀을 마련하였다.[7] 또한 권일신은 충청도 아산 출신 이존창과 전주 출신의 유항검을 입교시켜 이 땅에 중인들을 중심으로 한 천주교의 한 획을 긋게 만들었다.[7]

1787년에 가성직 제도를 수립할 때 주교 이승훈에 의해 사제로 선임되었지만 가성직제도가 교리에 위배된다는 사실을 안 이후에는 평신도로 돌아감과 동시에 베이징에 사람을 보내 성직자의 파견을 요청했다.[8][9] 1791년, 중국에 밀파되었던 윤유일이 귀국하여 제사금지령을 전하자 이승훈은 고민끝에 배교하였으나[10] 권일신은 잔류하여 전교활동을 하였다. 집안과 이웃에 열심히 전도하여 그 문하에 이존창, 유항검 등 열렬한 신자가 나왔으며, 양근 일대(현 양평)에 열심히 전도하여 당시 그곳을 서학의 요람이라 하였다.

2. 4. 신해박해와 순교

1791년 (정조 15) 신해박해권상연, 윤지충이 잡혀간 후, 권일신도 이승훈과 함께 서학책을 간행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이승훈은 배교했다는 변론이 받아들여져 석방되었으나 관직은 박탈당했다.[11][12] 권일신은 노모의 간청으로 회오문(悔悟文)을 지어 배교하여[13][14] 귀양지가 제주도에서 예산군으로 변경되었으나, 예산으로 가던 중 고문 후유증인 장독(杖毒)으로 죽었다.[15]권철신은 동생의 죽음에 슬퍼하며 10여 년간 집 밖을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16]

참조

[1] 백과사전 녹암 권철신 묘지명 - 1-2 [鹿菴權哲身墓誌銘] 네이버 지식백과
[2] 백과사전 권철신 [權哲身] 네이버 지식백과
[3] 백과사전 권일신 [權日身] 네이버 지식백과
[4] 문서 녹암 권철신 묘지명 - 1-2 [鹿菴權哲身墓誌銘] 네이버 지식백과
[5] 웹사이트 권철신 (權哲身, 1736년 ~ 1801년) https://maria.cathol[...]
[6] 백과사전 권철신 [權哲身] 네이버 지식백과
[7] 서적 한국사의 천재들 생각의 나무 2006
[8] 서적 (제목 불명) 2009
[9] 백과사전 권일신 http://100.naver.com[...] 네이버 지식백과 2016-02-08
[10] 웹사이트 이승훈(李承薰) http://encykorea.aks[...]
[11] 역사자료 정조실록 1805 http://sillok.histor[...] 1805-11-08
[12] 역사자료 정조실록 1805 http://sillok.histor[...] 1805-11-03
[13] 백과사전 권일신 [權日身] 네이버 지식백과
[14] 백과사전 권일신(權日身)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15] 백과사전 권일신 [權日身] 네이버 지식백과
[16] 백과사전 녹암 권철신 묘지명 - 1-2 [鹿菴權哲身墓誌銘] 네이버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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