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차랑
1. 개요
윤차랑은 재일 조선인 출신 야구 선수로, 도호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0년부터 1964년까지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에서 투수로 활동했다. 1960년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으며, 통산 24경기 2승 4패, 평균자책점 2.58을 기록했다. 1965년 북한으로 귀국하여 선수 생활을 이어갔으며, 1979년 사고로 사망했다.
| 선수명 | 파야마 지로 |
|---|---|
| 국적 | 대한민국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 출생지 | 일본 미야기현 센다이시 |
| 생년월일 | 1941년 4월 5일 |
| 사망일 | 1979년 7월 5일 (향년 38세) |
| 사망지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함경북도 청진시 |
| 투구 | 우 |
| 타석 | 우 |
| 수비 위치 | 투수 |
| 출신 학교 | 도호쿠 고등학교 |
|---|
| 프로 입단 연도 | 1960년 |
|---|---|
| 첫 출장 | 1960년 |
| 마지막 경기 | 1964년 |
| 경력 | 다이요 훼일스 (1960년 ~ 1964년) 직업 체육 평양 철도 체육단 |
| 선출국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야구 선수 -
박현명 (야구 선수)
박현명은 일제강점기 한국의 야구 선수로, 1938년 오사카 타이거스에 입단하여 타격 투수로 활동했으며, 해방 후 북한에 거주했고, 그의 동생은 삼미 슈퍼스타즈 초대 감독을 지낸 박현식이다. -
1941년 출생 -
신영복
신영복은 대한민국의 경제학자, 사회운동가, 대학교수, 저술가로서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수감 생활 중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집필하여 반향을 일으켰고, 출소 후 관계론을 중심으로 사상을 발전시키며 독특한 서체로 민중과 소통했으며, 다수의 저서를 남겼다. -
1941년 출생 -
도정일
도정일은 영문학자이자 사회운동가로, 경희대학교 교수, 도서관장, 정책기획위원회 위원, 문화개혁시민연대 공동대표 등을 역임했으나, 2016년 학력 위조 논란 이후 이를 인정했고, 저서로는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 등이 있다. -
20세기 한국 사람 -
백낙청
백낙청은 대한민국의 영문학자이자 문학평론가, 사회운동가로서, 《창작과비평》 창간, D. H. 로런스 연구, 유신 정권 비판, 남북 화해와 통일 운동 참여, 민족 문학론과 분단 극복론 주창 등 비판적 지식인으로서 한국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
20세기 한국 사람 -
주요한
주요한은 일제강점기 시인이자 언론인이자 정치인이며, 친일 행위로 인해 논란이 있으며, 국회의원과 상공부 장관을 역임했다.
2. 경력
1959년 10월 15일, 윤차랑은 다이요 웨일스와 계약금 7에 계약했다. 1960년 3월 8일 니시쿄고쿠 구장에서 열린 오픈전 한큐 브레이브스 전에서 선발 등판했으나, 로베르토 발본에게 볼넷과 도루를 허용하며 역전 점수를 내주는 등 부진하여 20구 만에 강판되었다.
1960년 7월 31일, 가와사키 구장에서 열린 주니치 드래건스 전에서 "2번 · 좌익수"로 출전하며 프로 첫 출전을 기록했으나, 이는 "미끼" 기용이었다. 1960년 10월 5일, 히로시마 시민 구장에서 열린 히로시마 카프 전에서 선발 등판하여 6이닝 1실점으로 프로 첫 승을 거두었다. 3회에는 프로 첫 타석에서 2루타, 5회에도 우전 안타를 기록했다. 그해 1960년 일본 시리즈 벤치 멤버로 선발되어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1961년에는 주로 구원 투수로 기용되었으나, 4월 25일 주니치전에서 구원에 실패하여 프로 첫 패를 기록했다. 5월 5일 고쿠테츠 스왈로스 전에서도 동점 상황에서 역전 점수를 허용하여 두 번째 패배를 기록하고 2군으로 내려갔다. 9월 10일 히로시마전에서는 프로 첫 완투승을 기록했으나, 이후에도 구원 투수로서 실패가 이어졌다.
1962년에는 1군에서 2경기 등판, 1963년에는 1군 등판이 없었다. 1964년 2군에서 홋카이도 원정 경기에 선발 등판하여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1964년 8월 25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전에서 3번째 투수로 등판했으나, 후나다 카즈히데에게 3점 홈런을 허용하고 강판되었다. 이것이 1군에서의 마지막 등판이 되었다. 1964년 시즌 종료 후 자유 계약 선수가 되었다.
1965년 5월 23일, 가족과 함께 귀환 사업 제125차 선박을 타고 니가타항에서 북한으로 출국하여, 5월 25일 청진에 도착했다. 이후 청진시의 철공소에서 '직업 체육' 야구를 계속하며 근로자 대회에서 활약했고, 1973년부터 평양시의 '평양철도체육단' 야구팀에 남동생과 함께 소속되었다. 1974년에는 평양시, 사리원시, 신의주시, 남포시에서 열린 쿠바 대표팀과의 경기에 북한 대표팀 투수로 출전하여 홈런을 기록하기도 했다.
1977년 청진의 철공소로 복귀했으며, 1979년 7월 5일 근무 중 사고로 사망하여 '사회주의 건설 애국자'로 추서되었다.
2.1. 프로 입단 전
1955년 가을, 도호쿠 고등학교가 주최하는 중학생 대상 야구 대회 '난코 대회'가 개최되었다. 이 대회에 센다이 시립 제2중학교의 에이스로 참가한 윤차랑은 그 재능을 인정받아 1957년 4월, 도호쿠 고등학교 야구부에 정식으로 입부했다.
같은 해 9월 8일, 도호쿠 고등학교의 초청으로 효테이가와라 구장에서 열린 와세다실업과의 경기에서 5회 초부터 구원 등판하여 오 사다하루를 삼진으로 잡는 등, 8회까지 주자를 한 명도 허용하지 않는 호투를 보였지만, 9회, 선두 타자 오 사다하루에게 장외 홈런을 허용하여 패전 투수가 되었다. 1958년 6월 27일에 열린 와세다실업과의 재경기에서 윤차랑은 9이닝을 7탈삼진 2실점으로 막아 오 사다하루에게 승리했다.
1958년 고교 야구 미야기현 대회에서 윤차랑은 구원 투수로 활약했고, 같은 해 8월 3일에 열린 센다이 상업과의 결승전에서는, 초회 무사 2, 3루의 위기에서 외야에서 마운드로 올라 위기를 넘기자, 외야 수비를 보던 3회 2사 1, 2루의 위기에서도 다시 등판하여 이 위기를 넘기고 경기가 종료될 때까지 던져 승리 투수가 되었다. 고시엔에서는, 8월 9일 나가사키 난잔과의 경기에서 17탈삼진을 기록하며 승리 투수가 되었다. 팀은 2회전에서 츠루가 고등학교에 패했다.
1959년, 도호쿠 고등학교는 춘계 도호쿠 대회에서 우승했고, 여름 미야기현 예선에서도 2경기 노히트노런을 기록하는 등 5경기 모두 완봉승을 거두며 2년 연속으로 여름 고시엔 출전을 결정했다. 8월 12일 시모다테 제1과의 1회전에서 윤차랑은 초회 무사에서 등판하여 10탈삼진을 잡아 승리에 기여했다. 8월 14일 구라시키 공업과의 2회전에서도 3회부터 등판하여 10탈삼진을 잡아 승리 투수가 되었다. 8월 16일 니치다이 제2고와의 준준결승에서는 4회부터 구원 등판하여, 선발 미네기시와 합계 16개의 삼진을 잡았다. 8월 18일 우츠노미야 공업과의 준결승에서는 2회부터 구원 등판했으나 타선의 지원을 받지 못했고, 연장 10회 말 윤차랑의 2루 악송구 사이에 주자가 홈인하며 끝내기 패배를 당했다. 그 해 고교 야구 일본 대표 미국 원정 멤버에는 재일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미국 입국이 어렵다는 판단 때문에 선출되지 않았다.
2.2. 프로 선수 시절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
1959년 10월 15일, 다이요 웨일스와 계약금 7에 계약했다. 1960년 3월 8일, 니시쿄고쿠 구장에서 열린 오픈전 한큐 브레이브스 전에서 선발 등판했으나, 로베르토 발본에게 볼넷과 도루를 허용하며 역전 점수를 내주는 등 부진하여 20구 만에 강판되었다.
1960년 7월 31일, 가와사키 구장에서 열린 주니치 드래건스 전에서 "2번 · 좌익수"로 출전하며 프로 첫 출전을 기록했으나, 이는 "미끼" 기용이었다. 1960년 10월 5일, 히로시마 시민 구장에서 열린 히로시마 카프 전에서 선발 등판하여 6이닝 1실점으로 프로 첫 승을 거두었다. 3회에는 프로 첫 타석에서 2루타, 5회에도 우전 안타를 기록했다. 그해 1960년 일본 시리즈 벤치 멤버로 선발되어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1961년에는 주로 구원 투수로 기용되었으나, 4월 25일 주니치전에서 구원에 실패하여 프로 첫 패를 기록했다. 5월 5일 고쿠테츠 스왈로스 전에서도 동점 상황에서 역전 점수를 허용하여 두 번째 패배를 기록하고 2군으로 내려갔다. 9월 10일 히로시마전에서는 프로 첫 완투승을 기록했으나, 이후에도 구원 투수로서 실패가 이어졌다.
1962년에는 1군에서 2경기 등판, 1963년에는 1군 등판이 없었다. 1964년 2군에서 홋카이도 원정 경기에 선발 등판하여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1964년 8월 25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전에서 3번째 투수로 등판했으나, 후나다 카즈히데에게 3점 홈런을 허용하고 강판되었다. 이것이 1군에서의 마지막 등판이 되었다. 1964년 시즌 종료 후 자유 계약 선수가 되었다.
2.3. 북한 귀국 후
1965년 5월 23일, 가족과 함께 귀환 사업 제125차 선박을 타고 니가타항에서 북한으로 출국하여, 5월 25일 청진에 도착했다. 이후 청진시의 철공소에서 '직업 체육' 야구를 계속하며 근로자 대회에서 활약했고, 1973년부터 평양시의 '평양철도체육단' 야구팀에 남동생과 함께 소속되었다. 1974년에는 평양시, 사리원시, 신의주시, 남포시에서 열린 쿠바 대표팀과의 경기에 북한 대표팀 투수로 출전하여 홈런을 기록하기도 했다는 사실이 후년에 밝혀졌다.
1977년 청진의 철공소로 복귀했으며, 1979년 7월 5일 근무 중 사고로 사망하여 '사회주의 건설 애국자'로 추서되었다.
3.1. 연도별 투수 성적
| 연도 | 소속팀 | 경기 | 승 | 패 | 세이브 | 홀드 | 완투 | 완봉 | 승률 | 타자 | 투구 이닝 | 피안타 | 피홈런 | 볼넷 | 사구 | 탈삼진 | 실점 | 자책점 | 평균자책점 | WHIP |
|---|---|---|---|---|---|---|---|---|---|---|---|---|---|---|---|---|---|---|---|---|
| 1960 | 다이요 | 1 | 1 | 0 | 0 | 0 | 0 | 0 | -- | 22 | 6IP | 2 | 0 | 1 | 0 | 4 | 1 | 1 | 1.50 | 0.50 |
| 1961 | 20 | 3 | 2 | 0 | 0 | 1 | 0 | .200 | 234 | 58IP | 50 | 4 | 15 | 1 | 28 | 20 | 14 | 2.17 | 1.12 | |
| 1962 | 2 | 0 | 0 | 0 | 0 | 0 | 0 | .000 | 22 | 4.1IP | 9 | 2 | 0 | 0 | 3 | 5 | 4 | 7.20 | 2.08 | |
| 1964 | 1 | 0 | 0 | 0 | 0 | 0 | 0 | .000 | 5 | 1.1IP | 1 | 1 | 0 | 0 | 0 | 1 | 1 | 9.00 | 0.75 | |
| 통산:4년 || 24 || 4 || 2 || 0 || 0 || 1 || 0 || .333 || 283 || 69.2IP || 62 || 7 || 16 || 1 || 35 || 27 || 20 || 2.58 || 1.12 | ||||||||||||||||||||
3.2. 등번호
尹且郞중국어은 1960년부터 1964년까지 등번호 46번을 사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