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치명은 구한말 학부주사를 거쳐 통정대부에 오른 인물이다.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이후 관직에서 사퇴하고 고향인 충청남도 아산으로 내려갔으며, 만주 동포 구제 의연금 납부, 수재 위문금 기부 등 활동을 했다. 그의 아들 윤유선은 의사이며, 서상일의 사위이다.
2. 생애
윤치명은 구한말 학부주사를 거쳐 통정대부에 이르렀다. 아들 윤유선(尹裕善)은 의사이며, 정치인 겸 독립운동가서상일(徐相日)의 사위이기도 하다.[3]
2. 1. 낙향 이후 활동
1910년 한일합방과 동시에 관직에서 사퇴하고 고향인 충청남도 아산으로 내려갔다. 1931년에는 만주 동포 구제 의연금을 납부했고, 1933년5월에는 둔포면 주민들이 영인금융회사의 지소 설치를 건의하는데 동참, 서명하였다. 1934년 8월에는 삼남지역의 수재 위문금을 기부하기도 했다.[3]1944년4월 21일 향년 50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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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1]
서적
윤치영의 20세기:동산회고록
삼성출판사
1991
[2]
문서
윤치영은 그의 회고록에서 다섯째 형님과 13년 차이라고 하였다.
[3]
서적
윤치호 일기 - 한 지식인의 내면세계를 통해 본 식민지 시기
역사비평사
2002
[4]
문서
아버지 윤영렬의 생모
[5]
서적
윤치호 일기 (1916-1943)
역사비평사
2001
[6]
서적
윤치호 일기:1916-1943
역사비평사
2001
[7]
서적
윤치호 일기 - 한 지식인의 내면세계를 통해 본 식민지 시기
역사비평사
2002
[8]
문서
윤치왕 의무감의 장교자력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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