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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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윤영렬은 조선 후기의 무관으로, 흥선대원군에게 발탁되어 무과에 급제한 후 여러 지방관을 역임했다. 동학 농민 운동 당시 토벌에 참여했으며, 안성군수로 재직하며 마적 토벌에 큰 공을 세웠다. 대한제국에서 육군 참장과 자헌대부를 지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관직을 사퇴하고 고향에서 지냈다. 윤두수의 후손이며, 윤웅렬의 동생으로, 윤치호, 윤보선 등 독립운동가와 정치인을 배출한 가문의 일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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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렬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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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윤영렬 |
한자 표기 | 尹英烈 |
별명 | 자는 백웅(白熊), 호는 연구 또는 경재 |
출생 | 1854년 4월 15일 |
사망 | 1939년 11월 4일 (향년 85세) |
사망 장소 | 일제강점기 경기도 경성부 |
본관 | 해평 윤씨 |
종교 | 유교 → 개신교(감리회) |
배우자 | 한진숙(본부인) |
자녀 | 슬하 9남 3녀 |
부모 | 아버지 윤취동, 어머니 고령 신씨 부인 |
친척 | 조부 윤득실, 조모 남양 홍씨 |
군사 경력 | |
소속 | 대한제국 육군 |
복무 기간 | 1897년 ~ 1907년 |
최종 계급 | 대한제국 육군 참모장 |
주요 참전 | 동학 농민 운동 토벌, 만주족·마적 토벌 |
정치 경력 | |
관련 활동 | 사헌부감찰, 안성군수, 남포군수, 내무참의, 강계부사, 남포군수, 집포관, 자헌대부 |
웹사이트 | |
웹사이트 | 해평 윤씨 홈페이지 |
2. 가계
윤영렬 가문은 조선 선조 때 형제 정승이었던 윤두수, 윤근수의 후손이다.[19][20][21] 7대조 윤흔은 예조판서를 지냈으나, 증조부 대에 향반으로 몰락하였다. 아버지 윤취동은 늦은 나이에 아들 형제를 얻어 이름을 윤웅렬, 윤영렬로 지었다.
2. 1. 가계도
윤득실|尹得實한국어은 할아버지[18], 윤취동|尹㝡東한국어은 아버지[19], 윤웅렬은 형, 윤치오|尹致旿한국어, 윤치소|尹致昭한국어, 윤치성|尹致晟한국어, 윤치병|尹致昞한국어, 윤치명|尹致明한국어, 윤치영은 아들이며, 윤치호, 윤치왕, 윤치창|尹致昌한국어은 조카이고, 윤일선, 윤명선 (1900년)|윤명선한국어, 윤보선, 윤원선|尹源善한국어, 윤택선|尹澤善한국어은 손자이다.[19][20][21]3. 생애
윤영렬은 1854년 해평 윤씨 가문에서 태어나 1878년 무과에 합격했다.[1] 동학 농민 운동 때는 전라북도에 파견되어 진압에 참여했다.[1]
1897년 안성군수로 임명되었고,[2] 1898년 참위로 임명되며 군 경력을 시작했다.[3] 백성을 위한 훌륭한 군수로 평가받았으며,[4] 1904년에는 정위로 승진하여 남포군수가 되었다.[5][6] 이후 양호집포관으로 전라북도의 산적을 체포하는 임무를 맡았다.[7][8] 1905년 부령,[9] 정령으로 승진했고,[10] 1906년에는 대령이 되었다.[12] 이근택 군부대신의 추천으로 포상을 받았으며,[13] 같은 해 소장으로 승진했다.[14] 1907년 보직 없이 면직되었다.[15]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이후 고향으로 돌아가 조선총독부의 작위를 거절하고 은거했다.[1] 1910년 형 윤웅렬과 함께 노비 문서를 불태웠다.[16] 1939년 아산에서 사망했다.[17]
3. 1. 초기 생애 (1854년 ~ 1878년)
윤영렬은 1854년 음력 4월 15일 충청남도 아산군 둔포면에서 윤취동(尹聚東)과 그의 두 번째 부인 안동 김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22][23][24] 어려서부터 기력이 강건하여 형 윤웅렬과 함께 천하장사라는 소리를 들었다. 위로는 누이가 몇 명 있었는데, 그 중 한 명은 온양에 사는 이원시에게 시집갔고, 후일 소설가 겸 작가인 이어령의 진외증조모가 되었다. 다른 누나는 아산에 사는 전주 이씨 이인서에게 시집갔다. 온양으로 시집간 윤씨 부인은 한글과 한학 실력에도 뛰어났는데, 훗날 남동생인 윤영렬의 치적을 담은 회고록인 《윤상공 선정록》을 출간하기도 했다.아버지 윤취동은 첫 부인에게서 아들이 없었고, 재취 부인을 얻었지만 딸만 몇 명 두었고, 나이 40이 넘도록 아들이 없었다. 아버지 취동은 웅달산에 기도를 하고 난 뒤 아들을 수태했다 하여 장남의 이름을 웅렬이라 지었고, 뒤에 그의 이름은 형 윤웅렬과 짝을 맞추기 위해(영웅) 영렬로 지어졌다. 윤영렬은 윤웅렬의 동생으로 9세 때 부친을 여의었다.
그의 가계는 선조 때의 형제 정승 윤두수, 윤근수 형제의 후손으로 7대조 윤흔(尹昕)이 예조판서를 지내고 6대조 윤취지(尹就之)는 부사직을 지냈으나 증조부 대에 향반으로 몰락하였다. 5대조 윤채는 세자익위사사어를 지내고 사후 증 이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고조부 윤세겸은 돈령부동지사를 지냈으며, 재종조부 윤득우는 병조참판과 광주부윤을 지냈으나 소론 신치운의 문인이라 하여 순탄치 않은 관료 생활을 보냈다. 증조부 윤발은 관직이 없이 생활하다가 집터가 수원 행궁으로 편입되면서 잠깐 낭청직을 지냈다. 후에 그의 아버지 윤취동이 억울함을 상소하여 호조참의에 추증되었다. 할아버지 윤득실은 통덕랑을 지냈지만 요절했고, 천안군으로 분가한 아버지 윤취동은 할아버지의 넷째 아들이었다.
어려서 아버지 윤취동을 여의었지만, 아버지 윤취동은 관직 생활 외에 자력으로 아산군 신항리의 농토를 얻은 뒤 만석꾼 대지주가 되어 가세를 일으켰으므로 그는 어렵지 않은 소년기와 청년기를 보냈다. 장인인 한치원(韓致元)에게 글을 배워 간단한 글과 고전에 대한 지식이 있었다. 훗날 조카인 윤치호는 그가 학식이 부족했다 하였지만, 그는 어린 윤보선과 윤치영에게 삼국지에 나오는 관우 운장을 설명하며 그와 같은 사람이 되도록 권고하였다. 글을 잘 지었던 장인 한치원은 그에게 '체화재상량문(棣華齋上樑文)' 등의 글을 지어 선물로 봉정하였다.
장인 한치원에게서 글을 배우다가 형 윤웅렬의 주선으로 박규수, 강위의 문하에도 출입하며 글을 배웠다. 일찍이 흥선대원군에게 발탁되어 관직에 나가 군관(軍官)으로 활동하다가 1878년(고종 15년) 무과(武科)에 급제하였다.
3. 2. 무과 급제와 관료 생활 (1878년 ~ 1894년)
1878년(고종 15년)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조선 사헌부 감찰을 지냈다.[1] 1881년(고종 19년) 1월 6품으로 승진하였고, 6월 20일 규장각 검서관에 임명되었다. 1882년 1월 왕세자인 순종과 순명효황후의 가례가 결정되자, 규장각 검서관으로 가례도감 별간역(別看役)을 겸임하였다.1882년 3월 3일 부사과, 이후 상의원 별제를 거쳐 12월 8일 금부도사가 되었다. 12월 15일 사헌부 감찰이 되었다가 1883년 1월 27일 규장각 검서관, 6월 4일 장악원 주부, 12월 27일 사헌부 감찰이 되었다. 1884년 8월 16일 부사과, 9월 10일 종부시 인의가 되었다.
1890년 평안북도 강계 방어사로 나갔다가 1891년 8월 10일 부호군, 1893년 내무 참의(內務參議)를 거쳐 다시 사헌부 감찰이 되었다.[1]
3. 3. 동학 농민 운동 진압과 도적 토벌 (1894년 ~ 1898년)
1894년 10월 윤영렬은 아산(牙山)에 사는 조중석(趙重錫)과 함께 장정 300명을 모아 천안군 목천면에 출몰한 도적을 토벌하였다. 이후 동학 농민 운동 토벌에 참여한다.1894년 동학 농민 운동 당시 조중양과 함께 토벌군에 별군관으로 차출되었으며,[25] 관군 외에도 격문을 돌려 의병을 모집하였다. 이어 관군과 의병 병력을 이끌고 충청남도 아산과 천안 일대의 동학 농민군 토벌에 참여하였으며, 아들 윤치소 역시 창의하여 동학군 토벌에 출정하였다. 그는 산적 소탕과 도적 체포를 잘 하였다.[26] 1895년 음력 9월 을미사변이 발생하자 관직을 사퇴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복직했다.
한편 조카 윤치호는 상하이 망명 중 동학 농민 운동 소식을 접하고 적극 지지하여 화제가 되었다. 윤치호는 1894년 2월 상해 YMCA의 조선문제에 관한 연설에서 "평화적 또는 폭력적 내부혁명만이 조선의 유일한 구제책이다."라고 주장했고, 동년 5월 동학당 봉기가 삼남지방에 만연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악으로 물들고 피로 얼룩진 정부를 때려부수는 일이라면 어떠한 일도 환영하고 또 환영한다."라고 주장했다.[27]
이후 연안부사[28]를 거쳐 강계부사 겸 방어사와 경기도 안성군수 겸 삼남토포사(三南討捕使)를 지냈다.[29] 1895년 3월 4일 강계부사를 거쳐 9월 2일 연안 군수로 발령되었다가 11월 29일 사퇴하였다. 1896년 4월 18일 안성군수에 임명되었다. 1897년 12월 26일 안성군수 재직 중 육군 부위에 겸임되었다.
안성군수 재직 중 마장군이라는 도적을 토벌하였다. 안성군으로 부임했을 당시 안성과 근처 여주, 이천까지 도적 무리가 횡횡하였고 그 중 마장군 무리가 가장 강력하였다. 그러나 역대 군수들은 이들 도적을 제대로 소탕하지 못했다.
윤영렬은 부임하자마자 근대적 치안 제도와 순검 제도를 도입했으며, 민병대를 조직해 도적 토벌에 나섰다. 토벌은 총격전까지 벌이는 치열한 난투였고 저항도 대단했다.[30] 윤영렬은 병사를 모집하고 병사들의 녹봉과 포상, 그리고 노비나 하층민에게는 면천하여 평민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조건으로 제시했다. 안성 주변 도적들은 무리가 강성해서 그 수가 8,000에 이른다고 주장하며 윤영렬에게 공개적으로 죽산 오봉산에서 결투를 벌이자는 전갈을 보낼 정도였고, 논두렁에 숨어서 윤영렬을 저격한 사건도 있었다.[30] 또한 윤영렬 토벌대가 주둔하던 막사에 자객을 침투시켰으나 재빨리 피신하였다.
1898년 10월 그는 도적 우두머리인 마장군에게 투항을 권고했다. 1898년 12월 9일자 "잡보"는 안성군 마장군이라는 불한당 괴수의 관군에 대한 도전을 안성군수이던 윤영렬이 효유한 글을 전재한 것이다.[31] 그러나 마장군은 듣지 않았고, 그는 직접 관군을 이끌고 보개산에 올라 마장군 근거지를 소탕했다. 이 과정에서 도적이 쏜 총에 맞고 쓰러지기도 했으나 기적적으로 일어나 도적 소탕을 지휘하였다. 만주에서 경기도까지 쳐내려온 만주족 마적단과 안성군 들판에서 총격전을 벌이기도 했다. 만주족 마적은 새벽에 윤영렬이 잠자던 막사에 자객으로 쳐들어왔지만 민첩하게 피신하여 생명을 건졌다. 만주족 마적들을 제압하자 이들은 다시는 쳐들어오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되돌아갔다.
3. 3. 1. 안성군수 재직 시절의 노력
안성군수 재직 중 윤영렬은 흉년과 질병을 이유로 경기도관찰사와 조정에 여러 번 건의하여 조세를 감면받았다. 당시 조선 사회는 관료의 능력을 세금 징수 능력으로 성적을 매겼으며, 군현의 사정을 무시한 채 미납 금액에 따라 처벌이나 파면을 하는 기계적인 규정이 있었다.[30] 거물급 인사가 수령으로 오면 조정에 상소하여 조세를 탕감하거나 유예하는 것이 가능했지만, 그렇지 않으면 백성들에게 세금을 걷어 바치거나 출세를 포기하고 사직 또는 파면당해야 했다.[32]윤영렬은 이러한 상황에서 이전 군수들이 해결하지 못한 역둔토(驛屯土)의 밀린 세금을 거두어 납부하고, 안성군 호포의 절반을 탕감받았다. 또한 의병들이 관청 서류를 불태워 밀린 세금 납부가 어렵다고 하소연하여 세금 탕감을 받아내기도 했다.[32] 그는 자기 홍보에도 능하여 안성에만 선정비를 네 개나 세웠다.[32] 원래 지방관은 부임 임기가 3년을 넘을 수 없었으나, 그는 특별히 안성군수로 7년 동안 재임하였다. 이임하면서 주민들에게 자신의 선정비를 세우지 말 것을 권고했으나, 주민들은 그의 선정비를 세웠고, 이는 현재 안성시 안성공원에 남아 있다.
3. 4. 대한제국 시기 (1898년 ~ 1910년)
1898년(광무 1년) 대한제국 수립 이후 육군부위를 지냈다.[3] 1902년 연기군수로 나갔다가[4] 다시 중추원의관으로 되돌아왔고, 이어 육군 정위로 승진하였다. 한편 1900년대 이후 조카 윤치호의 전도로 기독교로 개종하고 이후 그의 가족들은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1902년 1월 28일 충청남도 연기군수로 나갔다가[4] 1904년 1월 11일 육군 보병 정위(陸軍步兵正尉)로 돌아왔으며,[5] 다시 2월 19일 남포군수로 부임했다가[6] 3월 22일 의원면직하였다. 동년 4월 호서와 호남의 도적을 토벌하는 집포관(戢捕官)으로 임명되어 파견되었다.[7][8] 4월 25일 은진군수로 임명되었으나 9월 2일 의원면직하였다. 1905년 3월 9일 육군 보병 참령(陸軍步兵參領),[9] 11월 9일 육군 보병 부령,[10] 1906년 4월 가선대부로 승진했다.
1906년(광무 9년) 4월 준원전(濬源殿)을 개수하는데 참여한 공로로 가의대부로 승진하고, 5월 29일 육군 보병 정령(陸軍步兵正領)을 거쳐[11] 동년 9월 2일 육군참장(陸軍參將)으로 승진했다.[14] 이어 경무사(警務使)에 임명되었으나, 9월 3일 총리대신 이완용이 보직 없는 장교들을 모두 해임할 것을 청하여 해임되었다.[15] 1907년(융희 1년)에는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10년 7월 23일 다시 자헌대부로 승진하였다.
3. 5. 일제강점기와 생애 후반 (1910년 ~ 1939년)
1910년 10월 한일합방이 되자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조선총독부가 주는 자작 작위와 은사금도 거절하고 충청남도 아산군 둔포로 내려가 칩거하였다. 이후 글쓰기 등으로 소일하였다.[33] 일제강점기 동안 다복한 삶을 살았다.[34]1931년에는 충무공 이순신 묘소 주변 위토가 일본인에게 매각당할 위기에 처하자, 유적지 보존운동에 참여하여 성금을 여러 번 기탁하기도 했다. 또한 해평 윤씨 문중 회의에서 문장(종친회장)에 선출되기도 했다.
그러나 만년에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조카 윤치호에 의하면 그의 둘째 아들 윤치소는 지주로서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그가 아니었더라면 삼촌은 가난뱅이로 죽었을 것[35]이라고 지적했다. 한일 합방 이후 일체의 공직을 맡지 않았기에 그는 사후에도 친일파로 몰리지는 않았다.
1939년 11월 4일 오후 4시[34] 충청남도 아산군 둔포면 자택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향년 86세였다.
사후 묘소는 형 윤웅렬의 묘[36] 근처인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객사리 뒤편 부용산에 매장되었다.
4. 사후 평가
조카 윤치호는 윤영렬이 학식은 없었지만 용감하고 정직하며 성실한 사람이었다고 평가했다.[34] 또한 정확한 판단력을 가진 점을 높이 평가했다. 윤치호는 그가 '조선에서 가장 복 많은 사람이었다. 86년 동안 불행이나 고통을 겪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라고 평했다.[34]
윤치호는 그를 '사리 분별을 잘 하고 정직[34]'했으며 '가장 현명하고 용감한 사람 중 하나[35]'라고 평가했다. 윤영렬은 동학 농민 운동 진압, 도적 토벌, 백성을 위한 노력 등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그의 누이 중 온양으로 시집간 윤씨 부인은 남동생 윤영렬의 치적을 담은 《윤상공 선정록》을 직접 짓기도 했다. 후일 《윤상공 선정록》은 여러 사본이 배포되었는데, 손녀이자 윤치성의 딸인 윤화순이 베낀 필사본 등이 현재 전한다. 《윤상공 선정록》은 1983년 형설출판사에서 한글로 번역되어 출간되기도 했다.
5. 가족 관계
윤영렬은 윤근수, 윤두수 형제의 후손으로, 본처 한진숙과의 사이에서 6남 2녀를, 첩에게서 3남 2녀를 두었다.[35] 1927년 5월 16일 윤영렬과 한진숙의 회혼례식 사진이 남아있다.
장남 윤치오는 서울대학교 총장을 지낸 윤일선의 아버지이고, 차남 윤치소는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 윤보선의 아버지이다. 6남 윤치영은 대한민국 초대 내무부 장관, 국회부의장, 서울특별시장을 역임하였다.
조카 윤치호는 1939년 11월 4일자 자신의 일기에서 한진숙에게 5남 2녀를 두었다고 기록하기도 했다.[35] 윤영렬은 10남 5녀를 두었는데, 다른 아들 한 명은 어려서 사망했다. 따라서 딸 3명과 아들 3명은 첩에게서 낳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아들 윤치영이나 손자 윤보선은 언급하지 않았으나, 조카인 윤치호가 자신의 일기에서 '숙부의 어리석은 첩' 때문에 숙부의 건강에 해를 준 것을 질타하는 부분을 통해 알려지게 되었다.
5. 1. 가족 관계 상세
가계 | |
---|---|
조부모 | 윤득실(尹得實, 1768년 ~ 1805년), 남양 홍씨(南陽洪氏, 1765년 - 1816년 5월 7일) |
부모 | 윤취동(尹取東, 1798년 7월 18일 ~ 1863년 12월 21일), 안동 김씨(安東金氏, 1810년 ~ 1900년 10월) |
형제 | 윤웅렬(尹雄烈, 1840년 음력 4월 17일 ~ 1911년 양력 9월 22일) |
배우자 | 한진숙 (韓鎭淑, 1851년 3월 29일 ~ 1938년 2월 18일) |
자녀 | 장남: 윤치오 (尹致旿, 1869년 9월 10일 ~ 1950년 12월 22일) |
차남: 윤치소(尹致昭, 1871년 8월 25일 ~ 1944년 2월 20일) | |
3남: 윤치성(尹致晟, 1875년 4월 7일 ~ 1936년 8월 11일) | |
4남: 윤치병(尹致昞, 1880년 6월 4일 ~ 1940년 1월 24일) | |
5남: 윤치명(尹致明, 1885년 음력 9월 - 1944년 양력 4월 21일) | |
6남: 윤치영(尹致暎, 1898년 2월 10일 ~ 1996년 2월 9일) | |
장녀: 윤활란(尹活蘭, 1884년 3월 9일 ~ 1967년 12월 6일) | |
차녀: 윤노덕(尹老德, 1889년 6월 14일 ~ 1979년 11월 24일) | |
3녀: 윤씨 (이름 미상, 첩에게서 태어남) | |
첩 | |
첩 | 신덕경(愼德卿, ? - 1894년 5월 29일) |
첩 | 장복첨(張福瞻, 1902년 1월 22일 ~ 1950년 8월 3일) |
첩의 자녀 | 7남: 윤치정(尹致晶, 1921년 11월 25일 ~ ?) |
8남: 윤치일(尹致日, 1935년 2월 10일 ~ 1985년 4월 8일) | |
4녀: 윤길희(尹吉喜, 1924년 6월 16일 ~ 1973년 6월 28일), 5녀: 윤인희(尹麟喜, 1927년 1월 17일 ~ ?) |
참조
[1]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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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소(尹致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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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장관·서울대총장…대이어 ‘지배 엘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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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도 비난'…문창극이 옹호한 '친일파' 윤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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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일설에는 1843년생이라는 설도 있다.
[23]
문서
첫 부인인 고령신씨에게서는 아들이 없었다.
[24]
문서
그러나 형인 윤웅렬을 낳을 당시 안동김씨의 나이가 40대였다는 점으로 볼때 다른 부인의 소생일 가능성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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