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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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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윤치소는 1871년 충청남도 아산에서 태어난 인물로, 무관 출신 윤영렬의 아들이자 윤치호의 사촌이다. 유년기에 필운학당에서 수학하고 사헌부 감찰을 지냈으며, 동학농민운동 당시 의병을 조직하여 활동했다. 대한제국 시기 관직을 사퇴하고 경성신문 창간에 참여했으나, 을사조약 이후 기업 활동에 전념하여 경성방직회사와 조선광업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일제강점기에는 가나다 상점을 운영하며 국산품 장려 운동을 펼쳤으며,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역임하기도 했다. 1944년 사망했으며, 그의 생가는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었다. 그의 아들 윤보선은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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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소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출생일1871년 8월 25일
사망일1944년 2월 20일 (향년 73세)
본관해평 윤씨
부모아버지 윤영렬
어머니 한진숙
형제윤치오
첫째 남동생 윤치성
둘째 남동생 윤치병
셋째 남동생 윤치명
넷째 남동생 윤치영
첫째 여동생 윤활란
둘째 여동생 윤노덕
배우자이범숙
자녀장남 윤보선
차남 윤완선
삼남 윤원선
사남 윤한선
오남 윤택선
육남 윤형선
장녀 윤예경
차녀 윤의경
삼녀 윤계경
친척조부 윤취동
조모 고령 신씨
며느리 공덕귀
장손녀 윤완구
차손녀 윤완희
장손자 윤상구
차손자 윤동구

2. 생애

윤치소는 1871년 8월 25일 충청남도 아산에서 태어났다. 조선 선조 때 형제 정승이었던 윤두수윤근수의 후손으로, 가세가 몰락했다가 할아버지 윤취동 대에 다시 일어섰다. 유년 시절 필운학당에서 공부했고, 사헌부 감찰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에는 의병을 조직하여 동학군 토벌에 참여하기도 했다.

1898년 경성신문 창간에 참여했고, 1901년 중추원 의관을 지냈다. 1905년 을사 보호 조약 이후 관직에서 물러나 기업 활동에 전념했다. 광장주식회사, 대한천일은행 등에서 활동했고, 1907년 태극학회 창립에도 참여했다.

한일 강제 병합 이후에는 사업가와 사회 운동가로 활동했다. 국산품 장려 운동의 일환으로 가나다 상점을 개업했고, 조선교육회 창립 이사로 참여하는 등 교육 분야에도 힘썼다. 1924년부터 3년간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역임하기도 했다.

1932년 당시 아산 등지에 50명의 농감을 둘 정도로 많은 토지를 소유했으며, 재동공립보통학교와 수원고등학교에 기부하는 등 교육 분야에 대한 기여도 이어갔다.

1944년 2월 20일 74세로 사망했다. 1937년 국방헌금을 기증하고,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여한 경력이 있다. 사촌 윤치호는 그를 이재에 밝은 수완가로 평가했다.

2. 1. 생애 초기

윤치소는 1871년 8월 25일 충청남도 아산에서 무관 출신 윤영렬과 청주 한씨 한진숙의 6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형제로는 형 윤치오, 동생 윤치성, 윤치병, 윤치명, 윤치영 등이 있었다.

윤치소의 집안은 조선 선조 때 형제 정승인 윤두수윤근수의 후손이었다. 고조부 윤발 때 가세가 몰락하여 관직이 없었으나, 증조부 윤득실은 통덕랑을 지냈다. 할아버지 윤취동 대에 한직인 지중추부사로 관직에 올랐고, 큰아버지 윤웅렬과 아버지 윤영렬이 무과에 급제하고 중앙 관직에 진출하면서 가세가 다시 일어섰다. 특히, 사촌 형 윤치호는 외무부, 학부 협판과 한성부판윤으로 출세하여 가문을 크게 일으켰다.

윤치소의 집안은 증조부 윤득실 대에 충청남도 천안으로 내려왔고, 할아버지 윤취동은 분가하여 아산군 둔포에 정착했다. 처가는 충청남도 아산의 부호로, 장인 이봉하는 대한제국 시절 중추원 의관을 지냈다.

그는 유년 시절 이강, 이종훈, 권동진 등과 함께 필운학당에서 공부했다. 이후 관직에 올라 사헌부 감찰이 되었다. 할아버지 윤취동 대에 재산을 축적하여 유복한 유년기를 보냈으며, 청소년기에는 백부 윤웅렬, 부친 윤영렬, 사촌 형 윤치호 등이 조정에 진출하여 가세를 일으켰다. 성인이 될 무렵 그의 집은 200칸이나 될 정도로 부유했지만, 그는 동전 한 닢도 낭비하지 않을 정도로 검소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 아산 출신 조중양 등과 함께 300명 정도의 의병[1]을 조직하고 창의통문을 천안, 아산, 온양 지역에 돌렸다.[2] 그는 충청 의병 대장으로 추대되어 1894년 10월부터 11월까지 백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천안, 아산 일대에서 동학군 토벌에 참여했다. 이 과정에서 조선에 들어온 청나라 군대의 참외 약탈을 주변에 알려 제지하기도 했다. 1894년 10월 21일 순무영 본진 별군관(別軍官)에 제수되었고, 11월 1일에는 순무영 선봉 별군관으로 의병소 통령(義兵所統領)을 겸하여 38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예산과 신창 지역의 동학군 토벌에 참여했다. 1896년 6월에는 휘릉 참봉이 되었다.

사촌 형 윤치호는 1894년 2월 상해 YMCA에서 "평화적 또는 폭력적 내부 혁명만이 조선의 유일한 구제책이다."라고 연설했고, 동년 5월 동학 농민 봉기가 삼남 지방에 퍼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악으로 물들고 피로 얼룩진 정부를 때려 부수는 일이라면 어떠한 일도 환영하고 또 환영한다."라고 주장했다.[3] 윤치호의 동학 농민 혁명 지지 선언에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이내 평정심을 찾고 동학군 토벌을 계속했다.

전주 이씨광평대군의 후손인 이봉하의 외동딸 이범숙과 결혼하여 16남매를 두었고, 그중 6남 3녀가 장성할 때까지 살아남았다.

2. 1. 1. 출생과 가계

윤치소는 1871년 8월 25일 충청남도 아산에서 무관 출신 윤영렬과 청주 한씨 한진숙의 6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형제로는 형 윤치오, 동생 윤치성, 윤치병, 윤치명, 윤치영과 그 외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동생 한 명, 그리고 윤활란, 윤노덕 등 두 명의 누이가 있었다. 이복 형제로는 이름 미상의 이복동생 1명과 윤치정, 윤치일이 있었고, 이복 여동생으로는 윤인희, 윤길희, 그리고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한 명이 있었다.

윤치소는 조선 선조 때 형제 정승인 윤두수윤근수의 후손으로, 가계는 다음과 같다.

직계이름생몰년도관직
8대조윤흔? ~ ?자헌대부 중추부지사, 사후 의정부좌의정 추증
7대조윤취지? ~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6대조윤채(尹埰)1603년 ~ 1671년세자익위사 사어
5대조윤세겸(尹世謙)1668년 ~ 1748년가선대부 동지돈녕부사
고조부윤발(尹潑)1728년 ~ 1798년관직 없음
증조부윤득실(尹得實)1768년 ~ 1823년통덕랑
조부윤취동(尹㝡東)? ~ ?지중추부사



고조부 윤발 때 가세가 몰락하여 관직을 지내지 못했다. 증조부 윤득실은 통덕랑에 이르렀지만 술을 좋아하여 5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 뒤 가세가 몰락하여 경기도 수원에 거주하였으며, 윤득실의 셋째 아들인 할아버지 윤취동 대에 한직인 지중추부사로 관직에 올랐다. 증조부 윤득실 대에 충청남도 천안으로 내려왔고, 윤득실의 셋째 아들인 할아버지 윤취동은 분가하여 충청남도 아산군 둔포에 정착했다. 큰아버지 윤웅렬이 무과에 급제하고 아버지 윤영렬이 중앙 관직에 진출하였으며, 사촌 형 윤치호가 외무부, 학부 협판과 한성부판윤으로 출세하여 가세를 일으켰다.

처가는 충청남도 아산의 부호로, 처조부는 이인수(李寅琇)이고, 장인 이봉하는 대한제국 시절 중추원 의관에 선발되기도 했다.

2. 1. 2. 초기 활동

그는 유년기에 이강, 이종훈, 권동진 등과 필운학당에서 수학하였다. 그 뒤 관직에 올라 사헌부 감찰이 되었다.

할아버지 윤취동 대에 재산을 축적하여 유복한 유년기를 보냈다. 청소년기 무렵 백부 윤웅렬, 부친 윤영렬, 사촌 형 윤치호 등이 조정에 출사하여 가세를 일으켰다. 그가 성인이 될 무렵 그의 집은 200칸이나 될 정도로 부자였으나, 그는 동전 한닢도 낭비하지 않을 만큼 절약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 아산 출신 조중양(趙重錫) 등과 함께 300명 정도를 모아서 의병[1]을 조직하고 창의통문을 천안, 아산, 온양 지역에 돌리고 천안 지역에서 활동을 벌였다.[2] 이때 그는 조선에 들어온 청나라 군대의 참외 약탈 등을 주변에 알려 제지하기도 했다. 그는 충청 의병 대장으로 추대되고, 1894년 10월 ~ 11월 당시 백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천안, 아산 일대에서 동학군 토벌에 출정했다. 1894년 10월 21일 순무영 본진 별군관(別軍官)에 제수되고, 1894년 11월 1일에는 순무영 선봉 별군관으로 의병소 통령(義兵所統領)을 겸하여 천안을 출발, 38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예산과 신창 지역의 동학군 토벌에 참여했다. 1896년 6월 휘릉 참봉(徽陵參奉)이 되었다.

윤치호1894년 2월, 상해 YMCA의 조선 문제에 관한 연설에서 "평화적 또는 폭력적 내부 혁명만이 조선의 유일한 구제책이다."라고 주장했고, 동년 5월 동학당의 봉기가 삼남 지방에 만연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악으로 물들고 피로 얼룩진 정부를 때려 부수는 일이라면 어떠한 일도 환영하고 또 환영한다."라고 주장했다.[3] 윤치호의 동학 농민 혁명 지지 선언이 알려지자 처음에 이들은 당황해하였으나, 이내 평정심을 찾고 동비 토벌을 계속한다.

전주 이씨광평대군의 후손인 이봉하(李鳳夏)의 무남독녀 딸 이범숙과 결혼하여 16남매를 두고, 그중 6남 3녀가 장성할 때까지 살아남았다.

2. 2. 대한제국 시절

1898년 사촌 형인 윤치호 등과 함께 경성신문을 창간하고[4] 고정 필진으로 활동했으나, 경영난으로 이듬해 9월 남궁 억에게 인수되었다. 1901년 1월 중추원 의관에 임명되었으나 9월 6일 사퇴하였다. 1905년 을사 보호 조약으로 국권이 피탈되자 관직에서 물러나 기업 활동에 전념하였다. 1905년 7월 광장주식회사 감사, 1909년 대한협회 회원, 대한천일은행 감사, 1910년 1월 광업주식회사 사주, 1910년 3월 국민경제회 이사 등을 역임했다. 1907년 6월 태극학회 창립에 참여하여 찬조금 모집 발기인으로 활동하고, 1907년 11월 5일 아산의 유기영 등과 학교 설립 청원서를 제출하는 등 사회 활동도 활발히 전개하였다.

2. 2. 1. 관직 사퇴와 기업 활동

1898년 사촌 형인 윤치호 등과 함께 경성신문을 창간하고[4] 고정 필진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경영난으로 이듬해 9월 남궁 억이 인수하게 된다. 이때 기업활동에 참여한 경험으로 후일 을사조약 이후 기업 활동에 전념한다. 1901년 1월 중추원 의관에 임명되었으나 9월 6일 사퇴하였다.

이후 정3품에 제수되었으나 1905년 을사 보호 조약으로 국권이 피탈되자 관직을 사퇴한다. 본래 할아버지 윤취동의 유산으로 아산과 천안의 만석꾼이었다. 1905년부터는 기업 활동에도 이사, 주주 등으로 참여하고, 토지 매입과 성실성, 근면성 등으로 토지를 늘려 대지주가 되었다. 윤치소는 단독으로 50만을 투자하여 경성방직회사를 만들어 광목을 생산하였다.[6]

2. 2. 2. 을사보호조약 이후

1905년 (광무 8년) 을사조약 체결로 국권이 피탈되자 관직에서 물러났다. 같은 해 7월 광장주식회사 감사로 취임했다.[6] 1907년 6월 태극학회 창립에 참여하여 찬조금 모집 발기인으로 활동하고, 학회 창설을 주도했다. 같은 해 11월 5일에는 아산의 유기영 등과 함께 백성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학교 설립 청원서를 제출했다.

1909년 대한협회 회원으로 가입했고, 대한천일은행 감사로 선임되었다. 1910년 1월에는 사재를 출연하여 광업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사주가 되었다. 같은 해 3월 국민경제회 이사로 위촉되었다.

2. 3. 일제 강점기 이후

한일 강제 병합 이후 윤치소는 관직에서 물러나 사업가와 사회 운동가로 활동했다. 국산품 장려와 민족 자강운동의 일환으로 가나다 상점을 개업하여, 을사조약에 항의하여 자결한 민영환을 기리는 도자기 등을 판매했다.[5] 1911년 5월 조선상업은행 감사, 1915년 주식회사 광업(廣業) 중역,[8] 1912년 12월 광업주식회사 전무취체역을 역임했다. 동양서원과 동양서원출판사를 운영하다 1913년 2월 매각하고 양화점인 혁신상점을 인수하였다.[4]

1920년 6월 이상재, 유진태 등과 조선교육회를 설립하고 창립 이사가 되었으며,[4][9] 민립대학 설립운동에도 참여했다.[10] 1924년부터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3년간 역임했다.[12]

1932년 윤치소는 아산 등지에 50명의 농감을 둘 정도로 많은 토지를 소유했다.[14] 재동공립보통학교를 15년간 후원하고,[15] 수원고등학교에 기탁금을 기부하는 등 교육 분야에도 기여했다.

1944년 2월 20일 74세로 사망했다.[16] 1937년 국방헌금을 기증하고,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사촌 윤치호는 그를 이재에 밝은 수완가로 평가했다. 1907년 건립한 '''윤보선 생가'''는 1984년 12월 24일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었다.[17]

2. 3. 1. 한일 강제 병합 직후

한일 강제 병합 이후 윤치소는 관직에서 물러나 사업가로 활동했다. 청년지식교환회를 결성하고 매주 한 번씩 정기적인 모임을 가졌다.[5]

윤치영의 증언에 따르면, 윤치소는 국산품 장려와 민족 자강운동의 하나로 잡화상회인 가나다 상점을 개업하였다.[5] 가나다 상점은 물밀 듯 들어오는 일본 상품에 맞서는 국산품을 생산, 판매하였다.[5]

가나다 상점에서 판매하던 제품 중에는 을사조약에 항의하여 자결한 민영환의 충절을 기리는 뜻에서 도자기에 대나무를 그려 구운 분원자기(粉院磁器) 죽절필통(竹節筆筒)이 있다.[5] 윤치영의 증언에 따르면, 이 도자기는 경기도 광주의 분원요에서 개발한 상품으로, 민영환의 사진과 그의 방에서 자생한 혈죽을 그려 넣었다.[6]

이후 윤치소는 각지에서 투자자를 모았다. 가나다 상점은 윤치소가 주동이 되고 유명 지사들이 공동투자한 판매조직이며, 유지들이 매일 한 사람씩 일일 점원을 자원하여 말총모자, 무명두루마기, 미투리 등을 걸친 편안한 차림으로 나와서 상점을 지키며 물건을 팔았다 한다.[6] 판매 상품은 토산품, 서점과 학용품, 수건 등 각종 생활용품과 윤치성이 조선 피혁회사에서 개발한 가벼운 단화 구두도 포함되었다.[6]

1911년 5월 윤치소는 조선상업은행 감사에 취임하였고, 동양서원(東洋書院)과 혁신점(革新店)을 경영하면서 분원자기주식회사 감사를 지냈다.[7] 1915년 주식회사 광업(廣業)의 중역이 되었다.[8]

2. 3. 2. 기업, 사회 활동

1912년 12월 광업주식회사 전무취체역이 되었다.[4] 같은 해 12월 동양서원과 동양서원출판사를 운영하다가 1913년 2월 매각하고 양화점인 혁신상점을 인수하여 운영하였다. 1920년 2월 경성고등학교야구제회 이사에 위촉되었다.

1920년 6월 이상재, 유진태 등과 조선교육회 설립을 주도하여 창립 이사가 되었으며,[4][9] 1910년 11월 15일에 개교한 경성부 중부 돈화동의 사립 정경학교(貞慶學校) 재단 이사로 참여하여 주기적으로 기탁금을 기부, 후원했다.

그 밖에도 안동교회 장로로도 활동했다. 1920년대 초에는 민립대학 설립운동에 참여하여 이상재, 한규설 등과 함께 민립대학 설립운동 발기인의 한 사람이 되었다.[10] 1920년 12월 경성부 학교평의회 위원에 위촉됐다.

1921년 3월 30일 경성부의 고학생 후원회에 백미 2표를 기탁하였다.[11]

1924년 4월부터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3년간 역임하였다.[12] 1926년 8월 20일 노량진의 한강 선상에서 열린 청구구락부의 비밀회의에서 신동지 후보로 추천되기도 했다.[13]

1932년 2월 21일 당시 윤치소가 소유한 아산 등의 땅에는 농감이 50명이 되었다고 한다.[14] 이들 농감은 오작과 생산량을 감독했다.

그는 경성의 재동공립보통학교를 15년간 후원하고 기탁금을 기부했다. 1935년 3월 21일 재동공립보통학교장이 후원자 3인을 표창할 때 표창장을 받았다.[15] 1934년 11월 6일에는 수원고등학교에 850JPY의 기탁금을 기부하였다.

2. 3. 3. 사망

1944년 2월 20일에 7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16] 1937년 8월에는 쌀 120가마에 해당하는 2000JPY을 일제에 국방헌금으로 기증했고, 1941년 9월에는 조선임전보국단 경성지역 발기인 명단에 올랐다.

2. 3. 4. 사후

사촌 윤치호에 의하면 그는 이재에 밝은 수완가였다. 윤치호는 삼촌 윤영렬이 거지가 되지 않은 것이 그의 공적이라는 평을 남겼다.

1907년 그가 건립한 '''윤보선 생가'''는 1984년 12월 24일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었다.[17]

3. 역사학자 이병도 가문과의 관계

두계 이병도는 윤치영의 처남인 동시에 윤치소의 사돈으로, 이중 사돈관계를 형성했다.

윤치소의 넷째 딸 윤계경(1916년 2월 13일 ~ 2004년 6월 29일)은 이병도의 조카 이재영(李宰寧, 1913년 7월 22일 ~ 1997년 3월 9일)과 결혼했다.[18] 이재영은 이병도의 형 이병묵(李炳默)의 아들이자, 수군절도사 이봉구(李鳳九)의 손자이다.[18]

윤치소의 동생 동산 윤치영은 이병도의 여동생 이병영(1900년 ~ 1920년)과 결혼했다.

이병도, 이병묵은 윤치소의 동생 윤치영의 처남인 동시에 윤치영의 형 윤치소의 사돈이었다. 또한 이병도, 이병묵의 6촌 형 이병림은 윤치소, 윤치영의 매제, 매형이 된다. 윤치소의 여동생이자 윤치영의 둘째 누나인 윤정숙(尹貞淑)은 이병도, 이병묵의 6촌 형 이병림(李丙琳)과 결혼했다. 윤치오의 아들 윤승선이병도의 6촌 여동생 이을남과 결혼했다.

4. 일화

윤치소는 절약 정신이 강했는데, 자녀들이 휴지 두 장을 한꺼번에 쓰는 것을 보면 불호령을 내렸다고 한다.[29]

그는 신앙심이 깊었다. 일요일 아침이면 일찍 식사를 마치고 온 가족을 재촉하여 예배당에 갔다. 그는 맨 앞자리에 앉아 교인이 빠졌는지 확인하곤 했다고 한다.[29]

참조

[1] 문서 동학농민운동 토벌군
[2] 서적 1894년 농민전쟁연구 4 역사비평사 1995
[3] 서적 개화기의 윤치호 연구 한길사 1985
[4] 서적 윤치호 일기 - 한 지식인의 내면세계를 통해 본 식민지 시기 역사비평사 2002
[5] 서적 윤치영의 20세기:동산회고록 삼성출판사 1991
[6] 서적 윤치영의 20세기:동산회고록 삼성출판사 1991
[7] 서적 실록 친일파 돌베개 1996
[8] 서적 제국과 상인 역사비평사 2008
[9] 웹사이트 http://1013.newsk.co[...]
[10] 서적 한국사 이야기 20:우리 힘으로 나라를 찾겠다 한길사 2006
[11] 뉴스 "苦學生 갈톱會 同情" 동아일보 1921-04-05
[12] 서적 친일파99인 돌베개 1993
[13] 서적 우남 이승만 연구 역사비평사 2006
[14] 뉴스 "牙山 尹致昭氏 農監會" 동아일보 1932-02-21
[15] 뉴스 "齋洞公普後援 三功勞者表彰" 동아일보 1935-03-21
[16] 문서 종친회장
[17] 웹사이트 전통문화 문화재 정보제공 씨피앤(CPN) 문화재 방송국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http://www.icpn.co.k[...]
[18] 서적 윤치호 일기 역사비평사 2002-05-15
[19] 서적 윤치영의 20세기:동산회고록 삼성출판사 1991
[20] 문서 윤치영은 그의 회고록에서 다섯째 형님과 12년 차이라고 하였다.
[21] 서적 윤치호 일기 (1916-1943) 역사비평사 2001
[22] 뉴스 남흥우(고려대 명예교수)씨 상배 외 http://www.kihoilbo.[...] 기호일보 2007-03-27
[23] 문서 이준용의 첩 전순혁 소생이다.
[24] 서적 윤치호 일기:1916-1943 역사비평사 2001
[25] 웹사이트 안동교회 90년사 http://www.andong-ch[...]
[26] 문서 6남 윤형선의 첫 번째 부인
[27] 문서 6남 윤형선의 두 번째 부인
[28] 문서 셋째 사위이면서 동시에 동생 윤치영의 첫 번째 부인 이병영의 친정조카
[29] 웹사이트 윤치소 장로 회고록 http://skysunshine.p[...]
[30] 서적 역사비평:1992 여름호 역사비평사 2007
[31] 서적 윤치호 일기:1916-1943 역사비평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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