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용 (188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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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규용(1888년)은 대한제국 시기 왕족의 근친으로,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인물이다. 그는 1905년 목릉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곧 의원면관했으며, 1909년 대한흥학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기금을 기탁했다. 1911년 남작으로 순헌황귀비 상사 때 종척 집사로 참여했고, 고종 국장 때에도 종척 집사로 참여했다. 보성전문학교 재단 평의원과 이사를 역임했으며, 1927년 파산 신청을 하기도 했다. 1928년에는 집을 매각하고, 함경북도 함흥군 서퇴조면장을 지냈다. 1936년 삼남 지방 수재민을 돕기 위해 조선일보사에 위문품을 기탁했으며, 1945년 구황실관리위원회를 조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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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이규용은 1925년 보성전문학교 재단 평의원 및 이사로 활동했다. 1928년에는 동일은행 전무이사 한상룡에게 자신의 집을 매각하였다. 이 집은 훗날 가회동 산업은행관리가, 가회동 이규용 가옥, 또는 가회동 한씨 가옥 등으로 불렸으며, 해방 후 서울시 민속자료 14호로 지정되었다. 1933년 함경북도 함흥군 서퇴조면장을 역임했다. 이후의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1945년 8월 16일, 그는 형 이달용, 윤홍섭, 김익동 등과 함께 황실 종친 주도로 구황실관리위원회를 조직했으나, 11월 8일 해산하였다.

2.1. 가계와 초기 활동

아버지는 완순군 이재완이고, 어머니는 판서 서상조의 딸 대구 서씨이다. 이달용의 동생이다. 양주군 와공면 월곡(현, 남양주시 와부면 월문리) 출신으로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 178번지로 이주하여 생활하였다.

그의 가계는 본래 조선 선조의 아홉째 서자 경창군 이주의 후손으로, 왕족 대우는 그의 8대조 서천군 이황의 대에 끝났다. 그러나 경창군 이주의 8대손 음서로 현령을 지내고 증직으로 좌찬성추증된 이신응의 아들인 그의 아버지 이재완이 흥완군 이정응의 양자가 되었다. 흥완군의 동생 흥선군 이하응의 차남 명복이 고종으로 즉위하면서 그도 왕실의 가까운 근친이 되었다.

1905년(광무 8년) 8월 17일 목릉참봉에 임명되었다. 9월 15일 다시 목릉참봉에 재임명되었으나 9월 16일 의원면관하였다. 1909년에는 대한흥학회 회원으로 활동했으며, 그해 4월 20일 40전을 기탁하였다.

2.2. 일제강점기 활동

1909년 대한흥학회 회원으로 활동했으며, 그해 4월 20일 40전을 기탁하였다. 1911년 7월 20일 남작으로 순헌황귀비의 상사 때 종척 집사(宗戚執事)로 참여하였다.

1919년 1월부터 고종의 국장 기간 중 고종태황제빈전혼전주감(高宗太皇帝殯殿魂殿主監)의 낭청으로 참여하였고, 1월 22일에는 고종의 국상 때 종척 집사(宗戚執事)로 참여하였다.

1926년 4월 26일 순종의 국상 때 종척 집사(宗戚執事)로 참여하였고, 5월 10일에는 순명효황후 민씨의 천릉시종척집사(遷陵時宗戚執事)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1927년 2월 27일 경성지방법원에 파산 신청을 하였는데, 일본인 고리대금업자 도변경조로부터 채권 5000JPY, 도염동 9번지 조중면 등이 차압을 걸어와 파산신청을 했다.

1936년 삼남 지방에 수해가 나자 조선일보사에 수재민 위문품 7개 품목을 기탁하였다.

3.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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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이름출생 - 사망
아버지완순군 이재완(李載完)1855년 음력 12월 5일 - 1922년 8월 11일
어머니대구 서씨(徐氏)? - 1923년
이달용(李達鎔)1883년 - 1948년
부인풍산 홍씨? - ?
이경수(李慶洙)1893년 - 1968년 1월 18일

이규용의 첩 이경수(李慶洙)는 1924년 원불교에 귀의했으며 법명은 이동진화(李東震華), 법호는 육타원(六陀圓)이다.

4. 친척 관계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위원부와 구미위원부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이관용은 그의 숙부 이재곤의 셋째 아들이었다. 황족인 이관용은 그의 양가(養家)로 6촌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