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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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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상룡은 이완용, 이윤용의 외삼촌이며 한창수와 친척 관계인 친일파 집안 출신으로, 일제강점기 한성은행 총무, 두취를 역임하며 친일 경제 활동을 했다. 동양척식주식회사 설립, 대정실업친목회 활동 등 친일 단체에 참여했으며, 데라우치 마사타케, 이토 히로부미 등 일본인 현창 사업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중추원 참의, 중추원 고문, 칙선 일본 귀족원 의원을 지냈으며, 친일 행적으로 인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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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룡
기본 정보
씨명한상룡
한자韓相龍
로마자 표기Han Sang-ryong
출생일1880년 10월 16일
출생지한성부 북서 재동 (현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사망일1947년 10월 30일
직업관료, 실업가, 귀족원 의원
배우자이룡향
자녀한성희, 한효희
부친한관수
작위종4위
훈장[[File:JPN Zuiho-sho 2Class BAR.svg|35px]] 훈2등 서보장
경력
관직탁지부 주사
기호학교 교사
대한제국 중추원 의관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귀족원 의원
기업한성은행 감사
조선식산은행 이사
경성전기 감사
경성방직 감사
삼척탄광 감사
조선흥업 사장
대동광업 사장
기타
관련 기관한국은행
거주지백인제 가옥
관련 장소백악 구간

2. 생애

한상룡은 이완용이윤용이 외삼촌이고 한창수와 친척 관계인, 유력한 친일파 집안 출신으로, 한관수(韓觀洙)의 아들로 서울 재동에서 태어났다.[8] 관립 영어학교를 졸업하고 1898년 일본 제국으로 유학하여 일본 고위 인사들과 친분을 쌓았다.

1903년 일본이 친일 왕족 이재완을 내세워 설립한 한성은행 총무로 부임하여 실질적인 경영을 맡았다. 1923년 이윤용의 뒤를 이어 한성은행 두취로 취임했고, 식민지 경제 체제 강화에 앞장섰다. 1908년 동양척식주식회사 설립위원, 대정실업친목회 초대 평의장을 지냈고, 데라우치 마사타케 동상 건립, 이토 히로부미 기념회, 사이토 마코토 기념회 등 일본인 찬양 사업에 적극 참여했다. 1919년 창씨개명을 건의할 정도로 친일 행적이 뚜렷했다.

1926년 2월 18일 이완용 후작 장례식에서 영결식장 응접위원, 계장으로 참여했다.[9]

1930년대에는 경성국방의회, 조선국방비행기헌납회, 애국금차회, 국민총력조선연맹, 경성부 육군지원자후원회, 조선호국신사봉찬회, 반도무운현창회, 조선임전보국단 등 친일 단체에서 활동하며 전쟁에 협력했다. 관동군 사무촉탁을 맡아 강연과 기고 활동도 활발히 했다.

일본으로부터 훈장과 표창을 받았고, 1928년 중추원 참의, 1941년 중추원 고문, 1945년 칙선 일본 귀족원 의원에 임명되었다. 1935년 조선공로자명감에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수록되었다.[10][11] 부인 이용경도 애국금차회에 참여하여 훈장을 받았다.

2. 1. 초기 생애 및 일본 유학

이완용이윤용이 그의 외삼촌이며 조선귀족 한창수와도 친척 관계인, 유력한 친일파 집안 출신으로 한관수(韓觀洙)의 아들로 서울특별시 재동에서 태어났다.[8] 1896년 친척이자 관립 외국어학교장인 한창수의 추천으로 관립 영어학교에 입학했다. 처음에는 한성사범학교 진학을 희망했지만, 한창수로부터 근대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고 취업률이 좋은 영어학교 입학을 권유받았다. 관립 영어학교를 졸업한 뒤 1898년 일본 제국으로 유학했고, 이때부터 일본 제국의 고위 인사들과 친분을 맺을 수 있었다.

1898년 미국 유학을 계획했으나, 자금 부족으로 유학지를 일본으로 변경했다. 외가 친척인 이윤용의 추천으로 일본 육군사관학교 예비학교인 성성학교에 편입하였고, 입학 전에는 우쓰노미야 다로(宇都宮太郎) 대좌의 감독 하에 사숙에서 수학했다. 우쓰노미야 등 참모본부 소속 군인들의 영향으로 군인을 지망하게 되었다. 또한, 유학 중에는 박영효, 유길준 등 개화파 망명 그룹과 교류하며 문명개화론에 대한 사상적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1900년 질병을 이유로 퇴학하고 귀국했다. 귀국 후에는 우쓰노미야 다로의 친구이자 고종의 신임이 두터운 주한 일본 공사관 부무관 야쓰 노리타케(野津鎮武) 소좌로부터 지도를 받았고, 일본 공사관과 일본군에 이용당하게 되었다.

2. 2. 친일 경제 활동

이완용이윤용이 그의 외삼촌이며 조선귀족 한창수와도 친척 관계인, 유력한 친일파 집안 출신으로 한관수(韓觀洙)의 아들로 서울 재동에서 태어났다.[8] 관립 영어학교를 졸업한 뒤 1898년 일본 제국으로 유학했고, 이때부터 일본 제국의 고위 인사들과 친분을 맺을 수 있었다.

1903년 일본 제국이 친일 왕족인 고종의 종형 이재완을 내세워 설립한 한성은행의 총무로 부임하여 실질적인 경영을 맡은 것을 시작으로, 일제 강점기 동안 철저한 친일파로서 활동했다. 그는 일본 제국의 신임을 얻어 1923년 이윤용의 뒤를 이어 한성은행 두취로 취임했고, 이러한 경력을 바탕으로 식민지 경제 체제 강화 부문에서 주로 활동하였다. 1908년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설립될 때에는 설립위원으로 참가하기도 했는데, 이런 과정을 통해 조선에서 손꼽히는 거부가 된 한상룡은 친일 유력자 모임인 대정실업친목회 초대 평의장을 지내며 깊숙이 관여하기도 했으며, 일본인을 찬양 기념하는 각종 사업에서 두드러진 행적을 보였다.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동상을 세우고 이토 히로부미 기념회와 사이토 마코토 기념회에 발기인으로 참가하는 등 숱한 일본인의 현창 사업마다 빠지지 않았다. 1919년에 이미 창씨개명을 허가해 달라는 건의서를 제출했을 정도로 선구적인 모습을 보였다.

1926년 2월 18일 이완용후작 장례식 장의역원을 정할 때, 영결식장 응접위원, 계장으로 진행에 참여했다.[9]

1930년대부터는 전시 체제를 맞아 각종 친일 단체에서 활동하면서 자본가로서 모은 돈을 전쟁에 희사하기도 했다. 경성국방의회, 조선국방비행기헌납회, 애국금차회, 국민총력조선연맹, 경성부 육군지원자후원회, 조선호국신사봉찬회, 반도무운현창회, 조선임전보국단 등 많은 친일 단체에 참여했다. 이밖에도 관동군 사령부의 사무촉탁을 맡았고, 꾸준한 강연과 기고로 열성적인 활동을 벌였다.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에 병합되자, 한성은행 전무취체역에 취임하여 경성부협의회 의원, 조선물산공진회 평의원 등을 겸임하였다.[4] 1916년에는 데라우치 마사타케 조선총독의 권유로 일제강점기의 대만을 시찰하고, 대만의 발전을 목격하면서 조선의 발전이 뒤처져 있음을 인식하였다. 같은 해에 동양척식주식회사 고문, 친일단체인 대정친목회 평의장을, 1917년에는 불교옹호회 평의원을 겸임하였다.[4] 1918년에는 조선식산은행 설립위원[4], 1919년에는 금강산전기철도 감사에 임명되었다.[5]

1920년 무렵부터 한상룡은 조선인 실업가와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 실업가 사이에서 조선총독부의 가교 역할을 맡게 되어 조선에서의 회사 설립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조선 재계의 실력자로 된 한상룡은 같은 해 3월, 조선인 실업가들의 친목 단체인 "조선실업구락부"를 설립하고 회장에 취임했다.[5] 총회의 월례회에서는 조선인 실업가와 조선총독부 관료들이 교류하며 비공식적인 정책 결정의 장이 되는 등 총독부의 통제 하에 있었다. 1921년에는 한상룡이 주도하여 조선생명보험을 설립하고 부사장에 취임했다.[5] 조선인이 설립한 최초의 보험회사가 되었다.

1918년 데라우치 마사타케 조선총독의 명령에 따라 한성은행은 일본 본토에 지점을 설치했지만, 1923년 발생한 관동대지진의 영향을 받아 도쿄 지점이 경영난에 빠졌고, 1926년에는 정리 계획이 세워질 정도가 되었다. 이러한 위기 상황 속에서 한상룡이 은행장에 취임했지만, 1927년에 발생한 쇼와 금융공황의 영향으로 정리 계획이 중단되고 조선총독부가 직접 개입하게 되었다. 총독부는 자본금 반감 및 일본 본토 지점 폐쇄 등의 은행 정리안을 작성하는 동시에 한상룡의 은행장 사임을 압박했다.

1929년 총독부에 의해 「조선신탁업령」이 공포되자, 신탁회사를 설립하여 재계 중앙으로의 복귀를 노리게 된다. 초기에는 민간기업으로서의 설립을 계획했지만, 금융계의 반대로 반관반민(半官半民)이 되었으나, 우가키 가즈시게 총독의 지원으로 보조금이 지급되었다. 1932년에 조선신탁이 발족했지만, 금융계의 반발로 사장에는 취임하지 않고 이사회장에 취임했다. 이 사건은 한상룡이 조선 금융계에서 몰락하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2. 3. 친일 단체 활동 및 일제 협력

한상룡은 일제 강점기 동안 철저한 친일 행위를 한 인물이다. 1908년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설립될 때 설립위원으로 참가했고, 친일 유력자 모임인 대정실업친목회 초대 평의장을 지냈다.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동상을 세우고 이토 히로부미 기념회와 사이토 마코토 기념회에 발기인으로 참가하는 등 일본인 현창 사업에 적극 참여했다.[8] 1919년에는 창씨개명을 허가해 달라는 건의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1926년 2월 18일 이완용 후작 장례식에서 영결식장 응접위원, 계장으로 진행에 참여했다.[9]

1930년대부터는 전시 체제를 맞아 각종 친일 단체에서 활동하면서 자본가로서 모은 돈을 전쟁에 희사했다. 경성국방의회, 조선국방비행기헌납회, 애국금차회, 국민총력조선연맹, 경성부 육군지원자후원회, 조선호국신사봉찬회, 반도무운현창회, 조선임전보국단 등 많은 친일 단체에 참여했다. 관동군 사령부의 사무촉탁을 맡았고, 꾸준한 강연과 기고 활동도 전개했다.

이러한 공로로 일본 제국으로부터 많은 훈장과 표창을 받았고, 1928년 중추원 참의, 1941년 중추원 고문, 1945년 칙선 일본 귀족원 의원에 임명되었다. 1935년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는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수록되었다.[10][11] 부인 이용경도 애국금차회에 참여하는 등 일제에 협력해 훈장을 받았다.

1934년 조선국방비행기헌납회 고문을 겸임했고,[4]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관동군 고문에 임명되었으며,[4] 조선군(일본군)에 국방헌금을 했다.[4] 1938년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이사 겸 국민정신총동원경기도연맹 참여에 임명되었다.[4] 1943년 11월 국민총력조선연맹 사무총장에 임명되었고,[4] 1945년 4월 3일 귀족원 의원에 칙선되었다.[6] 같은 해 7월에는 조선국민의용대 고문에 취임했다.[4]

2. 4. 중추원 참의 및 귀족원 의원

한상룡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 제국으로부터 많은 훈장과 표창을 받았으며, 1928년 중추원 참의로 임명되었다.[8] 1941년에는 중추원 고문으로 승진했고, 1945년에는 칙선 일본 귀족원 의원으로 임명되었다.[10][11] 1935년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는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수록되어 있다.[10][11]

1927년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에 임명되었고,[4] 1937년 중일 전쟁 발발 후 관동군 고문에 임명되었다.[4] 이후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등을 겸임했다.[4] 1945년 4월 3일에는 귀족원 의원에 칙선되었다.[6] 같은 해 7월에는 조선국민의용대 고문에 취임했다.[4] 1946년 7월 4일, 자격 상실로 귀족원 의원을 사퇴했다.[7]

3. 사후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포함되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4] 2004년 한국에서 제정된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었다.[4]

4. 평가

제25대·제28대 내각총리대신 와카쓰키 레이지로는 한상룡을 두고 "조선 재계의 축소판"이라 평하며 "한상룡을 이해하는 것은 곧 조선을 아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참조

[1] 웹사이트 議会制度七十年史. 第1 https://dl.ndl.go.jp[...] 1960-12
[2] 웹사이트 白麟済家屋 https://museum.seoul[...] 2022-05-31
[3] 웹사이트 ペガク(白岳)区間 https://seoulcitywal[...] 2022-05-31
[4] 백과사전 한상룡(韓相龍) http://encykorea.aks[...]
[5] 웹사이트 한상룡 ( 韓相龍 ) http://db.history.go[...]
[6] 서적 貴族院要覧(丙) 1946-12
[7] 서적 貴族院要覧(丙) 1946-12
[8] 서적 실록 친일파 돌베개 1991-02-01
[9] 뉴스 聖恩鴻大 故李侯爵邸에 御沙汰書御下賜 매일신보 1926-02-18
[10] 뉴스 ‘조선공로자명감’친일 조선인 3백53명 기록 - 현역 국회의원 2002년 발표한 친일명단 일치 상당수 http://www.ilyosisa.[...] 일요시사 2004-03-18
[11] 뉴스 3백53명 중 2백56명 명단 http://www.ilyosisa.[...] 일요시사 2004-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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