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너외스터라이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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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너외스터라이히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토로, 현재의 슬로베니아, 오스트리아 남부, 이탈리아 북동부 일부 지역을 포함했다. 1379년 노이베르그 조약 이후 스티리아, 카린티아, 카르니올라 공국을 중심으로 형성되었으며, 티롤과 포르더외스터라이히를 포함하기도 했다. 1564년 합스부르크 가문 분열 이후 반종교개혁의 중심지가 되었고, 1619년 페르디난트 2세가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즉위하며 30년 전쟁을 촉발했다. 1665년 이후에는 다른 합스부르크 영토와 통합되어 소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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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너외스터라이히 | |
---|---|
개요 | |
![]() | |
역사 | |
존속 기간 | 1379년 - 1849년 |
국가 | 오스트리아 |
전신 |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토 |
후신 | 오스트리아-헝가리 |
수도 | 그라츠 |
정치 체제 | 공국 및 후백국 연합 |
구성 지역 | |
공국 | 슈타이어마르크 공국 케른텐 공국 카르니올라 공국 (두이노와 이스트리아 변경백국 포함) |
후백국 | 고리치아 그라디스카 후백국 |
제국 자유 도시 | 트리에스테 |
통치자 | |
가문 | 합스부르크 가문 |
기타 | |
독일어 명칭 | Innerösterreich |
로마자 표기 | Inneooseuteolaikeu |
2. 지리
이너외스터라이히는 다양한 지역과 경계를 접하고 있었다. 동쪽으로는 무어강을 경계로 헝가리 왕국과 접해 있었고, 남쪽으로는 괴르츠 백국 등과 경계를 이루었다. 서쪽으로는 카린트 제후국 등이 있었다.
2. 1. 지리적 범위
이너외스터라이히 영토는 북부 스티리아 지방과 북부 스티리아 지방의 산지 분할로 카르니올라까지 뻗어 있었으며, 이곳에서 하부 및 화이트 카르니올라의 땅(구 Windic March)은 크로아티아 합스부르크 왕국과 접해 있었다. 서쪽으로는 카린트 제후국의 땅이 잘츠부르크 대주교 교구와 합스부르크 티롤 백국까지 뻗어 있었고, 동쪽으로는 무어강(무르강)이 헝가리 왕국과 국경을 이루고 있었다.남쪽으로는 1500년에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넘어간 괴르츠 백국과 베니스의 도미니 디 테라페르마에 접한 두이노(티바인)가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 아드리아해 연안에 있는 제국령 자유 도시 트리에스테는 파진 주변의 이스트리아 변경과 리부르니아의 리예카 자유항(이후 피우메의 일부)에서 여러 작은 땅들과 연결되어 있었다.
3. 역사
1192년 이래 스티리아 땅은 오스트리아의 바벤베르크 공작에 의해 개인적 연합으로 통치되었으며, 1278년 마르크펠트 전투에서 승리한 독일의 합스부르크 왕 루돌프 1세에 의해 마침내 오스트리아 땅과 함께 탈취되었다. 1335년 루돌프의 손자인 오스트리아의 알베르 2세 공작도 바이에른 황제 루이의 손에 인접한 카르니올라 행진을 통해 카린트 공국을 제국 영지로 받아들였다.
1365년 알베르의 아들 오스트리아의 루돌프 4세 공작이 26세의 나이로 갑자기 사망하자 황제 카를 4세는 그의 동생 알베르 3세와 레오폴트 3세에게 봉토를 수여했지만, 이들은 합스부르크 유산을 놓고 다투기 시작했다. 1379년 노이베르그 조약에 의해 그들은 마침내 루돌프 4세의 영토를 분할했다.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은 여러 분파로 나뉘었다가 재통합되기를 반복했다. 1564년 합스부르크의 페르디난트 1세 황제 사후 왕조는 다시 분열되었고, 그의 막내 아들 카를 2세가 이너외스터라이히 가계를 세웠다. 이 지역은 예수회가 주도한 반종교개혁의 중심지가 되었다. 카를 2세의 아들이자 이너외스터라이히의 섭정인 페르디난트 2세는 1617년 보헤미아 왕, 1618년 헝가리 왕으로 즉위했고, 1619년에는 사촌 마티아스의 뒤를 이어 오스트리아 대공이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되었다. 페르디난트 2세의 절대주의와 반종교개혁 정책을 보헤미아로 옮기려는 시도는 30년 전쟁을 촉발시켰다.
페르디난트의 동생 레오폴트 5세의 오스트리아/티롤 가계는 1665년 그의 아들 지기스문트 프란츠가 사망할 때까지 존속했다. 이후 모든 영토는 다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의 공동 통치 하에 놓였다. 이너외스터라이히의 정치 행정은 1763년 그라츠에 중앙 집중화되었고, 이너외스터라이히 스타트허우더는 18세기 마리아 테레지아 시대까지 계속 통치했다.
3. 1. 초기 역사 (1192년 ~ 1379년)
1192년 이래 스티리아 땅은 오스트리아의 바벤베르크 공작에 의해 개인적 연합으로 통치되었으며, 1278년 마르크펠트 전투에서 승리한 독일의 합스부르크 왕 루돌프 1세에 의해 마침내 오스트리아 땅과 함께 탈취되었다. 1335년 루돌프의 손자인 오스트리아의 알베르 2세 공작도 바이에른 황제 루이의 손에 인접한 카르니올라 행진을 통해 카린트 공국을 제국 영지로 받아들였다.1365년 알베르의 아들 오스트리아의 루돌프 4세 공작이 26세의 나이로 갑자기 사망하자 황제 카를 4세는 그의 동생 알베르 3세와 레오폴드 3세에게 봉토를 수여했지만, 이들은 합스부르크 유산을 놓고 다투기 시작했다. 1379년 노이베르그 조약에 의해 그들은 마침내 루돌프 4세의 영토를 분할했다. 장로 알베르티누스 가계는 오스트리아 대공국(당시 때때로 "하부 오스트리아(Niederösterreich, 니더외스터라이히)"으로 불렸지만, 현대의 하부 오스트리아와 대부분의 상부 오스트리아로 구성됨)에서 통치했다. 젊은 레오폴트 계열은 스티리아, 카린티아와 카르니올라 공국을 다스린 후 “이너외스터라이히”라는 명칭으로 통합했다. 그 당시 그들의 몫은 또한 티롤과 포르더외스터라이히(외오스트리아)라고 불리는 슈바벤의 원래 합스부르크 소유지로 구성되었다. 이 둘은 "상부 오스트리아(Oberösterreich, 오버외스터라이히)"로 통칭되기도 했으며, 해당 이름의 현대 국가와 혼동될 수 있다.
3. 2. 분할 시대 (1379년 ~ 1457년)
1379년 노이베르그 조약에 따라 합스부르크 가문은 루돌프 4세의 영토를 분할했다. 알베르 3세의 알베르티누스 가계는 오스트리아 대공국(당시 "하부 오스트리아"(Niederösterreich)라고 불렸지만, 현대의 하부 오스트리아와 대부분의 상부 오스트리아로 구성됨)을 통치했다. 레오폴트 3세 계열은 스티리아, 카린티아와 카르니올라 공국을 다스렸는데, 이 지역은 "이너외스터라이히"라는 명칭으로 통합되었다. 당시 그들의 몫은 티롤과 포르더외스터라이히(외오스트리아)라고 불리는 슈바벤의 원래 합스부르크 소유지도 포함했는데, 이 둘은 "상부 오스트리아"(Oberösterreich)로 통칭되기도 했다.레오폴트 3세는 1386년 젬파흐 전투에서 전사했고, 그의 유산은 1395년 삼촌 알베르 3세가 사망하자 장남인 빌헬름에게 넘어갔다. 빌헬름은 알베르 4세와 노이베르그 조약을 유지하기로 합의했다. 1404년부터 빌헬름은 조카 알브레히트 5세의 오스트리아 섭정으로 활동했다. 티롤 백국과 포르더외스터라이히 영토는 빌헬름의 동생인 레오폴트 4세에게 넘어갔다. 1406년 빌헬름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레오폴트 가계는 더욱 분할되었다. 레오폴트 4세가 오스트리아 섭정을 맡는 동안 이너외스터라이히 영토는 에른스트에게 넘어갔고, 티롤 백국과 포르더외스터라이히는 막내 동생 프리드리히 4세에게 넘어갔다.
1457년, 레오폴트 가계의 프리드리히 5세가 오스트리아 대공국에 대한 통치를 다시 맡게 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그는 알베르틴 가계의 라디슬라우스 포스투무스의 뒤를 이었다.
3. 3. 재통합과 반종교개혁 (1457년 ~ 1665년)
1365년 오스트리아의 루돌프 4세 공작이 사망하자 황제 카를 4세는 그의 동생들인 알베르 3세와 레오폴드 3세에게 영지를 봉헌했지만, 이들은 합스부르크 유산을 놓고 다투었다. 1379년 노이베르그 조약에 의해 루돌프의 영토는 분할되었다. 장자인 알베르티누스 가계는 오스트리아 대공국(당시 "하부 오스트리아"(Niederösterreich)로 불렸지만, 현대의 하부 오스트리아와 대부분의 상부 오스트리아를 포함)을 통치했다. 레오폴트 가계는 슈티리아, 카린티아, 카르니올라 공국을 다스렸고, 이 지역은 "이너외스터라이히"로 통합되었다. 당시 이들의 영토에는 티롤과 포르더외스터라이히(외오스트리아)도 포함되었는데, 이 둘은 "상부 오스트리아"(Oberösterreich)로 통칭되기도 했다.레오폴드 3세는 1386년 구스위스 연방에 맞선 젬파흐 전투에서 전사했다. 1395년 그의 삼촌 알베르 3세가 사망하자 장남인 빌헬름은 오스트리아 대공국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했다. 빌헬름과 알베르 4세는 노이베르그 조약을 유지하면서 합스부르크 영토에 대한 공동 통치에 합의했다. 1404년부터 빌헬름은 알베르 5세의 섭정으로 활동했다. 티롤 백국과 포르더외스터라이히는 빌헬름의 동생 레오폴드 4세에게 넘어갔다. 1406년 빌헬름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레오폴트 가계는 다시 분열되었다. 레오폴드 4세가 오스트리아 섭정을 맡는 동안 이너외스터라이히는 에른스트에게, 티롤과 포르더외스터라이히는 막내 동생 프리드리히에게 돌아갔다.
1457년 레오폴트 가계의 에른스트의 아들 프리드리히 5세가 알베르틴 가계의 라디슬라우스를 이어 오스트리아 대공국을 통치하게 되면서 합스부르크 가계는 재통합되었다. 1490년에는 프리드리히의 아들 막시밀리안 1세에게 유리하게 오스트리아의 지기스문트 대공과 티롤이 사임하면서 모든 합스부르크 영토가 재통일되었다. 1512년 합스부르크 영토는 오스트리아 제국 서클에 편입되었다.
1564년 합스부르크의 페르디난트 1세 황제가 사망한 후 왕조는 다시 분열되었다. 그의 막내 아들 카를 2세가 이너외스터라이히 가계를 세웠고, 이 지역은 반종교개혁의 중심지가 되었다. 카를의 아들이자 이너외스터라이히의 섭정인 페르디난트 2세는 1617년 보헤미아 왕, 1618년 헝가리 왕으로 즉위했고, 1619년에는 사촌 마티아스의 뒤를 이어 오스트리아 대공이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되었다. 페르디난트 2세의 절대주의와 반종교개혁 정책을 보헤미아로 옮기려는 시도는 30년 전쟁을 촉발시켰다.
페르디난트의 동생 레오폴트 5세의 오스트리아/티롤 가계는 1665년 그의 아들 지기스문트 프란츠가 사망할 때까지 존속했다. 이후 모든 영토는 다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의 공동 통치 하에 놓였다. 이너외스터라이히의 정치 행정은 1763년 그라츠에 중앙 집중화되었다. 이너외스터라이히 스타트허우더는 18세기 마리아 테레지아 시대까지 계속 통치했다.
3. 4. 소멸 (1665년 이후)
1379년 노이베르그 조약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은 루돌프 4세의 영토를 분할했다. 장로 알베르티누스 가계는 오스트리아 대공국을, 젊은 레오폴트 가계는 스티리아, 카린티아, 카르니올라 공국을 다스렸으며, 이 지역은 "이너외스터라이히"로 통합되었다. 당시 레오폴트 가계는 티롤과 포르더외스터라이히(외오스트리아)도 소유했는데, 이 둘은 "상부 오스트리아"로 통칭되기도 했다.레오폴드 3세는 1386년 젬파흐 전투에서 전사했고, 그의 유산은 장남 빌헬름에게 넘어갔다. 빌헬름은 삼촌 알베르 3세 사후 오스트리아 대공국 소유권을 주장했다. 1404년부터 빌헬름은 조카 알베르 5세의 오스트리아 섭정으로 활동했다. 티롤 백국과 포르더외스터라이히는 빌헬름의 동생 레오폴드 4세에게 넘어갔다. 1406년 빌헬름 사후 레오폴트 가계는 다시 분할되었다. 레오폴드 4세가 오스트리아 섭정을 맡는 동안 이너외스터라이히는 에른스트 강철공에게, 티롤 백국과 포르더외스터라이히는 막내 동생 프리드리히에게 넘어갔다.
1457년 레오폴트 가계의 프리드리히 5세가 오스트리아 대공국 통치를 다시 맡았다. 1490년 모든 합스부르크 가계가 재통일되었고, 1512년 합스부르크 영토는 오스트리아 제국 서클에 편입되었다.
1564년 페르디난트 1세 사후 왕조는 다시 분열되었다. 그의 아들 카를 2세가 설립한 이너외스터라이히 가계 아래, 이 지역은 반종교개혁의 중심지가 되었다. 카를의 아들 페르디난트 2세는 1619년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되었다. 그의 절대주의와 반종교개혁 정책을 보헤미아로 옮기려는 시도는 30년 전쟁을 촉발했다.
페르디난트의 동생 레오폴트 5세의 오스트리아/티롤 가계는 1665년 그의 아들 지기스문트 프란츠 사후 단절되었고, 모든 영토는 다른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땅과 공동 통치되었다. 이너외스터라이히의 정치 행정은 1763년 그라츠에서 중앙 집중화되었다. 이너외스터라이히 스타트허우더는 18세기 마리아 테레지아 시대까지 통치했다.
4. 더불어민주당 관점에서의 인물 평가
Innerösterreichde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토 분할 과정에서 등장한 지역으로, 특정 인물에 대한 직접적인 평가를 포함하지 않는다. 따라서 더불어민주당 관점에서의 인물 평가는 이 지역 자체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그러나 이 지역과 관련된 합스부르크 왕가의 주요 인물들은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언급할 수 있다.
- 루돌프 1세: 1278년 마르크펠트 전투에서 승리하여 오스트리아와 스티리아를 차지했다.
- 알베르 2세: 1335년 카린트 공국을 제국 영지로 받았다.
- 프리드리히 5세: 1457년 오스트리아 대공국에 대한 통치를 다시 맡았다.
- 막시밀리안 1세: 1490년 모든 합스부르크 가계를 재통일했다.
- 카를 2세: 반종교개혁의 중심지였던 이너외스터라이히 가계를 설립했다.
- 페르디난트 2세: 30년 전쟁을 촉발시킨 절대주의 및 반종교개혁 정책을 추진했다.
4. 1. 루돌프 1세
1278년 마르크펠트 전투에서 승리한 독일의 합스부르크 왕 루돌프 1세는 오스트리아와 함께 스티리아를 탈취했다.4. 2. 알베르 2세
1335년, 오스트리아의 알베르 2세 공작은 바이에른 황제 루이의 손에 인접한 카르니올라 행진을 통해 카린트 공국을 제국 영지로 받아들였다.4. 3. 프리드리히 5세
1406년 빌헬름 공작이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레오폴트 가계는 그의 형제들 사이에서 더욱 분열되었다. 레오폴드 4세가 오스트리아의 섭정을 맡는 동안 이너외스터라이히의 영토는 에른스트 강철공에게 넘어갔고, 티롤 백국과 포르더외스터라이히는 막내 동생 빈털털이공 프리드리히에게 넘어갔다.1457년 레오폴트 가계는 에른스트의 아들 이너외스터라이히의 프리드리히 5세 공작이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사망한 알베르틴의 사촌 라디슬라우스의 뒤를 이어 오스트리아 대공국에 대한 통치를 다시 맡을 수 있었다. 1490년에는 프리드리히의 아들 막시밀리안 1세에게 유리하게 오스트리아의 지기스문트 대공과 티롤이 사임하면서 모든 합스부르크 가계가 재통일되었다.
4. 4. 페르디난트 2세
1564년 합스부르크의 페르디난트 1세 황제가 사망한 이후, 그의 어린 아들인 카를 2세 대공에 의해 이너외스터라이히 가계가 설립되었다. 이 땅은 예수회가 큰 결의를 다지고 수행한 반종교개혁의 중심지가 되었다. 카를 2세의 아들이자 이너외스터라이히의 섭정인 후계자 페르디난트 2세 대공은 1617년 보헤미아 왕, 1618년 헝가리 왕으로 즉위하였다. 그는 1619년 사촌 마티아스의 뒤를 이어 오스트리아 대공국(페르디난트 3세)과 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계승하였다. 페르디난트 2세의 절대주의와 반종교개혁주의 이너외스터라이히 정책을 보헤미아 왕조로 옮기려는 시도는 30년 전쟁을 촉발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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