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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종교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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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반종교개혁은 16세기 가톨릭 교회가 종교개혁에 대응하여 교리를 재확립하고 교회를 쇄신하려는 운동을 의미한다. '반종교개혁'이라는 용어는 개신교 역사가들이 사용하면서 가톨릭 개혁의 부정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최근에는 '가톨릭 개혁'이라는 용어가 더 널리 사용된다. 가톨릭 개혁은 14세기부터 일어난 영적 부흥을 배경으로, 트리엔트 공의회를 통해 교리를 재정립하고, 예수회와 같은 새로운 수도회를 통해 선교와 교육 사업을 펼쳤다. 또한, 성직자와 수도회의 개혁을 추진하고, 금서 목록 발간 등 다양한 문헌을 통해 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쳤다. 이러한 가톨릭 개혁은 유럽 각 지역에 다양한 영향을 미쳤으며, 영성과 예술 분야에서도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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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종교개혁
배경
정의16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가톨릭교회의 내부 쇄신과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에 대한 대응
동기마르틴 루터의 95개 논제 발표와 그로 인한 종교적 분열, 교회의 부패와 세속화에 대한 비판
목표가톨릭교회의 권위 회복
교리 재정립 및 강화
교회의 내부 개혁 및 정화
프로테스탄티즘 확산 저지
주요 사건 및 인물
트렌트 공의회시기: 1545년 ~ 1563년
내용:
가톨릭 교리 재확인 및 명확화
교회 개혁을 위한 다양한 조치 시행
성경과 교회 전통의 동등한 권위 강조
성사의 중요성 강조
면벌부 판매 금지
예수회창립: 이냐시오 데 로욜라
역할:
교육 및 선교 활동 강화
가톨릭 신앙 옹호
프로테스탄트 지역에 대한 선교 활동 전개
종교 재판 강화목적: 이단 심판 및 가톨릭 신앙 수호
방법:
이단 혐의자에 대한 심문 및 처벌
검열을 통한 사상 통제
새로운 수도회 설립목적: 사회 봉사 및 교육 활동 강화
예시:
카푸친회
우르술라회
주요 내용
교리 강화성경과 교회 전통의 권위 재확인
7성사의 중요성 강조
연옥 교리 확립
성인 숭배 장려
교회 개혁성직자의 교육 강화 및 도덕성 회복
교황의 권위 강화
면벌부 판매 금지
교회 재정 투명성 강화
문화적 영향바로크 미술 발전
가톨릭 교회 건축 양식 변화
종교 음악 발전
결과 및 영향
가톨릭교회의 변화내부 쇄신 및 개혁
교리적 명확성 확보
프로테스탄티즘 확산 저지
유럽 사회의 변화종교적 분열 심화
종교 전쟁 발생
국가 간 갈등 심화
장기적 영향가톨릭교회의 위상 강화
유럽 문화 및 정치에 지속적인 영향
논쟁점
명칭 논쟁'반종교개혁' (Counter-Reformation)이라는 용어가 가톨릭교회의 수동적인 대응만을 강조한다는 비판이 있어, '가톨릭 개혁' (Catholic Reformation)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음
평가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이 공존하며, 역사적 맥락에서 균형 잡힌 시각으로 평가해야 함
추가 정보
관련 용어종교 개혁
트렌트 공의회
예수회
이단 심문

2. 용어

'반종교개혁'(Counter-Reformation)은 의 번역어이다.[7]

개신교 역사가들은 종교개혁에 대한 반작용인 반종교개혁의 일부로 가톨릭 개혁을 언급하는 경향이 있었다.[6] 19세기 독일에서 이 용어는 의 일부가 되었다. '반종교개혁'은 개신교 역사가들에 의해 개신교에 대한 반동과 저항의 측면을 강조하고 가톨릭 내의 개혁을 간과하는 부정적이고 일차원적인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가톨릭 역사가들은 이 용어를 기피하였다. 개신교 역사가인 빌헬름 마우렌브레허가 1880년에 '가톨릭 개혁'이라는 용어를 도입했지만, 독일 역사 기술은 여전히 ​​종교적 분파주의로 나뉘었다. '가톨릭 개혁'이라는 용어는 가톨릭 역사가들에게 개신교에 대한 단순한 반동이라는 문제가 있는 '반종교개혁'이라는 용어를 피할 수 있게 하였기에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이 용어는 개신교 역사가들에게 거부되었다. 그들은 '종교개혁'이라는 용어가 개신교 종교개혁 외에 다른 것을 위해 사용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7]

가톨릭 역사가들은[8] 가톨릭 개혁과 반종교개혁을 다른 것으로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프랑스 역사가 앙리 다니엘-롭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이탈리아 역사가 마시모 피르포는 "가톨릭 개혁"과 "반종교개혁"을 문제점으로 구분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일반적인 "가톨릭 개혁"은 "영혼의 관리 ..., 주교 거주, 성직자의 갱신, 새로운 수도회의 자선 및 교육 역할"에 중점을 두었고, 특정 "반종교개혁"은 "정통성의 방어, 반대의 억압, 교회의 권위 재확립"에 기초했다.

최근에는 가톨릭 교회의 개혁이 종교 개혁 이전, 늦어도 15세기 초부터 추진되었음이 밝혀짐에 따라, 단순한 종교 개혁에 대한 반동으로 보는 '반종교 개혁'이라는 말의 폐해를 피하고, '가톨릭 개혁'이라고 칭하여 중세 후기 이래로 맥락을 이어온 가톨릭 교회 쇄신 운동에 위치시키는 표현이 주류가 되어가고 있다.

기타 관련 용어는 다음과 같다.


  • '트리엔트 이전'(Pre-Tridentine) - 트리엔트 공의회 이전, 또는 그 이전의 현상 유지 (예: "트리엔트 이전 미사")
  • '트리엔트'(Tridentine) -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에서 시작되거나 그 결과로 나타난 것(예: "트리엔트 미사")
  • '트리엔트 이후'(Post-Tridentine) - 때로는 트리엔트의 동의어, 또는 그 후의 뚜렷한 반응 또는 발전(예: "트리엔트 이후 미사")

3. 가톨릭 개혁의 배경

14세기에서 16세기에 이르기까지 유럽에서는 종교적 쇄신을 위한 다양한 움직임이 나타났다. 탁발 수도회의 등장, 평신도 영성 운동, 인쇄술의 발달, 그리스도교 인문주의 등이 이러한 변화를 이끌었다.[10][11]

이 시기에는 다음과 같은 공의회들이 개최되어 중세 부흥주의적 의제를 논의했다.

공의회기간
콘스탄츠 공의회1415년
바젤 공의회1431년-1449년
제5차 라테란 공의회1512년-1517년



이러한 공의회들은 후스파(양종 성찬, 결혼한 사제)와 이후 개신교 (면죄부, 칭의)가 염두에 둔 개혁과는 반드시 일치하지 않았다.[12] 공의회에서의 개혁 논의는 때때로 구체적인 실행 계획을 도출하기에 부족했다.[14]

교황의 친족 등용, 성직자들의 부패와 타락, 면죄부 판매 등의 문제는 오랫동안 해결되지 않았고, 이는 사보나롤라와 같은 급진적 개혁가들의 등장과 갈등을 야기했다.[14]

종교 개혁 이전 반세기 동안 타락한 수도원이나 수녀원을 주교들이 폐쇄하는 일이 잦아졌고, 본당 사제를 교육하는 프로그램도 시행되었다.[14] 트리엔트 공의회 이전에는 기욤 브리소네 (모 주교)와 그의 스승 자크 르페브르 데타플처럼[15] 개신교와 연관된 개혁을 실험한 가톨릭 지도자들도 있었다.[14]

14세기에는 정규 수도회가 개혁을 시도했다. 1336년의 '베네딕토회 칙서'는 베네딕토회와 시토회를 개혁했다. 1523년에는 몬테코로나의 카말돌리 은수자가 수도사들의 독립된 수도회로 인정받았다. 1435년, 파올라의 프란치스코는 미니모 수도회가 된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가난한 은수자회를 창설했다. 1526년, 마테오 데 바시오는 프란치스코회의 삶의 규칙을 본래의 순수함으로 개혁할 것을 제안하여 카푸친회를 탄생시켰고, 1619년에 교황에 의해 인정받았다.[16]

1400년대 말, 성 제노바의 카타리나의 병원 사역에서 영감을 받은 개혁 운동이 확산되었다. 1514년부터 로마에서는 신성한 사랑의 오라토리오가 익명의 자선 행위를 수행하고 개혁을 논의하기 위해 사제와 평신도의 귀족 회원들을 끌어들였다.[17]

1548년, 당시 평신도였던 필립보 네리는 '순례자와 회복자들을 위한 지극히 거룩한 삼위일체 형제회'를 창설했다. 이것은 오라토리안회로 발전하여 1564년에 헌법을 부여받았고 1575년에 교황에 의해 종교 수도회로 인정받았다.[18]

4. 가톨릭 개혁의 전개

로마 가톨릭교회개신교의 도전에 대응하여 트리엔트 공의회를 통해 교리를 재확인하고 교회 내부 개혁을 추진했다.

1545년부터 1563년까지 열린 트리엔트 공의회는 가톨릭 개혁의 핵심 사건이었다. 공의회에서는 개신교 주장을 반박하고 가톨릭 교리를 명확히 하는 한편, 성직자 교육 강화와 교구 중심의 사목 체계 확립 등 교회 내부 개혁을 위한 조치들이 이루어졌다.

교황 바오로 3세 시기에 소집된 트리엔트 공의회에서는 추기경위원회가 임명되어 교회의 조직적인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지만, 교리적인 개혁, 돈벌이에 몰두하는 주교들과 세속에 깊이 물든 사제들의 문제, 대사[72][73][74] 남발로 인한 혼란 해결, 재정 문제 등은 주요 의제로 다뤄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리엔트 공의회는 성사의 사상, 수도회와 특정 교리의 중요성을 재확인하고, 성체성사에서 빵과 포도주가 예수의 몸과 피로 실제로 변한다는 "실체변화" 사상을 지지하는 등 가톨릭 교회의 핵심 교리를 재천명했다.

1530년의 ''아우크스부르크 반박(Confutatio Augustana)''은 루터교의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서(Augsburg Confession)''에 대한 가톨릭 측의 답변이었다.

왼쪽부터 ''아우크스부르크 반박''과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서''가 카를 5세에게 제출되고 있다.

4. 1. 트리엔트 공의회

로마 가톨릭교회트리엔트 공의회(1545년-1563년)를 통해 개신교의 도전에 맞서 교리를 재정립했다.[71]

공의회는 프로테스탄트 주장의 일부가 오류임을 규정하고, 중세 교회가 유지해 온 성사 , 수도회 등의 중요성을 재확인했다. 특히 구원에 있어서 신앙과 협력의 관계, 전승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성체성사에서 빵과 포도주가 예수의 몸과 피로 실제로 변한다는 "실체변화" 사상을 재확인했다.

또한 종교 개혁자들이 비판했던 대사[72][73][74], 순례, 성인과 성유물에 대한 숭배,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 등 가톨릭의 전통적인 신심을 영적으로 의미 있는 것으로 다시 인정하며 개신교와 명확히 선을 그었다. 고해성사, 병자성사, 사죄, 비밀고해, 보속 등의 교리가 정의되었으며, 성체성사미사, 사제서품, 혼인성사에 관한 교리도 규정되었다. 모든 성인의 통공, 성인유해 공경, 연옥, 성화상 사용 등에 관한 교령이 반포되었다.[71]

4. 2. 성직자와 수도회 개혁

가톨릭 개혁은 성직자와 수도회의 쇄신을 중요한 과제로 삼았다. 14세기부터 정규 수도회를 중심으로 개혁이 시작되었고, 16세기에는 테아티노회, 바르나바회, 예수회 등 새로운 수도회들이 설립되어 가톨릭 교회의 쇄신에 기여했다.[16]

테아티노회는 1524년 가에타노와 지안 카라파 추기경에 의해 창설된 정규 성직자 수도회였다. 이들은 가르치고, 설교하고, 고해성사를 받는 등의 활동을 했지만, 특정 교구나 지역에 얽매이지 않고 주교의 직접적인 권한 아래 있었다.[16]

예수회는 1540년에 정식으로 인정받은 새로운 수도회로, 엄격한 규율과 헌신적인 활동으로 가톨릭 교회의 영향력을 회복하고 확장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영신 수련''은 로마 가톨릭 신심을 연상시키는 내용을 담고 있었으며, 예수회는 선교 활동을 통해 아메리카와 아시아에서 교회의 확장에 참여했다.

이 외에도 소마스키회, 우르술라회, 루카의 하느님 어머니 정규 성직자회, 카밀리안회, 아도르노 수도회, 피아리스트회 등 다양한 수도회들이 설립되어 교육, 선교, 사회봉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 특히 우르술라회는 소녀 교육이라는 특별한 임무에 집중했으며, 이는 전통적인 자비의 행위에 대한 헌신을 보여주는 예시였다.[29][30]

1512년부터 1560년대에 걸쳐 '복음적 가톨릭교도' 운동이 '스피리투알리(성령파)'라고 불린 고위 성직자들 사이에서 일어나, 개인의 쇄신을 통해 교회를 쇄신하려는 활동이 활발해졌다.

4. 3. 주요 문헌

가톨릭 교회는 트리엔트 공의회의 결정을 구체화하고, 신자들에게 올바른 교리를 가르치기 위해 다양한 문헌들을 발간했다.

  • '''금서 목록''(Index Librorum Prohibitorum): 1559년부터 1967년까지 존속한 금지 도서 목록이다. 색인 성성에 의해 도서가 추가되거나 삭제되는 방식으로 4세기 동안 20번 업데이트되었다. 이 목록은 세 가지 등급으로 나뉘었는데, 첫 번째 등급은 이단 작가, 두 번째 등급은 이단 저작물, 세 번째 등급은 저자 이름 없이 출판된 금지된 저작물을 다루었다. ''금서 목록''은 1967년 3월 29일에 최종 폐지되었다.[71][72][73][74]
  • '''로마 교리서''(Roman Catechism): 1566년에 발간되었으며, 성직자들이 자국어로 교리를 가르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라틴어로 작성된 자료이다.
  • '''Unigenitus''': 1713년 교황 칙서로, 프랑스 얀센주의 신학자 파스키에 퀘넬(1634–1719)의 101개 명제를 단죄했다. 얀센주의는 프랑스와 스페인령 네덜란드에서 일어난 가톨릭 내 프로테스탄트 성향 또는 중재적 운동이었다. 비밀 칼뱅주의적 성향을 띠고, 그리스도가 모든 이를 위해 죽었다는 것을 부정하며, 성체를 매우 드물게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의 이유로 비판받았다. 얀센주의 명제들이 단죄된 후, 이는 네덜란드 구 가톨릭 교회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5. 가톨릭 개혁과 전쟁

칼뱅주의자들이 네덜란드 역사의 여러 지역을 네덜란드 반란 중에 장악하자, 스페인 펠리페 2세가 이끄는 가톨릭교도들이 반격에 나섰다. 국왕은 1578년부터 1592년까지 파르마 공작 알렉산데르 파르네세를 총독으로 스페인령 네덜란드에 파견했다.

파르네세는 네덜란드 반란에 성공적으로 대항하는 작전을 펼쳐, 남부(미래의 벨기에)의 주요 도시들을 점령하고 스페인 가톨릭의 통제 하에 두었다.[22] 그는 네덜란드어를 사용하는 플라망인과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왈롱인 간의 분열을 이용하여 설득과 분열을 조장하고, 점증하는 불화를 이용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는 왈롱 지역을 국왕에게 다시 복종시킬 수 있었다. 1579년의 아라스 동맹을 통해 그는 남부의 가톨릭 귀족인 '불만 분자'들의 지지를 확보했다.

칼뱅주의자들이 통제하던 북부의 7개 주와 플랑드르 백국, 브라반트 공국위트레흐트 동맹으로 대응하여 스페인에 맞서 함께 싸우기로 결의했다. 파르네세는 에노 백국아르투아에 기지를 확보한 후 브라반트와 플랑드르를 공격했다. 투르네, 마스트리흐트, 브레다, 브뤼헤와 헨트가 잇따라 함락되었다.

파르네세는 마침내 주요 항구 도시인 안트베르펜을 포위했다. 이 도시는 바다로 열려 있고, 강력한 요새를 갖추었으며, 마르닉스 반 성 알데고네의 지휘 하에 잘 방어되었다. 파르네세는 스헬데 강에 배 다리를 건설하여 바다로의 접근을 모두 차단했다. 안트베르펜 함락으로 6만 명의 시민(포위 전 인구의 60%)이 북쪽으로 도망가면서 1585년 안트베르펜은 항복했다. 남부 네덜란드는 다시 스페인의 통제 하에 놓였다.

주로 전투보다는 포위전으로 이루어진 전쟁에서 그는 자신의 역량을 증명했다. 그의 전략은 항복에 관대한 조건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즉, 대량 학살이나 약탈은 없을 것이며, 역사적인 도시 특권은 유지되고, 완전한 사면과 사면이 주어지며, 가톨릭 교회로의 복귀는 점진적으로 이루어질 것이었다.[23]

한편, 북부에서 온 가톨릭 난민들은 쾰른과 두에에서 재결집하여 더욱 호전적인 트리엔트 신앙 정체성을 발전시켰다. 그들은 남부에서 대중적인 반종교개혁의 동원 세력이 되어, 결국 벨기에 역사에서 벨기에 국가가 출현하는 것을 촉진했다.[24]

아우크스부르크 잠정 협약은 슈말칼덴 전쟁 이후 패배한 프로테스탄트에게 반종교개혁 조치가 가해지던 시기였다.

반종교개혁 시대 동안 특히 반종교개혁을 피해 도망치는 난민들을 위한 거주지로 새로운 마을들이 세워졌는데, 이를 통칭하여 Exulantenstädte|엑술란텐슈타트de(복수)라고 불렀다. 보헤미아 형제단 지지자들은 실레시아와 폴란드 일부 지역에 정착했다. 플랑드르 백국 출신의 프로테스탄트는 종종 라인강 하류 지역과 북부 독일로 피난했다. 프랑스 위그노들은 라인란트를 넘어 중앙 독일로 이동했다. 대부분의 마을은 마을을 세운 통치자의 이름을 따서 지었거나, "Freudenstadt"("기쁨의 도시"), "Glückstadt"("행복의 도시")와 같이 감사를 표하는 의미로 지어졌다.[25]

다음은 ''엑술란텐슈타트'' 목록이다.

알토나
바트 카를스하펜
프로이덴슈타트
프리드리히스도르프
글뤽슈타트
하나우
요한게오르겐슈타트
크레펠트
노이-이젠부르크
노이잘차-슈프렘베르크



페테르 파울 루벤스는 반종교개혁의 위대한 플랑드르 화가였다. 그는 1624년에 ''동방 박사의 경배''를 그렸다.


쾰른 전쟁 (1583–1589)은 쾰른 선제후국을 황폐화시킨 개신교가톨릭 파벌 간의 갈등이었다. 쾰른 지역을 통치하는 선제후이자 대주교인 게브하르트 트루흐세스 폰 발트부르크가 개신교로 개종한 후, 가톨릭교도들은 다른 대주교인 바이에른의 에른스트를 선출했고, 게브하르트와 그의 동맹을 성공적으로 물리쳤다.

티롤을 제외하고 주로 개신교가 우세했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세습 영지에서 반종교개혁은 1576년 황제 루돌프 2세가 개신교 활동을 억압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갈등은 1620년 보헤미아 반란으로 격화되었다. 패배한 보헤미아와 오스트리아의 개신교 귀족과 성직자들은 나라에서 추방되거나 가톨릭으로 개종해야 했다. 이러한 망명자들 중에는 지크문트 폰 비르켄, 카타리나 레지나 폰 그라이펜베르크, 요한 빌헬름 폰 슈투벤베르크와 같은 중요한 독일 시인들이 있었다. 이것은 독일 바로크 문학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레겐스부르크뉘른베르크 주변에서 두드러졌다. 일부는 암호 개신교도로 살았다.

다른 사람들은 작센이나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으로 이주했다. 잘츠부르크 개신교도들은 18세기에 특히 프로이센으로 추방되었다. 트란실바니아 란들러들은 합스부르크 영지의 동부 지역으로 추방되었다. 황위 계승자로서 요제프 2세는 1777년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모라비아에서 개신교도들을 추방하는 것에 대해 격렬하게 말하며 그녀의 선택을 "부당하고, 불경하며, 불가능하고, 유해하고, 우스꽝스럽다"고 말했다. 그의 1781년 관용 특허는 정치적 반종교개혁의 종말이라고 볼 수 있지만, 개신교도에 대한 더 작은 추방은 여전히 있었다 (예: 질러탈 추방). 1966년 안드레아스 로라허 대주교는 추방에 대해 유감을 표명했다.

생존자들이 살해된 플로리다 마탄자스 만


프랑스에서는 1562년부터 가톨릭과 위그노 (개혁교회 신자)가 일련의 전쟁을 벌여 1598년 낭트 칙령으로 종교적 평화가 올 때까지 수백만 명이 사망했다. 낭트 칙령은 가톨릭을 국교로 확정했지만, 개신교 신자들에게 상당한 관용을 허용하고 정치적, 군사적 특권을 부여했다. 이 마지막 특권들은 1629년 알레 평화 조약으로 사라졌지만, 종교적 관용은 루이 14세 치세까지 지속되었으며, 그는 개신교 신자들을 다시 박해하여 마침내 1685년 퐁텐블로 칙령으로 예배할 권리를 폐지했다.

1565년, 수백 명의 위그노 난파 생존자들은 공정하게 대우받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플로리다의 스페인 당국에 항복했다. 난파된 사람들 중 소수의 가톨릭 신자들은 목숨을 건졌지만, 나머지는 모두 이단 혐의로 처형되었으며 성직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26]

6. 가톨릭 개혁의 결과

대응 종교 개혁은 로마 가톨릭교회개신교의 도전에 맞서 내부 문제를 해결하고 중앙 집권화를 강화한 중요한 사건이다.

스웨덴에서는 1575년 ''Nova ordinantia ecclesiastica''가 발표되면서 전례 투쟁이 발생했고, 스웨덴의 요한 3세와 스웨덴의 칼 9세가 대립했다.[21] 이 시기 예수회 소속 라렌티우스 니콜라이가 스톡홀름 왕립 대학교를 이끌며 ''Missio Suetica''라 불리는 반종교개혁 활동을 펼쳤다.

6. 1. 지역별 영향

칼뱅주의자들이 네덜란드 역사의 여러 지역을 네덜란드 반란 중에 장악하자, 스페인 펠리페 2세가 이끄는 가톨릭교도들이 반격에 나섰다. 국왕은 1578년부터 1592년까지 파르마 공작 알렉산데르 파르네세를 총독으로 스페인령 네덜란드에 파견했다.[22] 파르네세는 네덜란드어를 사용하는 플라망인과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왈롱인 간의 분열을 이용하여 왈롱 지역을 국왕에게 다시 복종시켰다. 1579년 아라스 동맹을 통해 남부 가톨릭 귀족들의 지지를 확보했다.[22]

칼뱅주의자들이 통제하던 북부 7개 주와 플랑드르 백국, 브라반트 공국위트레흐트 동맹으로 대응하여 스페인에 맞서 함께 싸웠다. 파르네세는 에노 백국아르투아에 기지를 확보한 후 브라반트와 플랑드르를 공격하여 투르네, 마스트리흐트, 브레다, 브뤼헤와 헨트를 함락시켰다.

파르네세는 안트베르펜을 포위하고, 스헬데 강에 배 다리를 건설하여 바다로의 접근을 모두 차단했다. 안트베르펜 함락으로 6만 명의 시민(포위 전 인구의 60%)이 북쪽으로 도망갔고, 남부 네덜란드는 다시 스페인의 통제 하에 놓였다.[23] 그는 주로 포위전으로 전쟁을 수행하며 항복에 관대한 조건을 제시했다. 즉, 대량 학살이나 약탈은 없을 것이며, 역사적인 도시 특권은 유지되고, 완전한 사면과 사면이 주어지며, 가톨릭 교회로의 복귀는 점진적으로 이루어질 것이었다.[23]

한편, 북부에서 온 가톨릭 난민들은 쾰른과 두에에서 재결집하여 더욱 호전적인 트리엔트 신앙 정체성을 발전시켰다. 그들은 남부에서 대중적인 반종교개혁의 동원 세력이 되어, 결국 벨기에 역사에서 벨기에 국가가 출현하는 것을 촉진했다.[24]

반종교개혁 시대 동안 특히 반종교개혁을 피해 도망치는 난민들을 위한 거주지로 새로운 마을들이 세워졌는데, 이를 통칭하여 Exulantenstadt|엑술란텐슈타트de(복수)라고 불렀다.[25]

다음은 ''Exulantenstädte'' 목록이다.



쾰른 전쟁 (1583–1589)은 쾰른 선제후국을 황폐화시킨 개신교가톨릭 파벌 간의 갈등이었다. 쾰른 지역을 통치하는 선제후이자 대주교인 게브하르트 트루흐세스 폰 발트부르크가 개신교로 개종한 후, 가톨릭교도들은 다른 대주교인 바이에른의 에른스트를 선출했고, 게브하르트와 그의 동맹을 성공적으로 물리쳤다.

티롤을 제외하고 주로 개신교가 우세했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세습 영지에서 반종교개혁은 1576년 황제 루돌프 2세가 개신교 활동을 억압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갈등은 1620년 보헤미아 반란으로 격화되었다. 패배한 보헤미아와 오스트리아의 개신교 귀족과 성직자들은 나라에서 추방되거나 가톨릭으로 개종해야 했다.

프랑스에서는 1562년부터 가톨릭과 위그노 (개혁교회 신자)가 일련의 전쟁을 벌여 1598년 낭트 칙령으로 종교적 평화가 올 때까지 수백만 명이 사망했다. 낭트 칙령은 가톨릭을 국교로 확정했지만, 개신교 신자들에게 상당한 관용을 허용하고 정치적, 군사적 특권을 부여했다. 이 마지막 특권들은 1629년 알레 평화 조약으로 사라졌지만, 종교적 관용은 루이 14세 치세까지 지속되었으며, 그는 개신교 신자들을 다시 박해하여 마침내 1685년 퐁텐블로 칙령으로 예배할 권리를 폐지했다.

1565년, 수백 명의 위그노 난파 생존자들은 공정하게 대우받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플로리다의 스페인 당국에 항복했다. 난파된 사람들 중 소수의 가톨릭 신자들은 목숨을 건졌지만, 나머지는 모두 이단 혐의로 처형되었으며 성직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26]

트리엔트 공의회와 반종교개혁의 영향은 루테니아 정교회 신자들이 가톨릭 교회와의 완전한 친교를 회복하면서 비잔틴 전통을 보존하는 길을 열었다. 교황 클레멘스 8세는 1596년 2월 7일 루테니아 주교들을 완전한 친교로 받아들였습니다.[27] 브레스트 연합 조약에 따라, 로마는 루테니아인들의 비잔틴 전례 전통, 결혼한 성직자, 그리고 루테니아 기독교 전통 내에서 주교의 서품을 계속 유지하는 것을 인정했다. 게다가, 그 조약은 루테니아인들이 화해 조건으로 필리오케 조항과 연옥을 받아들이는 것을 특별히 면제했다.[28]

반종교개혁은 리투아니아, 폴란드,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고 합스부르크가가 통치하던 광대한 지역, 즉 오스트리아, 남부 독일, 보헤미아 (현재의 체코), 스페인령 네덜란드 (현재의 벨기에 및 주변 지역),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에서 개신교의 세력을 급격히 줄이는 데 성공했다.

종교 개혁의 절정 및 반종교 개혁의 시작 (1545–1620)


종교 개혁과 반종교 개혁의 종말 (1648)


율리우스력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제5차 라테란 공의회(1512-1517)에서 달력 개혁이 제안되었고,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는 1543년 출판된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에서 이를 언급했다. 암묵적으로, 그의 프톨레마이오스 체계를 지동설로 대체하는 작업은 부분적으로 달력 개혁의 필요성에 의해 촉진되었다.

실제 새로운 달력은 1582년 그레고리력까지 기다려야 했다.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는 출판 당시 상대적으로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이는 더 정확한 달력을 위해 천문학적 참조를 단순화하는 수학적 편의에 불과했다.[67] 코페르니쿠스의 지구 운동에 대한 이론이 문자 그대로 사실임을 시사하는 물리적 증거는 당시 종교적 사상에 대한 명백한 이단을 조장했다. 그 결과, 갈릴레오 재판 동안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이단적이라고 강력히 의심되는" 저술을 출판한 혐의로 가택 연금되었다. 그의 반대자들은 지동설을 비난하고 1633년에 그 가르침을 잠정적으로 금지했다.[68]

6. 2. 영성과 예술

가톨릭 개혁은 영성 생활과 예술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로욜라의 이냐시오, 아빌라의 테레사, 십자가의 요한 등 새로운 영성가들이 등장하여 개인의 내적 신앙 체험을 강조하고, 신비주의적 영성을 발전시켰다.[31] 특히, 아빌라의 테레사와 십자가의 요한은 가르멜회 개혁가로서 그리스도를 향한 내적인 회심과 깊은 기도를 강조했다.[31] 토마스 머튼은 십자가의 요한을 최고의 신비주의 신학자로 칭송했다.[31]

성모 마리아 신심 또한 크게 부흥했는데, 1571년 레판토 해전의 승리가 성모 마리아의 덕분으로 여겨지면서 더욱 확산되었다.[32] 이 시기부터 마리아 신심은 예측 불가능할 정도로 성장하여, 17세기 동안에만 500페이지가 넘는 마리아 신학 저술이 나올 정도였다.[33]

고해성사는 공동체적 행위에서 개인적인 고백으로 변화하였고, 고해소에서 은밀하게 이루어졌다. 이는 교회와의 화해에서 하느님과의 직접적인 화해, 그리고 사회적 죄에서 개인적인 죄("마음의 은밀한 죄")로 강조점이 변화하는 것을 의미했다.[34]

예술 분야에서는 바로크 양식이 가톨릭 교회의 권위와 영광을 드러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베르니니, 루벤스 등 많은 예술가들이 가톨릭 교회를 위한 작품을 창작했다.[35][36][37] 트리엔트 공의회는 건축, 회화, 조각이 가톨릭 신학을 전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선언했다.[39] 이에 따라 "육욕"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작품은 금지되었고, 그리스도의 고난과 고통을 묘사하는 것이 권장되었다.[38]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은 누드, 그리스도의 모습, 이교도 인물 카론의 등장 등으로 인해 반종교개혁 시대에 공격을 받기도 했다.[39] 1563년 트리엔트 공의회의 포고령은 가톨릭 미술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종교적 이미지에 대한 명확한 지침을 제공했다.[39] 파올로 베로네세는 ''레위의 집에 베푸는 잔치''라는 작품에서 성경적 내용과 거리가 먼 묘사로 인해 종교 재판을 받기도 했다.[40][41]

이러한 변화는 매너리즘 작품의 감소, 종교적 주제에 대한 장식적 처리 감소, 부적절한 도상학 금지, 누드 금지 등으로 이어졌다.[42] 에밀 말은 이를 "중세 미술의 죽음"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43]

7. 주요 인물

가톨릭 개혁 시기에는 교회 쇄신과 발전에 기여한 많은 주요 인물들이 등장했다.

인물출생-사망재임 기간
아빌라의 테레사1515년 ~ 1582년
로베르토 벨라르미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1500년 ~ 1558년
카를로 보로메오
베드로 카니시우스1521년 ~ 1597년
프란시스코 수아레스
토마스 카예탄
가브리엘 바스케스
루이스 데 레온
에라스뮈스
요한 에크
존 피셔
십자가의 요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1578년 ~ 1637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1640년 ~ 1705년
루이 14세1638년 ~ 1715년
이냐시오 데 로욜라
잉글랜드의 메리 1세1553년 ~ 1558년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1542년 ~ 1587년
카트린 드 메디치
토마스 모어
루이스 데 몰리나
페테르 파즈마니1570년 ~ 1637년
스페인 펠리페 2세1527년 ~ 1598년
필립 네리1515년 ~ 1595년
교황 레오 10세1513년 ~ 1521년
교황 비오 3세1503년
교황 바오로 3세1534년 ~ 1549년
교황 율리오 3세1550년 ~ 1555년
교황 바오로 4세1555년 ~ 1559년
교황 비오 4세1559년 ~ 1565년
교황 비오 5세1566년 ~ 1572년
교황 그레고리오 13세1572년 ~ 1585년
교황 식스토 5세1585년 ~ 1590년
마테오 리치1552년 ~ 1610년
리슐리외 추기경1585년 ~ 1642년
프란치스코 드 살
폴란드 국왕 지그문트 1세1467년 ~ 1548년
폴란드 국왕 지그문트 3세1566년 ~ 1632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1506년 ~ 1552년
페테르 파울 루벤스1577년 ~ 1640년
바이에른 공작 빌헬름 5세1548년 ~ 1626년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1세1573년 ~ 1651년
빈센트 드 폴


8. 같이 보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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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웹사이트 Counter-Reformation Definition, Summary, Outcomes, Jesuits, Facts, & Significance Britannica https://www.britanni[...] 2023-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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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웹인용 “한국천주교주교회의에서 배포한 보도자료에 따르면, '대사'는 죄가 아니라 죄에 따른 벌을 사면해 주는 것으로, '면죄부(免罪符)'는 가톨릭교회가 금전적 대가를 받고 신자들의 죄를 사해주었다는 인상을 주며, 가톨릭 용어인 대사(大赦, indulgence)의 오역이므로, 대사부(大赦符)가 적절한 표현이라고 밝히고 있다.” https://web.archive.[...] 한국천주교주교회의 2011-03-14
[73] 웹인용 2011년 교육과학기술부에서 발간한 교과서 편수자료 https://web.archive.[...] 2018-02-22
[74] 웹인용 “면죄부”로 오역되는 가톨릭 용어‘대사’(大赦, indulgence)에 관하여 https://web.archive.[...] 2011-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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