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라이티아인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라이티아인은 고대 알프스 지역에 거주했던 민족으로, 그 기원과 명칭에 대한 다양한 설이 존재한다. 라이티아라는 이름은 에트루리아어에서 유래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로마의 지리학자 대 플리니우스는 이들이 포 계곡에서 추방된 지도자 라에투스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주장했다. 베르길리우스는 해당 지역의 와인 포도 품질을 칭찬하며 '라이티안'을 언급했고, 북동부 이탈리아의 여신 레이티아와의 관련성도 제기된다. 라이티아인은 기원전 146년 이전에 폴리비오스의 기록에 처음 등장하며, 골족의 침략으로 인해 알프스 산맥으로 이주한 에트루리아인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라이티아어는 에트루리아 문자의 변형으로 기록된 사멸된 언어이며, 켈트어, 라틴어의 영향을 받아 언어적 변화를 겪었다. 로마 제국에 정복된 후, 라이티아는 로마 군사 지구로 조직되었으며, 이후 속주로 편입되어 로마 문화에 동화되었다. 라이티아의 역사는 다문화 사회의 통합, 지역 정체성과 중앙 권력 간의 관계, 그리고 역사 교육의 중요성을 시사한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스위스의 고대사 - 핀 문화
    핀 문화는 스위스 북동부를 중심으로 신석기 시대 후기에 번성했던 문화로, 브라이텐루 유적지에서 가옥 구조와 생활 양식이 확인되었으며 금속 가공, 돼지 사육, 곡물 생산이 주요 경제 활동이었다.
  • 이탈리아의 고대 민족 - 에트루리아인
    에트루리아인은 기원전 900년부터 기원전 27년까지 이탈리아 반도 중북부에서 번성하며 스스로를 라스레나라고 칭했던 고대 문명으로, 독자적인 문화와 언어를 사용하며 로마 문화에 영향을 미쳤다.
  • 이탈리아의 고대 민족 - 라틴족
    라틴족은 기원전 1000년경 이탈리아 라티움 지역에 정착한 인도유럽계 민족으로, 라틴어를 사용하며 라티알 문화를 형성하고 도시국가를 건설, 공동 종교 의례를 통해 동족 의식을 유지했고, 로마 건국 신화의 기원이 되었으며, 로마 제국 팽창과 함께 라틴어는 로망스어군의 기반이 되었다.
  • 포어아를베르크주의 역사 - 이너외스터라이히
    이너외스터라이히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다스리던 영토로 현재의 오스트리아 남부, 슬로베니아, 이탈리아 일부를 포함하며, 1379년 노이베르크 조약으로 형성되어 반종교개혁의 중심지이자 30년 전쟁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 포어아를베르크주의 역사 - 아펜첼 전쟁
    아펜첼 전쟁은 1401년부터 1429년까지 아펜첼 지역에서 장크트갈렌 수도원장의 지배에 저항하고 스위스 연방과의 관계를 강화하며 독립을 쟁취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분쟁으로, 스위스 연방의 준회원국으로 편입되었다.
라이티아인
개요
이름라이티아인
주요 거주 지역알프스
관련 민족에트루리아인
기타 고대 이탈리아 민족
역사
기원정확한 기원은 불분명하나, 기원전 1천년기 초에 알프스 지역에 정착한 것으로 추정된다.
로마와의 관계기원전 15년: 로마 제국에 정복됨.
라우라와 빈델리키 속주에 편입됨.
문화적 변화로마 문화의 영향을 받아 로마화됨.
언어
언어라이티아어: 에트루리아어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계통은 불분명하다.
문화
특징독자적인 문자를 사용함.
산악 지형에 적응한 독특한 문화를 발전시킴.
유산
현대의 관련성로망슈어를 포함한 일부 알프스 지역의 언어와 문화에 영향을 미침.
참고현대 스위스그라우뷘덴주 지역

2. 명칭의 기원

'라이티'라는 이름의 기원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며,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한다. 주요 가설로는 에트루리아인의 언어와 관련된 설, 고대 로마의 기록에 등장하는 인물 '라에투스'에서 유래했다는 설[2], 그리고 지역적으로 숭배되었던 여신 레이티아와 연관 짓는 설[4] 등이 있다.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는 그의 저서 농경시에서 라이티아 지역의 포도주를 칭찬하며 '라이티안'이라는 인물을 언급하기도 했다.[3]

2. 1. 에트루리아어 기원설

'라이티'라는 이름의 기원은 명확하지 않다. 이 이름은 에트루리아인들이 스스로를 부르던 명칭인 '라스나'(Rasenna)와 유사하며, 이는 에트루리아어로 "사람들"을 뜻하는 '라스나'(rasna)에서 유래했을 수 있다. 하지만 라이티아인들이 실제로 비슷한 내부 명칭을 사용했는지, 아니면 '라이티'가 외부인들이 그들을 부르기 위해 사용한 외부 명칭인지는 불분명하다.

서기 70년경 로마의 지리학자 대 플리니우스는 이들이 포 계곡에서 쫓겨날 당시 지도자였던 '라에투스'(Raetus)의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했다.[2] 하지만 특정 인물의 이름에서 지명이 유래했다는 설명은 종종 만들어진 이야기로 여겨진다. 예를 들어 로마 시의 이름이 건국자 로물루스에서 따왔다는 전설이 있지만, 많은 학자들은 로물루스의 실존 여부를 의심하며 오히려 '로마'라는 기존 지명에서 로물루스라는 이름이 파생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베르길리우스(기원전 70년~기원전 19년)는 농경시에서[3] 라이티아 지역 와인 포도의 품질을 칭찬하며 '라이티안'(Raetian)이라는 인물을 언급하는데, 문맥상 특정 개인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는 베르길리우스가 라에투스를 라이티아인의 시조로 간주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또한 '라이티'라는 이름이 북동부 이탈리아에서 숭배된 주요 여신 레이티아(Reitia)와 관련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레이티아 여신은 베네티 사람들이 남긴 여러 봉헌 비문에서 확인된다. 같은 지역에서 발견된 한 라이티아 봉헌판에는 이 여신을 지칭할 수 있는 '레이투스'(reithus)라는 단어가 새겨져 있다.[4]

2. 2. 라에투스 기원설

서기 70년경 활동했던 로마의 지리학자 대 플리니우스는 라이티아인들의 이름이 포 계곡에서 "추방"될 당시의 지도자였던 "라에투스"(Raetus)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했다.[2] 하지만 특정 인물의 이름에서 민족이나 지명의 유래를 찾는 것은 흔히 만들어진 기원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 예를 들어, 로마 시의 이름이 전설적인 창시자 로물루스에서 따왔다는 이야기가 유명하지만, 많은 학자들은 로물루스의 실존 여부를 의심하며 오히려 '로마'라는 기존 지명에서 '로물루스'라는 이름이 파생되었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고 본다.

베르길리우스(기원전 70년~기원전 19년) 역시 그의 저서 농경시에서 라이티아 지역 포도의 품질을 칭찬하며 '라이티안'(Raetian)이라는 인물을 언급하는데,[3] 문맥상 특정 개인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여 베르길리우스가 라에투스를 라이티아인의 시조(始祖)처럼 여겼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

2. 3. 여신 레이티아 기원설

또한, 라이티라는 이름이 북동부 이탈리아에서 숭배되었던 주요 여신 레이티아와 관련이 있을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이 여신은 베네티 사람들의 제물 헌납판에 새겨진 여러 비문을 통해 그 존재가 확인된다. 같은 지역에서 발견된 한 라이티 제물 헌납판에는 이 여신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는 단어 '레이투스'(reithus)가 포함되어 있다.[4]

3. 기원

라이티아인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존재한다. 현존하는 고대 기록 중 라이티아인에 대한 가장 오래된 언급은 기원전 146년 이전에 쓰여진 폴리비오스의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5] 이후 로마의 작가 대 플리니우스와 리비우스는 라이티아인이 원래 포 계곡에 살던 에트루리아인이었으나, 북쪽에서 침입해 온 골족에 밀려 알프스산맥으로 이주하게 되었다고 기록했다.[6][7] 이 설명에 따르면, 이들의 이주는 포 계곡 일대가 켈트화되던 시기인 기원전 600년에서 400년 사이에 일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8]

하지만 고대 작가들이 제시한 이러한 전통적인 "이주 이론"은 오늘날 라이티아인의 기원을 설명하는 유일한 가설로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현대 학자들은 라이티아인이 에트루리아어와 유사한 언어를 사용했다는 점에 주목하면서도, 이것이 반드시 에트루리아로부터의 직접적인 이주를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본다. 오히려 라이티아인이 알프스 지역의 원주민으로서 오래전부터 해당 언어를 사용했거나, 혹은 포 계곡의 에트루리아인과의 문화 교류나 소수 엘리트의 영향 등으로 언어를 받아들였을 가능성 등 다양한 설명을 제시하고 있다.[9]

3. 1. 에트루리아인 기원설

현존하는 고대 자료에서 라이티아인에 대한 최초 언급은 기원전 146년 이전에 쓰여진 폴리비오스의 ''역사''에서 나타난다.[5] 대 플리니우스에 따르면, 라이티아인은 침략하는 골족에게 쫓겨 포 계곡에서 알프스산맥으로 들어간 에트루리아인이었다고 한다.[6] 이러한 라이티아인의 기원에 대한 설명은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로마 역사가 리비우스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7] 만약 이 역사 기록이 사실이라면, 포 계곡으로부터의 이주는 골족의 주요 이동으로 해당 지역 전체가 켈트화된 시기인 기원전 600년에서 400년 사이에 일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8]

하지만 고전 작가들과 1960년대까지 대부분의 현대 학자들이 지지했던 이러한 전통적인 "이주 이론"은 더 이상 사회 언어적 변화를 설명하는 유일한 가설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만약 라이티아인이 에트루리아어와 유사한 언어를 사용했다면, 그들은 에트루리아인보다 더 오래, 혹은 그 이전부터 알프스 지역의 원주민으로서 해당 언어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특히 많은 학자들이 에트루리아어를 이탈리아와 알프스 지역의 인도유럽어 이전의 기층 언어로 보는 경향이 있어 이 가능성은 더욱 주목받는다.[9] 다른 가능성으로는, 알프스 원주민이 원래 에트루리아어와 관련 없는 언어를 사용하다가, 대규모 이주가 아닌 다른 과정을 통해 에트루리아어를 받아들였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포 계곡의 에트루리아인과의 문화 교류나, 알프스 부족에 대한 정치적 우위를 점한 에트루리아 엘리트 계층의 영향("엘리트 이전") 등이 그 과정으로 제시된다.

3. 2. 알프스 원주민 기원설

고대 로마의 역사가 대 플리니우스와 리비우스는 라이티아인이 원래 포 계곡에 살던 에트루리아인이었으나, 기원전 600년에서 400년 사이 골족의 침입으로 알프스산맥으로 이주했다고 기록했다.[6][7] 이 주장은 폴리비오스가 기원전 146년 이전에 쓴 ''역사''에서 라이티아인을 처음 언급한 이후[5] 나온 설명으로, 골족의 이동으로 포 계곡 일대가 켈트화되던 시기와 맞물린다.[8]

하지만 이러한 전통적인 "이주 이론"은 오늘날 유일한 설명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라이티아인이 에트루리아어와 유사한 언어를 사용했다는 사실이 반드시 그들이 에트루리아에서 이주해왔다는 증거는 아니다. 오히려 라이티아인이 에트루리아인보다 더 오래, 혹은 그 이전부터 알프스 지역에 살면서 해당 언어를 사용한 원주민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특히 많은 학자들이 에트루리아어를 이탈리아와 알프스 지역에 인도유럽어가 들어오기 전부터 존재했던 토착 언어 중 하나로 본다는 점에서 이 가설은 설득력을 얻는다.[9]

다른 가능성도 있다. 알프스 원주민이었던 라이티아인이 원래는 에트루리아어와 관련 없는 언어를 사용했을 수 있다. 그러다가 포 계곡의 에트루리아인과의 문화 교류나, 소수의 에트루리아 엘리트 집단이 알프스 부족에 대한 정치적 우위를 점하면서 그들의 언어를 받아들였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는 대규모 이주 없이도 문화적, 정치적 영향력을 통해 언어가 전파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9]

4. 민족-언어학적 관계

라이티아인의 민족적, 언어적 정체성은 복합적인 양상을 띤다. 많은 학자들은 라이티아인이 본래 라이티아어를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언어는 에트루리아어와 연관된 사멸 언어로 여겨지며, 주로 비문을 통해 그 존재가 확인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켈트족의 영향력이 커져, 아우구스투스 시대에는 알프스 지역의 많은 라이티아 부족들이 켈트어를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제기된다.[10] 로마 제국은 라이티아인을 종종 북쪽의 켈트어파 사용 부족으로 간주되던 빈델리키와 행정적으로 통합했는데, 이는 라이티아 지역의 켈트화를 보여주는 정황으로 해석될 수 있다. 실제로 두 민족의 영역은 이후 클라우디우스 황제 시기에 '라에티아 에트 빈델리키아'라는 속주로 통합되기도 했다.

로마의 지배가 확립된 이후에는 라틴어가 라이티아인들 사이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오늘날 스위스이탈리아 일부 지역에서 사용되는 레토로만어군이 라이티아인이 사용했던 라틴어의 후예일 수 있다는 주장이 있지만, 그 기원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여전히 논의 중이다. 이러한 언어적 변화는 라이티아인의 민족적 정체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4. 1. 라이티아어

기원전 600년경 이탈리아의 언어 지도. 라이티아어가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을 보여준다.


많은 학자들은 라이티아인이 적어도 원래는 라이티아어를 사용했다고 본다. 라이티아어는 에트루리아 문자의 변형으로 기록된 비문들을 통해서만 알려진 사멸된 언어이다. 대부분의 언어학자들은 이 언어가 에트루리아어와 관련이 있다고 여기는데, 에트루리아어는 토스카나, 북부 라티움, 서부 움브리아 등 이탈리아 중부 지역에서 주로 확인되며, 에밀리아로마냐, 캄파니아, 롬바르디아 등 다른 이탈리아 지역에서도 발견되는 인도유럽어족이 아닌 언어이다. 이 언어는 다양한 증거를 바탕으로 라이티아인들이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어 언어학자들에 의해 "라이티아어"라고 불린다.

라이티아어가 라이티아인의 원래 언어였다고 하더라도, 아우구스투스 황제(재위 기원전 30년 - 서기 14년) 시대에 이 언어가 부족들 사이에서 얼마나 널리 쓰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알프스 지역 전반에 걸쳐 아우구스투스 시대까지 켈트족의 유입으로 인해 비(非)켈트족 요소가 상당 부분 동화되어 켈트어를 받아들였다는 증거가 있다.[10] 리비우스에 따르면, 라이티아인의 원래 에트루리아어의 "소리"(sonum linguae|소눔 링구아이lat)는 알프스에 살면서 변질되었다고 한다.[11] 이는 적어도 일부 부족이 조상 언어인 라이티아어를 버리고 켈트어를 사용하게 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켈트화는 로마가 라이티아인을 북쪽 이웃인 빈델리키와 행정적으로 묶었던 관행에서도 뒷받침되는데, 대부분의 역사가는 빈델리키를 켈트어파를 사용하는 민족으로 본다. 두 민족의 영토는 초기부터 행정 목적으로 통합되었고, 결국 클라우디우스 황제(재위 41-54년) 시대에 '''Raetia et Vindelicia|라에티아 에트 빈델리키아lat'''라는 하나의 주로 합쳐졌다. 또한, 아우구스투스 시대에는 Raetorum et Vindelicorum|라에토룸 에트 빈델리코룸lat이라는 이름의 두 합동 보조군 부대가 창설되기도 했다.[12]

북부 라이티아 부족이 로마 제국 시대 이전에 켈트어를 사용하게 되었다는 가설은 라이티아 비문의 분포를 통해서도 추가적인 증거를 얻는다. 이 비문들은 주로 이탈리아 북동부, 즉 남티롤, 트렌티노, 베네토 지역에서 발견되었다.[13] 라이티아 비문들은 라이티아어가 서기 3세기까지 살아남았음을 보여주며, 이는 적어도 이탈리아 북동부에는 당시까지 켈트어로 전환하지 않은 라이티아 부족이 존재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라이티아 영토에서 켈트어 지명이 풍부하게 발견된다는 점은 로마 정복 시점에 이미 많은 라이티아인들이 켈트화되었다는 결론을 뒷받침한다.[14]

로마 통치 시대에 라이티아인들은 주로 라틴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라이티아인의 라틴어 흔적이 오늘날까지 남아있을 가능성이 제기되는 것은 레토로만어군인데, 여기에는 라딘어, 프리울리아어, 로만슈어가 포함된다. 로만슈어는 오늘날 스위스 그라우뷘덴주의 일부 계곡에서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현재 대부분은 독일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로만슈어의 라이티아 기원은 불확실하다. 레토로만어는 골로로만어군과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며, 이는 적어도 일부 라이티아인이 라틴어화되기 전에 이미 켈트어를 채택했다는 주장을 강화하는 근거가 된다.

4. 2. 켈트어의 영향

아우구스투스 황제(재위 기원전 30년 - 서기 14년) 시대에 이르러 알프스 지역 전체에 켈트족이 유입되면서, 비켈트족 요소가 상당히 동화되어 켈트어를 채택했다는 증거가 있다.[10] 로마의 역사가 리비우스는 라이티아인의 원래 에트루리아어의 "소리"(sonum linguae|소눔 링구아이la)가 알프스에 거주하면서 변질되었다고 기록했는데,[11] 이는 적어도 일부 라이티아 부족이 조상 언어인 라이티아어 대신 켈트어를 사용하게 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라이티아인의 켈트화는 로마가 이들을 북쪽의 이웃인 빈델리키와 자주 결합시킨 관행에서도 뒷받침된다. 대부분의 역사가는 빈델리키를 켈트어파 사용자로 간주한다. 두 민족의 영토는 초기 로마 제국 시기부터 행정적으로 통합되었고, 결국 클라우디우스 황제(재위 41-54) 때 Raetia et Vindelicia|라에티아 에트 빈델리키아la라는 하나의 속주로 합쳐졌다. 또한, 아우구스투스 시대에는 "라에토룸 에트 빈델리코룸"이라는 이름으로 두 민족의 합동 보조군 부대가 창설되기도 했다.[12]

북부 라이티아 부족들이 로마 제국 시대 이전에 켈트어를 사용하게 되었다는 가설은 라이티아어 비문의 분포를 통해서도 일부 확인된다. 이 비문들은 주로 이탈리아 북동부, 즉 남티롤, 트렌티노, 베네토 지역에서 발견되었다.[13] 이는 라이티아어가 적어도 해당 지역에서는 서기 3세기까지 살아남았음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다른 지역에서는 켈트어로의 전환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을 열어둔다. 또한, 라이티아 영토 전반에서 발견되는 켈트식 지명의 풍부함은 로마 정복 시점에 이미 많은 라이티아인들이 켈트화되었음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여겨진다.[14]

4. 3. 라틴어의 영향과 레토-로만어군

로마 통치 시대에 라이티아인은 주로 라틴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라이티아인이 사용했던 라틴어의 흔적이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것으로 제안되는 것이 레토-로만어군인데, 여기에는 라딘어, 프리울리아어, 로만슈어가 포함된다. 로만슈어는 오늘날 스위스 그라우뷘덴 칸톤의 몇몇 계곡에서 살아남아 있으나, 이 지역의 대부분은 현재 독일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로만슈어의 라이티아 기원은 불확실하다. 레토-로만어군은 골로로만어군과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며, 이는 적어도 일부 라이티아인이 라틴어화되기 전에 켈트어를 채택했다는 주장을 강화한다.

5. 영역

라이티아인의 거주 영역, 즉 고대 라이티아 지역의 정확한 범위에 대해서는 고대 기록마다 약간의 차이가 존재한다. 특히 라이티족과 인접한 빈델리키족의 거주 영역을 구분하는 데 있어 프톨레마이오스와 스트라보의 설명이 다르다. 프톨레마이오스는 빈델리키족이 리카강(레흐강) 동쪽에, 라이티족은 그 서쪽에 거주했다고 본 반면[15], 스트라보는 라이티족이 주로 알프스 산맥 지역에 거주하며 북쪽으로는 스위스라인강 상류에서 남쪽으로는 이탈리아 북부까지, 동쪽으로는 타우리시(노리쿰), 서쪽으로는 헬베티족과 접했다고 보았다.[16]

5. 1.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경계

지도: 서기 14년경 로마의 라에티아 에트 빈델리키아 (당시에는 완전한 속주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음) 지역, 일부 라에티 부족 이름 표시


증거에 따르면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설립된 라이티아 에트 빈델리키아의 원래 로마 지역의 경계는 다음과 같다.

  • 동쪽 경계: 노리쿰 속주와의 경계는 도나우강과 합류하는 지점부터 남쪽으로 아에누스강()을 따라가다가, 그 다음에는 이사르쿠스강(아이사크)을 따랐다.
  • 북쪽 경계: "자유로운" 게르만 부족과의 경계는 도나우강 상류의 흐름으로 정해졌다.
  • 서쪽 경계: 라이티아 에트 빈델리키아는 보덴 호수 전체와 라인강 상류 계곡, 그리고 론강 상류 계곡을 따라 레만 호수까지 이어지는 긴 지역을 포함했다.
  • 남쪽 경계: 갈리아 트란스파다나와 베네티아 에트 히스트리아의 이탈리아 ''레기오네스''(행정 구역)와의 경계는 현재 이탈리아 북부 경계와 거의 유사했다.[15]


프톨레마이오스에 따르면, 빈델리키족은 리카강(레흐강) 동쪽에 국한되었으며, 그 강 서쪽, 즉 상부 바이에른에는 라이티족이 거주했다고 한다. 이와는 반대로, 도나우강과 알프스 산맥 사이의 전체 지역을 빈델리키족이 점유했으며, 라이티족은 알프스 산맥 자체에 국한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후자의 견해는 스트라보의 기록과 일치한다. 스트라보는 라이티 부족이 거주하는 영토가 스위스 북부의 라인강 상류에서 이탈리아 북부의 코모베로나까지 뻗어 있다고 기록했다. 라이티족은 동쪽으로는 켈트족인 타우리시(노리쿰)와 접했고, 서쪽으로는 헬베티족과 접했다.[16]

5. 2. 스트라보의 기록

스트라보는 라에티 부족이 거주하는 영토가 스위스 북부의 라인강 상류에서 이탈리아 북부의 코모베로나까지 뻗어 있다고 기록했다. 스트라보에 따르면, 라에티족은 동쪽으로는 켈트족인 타우리시(노리쿰)와 접했고, 서쪽으로는 헬베티족과 접했다.[16]

6. 부족

라이티아 지역에는 여러 부족이 거주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대 문헌들은 이들 부족의 기원이나 분류에 대해 서로 다른 기록을 남기고 있어, 정확히 어떤 부족을 라이티아인으로 특정하기는 어렵다. 문헌마다 언급된 부족 이름이 다르거나, 같은 부족이라도 켈트족이나 일리리아인 등 다른 계통으로 분류하기도 한다.[17][19][25]

주요 자료 중 하나인 알프스 개선 기념비 비문에는 로마 제국에 정복된 알프스 부족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만,[18] 평화적으로 통합된 일부 라이티 부족은 이 명단에서 제외되기도 했다. 따라서 고대 문헌 기록과 비문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라이티족으로 추정되는 부족들을 분류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26][27]

6. 1. 고대 문헌의 기록

고대 문헌들은 라이티아인이 에트루리아 기원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는 대체로 동의하지만, '라이티아'로 알려진 지역에 살았던 정확히 어떤 부족을 라이티아인으로 분류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다. 이러한 분류가 지리적 위치, 언어, 또는 문화적 요인 중 무엇에 근거했는지도 불분명하며, 문헌에 기록된 부족 이름에도 상당한 차이가 있다. 기록된 부족들의 일부 위치는 불확실하지만, 대부분은 지명과 인명 증거를 통해 어느 정도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

스트라보는 레폰티족, 카문니족 (이들은 이탈리아 롬바르디아의 발 카모니카에 이름을 부여했다), '코투안티족', '루칸티족'을 라이티아 부족으로 언급했다.[17] 이 중 레폰티족과 카문니족은 아우구스투스의 알프스 개선 기념비 비문에도 같은 이름으로 등장하며, 코투안티족과 루칸티족은 비문의 '코수아네테스'와 '루키나테스'일 가능성이 높다.[18] 그러나 비문 텍스트는 루키나테스를 정복된 4개의 빈델리치족 중 하나로 식별하는 것으로 해석될 여지도 있다. (한편, 스트라보의 '루칸티족'이 실제로는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또 다른 부족인 '루구스키족'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스트라보와 달리, 플리니우스는 레폰티족을 타우리스키족과 유사한 켈트족 부족으로 보았고, 카문니족은 인근 계곡인 가르도네 발 트롬피아의 '트룸플리니족'과 함께 북동 이탈리아의 에우가네이족 부족으로 분류했다.[19] 하지만 플리니우스의 견해가 레폰티족과 카문니족을 라이티족으로 보는 시각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레폰티어는 대륙 켈트어의 한 갈래로 명확히 분류된다.[20][21] 반면 에우가네이족의 언어는 증거가 부족하여 분류가 불확실하다. 이들의 언어가 에트루리아어와 관련이 있어 티르세니아어족에 속할 가능성도 있고, 또는 인도유럽어족 계열로서 이웃한 켈트족[22]이나 베네토족(이들의 언어는 라틴어 및 이탈리아어와 유사점을 공유하지만, 게르만어 및 켈트어와도 관련성이 있다)과 유사했을 수도 있다.[23][24]

또한, 라이티아 에트 빈델리치아 속주에는 라이티족이 아닌 여러 부족도 거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스트라보는 '브레우니족'과 '게나우니족'을 일리리아인으로 분류했으며, 이 지역의 여러 부족 이름은 켈트어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있다. 예를 들어, 카투리게스족은 '카투-'("싸움" 또는 "전사")에서, 난투아테스족은 '난투-'("계곡")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25]

알프스 개선 기념비 비문에는 45개의 알프스 부족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메란 남쪽의 라이티 부족들은 로마 제국에 평화적으로 통합되었기 때문에 이 비문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타불라 클레시아나에는 아나우니족, 신두니족, 툴리아세스족이 언급된다. 라이티아 에트 빈델리치아 속주와 북부 이탈리아의 베네티아 에트 히스트리아 지역에 거주했던 부족 중 학자들이 켈트족으로 간주하는 부족들(메둘리족, 우체니족, 카투리게스족, 브리기아니족, 소기온티족, 세우트로네스족, 우베리족, 난투아테스족, 세두니족, 베라그리족)[26]을 제외하면, 라이티족일 가능성이 있는 부족 목록은 다음과 같다.

'''가능한 라이티족 부족 목록'''[27]
부족 이름
(알프스 개선 기념비에)
이름
변형
영토
(주요 계곡/강)[28]
주요 도시
(로마 시대)
현대
구역
비고
브레우니족상부 fl. Aenus (인강) 계곡티롤 (오스트리아)스트라보에 의해 일리리아 부족으로 식별됨
브릭세네테스족fl. Atesis (아디제강) 계곡브릭시나 (브릭센)남티롤 (이탈리아)
칼루코네스족칼란다 (상부 fl. Rhenus - 라인강) 계곡)쿠리아 (쿠어)그라우뷘덴주 (스위스)
카문니족카무니족발 카모니카 (오글리오강)키비타스 카문노룸 (치비데이트 카무노)브레시아현 (롬바르디아, 이탈리아)플리니우스에 따르면 에우가네이족의 부족
코수아네테스족코투안티족?상부 fl. Isaras (이자르강) 계곡 (바이에른 알프스)투룸 (도르펜)오버바이에른 (독일)알프스 개선 기념비 비문의 가능한 해석에 따르면 빈델리치족의 부족. 스트라보에 따르면, 그의 코투안티족이 동일하다면 라이티족
포쿠나테스족상부 fl. Aenus (인강) 계곡티롤 (오스트리아)게나우네스족 및 브레우니족의 이웃
게나우네스족게나우니족상부 fl. Aenus (인강) 계곡티롤스트라보에 의해 일리리아 부족으로 식별됨
이사르치족fl. Isarcus (이사르코강) 계곡남티롤
레폰티족레폰티족, 레폰테스족오소라 계곡베르바노-쿠시오-오소라현 (피에몬테, 이탈리아)스트라보에 의해 라이티족으로 명명됨. 플리니우스에 따르면 켈트족
루키나테스족루니카테스족, 루칸티족?? Isaras (이자르강) 와 Danuvius (다뉴브강) 사이소르비오두눔 (슈타우빙)니더바이에른알프스 개선 기념비 비문의 가능한 해석에 따르면 빈델리치족의 부족. 스트라보에 따르면, 그들이 루칸티족과 동일하다면 라이티족
루구스키족루이구스키족, 루칸티족?알타 엥가딘 (fl. Aenus - 인강)그라우뷘덴주스트라보의 루칸티족일 수 있음
수아네테스족사루네테스족알불라강 계곡라피다리아 (칠리스)그라우뷘덴주플리니우스에 의해 라이티족으로 식별됨
트룸필리니족트룸플리니족가르도네 발 트롬피아브레시아현플리니우스에 따르면 에우가네이족의 부족
베노네테스족베노네스족, 베노니엔세스족상부 fl. Rhenus (라인강) 계곡장크트갈렌주플리니우스에 의해 라이티족으로 식별됨
베노스테스족빈슈가우 (이탈리아 발 베노스타) (fl. Atesis - 아디제강)남티롤


6. 2. 알프스 개선 기념비

알프스 개선 기념비 비문에는 로마 제국에 정복된 45개의 알프스 부족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18] 하지만 메란 남쪽에 거주하던 라이티 부족들은 로마 제국에 비교적 평화롭게 통합되었기 때문에 이 기념비에는 이름이 오르지 않았다. 예를 들어, 타불라 클레시아나에는 아나우니족, 신두니족, 툴리아세스족 등이 언급된다.

고대 문헌들은 라이티아인이 에트루리아 기원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는 대체로 동의하지만, '라이티아'로 알려진 지역의 어떤 부족을 정확히 라이티아인으로 분류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다. 이러한 분류가 지리적 위치, 언어, 또는 문화적 요인 중 무엇에 근거했는지도 불분명하며, 문헌에 기록된 부족 이름에도 상당한 차이가 있다.[17][18]

스트라보는 레폰티족, 카문니족, '코투안티족', '루칸티족'을 라이티아 부족으로 언급했다.[17] 이 중 레폰티족과 카문니족은 알프스 개선 기념비 비문에도 같은 이름으로 등장하며, 코투안티족과 루칸티족은 비문의 '코수아네테스족'과 '루키나테스족'에 해당할 가능성이 높다.[18] 그러나 비문 해석에 따르면 루키나테스는 정복된 4개의 빈델리키족 중 하나로 분류될 수도 있다. (스트라보가 언급한 '루칸티족'이 실제로는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또 다른 부족인 '루구스키족'일 가능성도 제기된다.)

반면, 플리니우스는 레폰티족을 타우리스키족과 유사한 켈트족으로 보았고, 카문니족은 인근 계곡의 트룸필리니족과 함께 북동 이탈리아의 에우가네이족으로 분류했다.[19] 하지만 플리니우스의 견해가 레폰티족과 카문니족을 라이티족으로 보는 시각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레폰티어는 대륙 켈트어의 한 갈래로 명확히 분류되며,[20][21] 에우가네이어는 자료 부족으로 분류가 불확실하지만, 에트루리아어와 관련되었을 가능성(아마도 티르세니아어족) 또는 인도유럽어족(켈트어[22]베네토어[23][24])에 속할 가능성이 모두 제기된다.

또한, "라이티아 에트 빈델리키아" 속주에는 라이티족이 아닌 다른 부족들도 거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스트라보는 브레우니족과 게나우네스족을 일리리아인으로 분류했으며, 카투리게스족(켈트어로 '전투' 또는 '전사'를 의미하는 '카투-')이나 난투아테스족(켈트어로 '계곡'을 의미하는 '난투-')처럼 켈트어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보이는 부족들도 여럿 존재했다.[25]

알프스 개선 기념비 비문에 기록된 45개 부족 중, 학자들이 켈트족으로 분류하는 부족들(메둘리족, 우체니족, 카투리게스족, 브리기아니족, 소기온티족, 세우트로네스족, 우베리족, 난투아테스족, 세두니족, 베라그리족)[26]을 제외하고, 라이티족일 가능성이 있는 부족 목록은 다음과 같다.

'''가능한 라이티족 부족 목록'''[27]
부족 이름
(알프스 개선 기념비에)
이름
변형
영토
(주요 계곡/강)[28]
주요 도시
(로마 시대)
현대
구역
비고
브레우니족상부 fl. Aenus (인강) 계곡티롤 (오스트리아)스트라보에 의해 일리리아 부족으로 식별됨
브릭세네테스족fl. Atesis (아디제강) 계곡브릭시나 (브릭센)남티롤 (이탈리아)
칼루코네스족칼란다 (상부 fl. Rhenus - 라인강 계곡)쿠리아 (쿠어)그라우뷘덴주 (스위스)
카문니족카무니족발 카모니카 (오글리오강)키비타스 카문노룸 (치비데이트 카무노)브레시아현 (롬바르디아, 이탈리아)플리니우스에 따르면 에우가네이족의 부족
코수아네테스족코투안티족?상부 fl. Isaras (이자르강) 계곡 (바이에른 알프스)투룸 (도르펜)오버바이에른 (독일)알프스 개선 기념비 비문 해석에 따라 빈델리키족으로 분류될 수도 있음. 스트라보에 따르면, (그가 언급한) 코투안티족이 이들과 동일하다면 라이티족으로 분류됨
포쿠나테스족상부 fl. Aenus (인강) 계곡티롤 (오스트리아)게나우네스족 및 브레우니족의 이웃
게나우네스족게나우니족상부 fl. Aenus (인강) 계곡티롤스트라보에 의해 일리리아 부족으로 식별됨
이사르치족fl. Isarcus (이사르코강) 계곡남티롤
레폰티족레폰티족, 레폰테스족오소라 계곡베르바노-쿠시오-오소라현 (피에몬테, 이탈리아)스트라보에 의해 라이티족으로 명명됨. 플리니우스에 따르면 켈트족
루키나테스족루니카테스족, 루칸티족?? Isaras (이자르강) 와 Danuvius (다뉴브강) 사이소르비오두눔 (슈트라우빙)니더바이에른알프스 개선 기념비 비문 해석에 따라 빈델리키족으로 분류될 수도 있음. 스트라보에 따르면, (그가 언급한) 루칸티족과 동일하다면 라이티족으로 분류됨
루구스키족루이구스키족, 루칸티족?알타 엥가딘 (fl. Aenus - 인강)그라우뷘덴주스트라보가 언급한 루칸티족일 가능성이 있음
수아네테스족사루네테스족알불라강 계곡라피다리아 (칠리스)그라우뷘덴주플리니우스는 라이티족으로 분류함
트룸필리니족트룸플리니족가르도네 발 트롬피아브레시아현플리니우스에 따르면 에우가네이족의 부족
베노네테스족베노네스족, 베노니엔세스족상부 fl. Rhenus (라인강) 계곡장크트갈렌주플리니우스는 라이티족으로 분류함
베노스테스족빈슈가우 (이탈리아 발 베노스타) (fl. Atesis - 아디제강)남티롤


6. 3. 주요 부족 목록

고대 문헌들은 라이티아인이 에트루리아 기원을 가지고 있다는 데 의견이 일치하지만, '라이티아'로 알려진 지역에서 확인된 정확히 어떤 부족을 라이티아인으로 분류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러한 분류가 지리적 위치, 언어 또는 문화적 요인에 근거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다. 또한, 문헌에 제시된 부족 이름에도 상당한 차이가 있다. 기록된 부족들의 일부 위치는 불확실하지만, 대부분은 지명과 인명 증거를 통해 확실하게 확립되었다.

예를 들어 스트라보는 레폰티족, 카문니족, '코투안티족', '루칸티족'을 라이티아 부족으로 꼽았다.[17] 이 중 처음 두 부족은 아우구스투스의 비문에도 동일한 철자로 기재되어 있으며, 후자 두 부족은 아우구스투스의 '코수아네테스족'과 '루키나테스족'일 가능성이 높다.[18] 그러나 스트라보와 달리, 플리니우스는 레폰티족을 켈트족의 일파인 타우리스키족과 유사하게 보았고, 카문니족은 에우가네이족의 부족으로 분류했다.[19] 또한 브레우니족과 게나우네스족은 스트라보에 의해 일리리아인으로 분류되었으며,[25] 이 지역의 여러 부족은 카투리게스족, 난투아테스족처럼 켈트어 어원을 가진 이름으로 불렸다.[25]

알프스 개선 기념비 비문에는 45개의 알프스 부족 이름이 포함되어 있다. 메란 남쪽의 라이티 부족은 로마 제국에 평화적으로 통합되었으므로 알프스 개선 기념비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타불라 클레시아나는 아나우니족, 신두니족 및 툴리아세스족을 언급한다. 라이티아 에트 빈델리키아 속주와 북부 이탈리아의 베네티아 에트 히스트리아 '지방'에 거주하는 부족 중 학자들이 켈트족으로 여긴 부족 (메둘리족, 우체니족, 카투리게스족, 브리기아니족, 소기온티족, 세우트로네스족, 우베리족, 난투아테스족, 세두니족, 베라그리족)을 제외하면,[26] 가능한 라이티족 부족 목록은 다음과 같다.

가능한 라이티족 부족 목록[27]
부족 이름
(알프스 개선 기념비에)
이름
변형
영토
(주요 계곡/강)[28]
주요 도시
(로마 시대)
현대
구역
비고
브레우니족상부 fl. Aenus (인강) 계곡티롤 (오스트리아)스트라보에 의해 일리리아 부족으로 식별됨
브릭세네테스족fl. Atesis (아디제강) 계곡브릭시나 (브릭센)남티롤 (이탈리아)
칼루코네스족칼란다 (상부 fl. Rhenus - 라인강 계곡)쿠리아 (쿠어)그라우뷘덴주 (스위스)
카문니족카무니족발 카모니카 (오글리오강)키비타스 카문노룸 (치비데이트 카무노)브레시아현 (롬바르디아, 이탈리아)플리니우스에 따르면 에우가네이족의 부족
코수아네테스족코투안티족?상부 fl. Isaras (이자르강) 계곡 (바이에른 알프스)투룸 (도르펜)오버바이에른 (독일)알프스 개선 기념비 비문의 가능한 해석에 따르면 빈델리치족의 부족. 스트라보에 따르면, 그의 코투안티족이 동일한 경우 라이티족
포쿠나테스족상부 fl. Aenus (인강) 계곡티롤 (오스트리아)게나우네스족 및 브레우니족의 이웃
게나우네스족게나우니족상부 fl. Aenus (인강) 계곡티롤스트라보에 의해 일리리아 부족으로 식별됨
이사르치족fl. Isarcus (이사르코강) 계곡남티롤
레폰티족레폰티족, 레폰테스족오소라 계곡베르바노-쿠시오-오소라현 (피에몬테, 이탈리아)스트라보에 의해 라이티족으로 명명됨. 플리니우스에 따르면 켈트족
루키나테스족루니카테스족, 루칸티족?? Isaras (이자르강) 와 Danuvius (다뉴브강) 사이소르비오두눔 (슈트라우빙)니더바이에른알프스 개선 기념비 비문의 가능한 해석에 따르면 빈델리치족의 부족. 스트라보에 따르면, 그들이 루칸티족과 동일한 경우 라이티족
루구스키족루이구스키족, 루칸티족?알타 엥가딘 (fl. Aenus - 인강)그라우뷘덴주스트라보의 루칸티족일 수 있음
수아네테스족사루네테스족알불라강 계곡라피다리아 (칠리스)그라우뷘덴주플리니우스에 의해 라이티족으로 식별됨
트룸필리니족트룸플리니족가르도네 발 트롬피아브레시아현플리니우스에 따르면 에우가네이족의 부족
베노네테스족베노네스족, 베노니엔세스족상부 fl. Rhenus (라인강) 계곡장크트갈렌주플리니우스에 의해 라이티족으로 식별됨
베노스테스족빈슈가우 (이탈리아 발 베노스타) (fl. Atesis - 아디제강)남티롤


7. 로마의 정복

라이티아인들은 북쪽의 이웃인 빈델리키(아마도 켈트족 계열)와 함께 기원전 15년,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의붓아들인 티베리우스와 드루수스가 이끈 로마군에 의해 정복되었다.[29] 정복 직후 라이티아와 빈델리키의 통합 영토는 정식 로마 속주가 아닌 군사 지구로 조직되었다. 이 지역은 로마 기사 출신 장교인 ''프라에펙투스''가 "라이티아인, 빈델리키 및 포에니네 계곡의 프라에펙투스"라는 직함으로 다스렸다.[33]

로마는 이 지역에 군대를 주둔시켰는데,[30] 이는 내부의 불안정보다는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로마 제국의 국경을 방어하기 위한 목적이 더 컸다.[30] 역사가 스트라본에 따르면, 알프스 부족들은 전반적으로 로마의 통치에 비교적 쉽게 적응했으며, 정복 이후 초기 33년 동안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다고 한다.[31] 라이티아인들은 로마 제국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되었다.

7. 1. 티베리우스와 드루수스의 원정

라이티아인들은 북쪽에 있던 이웃 부족 빈델리키(아마도 켈트족 계열로 추정됨)와 함께 기원전 15년,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의붓아들이자 로마의 고위 군 지휘관이었던 티베리우스와 드루수스가 벌인 양면 공격 작전으로 인해 로마에 정복되었다.[29]

7. 2. 로마 통치와 세금

라이티아인들은 북쪽의 이웃인 빈델리키와 함께 기원전 15년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의붓아들인 티베리우스와 드루수스에게 정복되었다.[29] 정복 이후 라이티아인들은 로마 제국에 세금을 납부해야 했다.[32]

처음에는 라이티아와 빈델리키의 통합 영토가 정식 로마 속주가 아닌 군사 지구로 조직되었다. 이 지역은 기사 출신 장교가 통치했으며, 공식 명칭은 "라이티아인, 빈델리키 및 포에니네 계곡의 ''프라에펙투스''"였다.[33] 서쪽 경계 지역에는 로마 군단과 보조 병력이 주둔했지만, 이는 내부 불안보다는 외부 위협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30] 스트라본은 알프스 부족들이 로마 통치에 비교적 쉽게 적응했으며, 정복 후 33년 동안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다고 기록했다.[31]

클라우디우스 황제(재위 41-54년) 시대에 이르러 이 지역은 ''라이티아 에트 빈델리키아''라는 이름의 정식 속주가 되었다. 이후 1세기 후반에는 이름이 단순히 ''라이티아''로 줄어들었다. 이때 포에니네 계곡(발레 주)은 분리되어 알페스 그라이아에 속주에 편입되었다.[34] 라이티아 속주는 기사 계급 출신의 프로쿠라토르가 다스렸다.[35]

로마 통치 하에서 라이티아인들은 로마군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초기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시대(기원전 30년 - 서기 37년)에 라이티아 부족에서 최소 10개의 보조 보병 연대(''코호르테스 라에토룸'')가 창설되었는데, 이는 약 5,000명의 병력에 해당한다. 인구 밀도가 낮은 알프스 지역에서 이는 상당한 규모의 징집이었으며, 라이티아인들이 로마 군 복무를 매력적으로 여겼음을 시사한다. (로마 군대의 알프스 연대 참조).[36]

7. 3. 로마 군대 복무

서쪽 경계 지역(기원후 15년경부터 빈도니사)에는 적어도 한 개의 로마 군단이 주둔했으며, (아마도 AD 9년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에서 파괴되기 전까지는 ''제19군단'') 기원후 100년경까지 주둔했다. 게다가 로마의 보조 병력과 ''레베스 아르마투레''( "경무장 병사", 아마도 지역 민병대)가 주둔했다.[30] 하지만 이러한 병력은 내부의 불안보다는 외부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스트라보는 알프스 부족들이 전체적으로 로마 통치에 쉽게 적응했으며, 초기 정복 이후 33년 동안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다고 기록했다.[31]

비문 기록에 따르면, 초기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시대(로마 제국, 기원전 30년 - 서기 37년)에 라이티아 부족 출신으로 구성된 최소 10개의 보조 보병 연대(''코호르테스 라에토룸'')가 창설되었다.[36] 이는 약 5,000명의 신병에 해당하는데, 인구 밀도가 낮은 알프스 계곡에서 이루어진 엄청난 규모의 징집이었다. 이는 라이티아인들이 로마 군대에서 복무하며 경력을 쌓는 것에 강한 매력을 느꼈음을 시사한다. (로마 군대의 알프스 연대 참조).

8. 현대의 해석과 한국에 주는 시사점

(내용 없음)

참조

[1] 문서 Cornell (1995) 44
[2] 문서 Pliny N.H. III.20
[3] 웹사이트 The Internet Classics Archive {{!}} The Georgics by Virgil https://classics.mit[...] 2024-08-31
[4] 문서 Zavaroni I.R. ''San Zeno'' 1
[5] 문서 Polybius XXXIV.10.18
[6] 문서 Pliny the Elder III.20
[7] 문서 Livy V.33
[8] 문서 Livy V.34
[9] 문서 Cornell (1995) 44
[10] 문서 Alfoldi (1974) 24-5
[11] 문서 Livy V.33
[12] 문서 Holder (1982)
[13] 문서 Zavaroni 1
[14] 서적 Researches Into the Physical History of Mankind: 3, Volume 1 Sherwood, Gilbert and Piper 1841
[15] 문서 Barrington Atlas maps 18, 19, 39
[16] 문서 Strabo IV.6.8
[17] 문서 Strabo IV.6.8
[18] 문서 CAH X 538
[19] 문서 Pliny the Elder III.20.134-5
[20] 서적 Celtic culture: a historical encyclopedia ABC-CLIO 2005
[21] 웹사이트 LinguistList: Lepontic https://web.archive.[...]
[22] 문서 Scullard, 43.
[23] 서적 Manuel de la langue vénète. Indogermanische Bibliothek, Lehr- und Handbücher 1974
[24] 서적 Indogermanisches Etymologisches Wörterbuch Bern 1959
[25] 문서 Faliyev Dictionary
[26] 문서 O Hogain (2006) 174
[27] 문서 Strabo IV.6.8-9; Pliny III.20.133-6; Tropaeum Alpium inscription
[28] 문서 Barrington Atlas Maps 18,19,39
[29] 문서 Dio LIV.22.3-4
[30] 문서 CAH X 538-9
[31] 문서 Strabo IV.6.9
[32] 문서 Strabo IV.6.9
[33] 문서 CAH X 539
[34] 문서 CAH X 541
[35] 문서 CAH X 369
[36] 서적 Holder 1980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