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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바벤 공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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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슈바벤 공국은 496년 알레만니족이 프랑크 왕국에 정복된 이후 프랑크 왕의 지배를 받으며 시작되었다. 7세기에는 기독교로 개종하고 수도원이 건립되었으며, 917년 부르카르트 2세가 공작 칭호를 사용하면서 사실상 독립적인 공국으로 발전했다. 이후 호엔슈타우펜 가문이 공위를 차지하면서 제국의 지원을 받았으나, 1268년 콘라딘의 사형 이후 공국은 붕괴되었다. 1512년에는 슈바벤 관구로 재편되었으며, 오늘날 슈바벤이라는 명칭은 바이에른 슈바벤 지역을 지칭하는 데 주로 사용된다. 공국의 영역은 현재 독일, 스위스, 프랑스, 오스트리아에 걸쳐 있었다.

2. 역사

496년 알레만니족은 프랑크 왕국 클로도베쿠스 1세에게 패배하여 프랑크 왕국에 편입되었고, 프랑크 왕의 지휘 아래 있는 공작에 의해 통치되었다. 7세기 알레만니족은 기독교로 개종하여 아우크스부르크콘스탄츠에 주교구가 설치되었고, 8세기에는 라이헤나우 수도원장크트갈렌 수도원이 건립되었다.[5] 알레만니족은 점차 프랑크족의 지배에서 벗어났지만, 730년 카롤루스 마르텔루스에 의해 종속되었고, 그의 아들인 피핀은 알레만니족의 부족 대공을 폐지하고 팔라틴 백작령에 의한 통치를 실시했다.[5] 이때 공국은 가우(Gau) 또는 백작령으로 분할되었고, 이 상태는 중세를 통해 유지되었다. 알레만니족의 백작령은 라인강, 보덴호, 레히강, 프랑켄 공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 알레만니아바이에른 공국을 가르는 레히강은 양측 사람들 사이의 왕래가 활발한 굳건한 국경선이었다. 카롤링거 왕조 후기 및 쇠퇴기에 알레만니족의 백작령은 거의 독립적인 형태가 되었고, 지배권을 놓고 콘스탄츠 주교구와의 사이에 투쟁이 벌어졌다.

917년 부르카르트 1세의 아들인 라에티아 쿠리엔시스 백작 부르카르트 2세는 공작 칭호를 사용했고, 919년 하인리히 1세에 의해 승인되었다. 926년 부르카르트 2세가 죽자, 그의 미망인과 결혼한 프랑크족 귀족인 헤르만 1세가 공작위를 계승했다.[1] 948년 헤르만 1세가 죽자, 오토 1세는 공국을 헤르만 1세의 딸과 결혼했던 리우돌프에게 주었지만, 공국의 특권을 축소하고 왕족의 관심사를 관찰하기 위해 백작을 임명했다. 리우돌프는 반란을 일으켜 폐위되었고, 부르크하르트 3세가 954년부터 973년까지 공국을 통치했다. 이후 리우돌프의 아들 오토 1세가 982년까지 통치했고, 헤르만 1세의 친척인 콘라트 1세가 997년까지 통치했다. 콘라트 1세의 아들로 추정되는 헤르만 2세가 1003년에 사망하고, 그의 아들인 헤르만 3세가 계승했다. 헤르만 3세에게는 자녀가 없었고, 공위는 그의 누이인 기젤라와 에른스트 1세의 아들인 에른스트 2세에게 넘어갔다. 1015년 에른스트 1세가 죽자 기젤라가 통치권을 이어받아 콘라트 2세와 재혼했다. 1030년 콘라트 2세는 에른스트 2세를 폐위시키고 기젤라의 둘째 아들인 헤르만 4세에게 공국을 하사했고, 1038년 헤르만 4세가 죽자 콘라트 2세의 아들인 하인리히 3세가 공국을 받았다.

하인리히 3세는 1045년에 알레만니를 오토 2세의 손자인 로타링기아 궁중백 오토 2세에게, 1048년에는 슈바인푸르트 백작 오토 3세에게 공국을 각각 주었다. 1077년 루돌프는 하인리히 4세의 대립왕으로 선출되었지만 슈바벤에서는 거의 지지자를 찾을 수 없었고, 그 지역은 하인리히 4세의 사위이자 충실한 지지자였던 호엔슈타우펜 백작 프리드리히 1세에게 주어졌다.[1]

1268년 콘라딘이 사형당하면서 공국은 붕괴되었고, 슈바벤의 유력자들은 뷔르템베르크 백작, 바덴 변경백, 튀빙겐 궁중백, 호엔촐레른 백작 등의 휘하에 들어갔다.[1]

1512년 막시밀리안 1세가 제국을 제국 관구로 분할했을 때, 사실상 슈바벤 공국과 동일한 영역을 슈바벤 관구라고 불렀다. 옛 슈바벤 지역은 뷔르템베르크 백작령, 바덴 변경백국, 바이에른 선제후국 서부를 포함하고 있었다. 신성 로마 제국 해체 후 슈바벤 관구의 남동부 지역은 바이에른 왕국 (바이에른 슈바벤)에 귀속되었고, 나머지는 뷔르템베르크 왕국바덴 대공국 사이에 분할되었으며, 호엔촐레른 공국들(지그마링겐과 헤칭겐)만이 남았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뷔르템베르크, 바덴, 호엔촐레른은 바덴뷔르템베르크주로 통합되었다. 슈바벤이라는 이름은 예전 공국 영역을 지칭하는 데 가끔 사용되지만, 현재는 바이에른 슈바벤 Regierungsbezirkde(행정구)에 국한되며, 중심지는 아우크스부르크이다.[1]

2. 1. 알레만니아

496년 알레만니족은 프랑크 왕국 클로도베쿠스 1세에게 패배하여 프랑크 왕국에 편입되었고, 프랑크 왕의 지휘를 받는 공작들에 의해 통치되었다. 7세기에 알레만니족은 기독교로 개종하여 아우크스부르크콘스탄츠에 주교구가 설치되었고, 8세기에는 라이헤나우 수도원장크트갈렌 수도원이 건립되었다.[5]

알레만니족은 점차 프랑크족의 지배에서 벗어났지만, 730년 카롤루스 마르텔루스에 의해 종속되었고, 그의 아들인 피핀은 알레만니족의 부족 대공을 폐지하고 팔라틴 백작령에 의한 통치를 실시했다. 이때 공국은 가우(Gau) 또는 백작령으로 분할되어 할당되었고, 이 상태는 중세를 통해 유지되었다. 알레만니족의 백작령은 라인강, 보덴호, 레히강, 프랑켄 공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 알레만니아바이에른 공국을 가르는 레히강은 양자를 민족적으로나 지리적으로 형성하는 것이 아니었고, 매우 굳건한 국경선이었으며, 그곳에서는 양측 사람들 사이의 왕래가 활발하였다. 카롤링거 왕조 후기 및 쇠퇴기에 알레만니족의 백작령은 거의 독립적인 형태가 되었고, 지배권을 놓고 콘스탄츠 주교구와의 사이에 투쟁이 벌어졌다.[1]

2. 2. 새로운 공국의 형성

496년 알레만니족은 프랑크 왕국클로도베쿠스 1세에게 패배하여 프랑크 왕국에 편입되었고, 프랑크 왕의 지휘 아래 있는 공작의 통치를 받았다. 7세기에 알레만니족은 기독교로 개종했고, 아우크스부르크콘스탄츠에 주교구가 설치되었으며, 8세기에는 라이헤나우 수도원장크트갈렌 수도원이 건립되었다.[5]

알레만니족은 점차 프랑크족의 지배에서 벗어났지만, 730년 카롤루스 마르텔루스에 의해 다시 종속되었고, 그의 아들 피핀 3세는 알레만니족의 부족 공작을 폐지하고 팔라틴 백작에 의한 통치를 실시했다. 이때 공국은 가우(Gau) 또는 백작령으로 분할되어 할당되었고, 이 상태는 중세를 통해 유지되었다. 알레만니족의 백작령은 라인강, 보덴호, 레흐 강, 프랑켄 공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 알레만니아바이에른 공국을 가르는 레흐 강은 양측 사람들 사이의 왕래가 활발한, 굳건한 국경선이었다.[1]

카롤링거 왕조 후기 및 쇠퇴기에 알레만니족의 백작령은 거의 독립적인 형태가 되었고, 지배권을 놓고 콘스탄츠 주교구와의 사이에 투쟁이 벌어졌다. 라에티아 쿠리엔시스의 백작이었던 알레만니족 일족의 족장은 때때로 변경백이라고 불렸으며, 그중 한 명이었던 부르하르트 1세는 알레만니 공이라고 불렸다. 부르하르트 1세는 911년에 살해되었고, 그 때문에 베르톨트와 에르항거 두 팔라틴 백작은 동프랑크 왕 콘라트 1세의 명령에 따라 반역죄로 기소되어 처형되었다.[1]

917년 부르하르트 1세의 아들인 라에티아 쿠리엔시스 백작 부르하르트 2세는 공작의 칭호를 채용했고, 919년 동프랑크 왕 하인리히 1세에 의해 승인되었다. 그 위치는 사실상 독립적인 것이었고, 926년 부르하르트 2세가 죽자, 그의 미망인과 결혼한 프랑크족 귀족인 헤르만 1세에 의해 계승되었다.[2]

2. 3. 중세 슈바벤 공국

496년 알레만니족은 프랑크 왕국 클로도베쿠스 1세에게 패배하여 프랑크 왕국에 편입되었고, 프랑크 왕의 지휘하에 있는 공작에 의해 통치되었다. 7세기에 알레만니족은 기독교로 개종하여 아우크스부르크콘스탄츠에 주교구가 설치되었고, 8세기에는 라이헤나우 섬과 장크트갈렌 수도원이 건립되었다.[5] 알레만니족은 점차 프랑크족의 지배에서 벗어났지만, 730년 카롤루스 마르텔루스에 의해 종속되었고, 그의 아들인 피핀은 알레만니족의 부족 대공을 폐지하고 팔라틴 백작령에 의한 통치를 실시했다.[5] 이때 공국은 가우(Gau) 또는 백작령으로 분할되어 할당되었고, 이 상태는 중세를 통해 유지되었다. 알레만니족의 백작령은 라인강, 보덴호, 레히강, 프랑켄 공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 알레만니아바이에른 공국을 가르는 레히강은 양측 사람들 사이의 왕래가 활발한 굳건한 국경선이었다. 카롤링거 왕조 후기 및 쇠퇴기에 알레만니족의 백작령은 거의 독립적인 형태가 되었고, 지배권을 놓고 콘스탄츠 주교구와의 사이에 투쟁이 벌어졌다. 라에티아 쿠리엔시스의 백작이었던 알레만니족 일족의 족장은 때때로 변경백이라고 불렸으며, 그중 한 명이었던 부르카르트 1세는 알레만니 공이라고 불렸다. 부르카르트 1세는 911년에 살해되었고, 그 때문에 베르톨트와 에르한가르의 두 팔라틴 백작은 콘라트 1세의 명령에 따라 반역죄로 기소되어 처형되었다.

917년 부르카르트 1세의 아들인 라에티아 쿠리엔시스 백작 부르카르트 2세는 공의 칭호를 채용했고, 그것을 919년 하인리히 1세에 의해 승인되었다. 그 위치는 사실상 독립적인 것이었고, 926년 부르카르트 2세가 죽자, 그의 미망인과 결혼한 프랑크족 귀족인 헤르만 1세에 의해 계승되었다.[1] 948년 헤르만 1세가 죽자, 오토 1세는 공국을 헤르만 1세의 딸인 이다와 결혼했던 리우돌프에게 주었지만, 공국의 특권을 축소하고, 왕족의 관심사를 관찰하기 위해 백작을 임명했다. 리우돌프는 반란을 일으켜 폐위되었고, 부르카르트 2세의 아들인 부르크하르트 3세가 954년부터 973년까지 공국을 통치했다. 이후 리우돌프의 아들로서 후에 바이에른 공작이 되는 오토 1세가 982년까지 통치했고, 그 후 헤르만 1세의 친척인 콘라트 1세가 997년까지 통치했다. 콘라트 1세의 아들일 것으로 추정되는 헤르만 2세가 뒤를 이어 1003년에 죽고, 그의 아들인 헤르만 3세가 계승했다. 이 기간 동안 슈바벤은 아마도 주교의 영향 때문일지 몰라도 작센 왕가의 왕에게 충실하였다. 헤르만 3세에게는 자녀가 없었고, 공위는 그의 누이인 기젤라와 오스트리아 변경백 에른스트 1세의 아들인 에른스트 2세에게 넘어갔다. 에른스트 1세는 1015년에 죽을 때까지 아들을 위해 공국을 장악했고, 에른스트 1세가 죽은 해에 기젤라는 통치권을 이어받아 프랑켄 공작 콘라트, 후의 콘라트 2세와 재혼했다. 에른스트 2세는 나이가 차자 의붓아버지인 콘라트 2세와 다투었고, 1030년 콘라트 2세는 에른스트 2세를 폐위시키고 기젤라의 둘째 아들인 헤르만 4세에게 공국을 하사했고, 헤르만 4세가 1038년에 죽자 콘라트 2세의 아들인 하인리히 3세가 어머니인 기젤라로부터 공국을 받았다. 왕위에 올라 하인리히 3세를 칭한 하인리히 1세는 1045년에 알레만니를 오토 2세의 손자인 로타링기아 궁중백 오토 2세에게, 1048년에는 슈바인푸르트 백작 오토 3세에게 공국을 각각 주었다. 다음 공작이 된 루돌프는 1077년에 하인리히 4세의 대립왕으로 선출되었지만 슈바벤에서는 거의 지지자를 찾을 수 없었고, 그 지역은 하인리히 4세의 사위이자 충실한 지지자였던 호엔슈타우펜 백작 프리드리히 1세에게 주어졌다.[1] 프리드리히 1세는 공위를 유지하기 위해 루돌프의 아들인 베르톨트나 사위인 체링겐 공작 베르톨트 2세와 싸워야 했고, 1096년에 후자에게 브라이스가우를 양도했다. 1105년에 그의 아들인 프리드리히 2세가 아버지의 뒤를 이었고, 그 후에는 프리드리히 3세가 계승했다. 초기 호엔슈타우펜 왕조는 슈바벤에서 황제령을 늘리고, 거기서 필요한 지원을 얻었지만 교회 세력의 영향은 강력했다. 1152년 프리드리히 1세는 일족인 프랑켄 공국 공작 프리드리히에게 공국을 주었고, 그가 1167년에 죽자 그의 세 아들이 연이어 장악했고, 그중 막내인 필리프는 1198년에 로마 왕으로 선출되었다. 왕위를 놓고 항쟁하는 동안 필리프는 슈바벤의 광대한 할양지로부터 지지를 얻었기 때문에, 1214년에 조카인 프리드리히 2세가 황제가 될 때까지 벨프가의 오토 4세가 황제가 된 사이에도 공국은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손에 남아 있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슈바벤을 적장자인 하인리히 7세에게 주었고, 그의 반란 후에는 또 다른 아들인 콘라트 4세에게 주었다. 후자의 아들인 콘라딘은 1266년에 자신이 시칠리아를 얻기 위해 뷔르템베르크 백작 울리히 2세에 대해 슈바벤을 계승하겠다고 약속했다. 1268년 콘라딘이 사형당한 여파로 공국은 붕괴될 기운이 높아졌고, 슈바벤의 유력자들은 뷔르템베르크 백작, 바덴 변경백, 튀빙겐 궁중백, 호엔촐레른 백작 등의 휘하에 들어갔다.

2. 4. 호엔슈타우펜 왕조 시대

프리드리히 1세는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루돌프의 아들인 베르톨트 및 사위인 체링겐 공작 베르톨트 2세와 싸워야 했고, 1096년에 후자에게 브라이스가우를 양도했다.[1] 1105년 그의 아들인 프리드리히 2세가 아버지의 뒤를 이었고, 그 후에는 프리드리히 3세(후의 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1세)가 계승했다. 초기 호엔슈타우펜가는 슈바벤에서 황제령을 늘리고, 거기서 필요한 지원을 얻었지만 교회 세력의 영향은 강력했다.[1]

1152년 프리드리히 1세는 일족인 프랑켄 공작 프리드리히에게 공국을 주었고, 그가 1167년에 죽자 그의 세 아들이 연이어 장악했고, 그중 막내인 필리프는 1198년에 로마 왕으로 선출되었다. 왕위를 놓고 항쟁하는 동안 필리프는 슈바벤의 광대한 할양지로부터 지지를 얻었기 때문에, 1214년에 조카인 프리드리히 2세가 황제가 될 때까지 벨프가의 오토 4세가 황제가 된 사이에도 공국은 호엔슈타우펜가의 손에 남아 있었다.[1]

프리드리히 2세는 슈바벤을 적장자인 하인리히 7세에게 주었고, 그의 반란 후에는 또 다른 아들인 콘라트 4세에게 주었다. 후자의 아들인 콘라딘은 1266년에 자신이 시칠리아를 얻기 위해 뷔르템베르크 백작 울리히 2세에 대해 슈바벤을 계승하겠다고 약속했다. 1268년 콘라딘이 사형당한 여파로 공국은 붕괴될 기운이 높아졌고, 슈바벤의 유력자들은 뷔르템베르크 백작, 바덴 변경백, 튀빙겐 궁중백, 호엔촐레른 백작 등의 휘하에 들어갔다.[1]

2. 5. 공국 해체 이후

496년 알레만니족은 프랑크 왕국 클로도베쿠스 1세에게 패배하여 프랑크 왕국에 편입되었고, 프랑크 왕국 휘하의 공작들에 의해 통치되었다. 7세기에 알레만니인은 기독교로 개종했고, 아우크스부르크콘스탄츠에 주교구가 설치되었으며, 8세기에는 라이헤나우 수도원장크트갈렌 수도원이 세워졌다.[5]

7세기 알레만니족들은 서서히 프랑크 왕국의 지배에서 벗어났지만, 709년에 헤르스탈의 피핀이 영토를 정복했고, 730년에 그의 아들 카롤루스 마르텔루스가 다시 그들을 속국으로 축소했다.[5] 746년 칸슈타트의 블러드 코트라고 불리는 작전으로 오랫동안 이어왔던 공국의 종말을 고했고, 알레만니 가문은 이제 완전히 프랑크인의 통치하에 들어갔다. 카를로의 아들 피핀 3세는 부족 공작을 폐지하고, 팔라틴 백작 또는 캄머보텐 백작에 의해 알레만니아를 통치했다.[5]

1512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가 제국을 제국 관구로 분할했을 때, 사실상 슈바벤 공국과 동일한 영역을 슈바벤 관구라고 불렀다. 옛 슈바벤 지역은 뷔르템베르크 백작령, 바덴 변경백국, 바이에른 선제후국 서부를 포함하고 있었다.

신성 로마 제국의 해체 기간 동안 슈바벤 관구의 남동부 지역은 바이에른 왕국 (바이에른 슈바벤)에 귀속되었고, 나머지 지역은 주로 뷔르템베르크 왕국바덴 대공국 사이에 분할되었으며, 호엔촐레른 공국들(지그마링겐과 헤칭겐)만이 별개로 남았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부터 뷔르템베르크, 바덴, 호엔촐레른은 바덴뷔르템베르크주로 통합되었다. 슈바벤이라는 이름은 예전 공국의 영역을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데 가끔 사용되지만, 현재 이 명칭의 정확한 사용은 바이에른 슈바벤 Regierungsbezirkde(행정구)에 국한되며, 그 중심지는 아우크스부르크이다.[1]

3. 영역

10세기에 슈바벤 공국이 형성되었을 당시, 공국은 여러 지역(’파기’, ’가우(Gau)’)으로 구성되어 있었다.[4] 이들 지역은 오늘날의 독일, 스위스, 프랑스, 오스트리아에 걸쳐 있었다.

슈바벤 공국의 영역
오늘날 국가지역
독일헤가우(Hegau), 린츠가우(Linzgau), 아르겐가우(Argengau) (린다우), 알가우(Allgäu) (오스트리아 레히 계곡 일부 포함), 켈텐슈타인, 일라르가우 (켐프텐, 메밍겐), 에르팅겐(Ertingen), 폴초츠바르 (비베라흐안데어리스(Biberach an der Riß)), 라마흐가우(Rammachgau), 두리아 (부르가우(Burgau)), 아우그스트가우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 오르테나우(Ortenau) (겐겐바흐(Gengenbach)), 베르톨츠바르 (울름(Ulm), 초이링겐, 팔켄슈타인(Falkenstein)), 네카르가우 (슈투트가르트(Stuttgart)), 슈비거슈탈, 필스가우 (로르흐(Lorch), 슈타우펜임브라이스가우(Staufen im Breisgau)), 트라흐가우, 알브, 넬트링거리스(Nördlinger Ries) (넬트링겐(Nördlingen)), 브라이스가우(Breisgau) (체어링겐(Zähringen)), 알브가우(Albgau)(남슈바르츠발트) (성 블라시우스 수도원(Kloster St. Blasien))
스위스아우그스트가우(Augstgau) (아우구스타 라우리카(Augusta Raurica), 바젤(Basel)), 투르가우주(Thurgau), 취리히가우(Zürichgau) (취리히(Zürich), 아인지델른(Einsiedeln), 엥겔베르크(Engelberg)), 아르가우주(Aargau) (부르군트 왕국(Burgund)과 분쟁 중) (렌츠부르크(Länzbrg))
프랑스노르가우(알자스)(Nordgau) (오늘날 사르베르댕(Sarrewerden)을 제외한 스트라스부르(Strasbourg) 주변 알자스(Alsace) 북부, 거의 바랭주(Bas-Rhin)와 일치 (‘알자스 보쉬(Alsace Bossue)’)), 순드가우(Sundgau) (오늘날 콜마르(Colmar) 주변 알자스 남부, 오트랭주(Haut-Rhin) 및 벨포르 테리토리(Territoire de Belfort) 해당)
오스트리아라인가우(Rheingau) (구 브레겐츠 백작령(Grafschaft Bregenz) 및 오늘날 포어아르베르크주(Vorarlberg)에 위치한 알프스 라인 계곡(Alpenrheintal))



부르카르트 2세(Burkhard II)는 공국 선포 당시 역사적으로 알레만니(Alemannen)의 일부가 아니었던 라에티아 쿠리엔시스(Raetia Curiensis) 백작의 칭호를 빼앗아 공국에 포함시켰다.

3. 1. 오늘날 독일

10세기 슈바벤 공국이 형성될 당시 독일에 속했던 지역은 다음과 같다.[4]

  • 헤가우(Hegau)
  • 린츠가우(Linzgau)
  • 아르겐가우(Argengau) (린다우(Lindau))
  • 알가우(Allgäu) (오늘날 오스트리아 레히 계곡(Lech Valley) 일부 포함)
  • 켈텐슈타인(Keltenstein)
  • 일라르가우(Illargau) (켐프텐(Kempten), 메밍겐(Memmingen))
  • 에르팅겐(Ertingen)
  • 폴초츠바르(Folchotsbaar) (비베라흐안데어리스(Biberach an der Riß))
  • 라마흐가우(Rammachgau)
  • 두리아(Duria) (부르가우(Burgau))
  • 아우그스트가우(Augstgau)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
  • 오르테나우(Ortenau) (겐겐바흐(Gengenbach))
  • 베르톨츠바르(Bertoldsbaar) (울름(Ulm), 초이링겐(Zollern), 팔켄슈타인(Falkenstein))
  • 네카르가우(Neckargau) (슈투트가르트(Stuttgart))
  • 슈비거슈탈(Swiggerstal)
  • 필스가우(Filsgau) (로르흐(Lorch), 슈타우펜임브라이스가우(Staufen im Breisgau))
  • 트라흐가우(Trachgau)
  • 알브(Alb)
  • 넬트링거리스(Nördlinger Ries) (넬트링겐(Nördlingen))
  • 브라이스가우(Breisgau) (체어링겐(Zähringen))
  • 알브가우(Albgau)(남슈바르츠발트) (성 블라시우스 수도원(Kloster St. Blasien))

3. 2. 오늘날 스위스

10세기 슈바벤 공국이 형성될 당시 오늘날 스위스에 해당하는 지역은 다음과 같았다.[4]

  • 아우그스트가우(Augstgau) (아우구스타 라우리카(Augusta Raurica), 바젤(Basel))
  • 투르가우주(Thurgau)
  • 취리히가우(Zürichgau) (취리히(Zürich), 아인지델른(Einsiedeln), 엥겔베르크(Engelberg))
  • 아르가우주(Aargau) (부르군트 왕국(Burgund)과 분쟁 중) (렌츠부르크(Länzbrg))

3. 3. 오늘날 프랑스

노르가우(알자스)(Nordgau): 오늘날 사르베르댕(Sarrewerden)을 제외한 스트라스부르(Strasbourg) 주변 알자스(Alsace) 북부에 위치하며, 거의 바랭주(Bas-Rhin)와 일치한다(’알자스 보쉬(Alsace Bossue)’).[4]

순드가우(Sundgau): 오늘날 콜마르(Colmar) 주변 알자스 남부에 위치하며, 오트랭주(Haut-Rhin) 및 벨포르 테리토리(Territoire de Belfort)에 해당한다.[4]

3. 4. 오늘날 오스트리아

라인가우(Rheingau): 구 브레겐츠 백작령(Grafschaft Bregenz) 및 오늘날 포어아르베르크주(Vorarlberg)에 위치한 알프스 라인 계곡(Alpenrheintal).[4]

참조

[1] 백과사전
[2] 서적 Die Welfen. Herrschaft und Erinnerung (819–1252) Kohlhammer Verlag 2000
[3] 웹사이트 Germany, the Stem Duchies & Marches http://www.friesian.[...] Friesian.com 1945-02-13
[4] 서적 Allgemeiner Historischer Handatlas 1886
[5]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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