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묘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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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묘묵은 일제강점기, 미군정,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까지 활동한 인물이다. 평안남도 중화군 출신으로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유학 후 보스턴 대학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일제강점기 말 친일 행적이 있으며, 수양동우회 사건에 연루되어 검거되기도 했다. 미군정 시기에는 존 하지 미군 24군단 사령관의 통역으로 활동하며 막후 실력자 역할을 했고,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했다. 광복 후에는 영자 신문을 창간하고, 연세대학교 재단 이사, 외교관 등을 역임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포함되었으며, 1957년 영국에서 사망했다.

이묘묵
기본 정보
한자 표기李卯默
가나다 표기이묘묵
로마자 표기Lee Myo-Mook
상세 정보
직업주영 공사
사망 날짜1957년 3월 1일
사망 정보 출처조선일보 1957-03-01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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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이묘묵은 평안남도 중화군 출신 전주 이씨 가문으로, 1915년 평양 광성학교를 졸업하고 1922년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했다. 잠시 공주영명학교 교사로 재직한 후, 1923년 7월 미국 유학을 떠나 1925년 오하이오주 마운트 유니온 대학교를 졸업하고, 시라큐스 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30년 하버드 대학교 대학원을 수료하고, 1931년 보스턴 대학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34년까지 미국에 머물며 시라큐스 대학에서 사학을 강의하였다.

1930년대 중반 귀국 후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1944년에는 연희전문학교 도서관장과 학감을 겸임했다. 1945년 광복과 함께 미군정이 시작되면서 미군 24군단 사령관 존 하지의 통역으로 기용되어 미군정의 막후에서 실력자로 활동했다. 1945년 조선농구협회가 부활되자 초대 회장에 선출되었다.

1949년 UN한국협회 이사장과 UN한국위원단 사무관을 역임했고, 1951년부터 주영국 특명전권공사로 런던에 파견되었다. 1951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6차 국제 연합 총회에 한국대표단으로 참석하였다. 1952년 영국 왕 조지 6세 장례식에 대한민국 대통령 특사로 조문하였고, 1953년 5월 엘리자베스 2세 여왕 대관식에 참석했다.

1949년 6월 초 옥중에 수감된 최능진의 석방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영국에 체류하며 주(駐)영국 대사와 겸 스칸디나비아 대사로 근무하던 중 1957년 2월 8일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택시와 충돌하였으나 경상에 그쳤고, 주영 공사로 재직 중에 영국에서 사망했다.

2.1. 일제 강점기 (1898년 ~ 1945년)

이묘묵은 평안남도 중화군 출신의 전주 이씨 가문이다. 1915년 평양의 광성학교를 졸업하고, 1922년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했다. 잠시 공주영명학교 교사로 재직한 후, 1923년 7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1925년 오하이오주 마운트 유니온 대학교를 졸업하고, 시라큐스 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30년 하버드 대학교 대학원을 수료하고, 1931년 보스턴 대학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34년까지 미국에 머무르며 시라큐스 대학에서 사학을 강의하였다.

1930년대 중반 귀국 후에는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1944년에는 연희전문학교 도서관장과 학감을 겸임했다. 1930년대 후반 수양동우회 사건에 연루되어 검거되었으나 전향서를 제출하고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2.1.1. 친일 행적 논란

1930년대 후반 수양동우회 사건에 연루되어 검거되었다가 전향서를 제출한 뒤, 수양동우회 사건 기소유예자 처분을 받았다. 일제강점기 말기 녹기연맹과 대화숙을 비롯한 여러 친일단체에 적극 가담했다. 연희전문학교 교장 자격으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국민총력조선연맹, 조선임전보국단 등 전시체제 지원 단체에 참여했고, 이광수가 황도사상 선양을 위해 조직한 황도학회 발기인도 지냈다.

2.2. 군정기 (1945년 ~ 1948년)

1947년 5월, 제2차 미소공위 당시 사진이다. 오른쪽부터 여운형, 김규식, 이묘묵, 말리크, 테렌티 스티코프(소련군정 사령관), 허헌이다.

1947년 5월, 제2차 미소공위 당시 사진. 오른쪽부터 여운형, 김규식, 이묘묵, 말리크, 테렌티 스티코프(소련군정 사령관), 허헌
1947년 5월, 제2차 미소공위 당시 사진. 오른쪽부터 여운형, 김규식, 이묘묵, 말리크, 테렌티 스티코프(소련군정 사령관), 허헌


이후 연세대학교 재단 이사로 취임했다. 1945년부터 1952년까지 제1~3대 대한민국 농구 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1957년 2월 27일, 영국에서 사망했다.

2.2.1. 미군정 협력

1945년 광복과 함께 미군정이 시작되면서 미군 24군단 사령관 존 하지의 통역으로 기용되었다. 이때부터 미군정의 막후에서 실력자로 활동했다. 남조선과도입법의원으로 발전하는 비상국민회의에서 평안남도 대표를 맡은 뒤 과도의원 출범을 주도하는 등 외부로 드러나는 활동 외에도, 윤치영이승만의 비서실장직에서 물러나게 하는 등 과도기의 주요 활동을 전담했다. 한편으로 9월 16일에 결성된 한국민주당의 창당에 참여하기도 했다.

1945년 9월 10일 조병옥, 윤보선한민당 대표들은 미 군정장관을 만나 조선인민공화국은 "일본과 협력한 한인집단"에 의해 조직되었으며, 여운형은 "한인들에게 잘 알려진 부일협력 정치인"이라고 주장하였다. 바로 그날 이묘묵은 하지의 개인통역관이 되었다. 그는 명월관에서 미군정 관리들에게 여운형, 안재홍이 잘 알려진 친일파이며 인공은 공산주의적 경향이 있다고 발언했으며, 이러한 발언은 미군정의 상당한 신임을 받았다. 이후 이묘묵은 존 하지 군정청 사령장관의 한국인 비서를 지내기도 했다.

하지와 미군정이 건국준비위원회의 여운형 계열에 대하여 부정적인 시각을 갖게 된 것이나, 이로 인해 결국 좌우합작을 요구하는 만만치 않은 목소리가 묵살되고 단독정부 수립으로 이어진 것, 경찰계에서 조병옥, 장택상, 최경진 등이 득세한 것도 이묘묵의 영향력과 관련이 있다는 설이 떠돌았을 정도로 이 시기에 중대한 역할을 했다.

9월 19일 최규남, 조의설, 김윤경 등과 미 군정청 재무국장을 만나, 연희전문학교를 미 육군병원 또는 법관양성소로 사용하려는 것을 강력하게 반대하고, 학교를 바로 접수하여 연희학교의 정상적인 운영을 할 수 있도록 교섭하였다. 1945년 10월 이승만이 귀국하자 돈암장을 자주 찾았다.

1945년 조선농구협회가 부활되자 초대 회장에 선출되었다. 1947년 연희대학후원회 부이사장, 재단법인 흥한재단 전무이사, 대한체육회 올림픽위원을 맡았으며, 이듬해 서울수렵회 초대회장과 국제사정연구회 부이사장 등을 지냈다.

1946년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 협의원에 지명됐다. 1945년 광복 후에는 미국 군정청을 위해 영자 신문 'Korea Times'를 창간하여 초대 사장을 맡아 점령군과 회견하며, 법질서 유지, 식량과 연료, 경제 인플레이션, 재일 조선인의 존재 등 당면 과제에 대해 언급했다.

2.3.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1948년 ~ 1957년)

제1공화국이 수립될 무렵 이묘묵은 연희대학후원회 부이사장, 재단법인 흥한재단 전무이사, 대한체육회 올림픽위원, 서울수렵회 초대회장, 국제사정연구회 부이사장, 대한농구협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대한민국 농구 협회 회장은 1945년부터 1952년까지 제1~3대를 역임했다.

2.3.1. 외교관 활동

1949년 UN한국협회 이사장과 UN한국위원단 사무관을 역임했고, 8월 20일 민족진영강화위원회 사무총장에 선출되었으며, 1951년부터 주영국 특명전권공사로 런던에 파견되었다. 1951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6차 국제 연합 총회에 장면(단장), 임병직, 장택상, 전규홍, 안연생과 함께 한국대표단으로 참석하였다. 1952년 영국 왕 조지 6세 장례식에 대한민국 대통령 특사로 조문하였다. 1953년 5월 엘리자베스 2세 여왕 대관식에 신익희 등과 한국대표로 참석, 특히 신익희 국회의장을 수석으로 하는 한국 사절단과 함께 처칠 수상을 비롯한 16개 참전국 정상들과 괄목할 외교성과를 거두었다.

1949년 6월 초 옥중에 수감된 최능진의 석방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영국에 체류하며 주(駐)영국 대사와 겸 스칸디나비아 대사로 근무하던 중 1957년 2월 8일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택시와 충돌하였으나 경상에 그쳤다. 주영 공사로 재직 중에 영국에서 사망했다.

3. 사후 평가

이묘묵은 민족문제연구소의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교육/학술 부문, 연세대학교 민주노동당 학생위원회가 발표한 '연세대학교 친일파 명단',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는등 사후에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었다.

3.1. 부정적 평가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교육/학술 부문에 선정되었다. 2005년 연세대학교 교내 단체인 민주노동당 학생위원회가 발표한 '연세대학교 친일파 명단'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사후에는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