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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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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범윤은 1856년 출생하여 1940년 사망한 대한제국 말기의 관료이자 독립운동가이다. 1902년 간도 시찰을 거쳐 1903년 간도관리사로 임명되어 사포대를 조직하고, 러일 전쟁 당시 러시아와 연대하여 일본군과 교전했다. 러일 전쟁 이후 러시아로 망명하여 최재형의 도움으로 연추의병부대를 조직하고, 13도의군, 권업회 등 독립운동 단체에서 활동하며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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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건국훈장 대통령장
건국훈장 대통령장
이름이범윤
원어명李範允
출생일1856년 12월 29일
출생지조선 경기도 고양(현재 동두문구 신설동)
사망일1940년 10월 20일
사망지일제 강점기 조선 경성부
학력한학 수학
국적대한제국
종교무종교
본관전주(全州)
정당무소속
관직 정보
국가대한제국 변계경무서
직책북변간도관리사
임기1903년 5월 3일 ~ 1905년 12월 22일
군주대한제국 조선 고종 이형
섭정총리대신 이근명(前)
가족 관계
형제이범익(배다른 적형)
이범온(배다른 서제)
친인척이인상(백조부)
이인달(친조부)
이원하(백부)
이범욱(6촌 재종형)
이범오(6촌 재종형)
이범진(6촌 재종형)
이범중(6촌 재종형)
이범택(6촌 재종형)
이위종(7촌 재종조카)
부모이경하(부), 재령 이씨 첩실(모)
서훈
서훈[[파일:건국훈장2대통령장.png|x10px]]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년)
외부 링크
웹사이트공훈전자 사료관 "이범윤"

2. 출생과 성장

조선 말기 무관(武官) 출신 이경하(李景夏)의 아들로 1856년 12월 29일 경기도 고양군(현재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신설동)에서 출생했다. 구한말 정치인외교관 이범진(李範晋)의 6촌 재종 아우이며, 구한말 외교관 이위종(李瑋鍾)의 친가 7촌 재종 숙부이다. 한때 경기도 양주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냈으며, 훗날 한성부에서 성장하였다. 1875년부터 1880년까지 5년간 청나라 만주 연길에 체재하였다.

3. 대한제국 관료 활동

1902년 간도 시찰에 임명되기 전까지 이범윤의 경력은 알려져 있지 않다. 이후 간도로 파견된 그는 1903년 간도관리사로 임명되어 간도 지역 조선인에 대한 행정 업무를 전담하였다. 이범윤은 이 지역의 포수들로 자위적 성격의 군대인 사포대를 조직하였는데, 이는 향후 간도 지역 의병운동의 한 기반이 되었다.

1904년 러일 전쟁이 발발하자 이범윤은 러시아 군대와 연대하여 함경북도 지역에서 일본군과 교전했다. 러일 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1906년 그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이끌고 러시아령으로 망명했다.

3. 1. 간도관리사 재임과 러일전쟁

1902년 간도 시찰에 임명된 이범윤은 이듬해인 1903년 간도관리사로 임명되어 간도 지역 조선인에 대한 행정 업무를 전담하였다. 그는 이 지역의 포수들로 자위적 성격의 군대인 사포대를 조직하였는데, 이 사포대는 향후 간도 지역 의병운동의 한 기반이 되었다.

1904년 러일 전쟁이 발발하자 이범윤은 간도관리사 재직 중 러시아 군대와 연대하여 함경북도 지역에서 일본군과 교전했다. 러일 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1906년 이범윤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이끌고 러시아령으로 망명했다.

4. 독립운동

이범윤은 간도 관리사 재직 중 1904년 러일 전쟁이 발발하자, 러시아군과 연합하여 함경북도 지역에서 일본군과 교전했다. 러일 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1906년 이범윤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이끌고 러시아령으로 망명했다.

이 지역에 이미 이민해 와 있었던 최재형의 도움으로 연추의병부대가 조직되었으며, 러시아제 무기로 무장할 수 있었다. 동의회(총장 최재형)와 창의회를 결성하고 연추의병부대 총독에 취임했다. 안중근과 엄의섭 등이 참가한 연추의병부대는 러시아령에 머물면서 수 차례 국내에 진입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4. 1. 13도의군과 성명회 활동

1909년 안중근이토 히로부미 저격 이후 그는 유인석이 이끄는 13도의군(도총재 유인석)에 참가했다. 13도의군은 의병장 출신들이 중심이었으나, 안창호이갑 등 계몽 운동 계열 인사들도 참여하여 연합 조직의 성격을 띠었다. 이범윤은 창의군 총재를 맡았으며, 이 조직은 한일 병합 조약 무효를 주장하는 성명회와 함께 러시아 정부에 의해 해체되었다. 이후 이범윤은 러시아 당국에 체포되어 7개월간 유형 생활을 했다.

4. 2. 권업회와 기타 독립운동 단체 활동

1909년 안중근이토 히로부미 저격 이후 그는 유인석이 이끄는 13도의군(도총재 유인석)에 참가했다. 13도의군은 의병장 출신들이 중심이었으나, 안창호이갑 등 계몽 운동 계열 인사들도 참여하여 연합 조직의 성격을 띠었다. 이범윤은 창의군 총재를 맡았으며, 한일 병합 조약 무효를 주장하는 성명회와 함께 활동했으나, 이들 조직은 러시아 정부에 의해 해체되었다. 이범윤은 러시아 당국에 체포되어 7개월간 유형 생활을 했다.

1911년 연해주로 돌아온 이범윤은 홍범도, 이상설 등과 함께 권업회(회장 최재형)를 조직하고 얼마 후 총재를 맡았다. 블라디보스토크 교외에 “한민학교”를 설립하고, 《권업신문》을 발행했다.

5. 최후

의군부대한독립군단의 총재, 신민부의 참의원 원장으로 추대되는 등 북간도와 연해주 지역 무장 독립 운동을 진행하다가 1940년 경성부에서 병사했다.

6. 사후

대한민국 정부1962년 이범윤의 공헌을 기리기 위해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7. 가족 관계

관계이름
할아버지이인달(李寅達)
아버지이경하
이복 형님이범진
조카이웨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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