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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진 (185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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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범진은 흥선대원군 섭정기 정치가 이경하의 아들로, 1852년에 태어났다. 1879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했으며, 명성황후가 친러 정책을 펼치자 친러파에 합류했다. 농상공부 부대신을 지냈으나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사임하고 춘생문 사건에 연루되어 러시아로 망명했다. 이후 주미 공사, 주러 공사를 역임하며 대한제국의 자율성과 권리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 이후에도 러시아에 남아 외교 활동을 지속했고, 헤이그 특사 파견을 지원하며 항일 의병 투쟁을 후원했다. 1911년 조국의 패망에 절망하여 자결했으며,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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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진 (1852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이범진
한글이범진
한자李範晉
출생일1852년 9월 3일 (음력)
사망일1911년 1월 13일 (58세)
사망 장소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직업관료, 외교관
관직
소속 정당수구파 잔존 후예 세력
통리기무아문 주사 임기1882년 1월 23일 ~ 1882년 4월 30일
홍문관 수찬 임기1884년 2월 29일 ~ 1884년 3월 29일
규장각 강독관 임기1884년 3월 29일 ~ 1885년 3월 29일
승정원 승지 임기1885년 3월 29일 ~ 1888년 12월 8일
승정원 승지 겸 경연관 임기1888년 11월 25일 ~ 1888년 12월 8일
형조참판 임기1888년 12월 8일 ~ 1888년 12월 19일
이조참판 임기1888년 12월 19일 ~ 1890년 4월 23일
호조참판 임기1890년 4월 23일 ~ 1892년 1월 13일
공조참판 임기1892년 2월 29일 ~ 1895년 4월 30일
농상공부대신 임기1895년 8월 8일 ~ 1896년 2월 29일
농상공부대신 겸 법부대신 서리 임기1895년 9월 3일 ~ 1896년 2월 29일
법부대신 임기1896년 2월 29일 ~ 1897년 8월 8일
법부대신 겸 규장각 규장원경 임기1896년 3월 29일 ~ 1897년 1월 8일
법부대신 겸 경무사 임기1897년 1월 18일 ~ 1897년 6월 18일
후임 법부대신한규설
선임 법부대신조병직
외교관 경력
미국 주재 조선국 공사해당사항 없음
미국 주재 대한제국 공사해당사항 없음
프랑스 주재 대한제국 공사해당사항 없음
오스트리아 주재 대한제국 공사해당사항 없음
러시아 주재 대한제국 공사해당사항 없음
개인 정보
종교유교(성리학)
본관전주(全州)
학력1879년 식년문과 병과 급제
아버지이경하
어머니단양 이씨 첩실
형제이범욱(배다른 적형)
이범오(배다른 적형)
이범중(배다른 서제)
이범택(배다른 서제)
자녀이기종(장남)
이위종(차남)
친인척이인달(조부)
이범윤(6촌 재종제)
구경하(사돈)
기타 정보
웹사이트두산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 생애

이범진은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 시기에 걸쳐 활동한 인물로, 이조참판, 형조참판, 공조참판 등을 역임했다. 아관파천 직후 법부대신에 올랐으며,[2] 제2차 헤이그 만국 평화회의에 특사로 파견된 이위종은 그의 차남이다. 대한제국 군주제 부활을 지향했던 독립운동가 이범윤은 그의 육촌 동생이다.

명성황후가 일본의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해 친러 정책을 시작했을 때 친러파에 합류했다. 농상공부 부대신으로 임명되었으나,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사임하고,[1] 1895년 11월 춘생문 사건에 참여했다가 실패하여 러시아로 망명했다.[1]

1896년, 고종의 아관파천을 이끌고 법무 대신으로 친러 내각에 합류했다.[2] 같은 해 주미 전권공사로 임명되어 그로버 클리블랜드 대통령을 만나고, '미시 일기'를 작성했다.[3]

러시아 제국 주재 한국 대사로서 대한제국의 자율성과 권리를 위해 노력했다. 러시아 공사 니콜라이 G. 마티우닌의 벌목권 연장과 러시아군의 용암포 점령에 반대했다.[4]

1905년 을사 조약 체결로 러시아 내 한국 공사로서의 권한을 상실했으나, 성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훈장 1등급을 받았다. 1907년 헤이그 만국 평화 회의에 참석하는 한국 대표들을 지원했으나, 러일 밀약으로 러시아의 지원을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대표들의 선언문을 프랑스어로 작성하며 지원했다.[4]

헤이그 특사 사건 이후 연해주에서 한국 신문사 설립을 지원하고, 최재형, 이범윤동의회 조직에 아들 이위종과 1만 루블을 지원하는 등 의병을 후원했다.[4]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에 비관하여 1911년 자결했다. 유산은 블라디보스토크샌프란시스코의 한국 사회에 남겨져 젊은 세대 교육에 사용되었다. 사후 1963년 대통령 표창, 1991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1]

2. 1. 가계와 초기 생애

이범진은 조선 말기 무관(武官)으로 형조판서, 판의금부사, 어영대장 등을 지낸 이경하의 서자(庶子)였다. 1852년 흥선 대원군 섭정기 시절 저명한 정치가였던 이경하의 아들로 태어났다.[1] 이범진의 어머니는 첩이었으며, 가계는 세종대왕의 다섯째 아들인 광평대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범진의 집안은 문과 과거 시험이 어려워지면서 무반 가문으로 변모한 양반 가문 중 하나였다.

1879년, 이범진은 문과에 급제했다.[1] 서자라는 낮은 신분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빠르게 정부 내에서 승진했다. 1880년 7월 육품에 임명된 후, 1881년 8월에는 통례원 좌통례(三品)에 임명되었다. 이는 서자 출신으로 이범진과 비슷한 시기에 관직에 진출한 김가진보다 훨씬 빠른 속도였다. 이러한 빠른 승진은 여흥 민씨와의 연계를 제공한 이범진의 가문 덕분이었다. 임오군란 이후, 이범진은 청나라에 대한 반감을 갖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사건 이후 청나라의 개입으로 처벌받았고, 이범진은 한국 내에서 중국인들과 개인적인 갈등을 겪으면서 반감이 더욱 깊어졌다.

2. 2. 관직 생활

고종 때인 1873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879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고종과 민왕후의 총애를 받았다.[1] 1880년 7월 육품에 임명된 후, 1881년 8월에는 통례원 좌통례(三品)에 임명되었다. 이는 서자 출신으로 비슷한 시기에 관직에 진출한 김가진보다 훨씬 빠른 속도였다. 임오군란 이후, 이범진은 청나라에 대한 반감을 갖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사건 이후 청나라의 개입으로 처벌을 받았고, 이범진은 한국 내에서 중국인들과 개인적인 갈등을 겪으면서 반감이 더욱 깊어졌다.

명성황후가 일본의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해 친러 정책을 시작했을 때 친러파에 합류했다. 농상공부 부대신으로 임명되었지만, 을미사변으로 친일파가 득세하여 모든 공직에서 물러났다.[1] 1895년 10월에 춘생문 사건으로 고종을 피신시키려다 실패하고 중국으로 피신했다가 1896년 귀국했다. 그후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시킨 아관파천에 성공하여 친러 내각의 법부대신에 임명되었다.[9] 법부대신 이범진은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배후를 캐는데 주력하다가 일본 정부가 가장 기피하는 인물이 되었다.

일본의 압박으로 신변이 위험해지자 고종의 배려로 1896년 말 주미 공사로 떠나 3년 동안 미국 전권 공사로 근무했다. 미국에 머무는 동안, 이범진은 일기를 썼고, 이는 후에 '미시 일기'로 알려지게 되었다.[3] 1899년 중반에 러시아, 프랑스, 오스트리아 3국 겸임 공사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가 1900년 초에야 파리에 부임했다. 이 당시 대한제국은 일본의 견제와 간섭을 피하고자 러시아와의 외교관계를 강화시켜 나갔다. 1901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상주하는 초대 주러 전권공사로 임명되어 대한제국의 주권을 지키고자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특히 일제의 감시를 피해 고종 황제와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 황제 사이의 이해를 증진시키고자 가교 역할을 충실하게 했다.

러시아 주재 한국 대사로서, 이범진은 대한제국의 자율성과 권리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러시아 주재 한국 공사 니콜라이 G. 마티우닌이 벌목권을 연장하려 하자, 이범진은 그 계약에 반대했다. 더 나아가, 러시아군이 용암포를 점령했을 때, 이범진은 한국의 주권을 보호하기 위해 그 점령에 반대했다.[4] 일본군이 무력으로 한국을 점령하자, 이범진은 한국으로 귀국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외무대신의 명령을 어기고, 러일 전쟁이 끝날 때까지 러시아 공사 직을 유지했다. 그는 오히려 일본의 귀국 압력을 무시하고 러시아에 머물라는 황제의 명령을 따랐다.[5] 러시아 정부는 이범진에게 매 3개월마다 7325RUB을 지급하며 한국에서의 일본의 폭정에 반대하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이 재정 지원은 1904년 2월부터 1905년 12월까지 지급되었다. 비공식 특사로서, 이범진은 외교 서한을 니콜라이 2세에게 전달하며 황제를 보좌했다.[4] 그러나, 1905년 을사 조약이 체결되면서 러시아 내 한국 공사로서의 그의 권한은 상실되었고, 회색빛 정치적 망명이 시작되었다.[10]

2. 3. 아관파천과 친러 내각

고종이 1896년 2월 11일 왕태자(후의 순종)와 함께 왕궁을 탈출하여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아관파천)을 성공시킨 중심 인물 중 한 명이다.[9] 아관파천으로 친러 내각이 구성되면서 이범진은 법무 대신에 임명되었다.[2] 그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배후를 밝히는 데 주력하여 일본 정부가 가장 꺼리는 인물이 되었다.

2. 4. 주미·주러 공사 시절

1896년 말, 고종의 배려로 주미 공사로 임명되어 3년 동안 미국 전권 공사로 근무했다.[1] 미국에 도착한 그는 그로버 클리블랜드 대통령을 만나 9월 11일 한국 특사 교체를 발표했다.[3] 미국에 머무는 동안, 이범진은 일기를 썼고, 이는 후에 '미시 일기'로 알려지게 되었다.[3]

1899년 중반에는 러시아, 프랑스, 오스트리아 3국 겸임 공사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가 1900년 초에야 파리에 부임했다. 1901년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상주하는 초대 주러 전권공사로 임명되어 대한제국의 주권을 지키고자 노력했다.[1] 특히 일제의 감시를 피해 고종 황제와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 황제 사이의 이해를 증진시키고자 가교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고 외국 주재 공사관을 폐쇄, 외교관 철수를 명령했으나, 이범진은 이에 불응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계속 주재했다.[1] 1906년 일제의 강압으로 공사관이 폐쇄된 이후에는 주거지를 옮겨 1910년까지 여권 발급 등 공사 업무와 비공식적인 외교 활동을 통해 국권 회복에 주력했다.

러시아 주재 한국 대사로서, 이범진은 대한제국의 자율성과 권리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러시아 주재 한국 공사 니콜라이 G. 마티우닌이 벌목권을 연장하려 하자, 이범진은 그 계약에 반대했다. 더 나아가, 러시아군이 용암포를 점령했을 때, 이범진은 한국의 주권을 보호하기 위해 그 점령에 반대했다.[4]

러일 전쟁이 끝날 때까지 러시아 공사 직을 유지했다.[5] 러시아 정부는 이범진에게 매 3개월마다 7325루블을 지급하며 한국에서의 일본의 폭정에 반대하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이 재정 지원은 1904년 2월부터 1905년 12월까지 지급되었다. 비공식 특사로서, 이범진은 외교 서한을 니콜라이 2세에게 전달하며 황제를 보좌했다.[4] 그러나, 1905년 을사 조약이 체결되면서 러시아 내 한국 공사로서의 그의 권한은 상실되었고, 회색빛 정치적 망명이 시작되었다. 러시아에서 그는 성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훈장 1등급을 받았다.[4]

2. 5. 항일 의병 투쟁 지원과 헤이그 특사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고 외국 주재 공사관을 폐쇄, 외교관 철수를 명령했으나, 이범진은 이에 불응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계속 주재했다.[1] 1906년 일제의 강압으로 공사관이 폐쇄된 후에도 주거지를 옮겨 1910년까지 공사업무와 비공식 외교활동으로 국권 회복에 힘썼다.

1907년 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대한제국 특사단을 파견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고, 영어, 프랑스어, 러시아어에 능통한 아들 이위종이상설, 이준과 함께 헤이그에 보냈다. 또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특사단의 신변 보호를 청원하여 특사단이 안전하게 도착하도록 도왔다.[1]

1908년에는 아들 이위종에게 10000RUB을 주어 연해주에 파견, 항일 의병단체의 무장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했다. 이 자금은 의병 무장에 사용되었고, 이위종은 무장 독립운동 단체인 동의회 조직과 활동에 핵심 역할을 했다. (10000RUB은 현재 가치로 10억원 이상으로 추정됨)[1]

2. 6. 최후

1911년 1월 26일, 조국의 패망에 절망하여 목을 매어 자결했다. 자결할 때 고통을 피하고자 머리에 권총 3발을 쏘았으나 모두 빗나가 벽과 천정에 박혔다. 당시 서울 주재 러시아 총영사 소모프는 이범진의 자살을 “적들에게 가장 잔인하고 확실한 복수”라고 평가하며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1] 그의 유해는 상트페테르부르크 교외에 있는 우스펜스키 묘지(현재의 북방묘지)에 안장되었으나 소련 시절의 대대적인 묘지 재구획 공사로 멸실되어 지금까지 찾을 수 없다. 이러한 내용을 알게 된 김대중 대통령은 그가 묻혔을 곳으로 추정하는 곳에 순국비를 세우게 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이범진은 순국 시에 고종에게 아래와 같은 내용의 유서를 남겼다. 또한 니콜라이 2세 러시아 황제 그리고 서울에 있는 장남 이기종에게도 비슷한 내용의 유서를 남겼다.

'''태황제폐하께'''

'''우리 대한제국은 패망했습니다. 폐하께서는 모든 권력을 잃었습니다. 신은 적을 토벌할 수도, 복수할 수도 없어서 깊은 절망에 빠져 있습니다. 국권을 회복할 방책이 없다면 더 이상 살아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자결 외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신은 격분의 정을 이겨낼 수 없기에 오늘 목숨을 끊습니다.'''

그의 끈질긴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암울한 운명은 변하지 않았다. 한국이 일본에 병합되자, 이범진은 그 사실에 큰 고통을 느끼고 자결했다.[4] 사후, 이범진은 그의 유산을 블라디보스토크샌프란시스코의 한국 사회에 남겼다. 단기적인 저항이 헛될 것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이범진은 그의 유산을 젊은 세대를 교육하는 데 사용하도록 수혜자들에게 강조했다.

사후에 이범진은 1963년 대통령 표창을 받았으며, 1991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1]

3. 사후


  •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1]
  • 차남 이위종은 1907년 헤이그 특사로 파견되어 을사늑약이 일제의 강압으로 체결되었음을 각국 기자들 앞에서 폭로했다. 그는 러시아 블라디미르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제1차 세계 대전에 제정 러시아 장교로 참전했으며, 볼셰비키 장교로 전향하여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공을 세워 적기 최고 무공훈장을 받았다.

4. 평가

이범진은 후대에 와서 러시아와의 정치적인 친분 때문에 친러파로 평가받기도 한다. 그러나 이범진은 결코 러시아를 위해 일한 적이 없다. 당시 대한제국은 일본을 제어하기 위해 러시아의 힘이 필요했으며, 러시아 역시 동아시아에서의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대한제국과의 긴밀한 외교 관계가 필요했다. 하지만 러시아도 다른 제국주의 열강들과 마찬가지로 조선의 자원과 철도 부설 등에서 자국의 이익을 취하려 했으며, 실제로 압록강 주변의 산림 채벌권을 얻기도 했다.[1]

이범진은 러시아의 대한반도 수탈 정책에 저항하다가 단기간이지만 전권 공사직에서 파직되기도 했다. 그는 조국의 독립과 이익을 우선시한다는 점에서, 무조건적으로 러시아를 추종하는 친러 사대주의자가 아니었다. 또한 조선 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합종연횡하는 친일, 친청 세력과는 전혀 다른 외교관이었다고 할 수 있다.[1]

5. 가족 관계

관계이름
고조부이의헌(李義獻)
종증조부이문연(李文淵)
재종조부이인두(李寅斗)
증조부이복연(李復淵)
조부이인달(李寅達)
백부이원하(李元夏)
숙부이정하(李貞夏) (재종조부 이인두에게 출계)
아버지이경하(李景夏)
생모단양 이씨 (첩실)
적모해주 오씨 부인
계적모풍양 조씨 부인
서모재령 이씨 (첩실)
배다른 동생이범중
서모수안 이씨 (첩실)
배다른 동생이범택
배우자부인
장남이기종(李璣鍾, 1873년 ~ 1931년) - 1894년 식년 진사시 3등 합격[11]
장자부능성 구씨 부인(綾城 具氏 夫人) - 구경하(具慶下)의 여식
차남이위종(李瑋鍾, 1884년 ~ ?)
차자부엘리자베타 발레리아노브나 놀켄(E. V. Nolken)



이범진은 이기종과 이위종 두 아들을 두었다. 두 아들 모두 대한제국의 관리였으며, 일제의 한국 지배에 저항했다. 첫째 아들 이기종은 1902년 한국으로 돌아와 군부 포병 부장과 법부 법무국장으로 대한제국 관료로 봉직했다. 러일 전쟁에서 일본의 승리가 확실해지자, 이기종은 관직에서 사퇴했다. 그는 아버지와 동생의 끈질긴 저항으로 인해 일본의 감시를 받았다. 이토 히로부미가 1909년 암살된 후, 그는 체포되었다.[6]

6. 수상

수여 내용시기비고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991년사후 추서[1]
대통령 표창1963년사후 추서[1]
태극훈장 2등급1901년 2월 22일[7]
성 알렉산드르 넵스키 훈장 1등급러시아 제국


참조

[1] 웹사이트 https://encykorea.ak[...] 2023-08-12
[2] 웹사이트 (2) 조선의 신내각 https://db.history.g[...]
[3] 뉴스 "미국이 너무 부럽다"…조선 외교관의 일기 들여다보니 https://www.hankyung[...] 2023-08-13
[4] 웹사이트 이범진 https://e-gonghun.mp[...]
[5] 웹사이트 이범진 https://encykorea.ak[...] 2023-08-13
[6] 웹사이트 https://www.hani.co.[...]
[7] 웹사이트 https://sillok.histo[...]
[8] 웹사이트 이범진(李範晉) http://encykorea.aks[...] 2022-08-24
[9] 서적 日露戦争と大韓帝国 : 日露開戦の「定説」をくつがえす https://ndlsearch.nd[...] 高文研
[10] 학술지 ロシア資料から見た駐露公使李範晋の自決 https://hdl.handle.n[...] 長崎県立大学 2008-12
[11] 웹사이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자료 데이터 http://people.aks.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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