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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구 (188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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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순구는 1884년 경상도 월성에서 출생하여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 대한제국 시대에 항일 의병 활동을 하였으며, 1910년 경술국치 이후에는 승려로 수도 생활을 하다가 만주 지린성으로 피신하여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8.15 광복 후 한국독립당에 복당하여 활동했으며,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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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구 (1884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병역
경력
서훈
웹사이트

2. 생애

이순구는 1884년 경상북도 월성에서 태어나 대한제국 시기 잠시 관료 생활을 하다가 항일 의병 활동에 투신했다. 정용기 의병 부대에서 활동하며 형 이한구와 함께 싸웠으나, 전투 중 형을 잃는 아픔을 겪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잠시 불교에 귀의했다가 환속 후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의 길을 모색했다. 광복 후 귀국하여 한국독립당에서 활동했으며, 말년에는 개신교로 개종하고 해외 여러 국가에서 잠시 체류하기도 했다. 1983년 향년 100세로 별세했다.

2. 1. 출생 및 성장

1884년 경상도 월성(현 경상북도 경주시)에서 태어났다.

2. 2. 대한제국 시대 항일 의병 활동

1901년부터 1905년까지 대한제국의 하위 관료로 잠시 일하다가 관직에서 물러났다. 1906년 3월, 경상북도 영천에서 정용기가 아버지의 명을 받들어 의병을 일으키자, 친형인 중군장 이한구와 함께 경상북도 군위로 나아가 의병에 참여했다. 그는 의병 진중에서 실기(實記)를 초집하는 임무를 맡아 활동했다.

그러나 1907년 10월 7일 입암 전투에서 초모장 정용기와 친형 이한구 등 여러 장령들이 전사하는 비극을 겪었다. 이후 정환직이 이끄는 의병 진영에서 실무 간부 대표로 활동을 이어갔으나, 결국 의병대는 전투에서 패배하였다. 이에 동료 간부였던 서종락 등과 함께 후일을 도모하며 귀가하였다.

2. 3.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

1910년 경술국치 이후, 1911년 2월부터 1913년 2월까지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법주사에서 출가하여 '''양지'''(壤地)라는 법명으로 불교 승려 생활을 하였다. 1913년 2월에 환속하였으며, 1914년에는 우재룡, 권영만 등 이전 의병대 간부 몇몇과 교류하며 활동하다가 중화민국 만주 지린성 지린으로 가족과 함께 이주하였다.

2. 4. 8.15 광복 이후 활동

1945년 8월 15일 중화민국 타이완성 타이중시에서 광복을 맞이하였다. 이듬해인 1946년 5월 20일 대한민국으로 귀국하였으며, 같은 해 11월 26일 한국독립당에 복당하였다. 1959년에는 불교를 떠나 개신교로 개종하였다. 1960년 1월 31일에는 한국독립당 대표전임고문으로 임명되었다. 1968년 5월 31일에는 첫째 아들 이상길(李祥桔, 1899~1968)이 향년 70세로 세상을 떠나는 아픔을 겪었다. 1969년 11월 18일 한국독립당을 최종적으로 탈당하였다. 1972년에는 부인과 사별하였다. 이후 1973년부터 1978년까지 차남과 삼남 내외를 따라 영국, 태국, 중화인민공화국, 싱가포르, 베트남, 중화민국 타이완 등지에서 잠시 머물렀으며, 1978년 대한민국으로 다시 돌아왔다.

2. 5. 최후

배우자와 장남, 맏사위, 큰손자를 먼저 떠나보낸 후, 1983년 9월 19일 향년 100세로 별세하였다. 별세 당시 유족으로는 맏며느리와 친손자녀, 맏딸과 외손자녀, 차남 부부, 차녀 부부, 삼남 부부 및 증손과 고손 등이 있었다. 장남과 맏사위는 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상태였다.

3. 사후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1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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