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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좌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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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인좌의 난은 1728년 이인좌를 중심으로 일어난 반란으로, 소론 강경파가 주도하고 사회적 불만과 정치적 갈등이 배경이 되었다. 신임사화 이후 실각한 소론이 영조 즉위에 불만을 품고 밀풍군을 추대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며, 과도한 세금과 지주 착취에 시달리던 백성들의 불만이 사회적 배경으로 작용했다. 이인좌는 청주를 점령했으나, 정부의 진압으로 3개월 만에 실패했다. 난 이후 소론의 세력이 약화되고 영남 지역에 대한 차별이 발생했으며, 영조는 당쟁 종식을 위한 탕평책을 추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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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준론 - 김일경 (1662년)
    김일경은 조선 후기 소론 강경파 문신으로, 신임옥사를 주도하여 노론을 축출하는 데 기여했으나, 영조 즉위 후 유배되어 능지처참되었으며, 후에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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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좌의 난 - [전쟁]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기본 정보
분쟁이인좌의 난
다른 이름무신란
로마자 표기Yi Injwaui nan
한자 표기李麟佐의 亂
로마자 표기(무신란)Musillan
한자 표기(무신란)戊申亂
날짜1728년 3월 15일—4월 19일
장소경기도
결과정부 승리, 반란 진압
관련 사건영조
교전 세력
교전국 1이인좌의 반란군
지휘관 1이인좌
정희량
태인현감 박필
정세윤
신천영
청주목사 권서봉
이기좌
청안현감 목함경
곽장
평안감사 이사성
총융사 김중기
정계윤
박상
포도대장 남태징
전라감사 정사효
담양부사 심유현
교전국 2조선 조정
지휘관 2오명항
훈련대장 이삼
종사관 박문수
경상감사 황선
충청병사 이봉상
경상우병사 이시번
성주목사 이보혁
선산부사 박필건
청주영장 남연년
진주영장 이석복
안동영장 김정상
상주영장 한속
곤양군수 우하형
안성군수 민제만
초계군수 정양빈
고성현감 유언철
거창좌수 이술원
군관 홍림
이홍무
병력 170,000명 이상
병력 2오명항의 오군영 2,300명, 기타 수천 명
사상자 1전멸
사상자 2보통

2. 명칭

'''이인좌-정희량의 난'''(李麟佐ㅡ鄭希亮의 亂)은 총대장 이인좌가 초기에 진압당했을 때 정희량이 이끌은 영남군이 오히려 최후까지 저항한 결과를 반영한 명칭이다.[3] 이 난은 녹색 피로안 반란 또는 무신란으로도 알려져 있다.[3]

3. 배경

신임사화 이후 실각했던 노론영조의 즉위와 동시에 다시 집권하였다. 노론은 이전에 노론 4대신을 무고소론김일경목호룡을 처형하였다. 이에 소론 잔당들은 불만을 품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4] 1727년(영조 3년) 음력 7월 1일, 노론 일부가 실각하자, 이듬해 음력 3월에 이인좌, 김영해, 정희량, 박필현, 심유현 등이 주동이 되어 밀풍군 탄(坦)을 추대하고 반란을 일으켰다.[4]

경종은 재위 기간 동안 세자 시절부터 심한 병을 앓았고, 국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했다.[2] 노론경종에게 후사가 없고 병이 심하다는 이유로 연잉군(후의 영조)의 책봉과 섭정을 서둘렀다.[2] 반면 소론경종 보호를 명분으로 섭정을 주장했으나, 경종이 즉위 4년 만에 승하하고 영조가 즉위하자 소론의 섭정 명분은 비판받고 노론의 입지가 회복되었다.[2]

1724년(경종 재위) 경종이 죽고 영조가 즉위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영조는 즉위 직후 신임사 사건으로 유배되었던 민진원을 석방하였다. 이는 전환점이 되었고, 소론의 대표적인 인물인 김일경, 유봉휘, 최석항 등을 비판하는 상소가 잇따랐다.[4] 영조는 김일경을 유배하고 신임사 사건의 주동자였던 목호룡을 처벌했다. 1725년(영조 재위)에는 노론 소속인 민진원, 정호, 이관명 등이 고위직에 임명되었고, 신임사 사건이 역모로 드러나면서 관련자들이 처형되어 노론은 중앙 정부에서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4]

3. 1. 사회적 배경

조선은 사회적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에 놓여 있었다. 일반 백성들은 다양한 세금 부담과 지주 계급의 경제적 착취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특히 군역과 관련된 부담이 컸다. 당시 일반 백성들은 군역에 직접 참여하는 대신 ‘군포’라는 군역포세를 납부해야 했다. 그러나 군포 징수 과정에서 노인, 어린아이, 심지어 사망자에게까지 징수되는 경우가 발생했다.[4] 군포를 감당할 수 없는 백성들은 유랑민이 되어 떠돌아다녔고, 그중 일부는 산적떼를 형성하여 관아와 지주들을 공격했다. 당시 전주 전라도의 산적들은 창과 대포를 지닌 100명이 넘는 인원으로 구성되었고, 두목은 갑옷을 입고 말을 탔다는 점에서 상당한 규모와 지휘 체계를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상인, 승려, 백정 등과 연합하여 세력을 확장하고 안전과 근거지를 강화하기도 했다.[4] 당국에 대한 저항 사건도 빈번하게 발생했다. 영덕군 경상도에서는 지방 관리와 징세관을 위협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광주 전라도에서는 봉기가 일어났다.[4]

중앙 정부의 정치 상황 또한 불안정했다. 노론은 ‘정유독대’ 사건 이후 경종을 옹립하고 이어 영조를 다음 왕위 계승자로 지지했다.[4] "효종의 계통과 전왕들의 혈육은 오직 세자와 계승자에게만 있다"는 대비의 말을 이용하여 세자의 폐위를 노린다는 의혹을 불식시키며 영조의 계승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4]

소론노론의 움직임에 대해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남구만, 최석정 등은 이미 은퇴한 상태였고, 세력이 약화된 상황에서 박세채 등의 문인이 노론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다.[4] 남인 또한 경신환국, 갑술환국, 신사옥사 등의 사건으로 세력이 약화되어 있었다.[4] 결과적으로 노론은 세자의 섭정을 추진했으나, 소론과 남인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고, 권상유, 박지원 등 노론 내부 일부 세력 또한 반대에 동조했다. 결국 노론은 1721년(경종 재위)부터 1722년(경종 재위)에 걸친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정계에서 사라지게 되었다.[4]

3. 2. 정치적 배경

신임사화 이후 노론은 실각하였으나, 영조 즉위와 함께 다시 권력을 잡았다. 노론은 소론김일경, 목호룡을 처형하였고, 이에 소론 잔당은 불만을 품고 기회를 엿보았다.[4] 1727년(영조 3년) 노론 일부가 실각하자, 이듬해 이인좌, 김영해, 정희량, 박필현, 심유현 등이 밀풍군 탄(坦)을 추대하고 반란을 일으켰다.[4]

조선왕조는 사회적으로 혼란스러웠다. 백성들은 과도한 세금과 지주 계급의 착취로 고통받았으며, 특히 군역 관련 부담이 컸다. 군포 징수 과정에서 노인, 어린아이, 사망자에게까지 징수되는 폐단이 발생했다.[4] 군포를 감당할 수 없는 백성들은 유랑민이 되거나 산적떼를 형성하여 관아와 지주들을 공격했다. 전주 전라도의 산적들은 창과 대포로 무장한 100명이 넘는 규모였으며, 상인, 승려, 백정 등과 연합하기도 했다.[4] 영덕군 경상도, 광주 전라도 등에서 당국에 대한 저항 사건도 빈번하게 발생했다.[4]

중앙 정부의 정치 상황 역시 불안정했다. 노론은 ‘정유독대’ 사건 이후 경종을 옹립하고 영조를 왕위 계승자로 지지했다.[4] 소론남인은 세력 약화로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노론은 세자의 섭정을 추진했으나, 소론, 남인 및 노론 내부 일부 세력의 반대로 1721년(경종 재위)부터 1722년(경종 재위)에 걸쳐 정계에서 사라지게 되었다.[4]

경종은 병약하여 국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했고, 노론경종에게 후사가 없고 병이 깊다는 이유로 연잉군(후의 영조)의 책봉과 섭정을 서둘렀다.[2] 소론경종 보호를 명분으로 섭정을 주장했으나, 경종이 승하하고 영조가 즉위하면서 소론의 섭정 명분은 비판받고 노론의 입지가 회복되었다.[2]

1724년(경종 재위) 경종이 죽고 영조가 즉위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영조신임사 사건으로 유배되었던 민진원을 석방하고, 소론의 김일경을 유배하고 목호룡을 처벌했다. 1725년(영조 재위)에는 노론 소속 인사들이 고위직에 임명되고 신임사 사건이 역모로 드러나면서 관련자들이 처형되어 노론은 중앙 정부에서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4]

4. 준비 과정

1725년(영조 1년) 김일경이 실각하자 소론 내에서 무신당이 형성되었고, 박필현과 이유익은 한세홍, 이인좌 등 남인 인물들을 규합하였다. 이들은 영조와 노론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정권을 되찾기 위해 노론을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4] 무신당은 영조 즉위의 정통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소현세자의 증손인 이담을 옹립하려 했다. 또한 "변방의 소란에 대해서는 서울에서 대응한다"는 전략을 세웠는데, 이는 당시 불안정한 사회 상황을 이용하려는 의도였다.[4]

이들은 경종의 죽음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고, 영조가 숙종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주장을 내세워 영조를 폐위하고 소현세자의 증손인 밀풍군 담을 왕위에 앉히려 했다. 이러한 주장은 반란을 정당화하고 추종자들을 모으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었다.[2]

중앙과 지방에서 반란 준비 과정에 문제가 발생했다. 중앙에서는 4월에 반란을 계획했으나, 지방에서는 3월 초부터 군사를 모으고 있었다. 1727년(영조 3년) 정미환국으로 노론이 실각하고 영조가 소론과 남인의 일부 세력을 등용하면서 무신당은 내분을 겪었고, 박필현, 한세홍, 이유익이 주도하는 중앙의 반란 계획은 일시 중단되었다.[4]

이인좌와 정세윤을 중심으로 지방에서는 반란 준비가 계속되었다. 이인좌는 안동과 상주는 정홍수에게, 거창과 함안은 정희량에게 반란 준비를 맡겼고, 자신은 경기 지역을 담당했다. 이호와 정세윤은 호남에서 반란을 준비했다.[4]

1728년 3월 초, 안성, 평택, 양성, 괴산 등지에 양반 약 300명과 기병 약 50명을 포함한 군사들이 모였다. 그러나 이들은 장비가 부족하고 전력이 약했다. 소사평으로 이동하여 무기와 말을 보충하고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으며, 가천역에서 말을 징발하고 여러 지역의 부유한 사람들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았다. 또한 정치 선전을 통해 군수품과 식량을 확보하고 병사를 모집했다.[4]

중앙 지도부는 평안도 군인으로 복무 중이던 이사성과 긴밀히 접촉했고, 박필현 등과도 반란을 준비했다. 무신당 소속인 박필현, 이유익, 심유현 등은 경종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자신들의 정치적 지위 상실 가능성에 위협을 느껴 남인들을 규합하고 영조와 노론을 제거하려 했다. 이들은 담양에서 군사를 훈련하고 화약을 훔쳐 한양으로 운반하려 했으며, 고부의 송하, 부안의 김수종, 순창의 양익태와 연합을 맺고 위조 문서를 전주와 남원에 유포했다.[4]

3월 12일, 안동에서 이웅보 등이 반란을 선동하려 했으나 지역 주민들의 비협조로 실패했다. 그러나 이웅보는 아음과 거청에서 군대를 모집하는 데 성공했지만, 지리적 여건 때문에 반군이 다른 지역으로 확대되기는 어려웠다.[4]

3월 14일, 반란 계획이 발각되었고, 최규서와 김중만 등 지지자들은 각 지역에서 군대 집결을 주장했다. 경기도 각지에서 반군의 움직임이 보고되자 영조는 서울 성문을 닫고 관군을 동원하여 방어를 강화했다.[4]

4. 1. 세력 규합

이인좌는 청주를 습격하여 병사(兵使) 이봉상을 죽이고 병졸을 모아 스스로 대원수(大元首)라 칭하며 사방으로 격문을 돌렸다. 격문의 요지는 경종의 죽음은 자연스러운 죽음이 아니라 흉악한 무리(즉 영조와 노론 세력)에 의한 독살이고, 연잉군(영조)은 숙종의 왕자가 아니므로, 왕대비의 밀조(密調)를 받아 경종의 원수를 갚고 소현세자의 적파손(嫡派孫)인 밀풍군 탄(坦)을 왕으로 세워 왕통을 바르게 한다는 내용이었다.[7] 모든 군사들은 경종을 애도한다는 뜻에서 상복과 같은 흰옷을 입었다.

1725년(영조 1년) 김일경이 실각하자 소론 내에서 박필현과 이유익이 이끈 무신당이 형성되었고, 이들은 한세홍, 이인좌 등 남인 인물들을 규합하였다. 이들은 노론과 영조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고, 정권을 되찾기 위해서는 노론을 제거해야 한다고 믿었다.[4]

무신당은 영조 즉위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소현세자의 증손인 이담을 옹립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변방의 소란에 대해서는 서울에서 대응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이 전략은 당시 불안정한 사회 상황을 이용한 것이었다. 이러한 시도는 이인좌와 정세윤의 역할에 의존했다. 남인 출신인 이인좌는 당시 관직 진출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는 박필현 등 측근들과 함께 반란을 계획하고 안성의 이호, 과천의 이일좌, 거제의 정희량, 충주(충주)의 민원보 등을 규합했다. 또한 영남 지역의 유력 인사들과 접촉하여 남인이라는 동일한 정치적 배경을 이용했다. 따라서 이인좌는 경기, 호서, 영남 세력을 중재하는 역할을 하였다. 반면 정세윤은 1724년(영조 즉위년) 녹림당을 조직하고 나주의 나성해와 연합하여 600~700명의 난민들을 기반으로 하였다. 무신당은 녹림당을 주력으로 삼고 이인좌에게 지휘를 맡기려 했다.[4]

경종의 죽음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고 영조가 숙종의 친자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명분으로 영조를 폐위하고 소현세자의 증손인 밀풍군 담을 왕으로 세우려 하였다. 이러한 의도는 추종자들을 결집시키고 반란을 정당화하며 여론을 조작하는 데 이용되었다. 1725년(영조 1년)부터 박필현 등은 단군 사상을 바탕으로 각 지역에서 섭정 세력에 동조하는 인물들을 선별적으로 규합했다.[2]

수도와 지방에서 가담한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2]

수도이하(李河), 양명하(梁命夏), 윤덕유(尹德裕)
지방안성의 정준유(鄭遵儒, 후에 화량으로 개명), 은진의 나만치(羅萬致), 여수의 조덕규(趙德奎), 이천의 임서호(任瑞虎), 안성의 정세윤(鄭世胤), 진위의 이호(李昈), 충주의 민원보(閔元普), 청주의 이인좌, 청주의 신천영(申天永), 상주의 김홍수(金弘壽), 과천의 이일좌(李日佐)



평안병사(平安兵使) 이사성 · 총융사 김중기 · 금군별장(禁軍別將) 남태징 등과도 연계하였다.[2] 그들은 경종의 죽음에 대한 의혹을 경종의 죽음을 목격한 신씨(沈氏) 왕비의 동생 심유현(沈兪賢)과 연관시켜 소문을 퍼뜨렸다. 그 결과 전국적으로 소문과 익명의 편지 사건이 발생하였고, 그들은 가병(家丁)과 노비를 모집하고, 명화적(明火賊) 등을 군대로 동원하였다.[2]

4. 2. 반란 계획의 차질

최규서가 조정에 반란 계획을 고변하면서 반군의 계획은 무너졌다. 당초 중앙에서는 4월에 반란을 계획했으나, 이인좌, 정세윤 등 지방에서는 3월 초부터 경기도 양성과 진위에서 군사를 모으고 있었다.[4] 이와 같은 시간적 차이로 인해 반란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1727년(영조 3년) 정미환국으로 노론이 실각하고 영조가 소론과 남인의 일부 세력을 등용하자, 영조와 노론에 반대했던 무신당은 내분을 겪게 되었다. 그 결과 박필현, 한세홍, 이유익이 주도하는 중앙의 반란 계획은 일시 중단되었다.[4]

중앙의 반란 계획이 보류되는 동안에도 이인좌와 정세윤을 중심으로 지방에서는 반란 준비가 계속되었다. 이인좌는 안동과 상주는 정홍수에게, 거창과 함안은 정희량에게 반란 준비를 맡겼고, 자신은 경기 지역을 담당했다. 이호와 정세윤은 호남에서 반란을 준비했다.[4]

4. 3. 최종 준비

이인좌는 청주를 습격해 병사 이봉상을 죽이고 병졸을 모아 스스로 대원수(大元首)라 칭하며 사방으로 격문을 돌렸다. 격문의 요지는 경종의 죽음은 자연스러운 죽음이 아니라 흉악한 무리(즉 영조와 노론 세력)에 의한 독살이고, 연잉군(영조)은 숙종의 왕자가 아니므로, 왕대비의 밀조(密調)를 받아 경종의 원수를 갚고 소현세자의 적파손(嫡派孫)인 밀풍군 탄(坦)을 왕으로 세워 왕통을 바르게 한다는 내용이었다.[7] 모든 군사들은 경종을 애도한다는 뜻에서 상복과 같은 흰옷을 입었다.

1728년 3월 초, 양반 약 300명과 기병 약 50명을 포함한 군사들이 안성, 평택, 양성(陽城), 괴산 등의 집결지에 모였다. 그러나 여러 곳에서 모인 반군은 장비가 부족하고 전력이 미약하였다. 이들은 소사평(蘇沙坪)으로 이동하여 무기와 말을 보충하고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반군은 가천역(加川驛)에서 말을 징발하기도 했고, 여러 지역의 부유한 사람들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았다. 또한 김정기(金正基)와 전라도 군인 조경(趙經) 등 정치 인물들의 참여를 주장하는 정치 선전을 펼쳐 군수품과 식량을 확보하고 병사를 모집하였다. 이 선전은 상당한 효과를 거두어 반군에 대한 소문이 과장되어 퍼져 경기도 남부와 호서 일부 지역의 행정과 치안이 마비되었다.[4]

반란 준비는 지역적으로 진행되었는데, 중앙 지도부는 당시 평안도 군인으로 복무 중이던 이사성(李嗣聖)과 긴밀히 접촉하였고, 대인(大仁)에 있던 박필현(朴弼顯) 등과도 반란을 준비하였다. 특히 무신당(武臣黨) 소속인 박필현, 이유익(李有翼), 심유현(沈有顯) 등은 경종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자신의 정치적 지위 상실 가능성에 위협을 느껴, 제외된 남인(南人)들을 규합하고 영조와 노론(老論)을 제거하려 하였다. 이들은 담양에서 군사를 훈련하고 화약을 훔쳐 반란을 위해 한양으로 운반하려 했다.[2] 박필현은 또한 고부의 송하(宋河), 부안의 김수종(金壽宗), 순창의 양익태(楊益泰)와 연합을 맺고, 영조가 경종을 암살했다는 내용의 위조 문서를 전주와 남원에 유포하였다.[4]

3월 12일, 안동에 도착한 이웅보(李雄輔) 등은 이인좌(李麟佐)의 지시에 따라 반란을 선동하려 했으나, 지역 주민들의 비협조로 실패하였다. 그러나 이웅보는 아음(兒陰)과 거청(巨淸)에서 군대를 모집하는 데 성공하였지만, 지리적 여건 때문에 이 지역의 반군이 다른 지역으로 확대되기는 어려웠다.[4]

3월 14일, 반란 계획이 발각되었고, 봉조하(奉朝賀) 최규서(崔奎瑞)와 양성인(陽城人) 김중만(金重萬) 등 지지자들은 각 지역에서 적극적으로 군대 집결을 주장하였다. 경기도 각지에서 반군의 움직임이 보고되자 영조는 서울 성문을 닫고 서울 외곽의 관군을 동원하여 방어를 강화하였다.[4] 영조는 충성스러운 군대를 배치하고 삼대문(三大門)의 경비를 강화하도록 명령하였다.[2]

5. 경과

이인좌는 청주를 거점으로 세력을 확장했으나, 용인에 있던 소론의 원로 최규서가 조정에 고변하면서 반군의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7] 영조는 정미환국을 통해 반란에 가담한 양반들을 회유하는 한편, 병조판서 오명항을 도순무사로 임명하여 관군을 이끌고 반란을 진압하게 했다.[7]

반란 초기, 이인좌는 평안병사 이사성, 총융사 김중기, 금군별장 남태징 등과 내통하여 중앙과 지방에서 동시에 봉기하려 했으나, 최규서의 고변으로 인해 계획이 무산되었다. 또한 경기도와 호서 지역 반군은 영남과 호남 지역 반군의 지원을 기대했으나, 이마저도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영남 지역에서는 정온의 4대손인 정희량이 백성들을 모아 안음, 거창 등을 점령하고 합천, 함양 등 4개 군현을 장악했으나,[2] 경상도 관찰사 황선의 지휘 아래 반란은 진압되었다. 호남 지역에서는 박필현 등이 주도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했으나, 전라 관찰사와의 연락 실패 및 주모자들의 체포와 처형으로 인해 무산되었다.[2] 전라도 태인 현감 정필현의 군사 동원 계획도 실패하고, 무안에 주둔한 평안병사 이사성도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서, 결국 중앙과 지방의 연합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4]

이러한 상황에서 청주 반군은 독자적으로 한양을 향해 진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오명항이 이끄는 관군은 안성과 죽산에서 반군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두었다. 특히 안성 전투에서는 첩자를 활용하고, 야간 기습을 예측하여 반군을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 청룡산 전투에서는 지형의 불리함을 극복하고, 적장 박종원을 사살하여 반군의 사기를 꺾었다.[6]

안성과 죽산에서의 패배는 삼남 지방 반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고, 주요 지휘관들이 체포되면서 다른 지역의 반군들도 연이어 무너졌다.[3] 결국 이인좌의 난은 3개월 만에 진압되었으며, 이인좌를 비롯한 주요 주모자들은 처형되고 밀풍군 탄은 사사되었다.[7]

5. 1. 청주성 함락

이인좌는 청주를 습격해 병사(兵使) 이봉상을 죽이고 병졸을 모아 스스로 대원수(大元首)라 칭하며 사방으로 격문을 돌렸다.[7] 격문의 요지는 경종의 죽음은 자연스러운 죽음이 아니라 흉악한 무리(즉 영조와 노론 세력)에 의한 독살이고, 연잉군(영조)은 숙종의 왕자가 아니므로, 왕대비의 밀조(密調)를 받아 경종의 원수를 갚고 소현세자의 적파손(嫡派孫)인 밀풍군 탄(坦)을 왕으로 세워 왕통을 바르게 한다는 내용이었다. 모든 군사들은 경종을 애도한다는 뜻에서 상복과 같은 흰옷을 입었다.

이인좌의 난은 3월 15일 청주성을 함락하면서 시작되었다. 반란군은 군영을 공격하여 이봉상, 남연련, 홍림 등의 군인들을 살해하고 청주를 점령하였다. 또한 경종의 여러 깃발을 세우고 그의 신주를 모셔 제사를 지냈다. 권서봉을 청주목사로, 신천영을 장군으로 임명하고 각 고을에 포고문을 보내 군사를 모집하고 양식을 나누어 주었다.[2] 청주 지역의 관리와 향반들이 반란에 가담하면서 세력이 크게 확장되어 그 수가 급증했다. 그 결과 반란군은 황간, 회인, 목천, 진천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안성, 죽산으로 향했다. 반란군은 이 지역들에 사자를 보내 쌀을 나누어주고 토지를 분배하며 군사를 모집하였다. 이처럼 200~300명으로 시작된 청주성 점령은 여러 지역과 계층의 지지를 얻게 되었다.[4]

5. 2. 한양 진격 시도

이인좌는 청주를 습격하여 병사 이봉상을 죽이고 병졸을 모아 스스로 대원수(大元首)라 칭하며 사방으로 격문을 돌렸다. 격문의 요지는 경종의 죽음은 흉악한 무리(즉 영조와 노론 세력)에 의한 독살이고, 연잉군(영조)은 숙종의 왕자가 아니므로, 왕대비의 밀조(密調)를 받아 경종의 원수를 갚고 소현세자의 적파손(嫡派孫)인 밀풍군 탄(坦)을 왕으로 세워 왕통을 바르게 한다는 내용이었다.[7] 모든 군사들은 경종을 애도한다는 뜻에서 상복과 같은 흰옷을 입었다.

경기도와 호서 지역의 반군은 청주성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영남과 호남의 반군의 지원을 기대했다. 그러나 영남과 호남의 연합은 쉽지 않았다. 호남 지역에서는 무주산에 유배된 주모자 박필현 등과 연계했으나 전라 관찰사와의 연락은 실패했고, 박필현은 상주 어느 마을에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고부현 흥덕에서 숨어 지내던 박필현 또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2]

전라도에서는 태인 현감 정필현이 인근 지역을 장악하고 기병을 동원할 계획이었으나, 과세염의 배분에 참여하여 군사 동원을 따르지 않았다. 더욱이 전주가 감영군과 함께 청주로 진군한다는 계획이 미리 누설되었다. 무장한 채 유배 중이던 박필현은 약 30명의 군사를 이끌고 전주로 진입하려 했으나, 태인의 군사 동원이 실패하면서 해산했다. 결국 호남의 계획된 군사 동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무안에 주둔한 평안병사 이사성도 약속한 군사 동원을 하지 않았다. 결국 중앙과 지방의 반란 계획에 차질이 생겼고, 청주 반군은 직접 서울로 진격할 수밖에 없었다.[4]

5. 3. 정부의 대응

영조는 정미환국을 통해 반란에 가담한 양반들을 회유하는 한편, 병조판서 오명항을 도순무사로 임명하여 관군을 이끌고 반란을 진압하게 했다.[7] 오명항의 관군은 2,300명에 불과했지만, 제대로 된 무장이 부족했던 반란군을 쉽게 제압했다.

영조는 소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노론 전략가 대신 소론 출신 장교들로 사령부를 구성했다. 이는 당파를 가리지 않고 인재를 등용한다는 것을 보여주어 반란의 명분을 약화시키려는 의도였다.[1]

정부는 농민군이 양성, 소사 등지에 집결하고 있다는 보고(최규서의 보고)를 받고 중앙과 지방의 농민군 연계를 차단했다. 또한 윤휴, 이우징 등 난에 동조했던 자들의 후손들과 김일경, 목호룡의 가족 등 한양 거주민들을 체포했다. 아울러 난으로 인한 쌀값 폭등과 민심 불안을 막기 위해 한강 부근에 저장된 쌀을 성 안으로 옮겼다.[4]

3월 17일, 한성 함락이 임박하자 오명항이 직접 출전을 자청했다. 영조는 이를 즉시 수락하고 박문수를 군관으로 임명했다. 오명항은 4도 병마절도사로서 경기도 지산으로 간다는 거짓 정보를 퍼뜨렸다.[3]

정부는 군사훈련원, 수도감영, 그리고 오군영(五軍營)의 왕실 근위대를 통해 성문 방어를 강화하고 여러 전선에 병력을 파견했다.[4] 영조는 직접 오명항을 4도 군대의 수군 총독으로, 박찬신을 중앙군 사령관으로, 박문수를 관리로 임명했다. 소론을 포함한 온건파는 여론을 안정시키기 위해 신속하게 움직여 오명항이 이끄는 2,000명의 군사로 구성된 토벌대를 파견하여 반란을 진압했다.[5]

5. 4. 안성·죽산 전투

오명항이 이끄는 관군은 3월 23일 안성에 도착하여 첩자 최섭을 잡아 이봉상의 휘장을 발견하고 적의 정보를 얻었다. 밤에 횃불과 함성이 들리고 폭풍우가 몰아치는 혼란 속에서도 오명항은 침착하게 병사들에게 적이 접근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명령했다.[6]

다음날인 3월 24일, 날이 밝자 진영 밖에서 총탄에 맞아 죽은 적군 시체 100여 구가 발견되었다. 적군은 정주진과 목천 등 여러 마을의 민간인으로 위장한 정예병이었고, 안성 근처 청룡산에 은밀히 모여 있었다. 그러나 적군은 관군이 직산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만 알았을 뿐, 안성으로 진영을 옮긴 것은 몰랐다. 어둠 속에서 적군은 관군의 진영을 자기 진영으로 착각하고 공격했지만, 관군의 신기전 공격에 당황하여 후퇴했다.[6][3]

반란군 지휘관 이인조와 박종원은 청룡산으로 후퇴했고, 관군은 첩자 민제장을 통해 반란군의 위치를 파악했다. 오명항은 청룡산의 지형을 관찰하고, 박찬신을 중군 지휘관으로 임명하여 공격을 지시했다. 박찬신은 보병과 기병을 나누어 전략을 세웠지만, 선봉대가 성급하게 행동하여 적에게 기회를 주고 말았다.[6][3][5]

관군은 지형의 이점을 잃었지만, 권희학이 마을 할머니를 협박하여 적장 박종원의 위치를 알아냈다. 임만빈 등 50여 명의 병사가 마을로 진격했고, 박종원은 조태선의 화살에 맞아 쓰러졌다. 임만빈은 박종원과 부장들의 목을 베어 적의 사기를 꺾었다. 비에 젖은 활과 대포는 무용지물이 되었고, 적군은 산꼭대기로 도망쳤다.[6]

강한 북동풍이 불어 관군을 도왔고, 적군은 무기와 깃발을 버리고 흩어졌다. 관군은 100명 이상의 적군을 죽이고, 적의 짐과 붉은 우산, 깃발을 노획했다. 오명항은 승리를 확신했고, 박찬신은 적의 머리를 말뚝에 걸어 서울로 보냈다. 조정에서는 북동풍을 보고 관군에게 유리하다고 판단했고, 실제로 관군은 큰 승리를 거두었다.[6]

5. 5. 반란 진압

이인좌청주를 습격해 병사(兵使) 이봉상을 죽이고 병졸을 모아 스스로 대원수(大元首)라 칭하며 사방으로 격문을 돌렸다. 그러나 용인에 있던 소론의 원로 최규서가 이를 조정에 고변해 반군의 계획은 무너졌다. 영조는 정미환국을 하여 반군 양반들을 회유하고, 새로 도순무사(都巡撫使)에 임명된 병조판서 오명항(吳命恒)의 관군을 파견하여 반란을 3개월 만에 진압하였다.[7] 관군은 2,300명에 불과한 병력이었으나, 무장이 부족한 반란군을 쉽게 제압했다.

안성과 죽산에서 반군이 패배하면서 삼남 지방의 반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주요 지휘관들이 체포되어 처형되자 다른 지역의 반군들도 차례로 무너졌다.[3] 정부군은 반란의 잔당을 추격, 진압하여 많은 반군 병사들을 사로잡거나 항복을 받았다.[4][1] 오명항이 이끄는 정부군이 4월 초 추풍령을 넘었을 때 영남 지역의 반군은 이미 지역 정부군에 의해 진압된 상태였다. 정부군은 4월 19일 거창으로 돌아왔고, 영조는 직접 숭례문으로 나가 그들의 승전을 맞이했다.[2]

이인좌를 비롯한 권서봉, 목함경 등 반란 주모자들은 서울로 압송되어 국문을 받고 처형되었고, 밀풍군 탄도 사사되었다.(자결했다는 설도 있다).[7]

6. 결과

이인좌의 난 이후, 난에 연루된 여당의 정치적 입지는 약화되었고, 난을 주도한 야당 역시 불리한 위치에 놓였다. 그러나 당쟁과 여야 갈등을 비판하던 중도파가 정권을 장악할 기회를 얻었다.[4]

이후 홍치중, 김흥경 등 야당 중도파와의 협력을 통해 여야 중도파가 함께 나라를 다스리는 기반을 마련했다. 이는 여야 중도파가 주도하는 온건한 정권의 토대를 닦았다.[4]

6. 1. 처벌

소론(완론)이 이 난을 진압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이 난의 주동자 대부분도 소론 강경파(준론)였기에, 이 난으로 소론의 세력은 크게 타격을 받았으며, 이후 정권은 대개 노론에서 차지하게 되었다. 이후 50여 년에 걸쳐 안동을 제외한 경상우도 사람들에게는 과거 응시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았으며, 조식의 문하인들은 벼슬길에 나아갈 생각을 갖지 못했다.[8] 과거 응시가 허용된 뒤에도 필기시험 합격자에게 임금이 낙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과거 금지는 사실상 130여 년 후 대원군의 과거 혁파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인좌의 난은 청주성을 점령하며 한때 세력을 과시했으나, 안성·죽산 전투에서 패배하며 결국 실패했다. 이는 지도부 내 갈등, 수도 함락을 통한 중앙 지배층의 소극적인 대응, 그리고 통합된 준비 체계의 부재 등이 원인으로 분석된다.[4]

영조는 이인좌의 난의 원인을 당쟁으로 파악했다. 그는 인재 등용과 화해 정치를 통해 당쟁을 종식시키려 노력했으나, 당쟁은 계속되었고 이것이 난의 원인이 되었음을 인지했다. 또한 기근과 빈곤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고통 속에서 당쟁이 계속되면서 민심이 흉흉해진 점을 인정했다. 이러한 반성을 바탕으로 영조는 이듬해인 1729년에 규유금단을 실시하고 화해 정치를 적극 추진했다.[1]

이인좌의 난 이후 정국은 미묘한 변화를 맞았다. 난에 연루된 여당의 정치적 입지가 약화되었고, 반대로 난을 주도한 책임이 있는 야당도 반드시 유리한 위치에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당쟁과 여야 갈등을 비판하던 중도파가 정권을 장악할 기회를 얻었다.[4]

이후 홍치중, 김흥경 등 야당 중도파와의 협력을 통해 여야 중도파가 함께 나라를 다스리는 기반을 마련했다. 이는 여야 중도파가 주도하는 온건한 정권의 토대를 닦았다.[4]

6. 2. 탕평책 추진

소론(완론)이 이 난을 진압하는 데 큰 공을 세웠으나, 난의 주동자 대부분이 소론 강경파(준론)였기에 소론은 이 난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이후 정권은 대개 노론이 차지하게 되었다.[8]

영조는 이인좌의 난의 원인을 당쟁으로 파악했다. 그는 인재 등용과 화해 정치를 통해 당쟁을 종식시키려 노력했으나, 당쟁은 계속되었고 이것이 난의 원인이 되었음을 인지했다. 또한 기근과 빈곤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고통 속에서 당쟁이 계속되면서 민심이 흉흉해진 점을 인정했다. 이러한 반성을 바탕으로 영조는 이듬해인 1729년에 규유금단을 실시하고 화해 정치를 적극 추진했다.[1]

이인좌의 난 이후 정국은 미묘한 변화를 맞았다. 난에 연루된 여당의 정치적 입지는 약화되었고, 난을 주도한 책임이 있는 야당도 반드시 유리한 위치에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당쟁과 여야 갈등을 비판하던 중도파가 정권을 장악할 기회를 얻었다.[4]

이후 홍치중, 김흥경 등 야당 중도파와의 협력을 통해 여야 중도파가 함께 나라를 다스리는 기반을 마련했다. 이는 여야 중도파가 주도하는 온건한 정권의 토대를 닦았다.[4]

6. 3. 영남 지역 차별

이 난은 소론 강경파(준론)가 주도했기에, 난이 진압된 후 소론은 큰 타격을 입고 정권에서 밀려났다. 이후 정권은 주로 노론이 차지하게 되었다.[8]

이후 50여 년간 안동을 제외한 경상우도 사람들은 과거 응시 자격을 박탈당했다. 조식의 제자들은 벼슬길에 나아갈 꿈을 꾸지 못했다.[8] 과거 응시가 허용된 후에도, 필기시험 합격자에게 임금이 낙점을 하지 않아 사실상 과거 응시는 130여 년 후 흥선대원군의 과거 제도 개혁 때까지 금지되었다.[8]

7. 영향

소론(완론)이 이 난을 진압하는 데 큰 공을 세웠으나, 난의 주동자 대부분이 소론 강경파(준론)였기에 이 난으로 소론은 크게 타격을 받았다. 이후 정권은 대개 노론이 차지하게 되었다.[8] 안동을 제외한 경상우도 사람들은 이후 50여 년간 과거 응시가 금지되었고, 조식의 문하인들은 벼슬길에 나아갈 생각을 하지 못했다.[8] 과거 응시가 허용된 뒤에도 필기시험 합격자에게 임금이 낙점을 하지 않아, 사실상 130여 년 후 대원군의 과거 혁파 때까지 과거 금지가 계속되었다.

이인좌의 난은 당시 정부에 상당한 도전이었다. 반란군은 여러 지역의 지지를 얻어 청주성을 점령하고 세력을 확장했으나, 영남과 호남의 다른 반란 세력과 연대하지 못했고, 정부의 선제적인 진압으로 계획이 좌절되었다.[4]

이 난은 사회·경제적 요인을 배경으로 했다. 과중한 세금과 착취에 시달리던 농민과 일반 백성 등 하층민들의 불만이 이 난의 원인이 되었다. 반란군은 토지 재분배와 경제적 구제를 약속하며 여러 지역과 계층의 지지를 얻었으나, 조직력과 효율적인 지도력 부족으로 목표 달성에 실패했다.[4]

이인좌의 난 진압은 이후 정치·사회적 상황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정부는 향후 봉기를 막기 위해 감시를 강화하고 더욱 엄격한 통제 조치를 시행했다. 또한 반란 가담자들에 대한 처벌, 처형 및 재산 몰수 등의 조치를 단행했다. 이 난은 정부의 민심 이반에 대한 취약성을 보여주었고,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개혁의 필요성을 부각시켰다.[4]

참조

[1] 뉴스 이인좌의 난 https://world.kbs.co[...] KBS World 2023-11-19
[2] 웹사이트 이인좌의 난 (李麟佐의 亂) https://encykorea.ak[...] Encyclopedia of Korean Culture 2023-11-19
[3] 뉴스 ‘나라 절반이 역적이 돼 버렸나이다’ [박종인의 땅의 歷史] https://www.chosun.c[...] Chosun 2023-11-19
[4] 웹사이트 노론에 맞선 소론 세력의 반란 https://contents.his[...]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2023-11-19
[5] 뉴스 [경인신공]선생님이 들려주는 우리고장 역사/1728년 무신 난 '이인좌의 난' http://www.kyeongin.[...] Kyeongin 2023-11-21
[6] 웹사이트 이인좌의 난 http://contents.hist[...]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2023-11-20
[7] 웹인용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people.aks.ac[...] 2019-05-01
[8] 간행물 국익보다는 당익(黨益)을 앞세운 붕당정치 http://www.kpanews.c[...] 약사공론
[9] 문서 심의겸
[10] 문서 김효원
[11] 문서 서인에 대한 보복 반대
[12] 문서 서인에 대한 강경 보복 주장
[13] 문서 광해군 폐위 반대
[14] 문서 광해군 폐위와 영창대군 세자옹립 주장
[15] 문서 광해군의 폐모살제 찬성
[16] 문서 광해군의 폐모 반대, 살제는 찬성
[17] 문서 광해군의 폐모살제 반대
[18] 문서 인조반정 주도세력
[19] 문서 반정에 참여치 않은 재야세력
[20] 문서 원두표
[21] 문서 김자점
[22] 문서 김집
[23] 문서 김육
[24] 문서 예송 이전에 서인과 대충 잘 지낸 세력
[25] 문서 서인과 싸운 예송 주도자들
[26] 문서 송시열
[27] 문서 윤증
[28] 문서 영조에게 영합하여 생존함
[29] 문서 영조가 경종을 독살했다고 주장
[30] 문서 척신정치 반대
[31] 문서 영조의 탕평책과 척신정치에 영합
[32] 문서 천주교 박해 주장
[33] 문서 천주교에 사상적으로 반대하는
[34] 문서 천주교 박해 반대
[35] 문서 사도세자 추숭 반대파
[36] 문서 사도세자 추숭 찬성파
[37] 문서 정순왕후 사망 이후 벽파 세력 전멸 및 정권 독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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