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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경 (166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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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일경은 1662년 한성부에서 출생하여, 소론 강경파로 활동한 조선 시대의 문신이다. 1699년 과거에 급제하여 정언, 사헌부 감찰 등을 역임했고, 세자 시강원 문학으로 세자 균(경종)을 보도했다. 1707년 문과 중시에 장원으로 급제했으나, 소론으로 동부 승지가 된 후 노론에 의해 부사과로 전직되면서 소론 강경파의 길을 걷게 되었다. 경종 즉위 후 이조참판을 거쳐, 노론 4대신을 탄핵하여 소론 정권을 수립하는 데 기여했다. 1722년 목호룡의 고변을 통해 신임옥사를 일으켜 노론을 대거 숙청했으나, 1724년 영조 즉위 후 유배되어 사형당했다. 이후 후손들은 영조와 노론의 탄압을 받았으나, 1908년에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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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경 (1662년)
기본 정보
일경(日庚)
중회(仲晦)
본관김해 김씨
생년월일1662년
몰년월일1722년
관력
주요 관직대사헌
이조판서
봉호문충(文忠)

2. 생애

김일경은 1662년 한성부에서 태어났으며, 호는 아계(丫溪)이다. 아버지는 생원 김하중(金夏重)이고, 통덕랑을 지낸 숙부 김여중(金呂重)의 양자가 되었다. 그의 집안은 본래 서인(西人) 명문가였으나, 숙종노론소론으로 분당될 때 그의 직계는 소론을 선택했다.

1699년1702년 과거에 급제하여 정언(正言), 사헌부 감찰 등을 역임했다. 세자 시강원 문학(世子侍講院文學)으로 오랫동안 훗날 경종이 되는 세자 균을 보도하였고[2], 사헌부 지평 등을 지냈다. 1707년 문과 중시(文科重試)에 장원 급제하여 장례원 판결사(判決事)로 특진되었다.[2]

경종 즉위 직후 이조참판이 되었다. 경종이 병약하여 후사 문제가 불거지자, 김일경은 종친의 자제 중 양자를 들이려는 선의왕후의 뜻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노론은 연잉군 금(후일의 영조)을 왕세제(王世弟)로 책봉할 것을 건의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노론이 경종의 병약함을 이유로 세제의 대리청정을 주장하자, 김일경은 소론 영수 조태구 등과 함께 이를 '택군'이라며 강하게 반대하여 대리청정을 취소시켰다.

같은 해, 김일경은 이진유, 윤성시 등과 함께 노론 4대신(김창집, 이이명, 조태채, 이건명)을 탄핵하는 여론을 주도했다. 이들은 경종이 병을 앓고 있지 않고 직접 국사를 처리할 수 있음에도 세제에게 대리청정을 하게 한 것은 나라를 망칠 죄라고 주장했다. 이 탄핵으로 4대신을 비롯한 노론 중신들은 유배되거나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이후 김일경은 소론 정권 수립에 기여하고 노론 탄압에 앞장섰다.[1]

1720년 말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이 되었다. 1722년(경종 2) 사헌부 대사헌으로 발탁되었다가 형조판서가 되었다. 같은 해 노론이자 연잉군의 측근인 목호룡을 설득, 매수하여 소론으로 전향하게 했다. 그는 숙종이이명 독대를 비판하고, 연잉군 추대 음모를 고변하게 했다. 목호룡은 백망(白望)·정인중(鄭麟重) 등과 함께 경종 시해 및 이이명의 추대 음모 가담을 고변하였다. 이 사건으로 옥사가 일어나자 그는 유배 중이던 노론 4대신들의 공격을 주도하였고, 4대신은 모두 사사되었으며 노론 당원 상당수가 투옥, 물고(物故) 또는 추방되었다.

목호룡의 고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목호룡은 백망, 정인중 등과 함께 경종을 시해하려 했다고 고변하였다. 궁녀와 내관이 결탁하고, 장씨 성을 가진 역관 김성절이 독약을 사 와서 김씨 성의 궁인에게 전해 경종에게 시험했으나 토해서 실패했다는 진술과, 훗날 영조도 서덕수가 자신을 위해 일을 도모하고 있다고 말하는 등, 실제로 경종을 시해하려는 음모가 있었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이로 인해 신임옥사가 일어나 유배 중이던 노론 4대신이 죽음을 당했으며, 많은 노론 당원들이 투옥되거나 사망, 추방되었다. 김일경은 의정부우참찬, 이조참판, 이조판서, 양관 대제학을 지냈다.

1724년 경종이 죽고 영조가 즉위하자 노론의 재집권으로 유배되었다. 신임옥사를 이끌 당시 영조에 대한 불경죄를 이유로 왕의 심문을 받고 참형당하였다. 청주 유생 송재후(宋載厚)의 상소를 발단으로, 신임사화가 무고로 조작된 것이라는 노론의 집중적인 탄핵을 받고 의금부에 투옥되었다.[1] 그는 영조의 친국(親鞫)을 받았다. 그러나 영조가 경종을 독살했다고 믿은 그는 영조에게 “시원하게 나를 죽이라”고 맞섰다.[1] 그해 12월 8일 공모자를 밝히지 않고 거리에서 능지처참형을 받고 죽었다.

1725년 1월 노론계의 공격으로 그의 처자에게도 연좌제가 적용되었다. 1728년 경종 독살설을 근거로 이인좌의 난이 일어났고 영조는 그의 남은 가까운 친척들 마저 사형에 처하였다.

2. 1. 생애 초반

김일경은 1662년 한성부에서 태어났으며, 호는 아계(丫溪)이다. 아버지는 생원 김하중(金夏重)이고, 통덕랑을 지낸 숙부 김여중(金呂重)의 양자가 되었다. 그의 집안은 본래 서인(西人) 명문가였다. 서인노론소론으로 나뉘기 전, 서인의 거두였던 김장생김집 부자는 그의 방계 선조였다.

5대조 서윤 김복휘(金復輝)는 김장생의 아버지 황강 김계휘와 김은휘 형제의 사촌이었다. 인경왕후김익훈, 김만중 등을 배출한 그의 일가들은 노론 명문가를 이루기도 했다. 그러나 숙종 말, 노론소론으로 분당될 때 그의 직계는 소론을 선택했다.

1699년1702년 과거에 급제하여 정언(正言), 사헌부 감찰 등을 역임했다. 세자 시강원 문학(世子侍講院文學)으로 오랫동안 세자 균(후일의 경종)을 보도하였고[2], 사헌부 지평 등을 지냈다. 1707년 문과 중시(文科重試)에 장원 급제하여 장례원 판결사(判決事)로 특진되었다.[2]

2. 1. 1. 출생과 가계

김일경은 1662년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호는 아계(丫溪)이다. 아버지는 생원 김하중(金夏重)이며 통덕랑을 지낸 숙부 김여중(金呂重)의 양자가 되었다. 본래 그의 집안은 서인(西人)의 명문으로, 서인노론소론으로 분당하기 전 서인의 거두였던 김장생, 김집 부자는 그의 방계 선조였다.

그의 5대조 서윤 김복휘(金復輝)는 김장생의 아버지인 황강 김계휘, 김은휘 형제의 사촌이었고, 인경왕후김익훈, 김만중 등을 배출한 그의 일가들은 노론의 명문가를 형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숙종 말기에 노론, 소론 분당 시 그의 직계는 소론을 선택하였다.

2. 1. 2. 과거 급제

1699년 과거에 급제하고, 1702년에 다시 과거에 급제하여 정언(正言), 사헌부 감찰 등을 역임하고 세자 시강원 문학(世子侍講院文學)으로 오랫동안 세자인 세자 균(후일의 경종)을 보도하였다.[2] 사헌부 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1707년 문과 중시(文科重試)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장례원 판결사(判決事)에 특진되었다.[2]

2. 2. 정치 활동

경종 즉위 직후 이조참판이 되었다. 경종이 병약하여 후사 문제가 불거지자, 김일경은 종친의 자제 중 양자를 들이려는 선의왕후의 뜻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노론은 연잉군 금(후일의 영조)을 왕세제(王世弟)로 책봉할 것을 건의하여 이를 관철시켰고, 선의왕후의 뜻은 무산되었다. 노론이 경종의 병약함을 이유로 세제의 대리청정을 주장하자, 김일경은 이조참판으로서 소론 영수 조태구 등과 함께 이를 '택군'이라며 강하게 반대하여 대리청정을 취소시켰다.

같은 해, 김일경은 이진유, 윤성시 등과 함께 노론 4대신(김창집, 이이명, 조태채, 이건명)을 탄핵하는 여론을 주도했다. 이들은 경종이 병을 앓고 있지 않고 직접 국사를 처리할 수 있음에도, 다른 마음을 품고 세제에게 대리청정을 하게 한 것은 나라를 망칠 죄라고 주장했다. 이 탄핵으로 4대신을 비롯한 노론 중신들은 유배되거나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이후 김일경은 소론 정권 수립에 기여하고 노론 탄압에 앞장섰다.[1]

2. 2. 1. 노론과의 갈등

경종 즉위 직후 이조참판이 되었다. 곧 경종이 병약하여 후사 문제가 불거지자 그는 종친의 자제 중 양자를 들이려는 선의왕후의 뜻을 지지하였다. 그런데 노론은 연잉군 금(延礽君 昑, 후일의 영조)의 왕세제(王世弟) 책봉을 건의하여 책봉케하여 선의왕후의 뜻은 무산되었다. 이어 노론은 경종의 병약함을 이유로 세제의 대리청정을 실시하게 하자 그는 이조참판으로서 소론의 영수인 조태구 등과 함께 이를 택군이라며 강하게 반대하여 대리청정을 취소하게 하였다.

그 해 김일경은 이진유, 윤성시 등과 함께 경종이 병을 앓지 않고 있으며 손수 국사를 처리할 수 있는데도 노론 4대신(老論四大臣)들이 다른 마음을 품고 세제에게 대리청정하게 한 일은 나라를 망칠 죄과라고 탄핵하여 4대신인 김창집, 이이명, 조태채, 이건명 등을 비롯한 노론 중신들에 대한 공격 여론을 주도, 이들을 유배, 위리안치(圍籬安置)하게 하였다. 이후 소론 정권을 수립하여 노론 탄압에 앞장섰다.

2. 2. 2. 소론 강경파 활동

1720년 말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이 되었다. 이후 1722년(경종 2) 사헌부 대사헌으로 발탁되었다가 특별히 형조판서가 되었다. 1722년(경종 2) 당시 노론의 일원이자 연잉군의 측근인 목호룡을 설득, 매수하여 소론으로 전향하게 했다. 그는 1710년에 있었던 숙종이이명 독대를 비판하였다. 이어 연잉군 추대 음모를 고변하도록 하였는데, 목호룡은 백망(白望)·정인중(鄭麟重) 등과 뜻을 모아 경종의 시해와 이이명이 추대 음모에 가담했다고 고변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옥사가 일어나자 그는 유배 중이던 노론 4대신들의 공격을 주도하였고, 4대신은 모두 사사되었으며 노론 당원 상당수가 투옥, 물고(物故) 또는 추방되었다.

소론 강경파이던 그는 경종 원년(1721) 12월 경종의 왕권을 위협하는 노론 사대신을 사흉(四凶)이라고 공격하는 신축소를 올려 소론이 정권을 장악하는 신축환국(辛丑換局)을 달성한 주역이었다.[1] 영조가 경종을 독살했다고 믿은 그는 영조에게 “시원하게 나를 죽이라”고 맞섰다. 《영조실록》의 사관은 “김일경은 공초(供招)를 바칠 때 말마다 반드시 선왕의 충신이라 하고 반드시 ‘나’(吾)라고 했으며 ‘저’(矣身)라고 하지 않았다”(《영조실록》 즉위년 12월 8일)라고 부기할 정도로 영조를 부인했다. 경종에게는 사육신 못지않은 충신이던 그는 영조에게는 역적이 되어 부대시처참(不待時處斬)됐다.[1]

2. 2. 3. 경종의 치세와 몰락

목호룡의 고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목호룡은 백망, 정인중 등과 함께 경종을 시해하려 했다고 고변하였다. 이것이 무고인지는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궁녀와 내관이 결탁하고, 장씨 성을 가진 역관 김성절이 독약을 사 와서 김씨 성의 궁인에게 전해 경종에게 시험했으나 토해서 실패했다는 진술과, 훗날 영조도 서덕수가 자신을 위해 일을 도모하고 있다고 말하는 등, 실제로 경종을 시해하려는 모종의 음모가 있었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이로 인해 신임옥사가 일어나 유배 중이던 노론 4대신이 죽음을 당했으며, 많은 노론 당원들이 투옥되거나 사망, 추방되었다. 김일경은 의정부우참찬, 이조참판, 이조판서, 양관 대제학을 지냈다.

  • 양관대제학을 지냈다는 기록은 김도화의 김일경 행장에 기록되어 있고, 승정원일기에는 홍문관 제학을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2. 3. 유배와 최후

1724년 경종이 죽고 영조가 즉위하자 노론의 재집권으로 유배되었다가 신임옥사를 이끌 당시에 영조에 대한 불경죄를 이유로 왕의 심문을 받고 참형당하였다. 청주의 유생인 송재후(宋載厚)의 상소를 발단으로, 신임사화가 무고로 조작된 것이라는 노론의 집중적인 탄핵을 받고 의금부에 투옥되었다.[1] 그는 영조의 친국(親鞫)을 받았다. 그러나 영조가 경종을 독살했다고 믿은 그는 영조에게 “시원하게 나를 죽이라”고 맞섰다.[1] 그해 12월 8일 공모자를 밝히지 않고 거리에서 능지처참형을 받고 죽었다. 저서로는 《아계문집》등이 있다.

1725년 1월 노론계의 공격으로 그의 처자에게도 연좌제가 적용되었다. 1728년 경종 독살설을 근거로 이인좌의 난이 일어났고 영조는 그의 남은 가까운 친척들 마저 사형에 처하였다.

2. 4. 사후

연좌된 그의 자식들도 모두 죽임을 당했다. 게다가 영조 31년 나주벽서 사건이 일어나자, 김일경의 아들 중에 혹시 살아남은 자가 있을지 모르니 찾아서 처단하라는 왕명이 내려졌다. “역적 김일경의 종손 가운데 성명을 바꾸고 중이 된 자가 있다”는 정보가 있자 발본색원을 지시할 정도로, 김일경의 후손은 영조·노론과 한 하늘 아래서 살 수 없던 처지였다. 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아주 짧은 시기를 제외하고는 노론이 계속 집권했기 때문에 김일경은 신원될 수 없었다.[1] 정조 즉위 후에도 영조의 정통성을 부정했다는 점 때문에 복권되지 못하였다.

1907년(융희 1년) 이후 후손의 여러 번의 복권 상소로 1908년 4월 복권되었다. 1908년(융희 2년) 1월 후손의 건의로 작위와 시호가 회복되었고,[4] 같은 해 4월 30일에 후손의 건의로 복권되었다.[3]

1908년 4월 죄적에서 삭제되고 명예회복되었다.[3] 그는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할 때까지도 금기시되다가 멸망 이후부터 그에 대한 연구가 계속되었다. 그의 시문집인 아계집은 1963년에 가서야 9대손 김윤중(金允中) 등에 의해 간행되었다.

3. 저서


  • 《아계집》

4. 가족 관계

관계이름
고조부김태생(金泰生)
증조부김계(金棨)
조부김익렴(金益廉)
조모함양 여씨 (여이재의 딸)
숙부김귀중(金龜重)
양아버지김여중(金呂重) (숙부)
양어머니여흥 민씨 (민소(閔沼)의 딸, 숙부의 부인)
친아버지김하중(金夏重)
형님김수경(金壽鏡)
동생김구경(金九鏡)
동생김철경(金哲鏡)
동생김상경(金相鏡)
부인전주 이씨 (이명하의 딸)
부인이씨 (이세신의 딸)


5. 기타

그의 후손들은 영조 즉위 후 이인좌의 난과 나주 괘서 사건 당시 대부분 몰살되었다. 그러나 후손 중 한 명이 우여곡절 끝에 살아남아 20세기까지 명맥을 이어왔다.[1]

6. 김일경을 연기한 배우

참조

[1] 뉴스 시원하게 나를 죽이라 http://legacy.h21.ha[...] 한겨레 21 2014-05-02
[2] 문서 이미 과거에 합격한 자 또는 관료를 대상으로 한 시험으로 합격하면 당상관으로 특진하였다.
[3] 실록 죽은 좌의정 한효순 외 77명의 관작을 회복시켜 줄 것에 관하여 보고하다 순종실록 2권 1908-04-30
[4] 실록 한효순, 정인홍 등에게 죄명을 벗겨주고 작위와 시호를 회복시켜 주다 순종실록 2권 1908-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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