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훈 (185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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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종훈은 1858년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나 동학 농민 운동에 참여하고 천도교에서 활동한 인물이다. 3·1 운동에 민족대표 33인으로 참여했으며, 이후 투옥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0년대에는 천도교 종법사, 민립 대학기성회 집행위원 등을 역임했고, 고려혁명당을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체포되기도 했다. 1931년 사망 후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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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훈 (1858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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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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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이종훈 |
원어 이름 | 李鍾勳 |
출생일 | 1856년 3월 2일 |
출생지 | 경기도 광주 |
사망일 | 1931년 5월 2일 |
본관 | 광주 이씨 |
직업 | 독립운동가, 천도교 지도자 |
종교 | 천도교 |
관련 활동 | 독립운동 |
상훈 | [[파일:건국훈장2대통령장.png|x10px]]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년) |
웹사이트 | 이종훈(독립유공자 공훈록) |
2. 생애
경기도 광주 실촌면 유여리(현 곤지암읍 유사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광주, 원래 이름은 종구, 자는 진호이다. 유년기에 윤치소, 의친왕, 권동진 등과 필운학당에서 수학하였고, 윤치소의 조카와 결혼했다.
1893년 동학에 입도하여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에 손병희와 함께 북접군으로 참가했으며, 우금치 전투에서 패한 후 충청도에서 은거하였다. 1902년 손병희와 일본으로 망명하여 권동진, 오세창 등을 만나 독립 방안을 논의하였다. 1904년 손병희의 갑진개혁운동에 참여, 귀국 후 대동회(진보회)를 조직하여 단발, 흑의입기 운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 이종일의 지시로 농어민 대상 민중운동을 시도, 비밀결사인 민족문화 수호운동본부를 통해 민중시위운동을 계획하였다. 1916년 천도구국단을 조직하여 민중시위 운동을 추진했으나 이상재만 동의하여 성사되지 못했다. 1918년 최린 등 천도교 지도부와 독립운동 3대 원칙을 정하고 '무오 독립시위운동'을 계획했으나, 독립선언서 문제로 차질을 빚었다.
1919년 3·1 운동에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참가, 2년간 옥고를 치렀다. 1922년 천도교 종법원 종법사 겸 경기도 교구순회 책임자로 선임되었으나, 신구파 갈등 속에서 제명되었다가 1개월 후 복권되었다. 1924년 천도교 최고비상혁명위원회 사성위원장을 맡았으며, 1926년 고려혁명당을 조직하였으나, 이 사건으로 다시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이종훈(李鍾勳|이종훈중국어)은 1931년 5월 2일 사망했다. 1966년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으며,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2. 1. 출생과 가계
경기도 광주 실촌면 유여리(현 곤지암읍 유사리)에서 아버지 이우재와 어머니 선산 김씨 사이의 삼 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광주, 원래 이름은 종구, 자는 진호이다. 유년기에 윤치소, 의친왕, 권동진 등과 필운학당에서 수학하였다. 이후 명문가 출신인 윤치소의 조카와 결혼했다.2. 2. 동학 농민 운동 참여
1893년 동학에 입도하여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에 손병희와 함께 북접군으로 참가했으며, 우금치 전투에서 패한 후 손병희, 손천민, 이용구 등과 함께 모두 북쪽으로 퇴각하였다. 이후 손병희와 함께 충청도에서 은거생활에 들어갔다.2. 3. 천도교 활동과 독립운동
1902년 이종훈은 손병희와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여 권동진, 오세창 등을 만나 독립의 방도를 논의하였다.1904년부터 손병희의 갑진개혁운동에도 앞장섰다. 손병희는 이종훈을 비롯한 동학 지도자 40여 명을 도쿄로 불러 민회 조직을 지시하였다. 이들은 귀국하여 대동회(이후 진보회로 개칭)를 조직하여 단발, 흑의입기 운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 이종일의 지시로 이종훈은 임예환과 함께 농어민을 포섭하여 민중운동을 시도하였다. 이종훈은 경기도 인근 농민을 맡아 조사하였는데, 당시 농민의 80% 이상이 반일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토대로 이종일, 임예환은 보성사 사원 60여 명과 함께 범국민 신생활 운동을 추진하였다. 이는 비정치적 국민집회를 표방한 것으로, 집회일은 7월 15일이었다. 그러나 7월 13일 종로경찰서에 집회서류가 발각되어 서류일체가 압수당했다. 다행히 생활개선운동이라 둘러대 화를 면했다. 그해 10월 31일 천도교를 중심으로 비밀결사체인 민족문화 수호운동본부를 만들었다. 총재는 손병희, 회장은 이종일, 부회장은 김홍규, 제1분과위원장은 권동진, 제2분과 위원장은 오세창, 제3분과위원장은 이종훈이 맡았다. 이들이 민족문화수호운동으로 구상했던 것은 민중시위운동이었으며, 민중동원을 위해 강연회를 개최했다. 1914년 4월 29일 이종훈은 '민족문화 수호의 의의'라는 주제로 강연하다가 종로 경찰서에 연행되기도 하였다.
1916년 2월 천도교가 운영하던 출판사인 보성사 안에 천도구국단이라는 비밀단체를 조직하였는데, 이는 일본이 물러가면 정권을 담당할 모체였다. 이종훈, 이종일, 박준승, 장효근 등은 각계 원로들과 함께 민중시위 운동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이종훈이 만난 이상재만 동의하였을 뿐 다른 인사들은 찬성하지 않아 결국 성사되지 못했다.
1918년 5월 5일 손병희를 비롯해 이종훈, 권동진, 오세창, 최린 등 천도교 지도부는 모임을 가지며 독립운동 3대 원칙을 정하였다. 시위 일자를 9월 9일로 잡고 이를 '무오 독립시위운동'으로 명명하였으나, 최남선이 준비하기로 했던 독립선언서가 제때 준비되지 않아 차질을 빚게 된다.
1919년 2월 25일 천도교 장로였던 이종훈은 천도교 기도회 종료 보고와 국장을 배관하기 위하여 서울에 올라갔다가 손병희, 권동진, 오세창 등을 만나 독립운동에 대한 계획을 듣고, 3·1 운동에 민족대표 33인으로 참가했다. 그는 당시 60대로 대표들 가운데 최고령자였다. 1년 반에 걸친 심문과 재판 이후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 최종심에서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죄로 징역 2년(미결구류 360일 통산)을 선고받았다. 이후 2년간 서대문감옥 병사에서 옥고를 치른 후 1921년 11월 4일 만기출옥하였다.
1922년 천도교 종법원 종법사 겸 경기도 교구순회 책임자로 선임되었다. 당시 천도교 신구파 갈등 속에서 홍병기, 오지영, 정계완 등과 함께 '교단에 불온한 문서를 배포하여 교단의 체면을 손상시켰다'라는 이유로 1922년 5월 12일 제명되었으나, 1개월 이후 6월 13일 제명이 취소되면서 교적은 회복되었다.
1924년 천도교 최고비상혁명위원회 사성위원장을 맡았으며, 만주와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천도교 혁신파 동료들과 합류하여 1926년 고려혁명당을 조직하였다. 혁신파 동료들과 함께 만주로 옮겨갔다가 고려혁명당사건으로 조직이 노출되면서 체포되어,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른 후 1929년 7월 5일 가출옥 하였다.
2. 4. 사망과 추서
이종훈(李鍾勳|이종훈중국어)은 1931년 5월 2일 사망했다. 고향에 매장되었다가 1966년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21번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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