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금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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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금치 전투는 1894년 동학 농민 운동 당시, 농민군이 공주를 점령하기 위해 우금치를 공격했으나 관군과 일본군에게 패배한 전투이다. 일본의 경복궁 점령으로 서울 진격을 결심한 동학 농민군은 삼례에 집결하여 북진을 시작했고, 공주를 점령하려는 과정에서 우금치를 주요 전장으로 관군과 격돌했다. 농민군은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신식 무기로 무장한 관군과 일본군에게 밀려 큰 피해를 입고 패배했으며, 이 전투의 패배로 동학 농민 운동은 사실상 막을 내렸다. 이후 전봉준은 체포되었고, 동학 신도들에 대한 학살이 자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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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금치 전투 | |
|---|---|
| 전투 정보 | |
| 전투 이름 | 우금치 전투 |
| 관련 분쟁 | 동학 농민 운동 |
| 날짜 | 1894년 10월 22일 ~ 1894년 11월 10일 (음력 10월 23일 ~ 11월 11일) |
| 장소 | 공주 우금치 일대 |
| 결과 | 동맹군의 승리 |
| 교전 세력 | |
| 교전국 1 | 조선 조선군 일본군 |
| 교전국 2 | 동학 농민군 |
| 지휘관 | |
| 지휘관 1 | 신정희 허진 이두황 이규태 이기동 조병완 미나미 모리오 마사이치 |
| 지휘관 2 | 전봉준 손병희 |
| 병력 | |
| 병력 1 | 조선군 3,000명 일본군 400명 조선군 810명 교전 일본군 120명 교전 |
| 병력 2 | 농민군 약 40,000명 청나라 군인 50명 |
| 사상자 | |
| 사상자 1 | 미미함 |
| 사상자 2 | 500명 생존 |
| 추가 정보 | |
| 관련 전투 | 고부 황토현 황룡강 전주성 경복궁 우금치 공주 |
2. 배경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조선 정부는 일본과 협력하여 1894년 9월 21일 통위영과 장위영 소속 부대를 주력으로 양호도순무영(兩湖都巡撫營)을 설치하고 신정희를 도순무사로 임명하였다. 일본은 2개 대대 병력을 보내 조선의 관군을 돕도록 하였다.[18] 이로써 삼례에서 논산을 거쳐 서울로 북진하려는 농민군과, 충청감영이 있는 공주를 반드시 점령해야 하는 농민군과, 이를 진압하려는 관군은 우금치를 주요 전장으로 삼아 전투가 불가피하게 되었다.
2. 1. 조선의 상황
1894년 갑오년은 조선의 역사에서 큰 획을 그은 한 해였다. 고종은 농민군의 봉기 이후 청나라에 진압 지원을 요청하였고, 청나라 군대가 조선에 입국하자 일본 역시 톈진 조약을 근거로 파병하였다.[12] 조선에 주둔한 일본군은 이 틈을 노려 자신들의 영향력을 강화할 목적으로 1894년 7월 23일(음력 6월 21일) 경복궁을 무단 점령하였다.[13] 새벽에 영춘문을 통해 기습한 일본군은 조선군과 총격전을 벌인 끝에 조선군의 무장을 해제하고 고종에게 자신들의 요구안을 전달하였다. 이 일로 일본과 청나라는 조선에서 청일전쟁을 벌이게 된다.[14]2. 2. 일본의 개입
일본은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고 내정에 간섭할 목적으로 한국에 주둔한 자국군을 유지할 구실이 필요했다. 일본군은 농민 운동 진압을 명분으로 1894년 음력 6월 21일 경복궁을 점령(일본군의 경복궁 점령)하고 고종과 대원군에게 입헌군주제를 모델로 한 새로운 내각을 수립하도록 강요했다.[2] 일본군의 불법적인 경복궁 점령으로 인해 9월 초 동학 농민군의 2차 봉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2]2. 3. 동학 농민군의 재결집
1894년 갑오년은 조선의 역사에서 여러모로 큰 획을 그은 한 해였다. 이해 초 고부에서 거병한 전봉준은 기존의 민란을 넘어서 중앙정치의 개혁을 요구하며 3월에 전주성을 점령하고 5월 7일 전주화약을 맺어 일정 정도 성과를 보았다.[11] 고종은 농민군의 봉기 이후 청나라에 진압 지원을 요청하였고 청나라 군대가 조선에 입국하자 일본 역시 톈진 조약을 근거로 파병하였다.[12] 조선에 주둔한 일본군은 이 틈을 노려 자신들의 영향력을 강화할 목적으로 7월 23일(음력 6월 21일) 경복궁을 무단 점령하였다.[13] 이일로 일본과 청나라는 조선에서 청일전쟁을 벌이게 된다.[14]일본이 경복궁을 무단 침입하고 국왕을 겁박하였다는 소식은 전봉준이 서울 진격을 결심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15] 당시 동학은 전봉준이 이끄는 남접과 최시형이 이끄는 북접의 입장에 차이가 있어, 사회의 전면적 개혁을 요구하는 남접과 달리 북접은 종교의 자유 획득에 보다 중점을 두고 있었고 이 때문에 중앙정부와의 충돌을 피하는 분위기였다.[12] 그러나 청일전쟁으로 조선이 전쟁터가 되고 중앙정부의 위신이 땅에 떨어지자 남북접 모두 "척왜양이"(斥倭洋夷, 왜와 서양 오랑캐를 배척함)를 내걸고 거병하게 되었다. 1894년 음력 9월 추수철이 지날 무렵 농민군은 다시 결집하였다.[16]
봄철 전주성 점령이 주로 전라도의 남접이 주축이 되어 진행되었던 반면, 가을철 봉기는 전라도와 충청도 농민이 합세하여 이루어졌다. 전봉준은 삼례에 집결하여 북진을 시작하였고,[9] 최시형은 보은에서 북접을 결집하였다.[17] 당시 남북접을 합한 농민군의 규모는 총 4만여 명에 가까웠다.[17]
3. 전개 과정
동학 농민 혁명 당시 농민군은 삼례에서 논산을 거쳐 서울로 진격하기 위해 공주를 점령하려 했고, 조선 정부와 일본 제국은 이를 저지하고자 했다.
농민군은 전라북도 삼례에 집결하여 공주를 공격 목표로 삼았다. 전봉준은 최시형에게 '기포'를 요청하여 동학군 병력을 모았고, 10월 9일 4만여 명의 농민군 주력 부대가 삼례에 집결하여 논산을 거쳐 공주로 진격했다.[4]
1894년 11월 20일(음력 10월 23일), 농민군은 이인역 근처에서 관군 및 일본군과 첫 전투를 벌였다. 농민군은 고지대를 이용해 격렬하게 저항했고, 관군은 큰 피해를 보았다.[25] 다음날, 중앙 정부에서 파견된 이규태와 일본군 제19대대 서로 중대가 공주에 도착하여 방어를 강화했다.[27] 11월 22일(음력 10월 25일), 농민군은 효포를 공격했으나, 관군의 화력에 밀려 후퇴했다.[27][28]
전봉준은 논산에서 농민군을 재편하고 우금치를 넘어 공주를 점령하고자 했다. 1894년 12월 5일(음력 11월 9일), 농민군은 총공세를 시작했지만, 기관총 등 신무기로 무장한 관군과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입고 후퇴했다.[31]

3. 1. 삼례 집결
전봉준과 그의 군대 약 4,000명은 지리적 영향력이 넓은 전략적 요충지인 전라북도 삼례에서 봉기를 일으키기로 결정했다. 전봉준은 그곳에 본영을 설치하고 농민군을 통합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정부군과 일본군을 물리치고 한양으로 진격하기 위한 첫 공격의 주요 목표로 공주를 선택했다. 동학군의 전략은 부여와 논산에서 공주를 포위하는 것이었다.[3]전봉준은 무기와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인근 지역을 공격했다. 8월 말에 봉기 준비를 시작했지만, 실제 북상은 한 달 뒤인 9월 말에 시작되었다. 이러한 시기에 영향을 미친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전봉준 자신이 병들었다. 또한, 수확이 아직 끝나지 않아 군량 조달과 농민군 동원에 제약이 있었다. 이것은 전라도 지역으로 제한된 농민군의 실질적인 역량과 관련하여 중요한 고려 사항이었다. 따라서 수확기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면서 봉기에 참여할 동맹군을 모으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당시 동학 운동 지도자였던 최시형에게 ‘기포’에 참여하고 전국 동학군의 병력을 모아줄 것을 청원했다. 또한 여러 동학 지도자들에게 서한을 보내 ‘기포’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봉기에 참여할 것을 촉구했다. 그 결과, 금구, 전주, 정읍, 부안, 진안 지역의 농민군 지도자들이 각각의 농민군을 모아 삼례에서 합류했다.[2]
10월 9일, 농민군 주력 부대 4만여 명이 삼례에 집결했다. 동학농민군이 결의식을 마치자마자 전봉준 장군과 손화중(1861-1895), 김덕명 등의 지휘 아래 논산으로 북진하여 노성주를 지나 공주에서 30리(약 12.5km) 떨어진 경천에 주둔했다.[4] 한편, 평화적인 협상을 주장했던 최시형(1827-1898)은 반외세라는 명분을 내세워 무력 저항을 명령했다. 북접과 남접 지역에서 보은에 집결한 손병희와 그의 부대는 충청 지역의 전략적 요충지이자 한양으로 가는 길목인 공주를 공격하기 위해 협력했다.[5]
3. 2. 초기 전투
1894년 11월 20일(음력 10월 23일), 농민군은 공주로 가는 길목인 이인역 근처 산에 진을 쳤다. 충청감사 박제순이 이끄는 관군과 일본군 1개 소대가 이인역으로 출동하여,[24] 농민군을 삼면에서 공격했다. 그러나 고지대를 차지한 농민군의 격렬한 저항에 관군은 사망 120여 명, 부상 300여 명의 피해를 보고 물러났다.[25]다음날인 11월 21일(음력 10월 24일), 중앙 정부에서 보낸 순무선봉장 이규태가 공주에 도착했다. 일본군 제19대대 서로 중대도 공주에 와서 감영 방어를 맡았다.[27] 농민군은 관군이 재편성을 위해 금강진 근처 효포를 비운 틈을 타 이곳으로 공주를 공격하려 했다. 11월 22일(음력 10월 25일) 새벽, 동학군은 금강을 건너 효포를 공격했고, 관군도 반격했다. 낮부터 저녁까지 이어진 격전에서 농민군은 관군의 우세한 화력에 밀려 대포 2문과 70여 명의 전사자를 내고 후퇴했다.[27][28]
전봉준은 10월 20일 공주 총공격을 명령했고, 농민군은 10월 23일 이인, 10월 24일 대교, 10월 25일 효포와 능치에서 관군 및 일본군과 방어전을 벌였다.[5] 농민군은 무기와 전술에서 불리했지만, 초반에는 용감하게 싸워 공주 방어선을 뚫고 이인과 효포를 점령하기도 했다.[2]
3. 3. 우금치 전투
전봉준은 효포 전투에서 후퇴한 뒤 논산에서 농민군을 재편하고, 우금치를 넘어 공주를 점령하고자 하였다. 1894년 12월 5일(음력 11월 9일) 농민군은 총공세를 시작했다. 농민군은 수적 우세를 활용하여 일부 병력을 효포와 고마나루로 보내 관군의 방어를 교란하는 한편, 전봉준이 이끄는 주력 부대로 우금치를 공격하게 했다.[31]그러나 농민군은 고지를 올라가며 공격해야 하는 불리한 지형 조건과 기관총 같은 신무기로 무장한 관군과 일본군의 집중 포화를 뚫을 수 없었다. 관군의 기록에 따르면, 농민군은 40~50차례 이상 우금치 돌파를 시도했으나, 압도적인 화력 차이와 지형적 불리함을 극복하지 못하고 많은 사상자를 내며 후퇴했다.[31] 농민군이 퇴각하자 관군은 즉시 추격하여 많은 농민군을 사살했다.[32]
전봉준은 후퇴하면서 관군에게 편지를 보내 일본에 맞서 함께 싸울 것을 호소했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5]
4. 무장과 병력

우금치 전투 당시 관군은 일본을 통해 크루프포, 개틀링 건, 스나이더 총, 무라타 총 등 신식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다.[30] 관군의 총 병력은 2천여 명이었고,[30] 일본군 2개 대대가 지원하였다.[17]
4. 1. 농민군
동학 농민군은 주로 농업에 종사하던 농민들로 구성되어 무장이 변변치 않아 1차 봉기 때 두드러진 무장이 급조한 죽창이었을 정도였다.[19] 그러나 이후 관군의 무기를 노획하여 약간의 대포와 화승총 등으로 무장을 강화할 수 있었다. 전주성 점령 당시 농민군에는 2문의 대포와 1백여 정의 총기가 있었다.[20] 이 외에도 보다 사거리를 늘린 천보총도 사용되었다.[21] 전반적으로 보았을 때 농민군은 의지는 컸으나 무장은 변변찮았다고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농민군 지휘부는 사기를 높이기 위해 총알을 피할 수 있다는 "궁을"을 쓴 부적을 나눠주기도 하였다.[22]2차 봉기 당시 농민군의 전체 병력은 4만여 명에 달했으나 이들은 각각 별도의 접장에 의해 결집되어 중앙지휘부는 없었기 때문에 효율적인 집중 공격을 가할 수는 없었다. 남접을 이끌던 전봉준이 직접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최대 1만여명이었고 공주 점령을 위한 선발대는 4천여 명이었다. 이들은 초기 전투 이후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김개남 등에게 지원을 요청하여 병력을 확충하였고 우금치 전투 당시 총 병력은 2만여 명 정도였다.[12] 이러한 비효율적 지휘 체계는 무장의 열세와 함께 우금치 전투 패배의 원인으로 작용하였다.[23]
수확이 거의 끝난 10월 12일경, 삼례에 모인 4만 명의 농민군은 북진을 시작하여 논산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추가적인 농민군을 모집하고, 10월 12일부터 16일 사이에 충청도 북동부 지역에서 손병희가 이끄는 농민군과 합세했다. 또한 최시형의 지휘 아래 많은 지역 지도자들이 충청도와 경상도 각지에서 봉기하여 논산에 모였다. 전봉준의 진술에 따르면, 우금치 전투를 포함한 공주 전투에 참여한 농민군은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 등 여러 지역에서 온 1만 명이 넘는 사람들로 구성되었으며, 남부와 북부 계열 모두 포함되었다. 전라도를 근거지로 한 전봉준의 직속 부대는 약 4,000명이었다. 나머지 6,000명은 충청도 강경, 논산, 은진, 노성 등지에서 전봉준과 합류하여 공주로 북진한 농민군이었다. 다시 말해, 제2차 동학 농민 혁명의 농민군은 전라도와 충청도 연합군의 성격을 지녔다.[2] 전투에는 청나라 군대 약 40~50명도 참여했다.[4]
4. 2. 관군 및 일본군
우금치 전투 당시 관군은 일본을 통해 신식 무기로 무장한 상태였다. 독일제 크루프포, 개틀링 건, 영국제 스나이더 총, 일본이 자체 개발한 무라타 총 등으로 무장하였다.[30] 관군의 총 병력은 2천여 명이었고,[30] 일본군 2개 대대가 지원하였다.[17]
조선 정부는 일본군과 협력하여 농민군을 진압하기로 결정하고, 9월 21일 수도 경비대와 궁궐 경호대 병력 810명으로 양호도순무영(兩湖都巡撫營)을 편성하고 신정희를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구승조와 성하영이 이끄는 조선 정부 정예군에는 성하영(成夏泳)과 홍운섭 경리청영관(經理廳領官)이 이끄는 궁궐 경비대(경리청(經理廳)) 병력, 이규태가 이끄는 좌선봉진군(左先鋒陳軍, 통위영군(通威營軍)), 평위영(平威營), 군사훈련부대, 우영장 이기동이 지휘하는 진영 병력이 포함되었다. 또한 서산부사(瑞山府使) 박제순이 지휘하는 감영군(監營軍)도 전투에 참여했다.[2]
일본은 18연대에서 1개 중대와 2개 소대로 구성된 제2중대 병력 120명을 현대적인 무기와 전술을 갖추고 배치했다.[2]
5. 결과 및 영향

우금치 전투는 동학 농민 운동의 분수령이 된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농민군은 급격히 와해되었고, 전봉준을 비롯한 지도부는 체포되거나 처형되었다.[34][33][9] 농민군 주력 부대는 우금치 전투 이후 크게 약화되었다.[2]
전투 이후, 일본군, 관군, 그리고 동학에 반대하는 유생들이 조직한 민병대에 의해 전국적으로 동학 농민군과 동학 신도들에 대한 대대적인 학살과 탄압이 벌어졌다.[35][36][37] 전투 지역에서는 사망자가 너무 많아 시신을 흙으로 덮어 묘지가 되었다는 구전이 전해질 정도였다.[2]
한편, 동학 농민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조선 정부가 요청한 청나라 군대의 파병은 일본의 개입을 불러와 청일전쟁으로 이어졌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했다.[38]
5. 1. 전투의 결과
우금치 전투 이후 전봉준은 순창으로 피신하였으나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다.[34] 김개남은 피신 중 붙잡혀 압송되다가 동학 농민군에게 탈취당할 것을 염려한 전라감사 이도재에 의해 즉결 처형되었다.[33] 이로써 동학 농민 운동은 사실상 종료되었다.[9]이후 전국에서 동학 신도를 색출하고 처형하는 학살이 번졌다. 이러한 학살은 일본군뿐만 아니라[35] 관군에 의해서도 저질러졌으며,[36] 동학에 반대하는 유생들이 모은 병력에 의해서도 일어났다.[37]
한편, 동학 농민 운동을 빌미로 일어난 청일전쟁은 해를 넘겨 계속되다 1895년 4월 17일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종결되었다. 이로써 일본은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우위권을 부정하고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게 되었다.[38]
우금치 전투 결과, 농민군은 일본군을 한 차례 공격한 후 원래 4만 명이었던 병력 중 1만 명만 남았다. 이후 공격에서 3,000명, 또 다른 교전 후에는 약 1,500명으로 줄었다. 11월 10일 농민군 후퇴 시 4만 명 중 500명만 남았고,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 주력 부대는 우금치 전투 이후 급격히 전력이 약화되었다.[2] 조선 정부군과 일본군은 방어선을 지키고 동학 농민군의 공격을 격퇴했다. 공주 우금치 전투는 동학 농민 혁명에 있어 중요한 패배였다. 농민군은 통일 전선을 형성하지 못하고 와해되었으며, 이후 지역 저항 운동은 산발적으로 점차 감소하였다.[4]
산에는 농민군의 시체가 수북이 쌓였다. 2000년대 초 우금치, 사창재, 승주갈 등 농민군과 진압군의 전투가 벌어졌던 지역에서 기록된 구전에 따르면, 사망자가 너무 많아 흙으로 덮었고, 그 지역 전체가 묘지가 되었다고 한다. 현지 주민들이 3년에 걸쳐 농민군 시체를 수습하는 데 동원되었다고 전해진다.[2]
전봉준은 남은 500명을 이끌고 남쪽 태인으로 향했다. 거기서 8,000명의 농민군을 모았다. 11월 25일, 일본군은 구미산에 진을 친 농민군을 추격했다. 농민군의 전략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의 화력은 농민군과 태인 시가지를 모두 괴멸시켰다. 역사가 박은식은 "태인에서 40km까지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40채의 민가와 약 400명의 농민군이 사망했다.[8] 태인 전투 이후인 1894년 11월 28일, 전봉준은 공식적으로 동학군을 해산하고 동학 농민들에게 해산을 명령했다. 농민군은 "전녹두(전봉준의 별명)가 우리를 구할 줄 알았는데, 이제 우리 모두 죽게 생겼다"고 통곡했다. 전봉준은 "전쟁은 운빨 게임이다. 왜 나를 탓하는가"라고 대답했다. 전봉준 자신은 1895년 3월 교수형에 처해졌다.
5. 2. 학살과 탄압
우금치 전투 이후 전국에서 동학 농민군을 색출하여 처형하는 학살이 일어났다. 이러한 학살은 일본군뿐만 아니라[35] 관군,[36] 동학에 반대하는 유생들이 모은 병력에 의해서도 자행되었다.[37] 2000년대 초 우금치, 사창재, 승주갈 등 농민군과 진압군의 전투가 벌어졌던 지역에서 기록된 구전에 따르면, 사망자가 너무 많아 단순히 흙으로 덮었고 그 지역 전체가 묘지가 되었다고 한다. 현지 주민들은 3년에 걸쳐 농민군 시신을 수습하는 데 동원되었다고 전해진다.[2]5. 3. 역사적 의의
우금치 전투와 동학 농민 운동의 패배는 조선 사회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농민군의 시신은 산에 수북이 쌓였고, 2000년대 초까지도 전투 지역에서는 수많은 사망자를 흙으로 덮어 묘지가 되었다는 구전이 전해진다. 당시 현지 주민들은 3년에 걸쳐 농민군 시신을 수습하는 데 동원되었다고 한다.[2]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 주력 부대는 우금치 전투 이후 급격히 전력이 약화되었다.[2] 1894년 11월 28일, 전봉준은 공식적으로 동학군을 해산했고, 동학 농민들은 "전녹두(전봉준의 별명)가 우리를 구할 줄 알았는데, 이제 우리 모두 죽게 생겼다"고 통곡했다.[8]
이후 전국에서는 동학 신도를 색출하고 처형하는 학살이 벌어졌으며, 이는 일본군뿐만 아니라 관군, 그리고 동학에 반대하는 유생들이 모은 병력에 의해서도 자행되었다.[35][36][37]
한편, 동학 농민 운동을 빌미로 일어난 청일전쟁은 1895년 4월 17일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종결되었다. 이로써 일본은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우위권을 부정하고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게 되었다.[38] 이는 결국 조선의 자주독립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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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언과 연대의 서사시 ‘가보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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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군사들이 새벽에 영추문으로 대궐에 난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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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키워드‘궁궁을을’(弓弓乙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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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 우금치전투는 학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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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동학농민군의 ‘우금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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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살, 서울 압송 도중 처형된 김개남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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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각처에서 동학농민군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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