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 (낭야왕)
1. 개요
이충은 당나라 황족으로, 당 태종의 아들인 월왕 이정의 장남이다. 그는 여러 주의 자사를 역임하며 유능함을 인정받았으나, 측천무후가 섭정하며 황실을 위협하자 이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무수성을 공격했으나 실패하고 부하의 배신으로 군대가 붕괴되어 688년 9월 22일 박주성에서 사망했다. 반란은 7일 만에 실패로 돌아갔으며, 그의 시신은 효수되었다. 이후 아버지 이정 또한 반란에 가담했으나 실패하여 부자는 훼씨로 개성되고 황족 지위가 박탈되었다. 당 중종 복위 후 성씨와 지위가 회복되었으나, 관작은 복권되지 못하다가 당 현종 때에 이르러 관작이 회복되고 재장례가 치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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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8년 사망 -
귀실집사
귀실집사는 백제 왕족 출신으로 백제 멸망 후 일본으로 망명하여 소금하의 관위를 받고 학직두를 역임하며 교육에 기여했고, 그의 후손은 백제공의 성을 하사받았으며 현재 일본 시가현 히노정에는 그의 묘소가 있는 귀실신사가 위치해 있다. -
688년 사망 -
이정 (월경왕)
이정은 당나라 태종의 아들이자 월왕으로, 무측천의 통치에 반대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며, 실패 후 자결하고 명예가 회복되었다. -
당나라의 황족 -
이중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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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의 황족 -
이사훈
당나라 화가 이사훈은 당 고조의 종실이자 금벽산수화풍을 발전시켜 '대 이장군'이라 불렸으며 그의 화풍은 아들 이소도에게 전해져 북종화의 시조로 여겨진다. -
무기에 죽은 사람 -
오리온
오리온은 그리스 신화 속의 사냥꾼으로, 뛰어난 사냥 실력, 연인들과의 갈등, 비극적인 죽음, 그리고 별자리로의 변신을 묘사하며, 다양한 이야기와 연관되어 있다. -
무기에 죽은 사람 -
시아그리우스
시아그리우스는 서로마 제국 말기 갈리아 지역의 지배자로 아버지 아에기디우스의 뒤를 이어 수아송 왕국을 건설했으나 프랑크 왕 클로비스 1세에게 패배하여 암살당했다.
2. 생애
2.1. 배경
이충의 출생 연도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당 태종의 8남인 월왕 이정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낭야군왕(琅琊郡王)에 봉해진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밀주(密州, 대략 지금의 산동성 유방시 일대에 해당한다)·제주(濟州, 지금의 산동성 요성시 치평구 서남쪽)·박주(博州, 역시 지금의 산동성 요성시에 있었다) 같은 각 주의 자사를 잇달아 역임하였는데, 모든 임지에서마다 유능하기로 유명했다. 또한 그는 문학을 좋아하였으며, 기마술에도 뛰어났고 활쏘기도 잘하였다고 한다.
2.2. 측천무후 집권과 황실의 위기
고종이 683년에 사망한 후, 그의 아들 이철이 황위를 이었으나(중종), 실권은 고종의 황후 무후가 태후이자 섭정으로서 장악했다. 684년 봄, 중종이 독자적인 행보를 보이자 무측천은 그를 폐위하고 동생인 이단을 옹립하였으나(예종), 권력은 여전히 무측천의 수중에 있었다. 무측천은 자신과 무씨 일족의 지위를 높이며 황실 이씨 가문을 위협했고, 이에 황족들은 무측천이 자신들을 몰살하고 당나라를 찬탈할 것이라는 의심을 품게 되었다.
2.3. 측천무후에 맞선 반란
측천무후는 좌금오위(左金吾衛) 장군 구신적(丘神勣)을 청평도(淸平道, 지금의 산동성 요성시의 임청시 일대) 행군대총관으로 삼아 이충을 공격하게 하였다. 한편, 모병을 통해 5,000여 명의 병력을 확보한 이충은 황하를 건너 제주를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를 준비하면서, 그는 먼저 박주 관하의 현 가운데 하나인 무수(武水, 지금의 산동성 요성시 동창부구 서남)를 공격하였다. 무수령 곽무제(郭務悌)는 위주로 가서 구원을 요청하였고, 위주 관하의 현령 가운데 한 사람인 신현(莘縣, 지금의 산동성 요성시 신현)령 마현소(馬玄素)는 1,700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중도에서 이충을 요격하고자 하였으나, 이충과 대적하기에는 병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하고, 먼저 무수성으로 들어가서 성문을 걸어 잠그고 방어 태세에 들어갔다.
이충은 무수성 남쪽에 자리를 잡고 풀섶을 가득 실은 수레들을 남쪽 성문 근처에 세워놓았다. 그리고 바람 부는 방향을 따라 남쪽 성문에 불을 질러 성문을 불태워 버리고, 그 불길을 틈타 성문 안으로 돌입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불을 지르자마자, 방화 전에는 남쪽 방향으로 매우 급격하게 불어오던 바람이 방화 후 불길이 타올랐을 무렵, 갑자기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버렸다. 결국 불길은 성문에 이르지 못했고, 수레에 실린 풀섶들은 전부 불에 타 버렸다. 이충의 군세는 더 이상 전진하지 못했고, 이로 인해 군의 사기가 저하되고 말았다.
한편, 이충의 부장들 중의 한 사람인 박주 당읍(堂邑, 지금의 산동성 요성시 동창부구 서북)승 동현적(董玄寂)은 그의 동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기 시작하였다.
: "낭야왕은 국가와 교전을 벌이고 있다. 이것은 곧 반역이다!"
이충은 동현적의 목을 베어 군중에 조리돌렸으나, 이를 더욱 두려워한 병사들은 각자 민간으로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는 이들이 달아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의 주위에는 수십 명의 시종들과 하인들만이 남아 있었다. 그러자, 그는 하는 수 없이 도로 자신의 본부가 있던 박주성으로 도망쳤다. 하지만 688년 9월 22일, 그가 그곳의 성문에 도착했을 때, 그는 성문을 지키던 병사들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 이렇게 해서, 이충은 반란을 일으킨 지 7일 만에 패망하였다.
2.3.1. 전투와 패배
무측천은 좌금오위(左金吾衛) 장군 구신적(丘神勣)을 청평도(淸平道, 지금의 산동성 요성시의 임청시 일대) 행군대총관으로 삼아 이충을 공격하게 하였다. 한편, 모병을 통해 5,000여명의 병력을 확보한 이충은 황하를 건너 제주를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를 준비하면서, 그는 먼저 박주 관하의 현 가운데 하나인 무수(武水, 지금의 산동성 요성시 동창부구 서남)를 공격하였다. 무수령 곽무제(郭務悌)는 위주로 가서 구원을 요청하였고, 위주 관하의 현령 가운데 한 사람인 신현(莘縣, 지금의 산동성 요성시 신현)령 마현소(馬玄素)는 1,700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중도에서 이충을 요격하고자 하였으나, 이충과 대적하기에는 병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하고, 먼저 무수성으로 들어가서 성문을 걸어 잠그고 방어 태세에 들어갔다.
이충은 무수성 남쪽에 자리를 잡고 풀섶을 가득 실은 수레들을 남쪽 성문 근처에 세워놓았다. 그리고 바람 부는 방향을 따라 남쪽 성문에 불을 질러 성문을 불태워 버리고, 그 불길을 틈타 성문 안으로 돌입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불을 지르자마자, 방화 전에는 남쪽 방향으로 매우 급격하게 불어오던 바람이 방화 후 불길이 타올랐을 무렵, 갑자기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버렸다. 결국 불길은 성문에 이르지 못했고, 수레에 실린 풀섶들은 전부 불에 타 버렸다. 이충의 군세는 더 이상 전진하지 못했고, 이로 인해 군의 사기가 저하되고 말았다.
한편, 이충의 부장들 중의 한 사람인 박주 당읍(堂邑, 지금의 산동성 요성시 동창부구 서북)승 동현적(董玄寂)은 그의 동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기 시작하였다.
이충은 동현적의 목을 베어 군중에 조리돌렸으나, 이를 더욱 두려워한 병사들은 각자 민간으로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는 이들이 달아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의 주위에는 수십 명의 시종들과 하인들만이 남아 있었다. 그러자, 그는 하는 수 없이 도로 자신의 본부가 있던 박주성으로 도망쳤다. 하지만 688년 9월 22일, 그가 그곳의 성문에 도착했을 때, 그는 성문을 지키던 병사들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 이충은 반란을 일으킨 지 7일 만에 패망하였다.
2.4. 사후
이충의 시신은 낙양으로 보내져 내걸렸다. 이충의 뒤를 이어 반란을 일으킨 아버지 이정 역시 곧 패망하였고, 이정과 그의 막내아들 이규, 사위 배수덕은 모두 자살하였다. 이정과 이충 부자는 살무사를 의미하는 훼(虺)씨로 개성(改姓)을 당하였고, 당나라 황실의 호적에서 제명되었다. 무측천은 혹리(酷吏)인 주흥에게 수사를 맡겼고, 주흥은 이원가, 이령기, 이선 및 당 고조의 7녀 상락장공주·수주자사 조괴 부부를 낙양으로 압송하여 자결하게 협박하였다. 그들의 가족들은 대부분 몰살당하였고, 살아남은 사람들까지 당나라 황실의 호적에서 제명되고 훼씨로 개성을 당하였다.
690년, 무측천은 예종으로부터 제위를 찬탈하여 주나라를 건국했다. 705년, 중종이 복위하여 이정과 이충 부자의 성씨와 황족 지위를 회복시켰으나, 오삼사와 상관완아의 반대로 관작은 복권되지 못했다. 716년, 당 현종 때에 이르러서야 이정과 이충 부자의 관작이 회복되고 재장례가 치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