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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리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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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토 리쓰는 1930년대 초 공산주의 운동에 투신하여 일본 공산당 간부로 활동하다가, 1950년 공직 추방 및 단체 등 규제령을 피해 지하 잠행했다. 이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베이징 기관에서 활동했으나, 스파이 혐의로 제명되어 투옥되었다. 1979년 석방되어 1980년 일본으로 귀국했으며, 조르주 사건 관련 논란에 휩싸였다. 말년에는 저술 활동과 사회 문제에 관심을 보였으며, 1989년 신부전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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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리쓰
기본 정보
이토 리쓰
이토 리쓰
이름이토 리쓰
본명이토 요시마
로마자 표기Itō Ritsu
출생1913년 2월 25일
사망1989년 5월 16일 (76세)
출생지일본 나가노현
사망지중국 베이징시
국적일본
직업정치학자
학력도쿄 대학 법학부 졸업
경력
소속 정당일본 공산당 → 중국 공산당
주요 활동일본 공산당 중앙위원
일본 공산당 무장투쟁 노선 지지
중국 망명 후 중국 공산당 활동
주요 저서《나의 소생》 (와타시노 소세이)

2. 생애

2. 1. 공산주의 운동 투신 (1930년대 초 ~ 1945년)

이토 리쓰는 1930년 제1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사회주의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1931년 공산청년동맹에 가입하면서 본격적인 공산주의 운동을 시작했다.[1] 특별고등경찰(특고)의 감시 속에서 공산청년동맹 재건 임무를 맡았으나, 1932년 지하로 잠행했고, 12월에 퇴학 처분을 받았다.[1] 이후 도쿄 조세이 지구 대학을 중심으로 조직 활동을 펼쳤다. 1933년 2월 공산청년동맹 중앙 사무국장이 되었고, 3월에는 일본 공산당에 정식으로 입당했다.[1] 그러나 같은 해 5월, 특고 스파이의 밀고로 검거되어 구속되었다.[1]

1934년 보석으로 풀려난 후, 1935년 4월 도쿄 지방 재판소에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의 유죄 판결을 받았다.[1] 전향을 표명했으나 특고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1] 판결 후, 미쓰비시 광업 계열 회사에 임시 고용원으로 취직하여 5개월간 노동 현장 경험을 쌓았다.[1] 1936년부터 도쿄 대학에서 일본 농업 경제사 연구에 종사하며, 1937년 공산당 재건 활동을 시작했다.[1] 인민 전선 전술을 채택하여 직장 중심의 활동을 전개했고, 문예 서클 "거리"를 통해 노동자 조직을 지도했다.[1]

1938년 전국 구매 조합 도쿄 지사에 취직하여 농촌 조사를 담당했고, 1939년 남만주 철도 도쿄 지사 조사실 촉탁으로 농촌 실정 조사를 실시했다.[1] 그러나 과거 활동 관련으로 다시 검거되었고, 폐 침윤을 앓는 등 건강이 악화된 상태에서 고문을 받고 진술에 응하게 되었다.[1] 1940년 6월, 구류가 일시 정지되어 만철에 복직했고, 오자키 호쓰미와 가족 간의 친분을 쌓았다.[1] 1941년 9월, 다시 구속되어 조사를 받았고, 조르제 사건에 연루된 오자키 호쓰미의 체포 사실을 알게 되었다.[1] 특고 형사로부터 소련 스파이 혐의로 고문을 당하고, 미야기 요토쿠와 관련된 기타바야시 토모에 대한 수기를 작성하도록 요구받았다.[1]

1942년 6월 예심이 종료되고, 12월 1심 판결에서 징역 4년형을 선고받았다.[1] 1943년 11월 재심 판결에서 징역 3년으로 감형되었고, 스가모 구치소와 도요타마 형무소에서 복역하며 종전을 맞이했다.[1] 복역 중 오자키 호쓰미와 짧은 만남을 가졌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오자키 호쓰미 가족과의 교류를 이어갔다.[1]

2. 2. 일본 공산당 간부 활동 (1945년 ~ 1950년)

1945년 8월 26일, 이토 리쓰는 가출옥했다. 이는 정치범 중 형기가 가까워지는 자들을 조금씩 석방한 결과였다. 10월 4일 연합군 최고사령관 총사령부(GHQ)의 "인권 사령"으로 정치범이 전면 석방되면서 공산당 재건 움직임이 시작되자 가장 먼저 입당했다. 이토는 농민 운동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도쿠다 큐이치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1946년 2월 제5회 당대회에서 당 중앙위원·서기국원에, 5월에는 정치국원에 취임했다. 1946년 제22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와 1947년 제23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도쿄 7구에서 입후보했지만, 모두 낙선했다. 이토는 도쿠다의 오른팔로서 당의 중책을 맡았다.

1949년 2월, 미국 육군성은 조르지 사건에 관한 보고(코넬 보고, 또는 윌러비 보고)를 발표했고, 일본 신문에도 전재되었다. 이 중 "이토가 기타바야시 토모의 이름을 진술한 것이 사건 발단의 시작이다"라는 설이 제기되었다. 시가 요시오는 "이 소문에 대해 1946년 3월에 엄밀하게 조사를 진행한 결과, 당시 특고가 모략과 행상 때문에 행한 작문이며, 기타바야시와 이토에게는 조직상의 연락은 없다"는 취지의 담화를 발표했다.

1950년, 코민포름의 비판으로 당이 분열되자, 도쿠다와 가까웠던 이토는 소감파에 속했다. 이토는 대립하는 국제파의 비난을 받았다. 당시 이토는 윌러비 보고에서의 "고발", 전시 중 망명이나 비전향으로 투쟁한 경험 없이 간부가 된 것에 대한 부러움이나 질투, 여성 문제 등으로 공격받았다. 소감파 내부에도 이토를 스파이로 보는 사람이 있었다.

1950년 6월 GHQ의 공직 추방과 7월 단체 등 규제령의 출두 명령을 거부한 단규령 사건으로 정부로부터 체포 영장이 발부되어 지하로 잠행했다. 10월 도쿠다 큐이치가 중화인민공화국으로 떠나 "베이징 기관"을 조직한 후, 도쿠다가 전체 방침 입안, 국내는 시다 시게오・시이노 에쓰로와 이토의 삼자 합의를 중심으로 한 지도 체제가 되었다. 당시 도쿠다는 "안정하고 여명 4년"이라는 상황(간부 외에는 비밀)이었고, 도쿠다의 후계자를 둘러싼 다툼에 이토도 휘말리게 되었다.

노사카 산조 이론의 결함을 인정하는 소감을 발표하는 이토 리쓰(1950년 1월 12일)


이 기간 동안 일본 국내에서는 사망설, 외국 망명설 등 여러 설이 흘러나왔다. 1950년 9월 27일, 아사히 신문이 "다카라즈카시의 산속에서 이토와 접촉했다"는 가짜 기사를 실었다(이토 리쓰 회견 보도 사건)[5]가, 9월 30일에 같은 신문의 고베 지국원에 의한 날조임이 밝혀졌다[6]

1951년 베이징 기관 내부 대립이 파급되어, 7월 도쿠다의 자기 비판에 이어 이토도 자기 비판을 했다. 이토는 후년 시다 시게오와 그 측근으로부터 비판과 방해를 받았다고 하세가와 히로에게 보낸 편지에서 밝혔다. 무장 투쟁 노선의 신 강령을 채택한 10월 제5회 전국 협의회에서도 이토는 비난받았다. 이후, 중국으로 밀항하여 도쿠다, 노사카 산조, 니시자와 류지 등이 있던 베이징 기관에 합류한다. 이 중국행은 "도쿠다의 초청"으로 전해졌다. 이토는 당내 정세로 인해 가면 체포·투옥될 우려도 안고 있었지만, 마지막에는 당을 믿는 형태로 동의했다. 인민 함대라고 불린 어선으로 일본해를 건너 베이징에 도착하여, 1952년 5월 1일부터 시작된 일본향 지하 방송·자유일본방송을 지도했다. 중국에서는 "구칭"이라는 중국 이름을 칭했다.

2. 3. 지하 잠행과 중국 망명 (1950년 ~ 1953년)

1945년 8월 26일에 가출옥한 이토 리쓰는 정치범 중에서 형기가 가까워지는 자들을 조금씩 석방한 것에 의한 것이었다.10월 4일 연합군 최고사령관 총사령부(GHQ)의 "인권 사령"에 의해 정치범이 전면적으로 석방되면서 공산당 재건의 움직임이 시작되자 가장 먼저 입당했다.특기인 농민 운동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그 상황을 서기장인 도쿠다 큐이치에게 보고했다. 1946년 2월의 제5회 당대회에서 당 중앙위원·서기국원에, 5월에는 정치국원에 취임한다. 1946년의 제22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와 1947년의 제23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도쿄 7구에서 입후보했지만, 모두 낙선했다. 이토는 도쿠다의 오른팔로서 당의 중책을 맡았다.

1949년 2월, 미국 육군성은 조르지 사건에 관한 보고(코넬 보고, 또는 찰스 윌러비 보고)를 발표했고, 일본 신문에도 전재되었다. 이 중에서 "이토가 기타바야시 토모의 이름을 진술한 것이 사건 발단의 시작이다"라는 설이 제기되었다. 이때 공산당 측은 시가 요시오가 "이 소문에 대해서 1946년 3월에 엄밀하게 조사를 진행한 결과, 당시 특고가 모략과 행상 때문에 행한 작문이며, 기타바야시와 이토에게는 조직상의 연락은 없다"는 취지의 담화를 발표했다.

1950년, 코민포름의 비판으로 인해 당이 분열되자, 도쿠다와 가까웠던 이토는 소감파에 속했다. 이토는 대립하는 국제파의 비난을 받았다.당시 이토에게는 윌러비 보고에서의 "고발"에 더해, 전시 중에 망명이나 비전향으로 투쟁한 경험 없이 간부가 된 것에 대한 부러움이나 질투, 더 나아가 여성 문제 등 공격의 재료가 부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소감파 내부에도 이토를 스파이로 보는 사람이 있었다.

6월에 GHQ의 공직 추방과 7월에 단체 등 규제령의 출두 명령을 거부한 단규령 사건으로 정부로부터 체포 영장이 발부된 것을 계기로 지하로 잠행했다. 같은 해 10월에 도쿠다 큐이치가 중화인민공화국으로 떠나 "베이징 기관"을 조직한 후, 도쿠다가 전체 방침 입안, 국내는 시다 시게오・시이노 에쓰로와 이토의 삼자 합의를 중심으로 한 지도 체제가 되었다. 이때 이미 도쿠다는 "안정하고 여명 4년"이라는 상황(간부 외에는 비밀)이었고, 곧 도쿠다의 후계자를 둘러싼 다툼에 이토도 휘말리게 되었다.

이 기간 동안 일본 국내에서는 사망설, 외국 망명설 등 여러 설이 흘러나왔다. 9월 27일, 아사히 신문이 "다카라즈카시의 산속에서 이토와 접촉했다"는 가짜 기사를 실었다(이토 리쓰 회견 보도 사건)[5]가, 9월 30일에 같은 신문의 고베 지국원에 의한 날조임이 밝혀졌다.[6]

1951년에는 베이징 기관 내부에서의 대립이 파급되어, 7월에는 도쿠다의 자기 비판에 이어 이토도 자기 비판을 했다. 이토는 후년에 시다 시게오와 그 측근으로부터 노골적인 비판과 방해를 받았다고 하세가와 히로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했다.무장 투쟁 노선의 신 강령을 채택한 10월의 제5회 전국 협의회에서도 이토는 비난을 받았다. 이 후, 중국으로 밀항하여 도쿠다, 노사카 산조, 니시자와 류지 등이 있던 베이징 기관에 합류한다. 이 중국행은 표면적으로는 "도쿠다의 초청"으로 전해졌다. 이토는 당내 정세로 인해 가면 체포·투옥될 우려도 안고 있었지만, 마지막에는 당을 믿는 형태로 동의했다.「인민 함대」라고 불린 어선으로 일본해를 건넌 이토는 베이징에 도착하여, 이듬해 1952년 5월 1일부터 시작된 일본향 지하 방송·자유일본방송을 지도했다. 중국에서는 "구칭"이라는 중국 이름을 칭했다.

2. 4. 중국에서의 제명과 투옥 (1953년 ~ 1979년)

이토의 회상에 따르면, 베이징 기관에서는 국제파에 대한 타협을 주장하는 노사카 산조(野坂参三)와 니시자와 류조(西沢隆蔵), 도쿠다 큐이치(徳田球一) 사이에 갈등이 생겼고, 더 나아가 중국 공산당의 내부 문제도 얽혀 복잡한 상황이 되었다..1952년 도쿠다의 병세는 악화되어 9월 말부터 입원했으며, 이내 의식 불명이 되었다. 12월, 이토는 연금되었고, 1953년 10월에 도쿠다가 사망했다. 이 기간 동안 니시자와와 노사카에 의해 이토를 "스파이"로 제명하는 결정이 내려졌다. 이 결정은 귀국한 후지이 칸지(藤井冠次)(전 NHK 보도부원·방송 단일 노조 서기장으로 자유일본방송에 종사)에 의해 일본에 전달되었고, 9월 15일자 "적기"에 이토의 처분에 관한 중앙 위원회 성명이 게재되었다. 이토는 그로부터 3개월 후에 베이징에서 이 "아카하타"를 보게 된다. 이토는 그 내용을 부인하고 결정을 거부했지만, 감옥으로 신병이 옮겨졌다.

격리 심사 이후, 노사카 등 당 간부들은 이토에게 "스파이"임을 인정하면 복귀시켜 주겠다고 종용했지만, 이토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1955년 7월, 일본 공산당은 제6회 전국 협의회에서 이토의 제명을 재확인하고, 9월 15일의 "적기"에 "이토 리쓰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중앙위원회 간부회 발표를 게재했다. 여기에서도 이토는 스파이로서의 죄상을 열거했지만, 그 내용은 2년 전의 중앙 위원회 성명과는 크게 달랐다. 1953년의 성명에서는 주로 전후의 당 지도부가 열거되었고, 조르주 사건 등에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던 데 반해, 이 발표에서는 조르주 사건의 내용이 중심이 되었고, 요코하마 사건에도 관여했다는 등 대부분이 종전 전의 내용이었다. 와타나베 토미야(渡部富哉)는 "실제로는 일본과 중국 양당 사이를 갈라놓았다는 것이 이유가 되었다"라는 관계자의 증언을 바탕으로, 처분을 결정하고 나중에 구실을 붙였다고 추론하고 있다. 일본 공산당 간부들은 1955년의 하카마다 사토미를 마지막으로 이토를 면회하러 오지 않았다. 1958년의 제7회 당대회에서도 이토의 제명이 다시 확인되었다. 이토는 1959년에 노사카 등 일본 공산당 대표단이 방중했을 때 면회를 신청했지만 거절당했다. 1955년 이후 소식이 끊겨, 노사카 등이 사망설을 퍼뜨린 탓에 굳어졌다. 이토에 대한 체포 영장은 1960년에 치안 당국은 다양한 정보 수집을 통해 "이토 리쓰는 중공에서 건재하다"는 분석 결과를 공표했다. 1970년 6월에 일본의 공안조사청은 중국에서 사망했다는 정보에 의해, 이토에 관한 정보 수집을 중단했다. 이토는 1960년에 친청 감옥으로 이송되었고, 문화 대혁명 중에는 군대의 점령 하에서 박해를 받았다. 이 기간 동안 이토는 건강이 악화되어 오른쪽 눈과 오른쪽 귀가 전혀 들리지 않게 되었고, 신부전에 걸렸다.

이토의 투옥에 대해, 중국 관계자는 "이토를 격리 심사한다는 일본 공산당의 의뢰에 따라 한 것이며, 중국 공산당은 관여하지 않았다"고 했고, 이토도 그러한 설명을 들었다. 이토는 옥중에 있는 동안 줄곧 "3호"라고 불렸고, 중국 측으로부터 피의자·피고인으로 이름이 불리거나 죄명을 고지받거나 재판에 회부되는 일도 없었다. 이에 대해 일본 공산당 측은, 이토의 귀국 직후 노사카 산조가 "제명된 이토의 신병을 중국 측에 인도했을 뿐 투옥에는 관여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노사카가 제명된 후, 베이징 기관이 존재했던 당시 일본과의 창구를 맡았던 자오안보(趙安博)가 1998년 회고에서 "노사카와 하카마다로부터 이토를 죽이라는 의뢰를 받았다"고 밝히자, 기관지 『전위』에서 "제명 후 이토의 상황을 알고 있었던 것은 노사카와 하카마다뿐이며, 두 사람은 그것을 당에 숨겼다"는 이유로 "당은 관여하지 않았다"고 하며, 현재도 관여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덧붙여, 1998년 기관지 『전위』의 "노사카와 하카마다는 제명 후 이토의 상황을 당에 숨겼다"는 견해가 나왔을 때, 노사카는 1993년에, 하카마다는 1990년에 각각 사망하여, 두 사람은 공산당의 견해에 반론할 수 없었다).

2. 5. 귀국과 만년 (1980년 ~ 1989년)

1979년 차오스의 결단으로 중국 당국은 이토의 석방을 결정했고, 이토은 12월에 병원으로 옮겨졌다.[10] 1980년 3월에 퇴원 후, 6월에는 아내에게 편지를 보냈으며, 7월 31일에 지치 통신이 이토의 생존을 보도했다.[10] 8월 23일, 중국 정부는 이토가 중국에서 생존해 있다는 것을 공식 발표했고, 9월 3일 29년 만에 일본으로 귀국했다.[10] 귀국 당시 이토는 67세였으며 휠체어를 타고 있었다.[10]

일본 정부는 이토의 형사 소추에 대해 "1950년 7월 단체 등 규제령에 따른 출두 명령에 응하지 않은 것은 단체 등 규제령 위반 혐의로 체포 영장이 발부되었지만, 1952년 평화 조약 발효 후 범죄 후의 법령에 의해 형이 폐지되었을 때 해당한다는 최고 재판소 판례가 확립되어 처벌할 수 없다"고 밝혔다.[11] 또한, "법률 절차를 거치지 않고 출국한 것은 인정되지만, 출입국 관리령 시행 이전의 밀출국은 범죄 후의 법령에 의해 형이 폐지되었을 때 해당하여 처벌할 수 없고, 이토의 밀출국이 1951년 11월 1일 이후라는 증거가 없으므로 처벌할 수 없다"고 답변하여[11] 형사 소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귀국 후, 이토는 고마쓰 유이치로에게 "옥중 27년의 기록"을 이야기했고, 이를 바탕으로 아사히 신문은 1980년 12월에 야마모토 히로시 기자의 "고국의 흙을 밟고"라는 증언록을 게재했다. 주간 아사히에도 가필 연재되어 『이토 리쓰의 증언』으로 출판되었으나, 이토 본인은 그 공표 과정을 납득하지 못하고 인정하지 않았다. 일본 공산당은 이토의 생존이 알려진 직후부터 "1955년 제명 처분은 옳고, 이토는 스파이다"라는 주장을 "아카하타" 등에서 반복했지만, 증거는 제시하지 않았다.

이토는 자신이 부재 중 오자키 히데키와 가와이 사다키치에 의해 퍼진 "조르제 사건 발단의 경찰 스파이"라는 주장에 분노했다.[12] 당시 서간에서 오자키 히데키를 "이토를 스파이로 만들지 않으면 밥을 먹을 수 없고, 어렵게 팔린 면목이 없어지는 작가가 지금도 몇 명 있다. 그 큰 자가 히데키입니다"라고 비판했다.[13]

이토의 제명 처분을 일본에 전한 후지이 간지는, 이토 귀국 직후 『이토 리쓰와 베이징·도쿠다 기관』을 간행했다. 그러나 이 책의 많은 부분은 노사카 산조의 전문에 근거한 내용을 자신이 직접 체험한 것처럼 기록한 것이었다.[14] 후지이는 이토의 생환을 알면서도 변명을 듣지 않고 책을 낸 것에 대해 반성하는 서간을 이토에게 보냈고, 이후 둘은 편지를 주고받았다. 이토는 후지이의 책을 비판하면서도, 후지이 개인은 "당 중앙의 명령에 충실히 움직였을 뿐"이라며 동정했다.[16][17] 후지이는 이후 『머나먼 번개 이토 리쓰 사건』(1986)을 한정판으로 출판하여 노사카 산조의 모략에 휘말린 것에 대해 사죄하고 정정했다.[18]

이토는 『도쿠다 큐이치 전집』(1985-1986) 편집에 협력했고, 제4권 해설문을 썼다. 1981년부터 중국 시대 회상록을 집필, 사후 1993년 『문예 춘추』에 "일본의 유다로 불린 남자"로 게재 후, 『이토 리쓰 회상록』으로 간행되었다. 1988년에는 "조르제 사건에 대하여"를 집필하여 사후 『거짓 낙인』에 게재되었다. 다카오 산으로의 수도권 중앙 연락 자동차도 건설 반대 운동에 참여하는 등 사회에 대한 관심을 잃지 않았다. 1989년 8월 7일 신부전으로 사망했으며(76세), 사망 4일 전에는 문병객에게 "중국의 민주화 운동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말했다고 한다.

3. 조르주 사건 관련 논란

오랜 기간 동안 "1940년 7월 이토가 경찰의 심문에서 기타바야시 토모의 이름을 밝히면서 기타바야시가 체포되었고, 그 기타바야시의 진술에 의해 미야기 요토쿠가 검거되어 조르주 사건의 발각으로 이어졌다"라는 설이 제기되어 한때 정설화되었다.[19] 이 설은 1942년 8월 『특고월보』에 처음 등장했지만, 당시에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19] 종전 후, 일본 공산당 관계자가 이토를 심문한 특고 형사의 내무대신 공로상 수여를 자문하는 린기서를 발견하면서 이토와 사건의 관계를 부정하는 입장이었다.

적색 숙청 속에서 1951년에 윌로비 보고가 발표된 후에도, 공산당은 이토에게 문제가 없는 것으로 양해를 얻었다.[19] 그러나 공산당이 이토를 제명하면서 이 설을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어졌다. 오자키 히데미의 이복 동생인 오자키 히데키와 사건으로 실형을 받은 가와이 사다키치 등은 "조르주 사건 진상 규명회"를 발족시켜 이토가 발각의 단서임을 지지했고,[21] 마쓰모토 세이초도 자신의 저서에서 이 설을 채택하여 "정설"화되어 갔다.

1978년, 이토 타카시가 이토를 심문한 전 특고 경찰에게 인터뷰를 진행하여 이토가 조르주 사건과 관계가 없다는 증언을 얻었지만,[20] 정설을 뒤집지는 못했다.

이토의 사망 후, 와타나베 토미야는 1990년대 초에 사실 관계를 확인한 결과, 『특고월보』의 기재 내용에 부자연스러운 점이 있고,[19] 당시 특고 과장의 저서와 와카야마현 경찰 특고 형사의 증언, 사건 담당 검사들의 발언 등을 통해 "이토의 진술" 이전에 경찰이 기타바야시 토모를 감시하고 있었고, 기타바야시의 이름은 이토 이전에 경찰에 전해졌음을 밝혀냈다.[19] 또한, 이토 켄코의 공로상 린기서는 상을 받기 위한 작문이었고, 자필 진술서도 없었을 가능성이 높아졌다.[19]

와타나베는 오자키 히데키와 가와이 사다키치, 마쓰모토 세이초 등이 "이토가 경찰의 스파이인 방증"으로 든 점에 대해서도 검증하여, "이토의 진술이 단서이다"라는 설은 특고 측이 사건의 발각 경위를 숨기기 위해 작위적으로 꾸민 "함정"이라고 결론 내렸다. 오자키 히데키의 저서에 대해서는 사실 검증이 부실하고 명확한 근거 없이 이토를 "스파이"로 단정하고 있다고 비판했다.[19]

가토 테츠로가 2007년에 공개된 미국 육군 첩보부의 일본 관계 문서를 조사한 결과, 가와이 사다키치는 전후 GHQ참모 제2부 (G2)로부터 조르주 사건과 공산당의 정보 제공에 대한 보수를 받고 있었고, 조르주 사건을 반공 선전의 재료로 하는 윌로비의 뜻에 따라 이토를 "사건 발각의 단서"로 하는 증언을 하고 있었음이 밝혀져, 가와이 사다키치의 증언에 대한 신빙성은 현저히 저하되었다.[21]

또한, 조르주의 활동 당시 모스크바의 참모 본부 첩보국 극동과에서 암호 전문의 번역을 담당했던 M.I. 시로토킨은 전후 1964년에 적은 회상록에서 "이토 리쓰는 '람제이'(조르주의 코드네임)의 첩보망과 아무런 관계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라고 증언하고 있다.[22]

이것들에 의해, 현재는 "조르주 사건 발각의 단서는 이토의 진술이었다"라는 설을 지지하는 견해는, 일본의 사건 연구자 사이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게 되었다.

2013년, 이토의 유족 및 와타나베 토미야가 대표를 맡는 "이토 리츠의 명예를 회복하는 회"가 분게이슌주에 대해, 이토를 스파이로 기술한 마쓰모토 세이초의 『일본의 검은 안개』의 해당 이야기의 출판 중단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 보도되었다.[23][24] 분게이슌주는, 『일본의 검은 안개』의 해당 이야기에 이토의 증언의 인용과 스파이설을 부정하는 문헌으로의 참조를 촉구하는 주석을 넣기로 결정했다.[25]

4. 유산과 평가

이토 리쓰의 차남인 이토 준은 2016년에 코단샤를 통해 『아버지·이토 리쓰, 어느 가족의 "전후"』를 출간했다.

참조

[1] 서적 近代日本社会運動史人物大事典 日外アソシエーツ
[2] 문서 伊藤の晩年の手記と長谷川の戦後の証言による。
[3] 서적 生還者の証言
[4] 문서 当時は適齢者には犯歴などチェックせず機械的に召集令状が送られ、同様の例は少なくなかった。
[5] 신문 当該記事については[[新聞縮刷版|朝日新聞縮刷版]]ではその箇所を空欄にし、お詫び記事を掲載している
[6] 서적 近代日本総合年表 第四版 岩波書店
[7] 서적 伊藤律回想録
[8] 서적 生還者の証言
[9] 간행물 趙安博と歴史の真実
[10] 웹사이트 中日ニュース No.1386_1「生きて故国の土を!! -伊藤律氏帰国-」 https://www.youtube.[...] 中日映画社 2016-09-05
[11] 문서 1980年11月5日、衆議院外務委員会における警察庁警備局公安第一課長の答弁
[12] 서적 生還者の証言
[13] 서적 生還者の証言
[14] 서적 生還者の証言
[15] 서적 戦後期左翼人士群像 つげ書房新社
[16] 서적 生還者の証言
[17] 서적 生還者の証言
[18] 서적 生還者の証言
[19] 문서 当時において予審終結後の一時保釈はかなり一般化していたという。
[20] 신문 朝日新聞 1978-06-18
[21] 간행물 「ゾルゲ事件の新資料─米国陸軍諜報部『木元伝一ファイル』から」 http://netizen.html.[...] 日露歴史研究センター
[22] 웹사이트 国際情報戦の中のゾルゲ=尾崎秀実グループ――リュシコフ亡命、ノモンハン事件、シロトキン証言―― http://netizen.html.[...] 第4回ゾルゲ事件国際シンポジウム「ノモンハン事件とゾルゲ事件」
[23] 뉴스 松本清張『日本の黒い霧』 関係者遺族抗議で読めなくなる? https://www.news-pos[...] NEWSポストセブン 2013-04-14
[24] 웹사이트 4月15日記者会見のご案内 http://www.doujidais[...] 同時代社
[25] 신문 清張作品 スパイ説に注釈 朝日新聞 2013-05-27
[26] 신문 伊藤律スパイ説修正 東京新聞 2013-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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