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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특 (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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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특은 파저족 출신으로, 후한 말 혼란기에 유랑민들을 이끌고 촉 지역에서 세력을 키운 인물이다. 298년 기근으로 인해 발생한 유랑민들을 이끌고 익주로 이주했으며, 300년 익주자사 조흠의 반란에 가담하여 조흠을 제거하는 데 기여했다. 이후 서진 조정에 대항하여 자립을 시도했으나, 303년 뤄상과의 전투에서 패하여 사망했다. 이특의 아들 이웅은 성한을 건국하고, 이특은 사후에 경황제로 추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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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특 (성한)
기본 정보
수놓은 삼국연의 속편 v.1 (이특)
이특의 모습
이름이특 (李特)
현림 (玄林)
묘호시조 (始祖)
시호경황제 (景皇帝, "훌륭한")
존호행진북대장군 (行鎮北大將軍)
연호건초 (建初)
생몰년240년대 ~ 303년
통치
작위성한의 통치자
재위 기간303년
이전없음
이후이류
가계
아버지이모
기타
시대성한

2. 배경 및 초기 생애

이특은 파저족 출신으로 무용으로 이름난 명사였다.[2] 298년, 옹주(간쑤성 동부) 지역에 기근이 들어 천수 등 6개 군에서 유랑민이 발생하자, 이특과 이상 형제는 이들을 이끌고 한중으로 이동하였다. 서진 정부는 유랑민을 해산시키려 했으나, 이특은 지방관에게 뇌물을 주어 이를 무마하고 촉(蜀)으로 이주할 수 있도록 하였다.[2]

300년, 서진의 익주자사 조흠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특 형제는 이에 협력하여 조흠이 익주를 장악하도록 도왔다. 그러나 301년, 조흠은 이특 형제의 힘을 두려워하여 이상을 죽이고 이특도 죽이려 하였다. 이에 이특은 반격하여 성도를 점령하고 조흠을 죽였다.[2] 이후 서진의 나상이 이끄는 토벌군이 오자 이특은 항복하였고, 선위장군, 장락향후에 봉해졌다.[2]

이특은 검각관 (현재 광원시)을 지나면서, "유선은 이런 방어 시설을 갖추고도 항복했으니, 변변치 못한 인물이 아니겠는가?"라고 말했다.[3]

2. 1. 파저족의 기원과 이주

이특의 조상은 본래 파서군(巴西郡, 현재의 랑중시) 출신의 반둔 또는 총이었다. 후한 말, 조조가 한중을 점령하자 이특의 할아버지 이호는 백성을 이끌고 조조에게 항복했다.[2] 이후 이들은 략양(略陽)으로 이주하여 진주(秦州, 현재의 간쑤성 동부)의 저족과 섞여 살았으며, 파 지역을 따라 파저(巴氐)라고 불렸다.[2] 이특은 이무의 다섯 아들 중 둘째로, 키가 8척(약 188cm)이었으며 무술에 능했다.[2]

2. 2. 기근과 유랑민 발생

296년, 저족 추장 기만년이 이특의 지역 주변에서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3] 이 땅은 기근과 군사적 점령에 시달렸고, 많은 주민들이 이주를 결심했다.[3] 298년 말, 략양·천수를 비롯한 진주 6군의 백성들은 식량을 구하기 위해 남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하여 수만 가구의 유민이 한천으로 들어갔다.[2] 이특은 유랑민들을 이끌고 조상들의 고향인 익주로 돌아갔다.[3]

3. 조흠의 난과 이특의 역할

298년, 옹주(雍州) (현재의 간쑤성 동부) 지역에 기근이 들어 천수(天水) 등 6개 군에서 많은 유랑민이 발생하였다. 이들은 이특과 이상(李驤) 형제를 우두머리로 하여 한중(漢中)으로 이동하였는데, 서진(西晉) 정부는 이들을 해산시키려 하였다. 이에 이특은 지방관에게 뇌물을 써서 이를 무마하고 촉(蜀)으로 이주할 수 있도록 하였다.

300년, 조흠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특은 이에 협력하였다. 그러나 301년 조흠은 이특 형제의 힘을 두려워하여 이상을 죽이고 이특도 죽이려 하였다. 이에 이특은 반격하여 성도(成都)를 점령하고 조흠을 죽였다.

3. 1. 조흠의 반란 가담

300년, 서진의 익주자사(益州刺史) 조흠(趙廞)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특은 형제들과 함께 이에 협력하여 조흠이 익주를 장악하는 데 기여했다.[4] 조흠은 이특의 형인 이상(李驤)을 정로장군(征虜將軍)으로 임명하고 북쪽을 방어하게 했다.[4] 이상은 백성들에게 매우 친절하게 대했기 때문에 인기가 많았지만, 이는 조흠의 질투심을 불러일으켰다.[4]

301년, 조흠은 이상을 살해했다.[4] 조흠은 이특과 이류의 충성을 확보하고자 사자를 보내 형제들을 위로하고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려 했지만, 이는 그들을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다. 두 사람은 군대를 이끌고 조흠의 근거지인 면죽(綿竹)을 공격했다. 그들은 먼저 밤에 석정(什亭)에서 조흠의 군대를 기습하여 불을 지르고 많은 병사들을 죽인 후 성도(成都)로 진격했다.[5] 이특이 도착하자 성 안은 공황 상태에 빠졌고, 조흠의 많은 관리들이 그를 버렸다. 조흠은 가족과 함께 배를 타고 광도(廣都)(현 쓰촨성 솽류구)로 도망쳤지만, 가는 길에 부하들에게 살해당했다. 이특은 성도로 들어가 도시를 약탈한 후 조흠이 저지른 죄목들을 기록한 목록을 낙양(洛陽)에 있는 진나라 수도로 보냈다.[5]

3. 2. 조흠과의 갈등 및 반격

300년, 서진의 익주자사(益州刺史) 조흠(趙廞)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특은 이에 협력하여 조흠이 익주를 장악할 수 있도록 하였다.[4] 그러나 301년에 조흠이 이특 형제의 힘을 두려워하여 이특의 형인 이상을 주살하고 이특도 죽이려 하였다.[4][5]

조흠은 이상이 용맹하고 강한 병사를 이끌고 있다는 것을 두려워하여, 이유를 붙여 그를 주살하고 그의 아들과 종족 30여 명을 처형했다. 조흠은 이특 등이 반란을 일으킬 것을 두려워하여 사자를 파견하여 "이상은 신하로서 말해서는 안 될 말을 했기 때문에 사형에 처해졌다. 하지만 이 죄는 형제에게 미치지 않는다"고 타이르며 설득했다. 또한 이상의 시신을 이특에게 돌려주고, 이특과 이류를 독장으로 임명하여 위무했다.[5]

그러나 이특은 조흠을 매우 원망하여 이에 따르지 않고 병사를 이끌고 면죽으로 돌아갔다. 이특은 몰래 7천여 명의 병사를 모아 조흠의 장사 비원의 진영을 야습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특은 그대로 성도를 향해 진격했다. 조흠은 이를 듣고 크게 두려워하며 어찌할 바를 몰랐고, 결국 부하에게 살해당했다.[5]

이특은 성도에 입성하여 병사들을 풀어 약탈을 허용하고, 조신이 임명한 관리들을 주살했다. 또한, 조신의 죄상을 적어 낙양으로 보냈다.[5]

4. 서진과의 대립과 자립 시도

301년 조흠이 사망한 후, 서진 조정은 나상이 이끄는 토벌군을 파견했으나, 이특은 나상에게 성도를 넘겨주고 항복했다. 이 공로로 이특은 선위장군(宣威將軍)에 임명되고 장락향후(長樂鄕侯)에 봉해졌다.[6]

그러나 나상은 이특을 따르는 유민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려 했고, 이에 유민들은 이특을 지도자로 추대하여 거병했다. 이특은 진북대장군(鎭北大將軍)을 자칭하고, 촉 백성들에게 간략한 법령을 약속하고 재화를 베풀며 인재를 선발했다.[7] 302년에는 스스로 대장군(大將軍)과 익주목(益州牧)을 칭하며 세력을 확장했다.[8]

4. 1. 뤄상과의 초기 관계

이특은 성한과 우호 관계를 맺으려 했지만, 조정은 이특과 그의 군대를 토벌하기 위해 나상이 이끄는 군대를 파견했다. 이특은 뤄 상을 맞이하고 선물을 주기 위해 그의 형제 이상(李驤)을 보냈다. 뤄 상은 기뻐하며 부하 왕돈(王敦, 더 유명한 왕돈과는 다른 인물)과 신염(辛冉)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우호의 표시를 받아들였다. 뤄 상은 심지어 이상을 자신의 부하로 임명했지만, 양측 간의 의심은 여전했다.[6]

북쪽에서는 기만년의 반란 당시 도망친 난민들에게 각자의 지역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당시 촉에 있던 이특의 동생 이보(李輔)는 형에게 북쪽이 여전히 혼란스럽다고 알렸다. 이에 이특은 뤄 상에게 염식을 보내 뇌물을 주며 체류 기간을 가을까지 연장해 달라고 요청했고, 뤄 상은 이를 허락했다. 이특은 위무장군(威武將軍)에 임명되고 제후에 봉해졌지만, 조정은 조신을 진압하는 데 도움을 준 사람들에게 보상하지 않아 민심을 잃었다. 이는 뤄 상의 부하 신염이 제안한 것으로, 난민들은 그를 원망하게 되었다.[7]

가을이 다가오자 뤄 상은 난민들을 돌려보낼 준비를 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돌아가기를 불안해했다. 이특은 다시 염식을 보내 겨울까지 체류 기간을 연장해 달라고 협상했지만, 뤄 상은 거절했다. 염식이 뤄 상의 부하인 두도를 설득하여 간언하게 했지만, 뤄 상은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이특은 날이 갈수록 인기가 높아졌고 더 많은 난민들을 보호하게 되었으므로, 계속해서 뤄 상에게 체류 연장을 요구했다. 신염은 이 모든 상황에 분노하여 이씨 가문의 목을 요구하는 공고를 내걸었다. 이특은 이 공고를 입수하여 신염이 이씨 가문뿐만 아니라 난민들 중 다른 주요 가문들도 죽이려 한다고 내용을 수정했다. 위조된 공고는 즉시 난민들의 관심을 끌었고, 그들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이특과 함께 보호를 받기 위해 뭉치게 되었다.[8]

조흠의 난이 진압되자 조정은 라상(羅尚)을 평서장군(平西將軍)·영호서이교위(領護西夷校尉)·익주자사(益州刺史)에 임명했다. 라상은 아문장(牙門將) 왕돈(동진의 왕돈과는 다른 인물), 상용 도위(都尉) 의흠, 촉군태수 서검, 광한군 태수 신염을 비롯한 7천여 명을 이끌고 촉으로 출발했다.

이특 등은 라상의 도착을 듣고 매우 불안해하며 아우 이상(李驤)을 파견하여 그를 맞이하게 하고, 진귀한 보물을 바쳤다. 라상은 매우 기뻐하며 이상을 기독(騎督)에 임명했다. 또한 이특은 이류와 함께 쇠고기와 술을 가지고 면죽(綿竹)으로 가서 라상을 위로했다. 왕돈, 신염은 모두 라상에게 "이특 등은 유민(流民)이며, 도적질을 일삼았습니다. 빨리 제거해야 합니다."라고 간언했지만, 라상은 이 진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신염은 이특과 오랜 지인이었기에, 이특에게 "오랜 지인이 이렇게 만나는 것은 좋지 않다. 틀림없이 흉하다."라고 말했고, 이특은 크게 두려워하며 경계하게 되었다.

같은 해 3월, 라상은 성도(成都)로 입성했다. 조정은 익주에 있는 유민들을 진주(秦州)·옹주로 데려가도록 통지했고, 그들을 감독하기 위해 어사 풍해와 장창을 파견했다. 이특의 형 이보(李輔)는 원래 략양(略陽)에 머물러 있었지만, 이특 등을 맞이하러 간다는 핑계로 촉으로 들어가 이특에게 "북쪽은 크게 혼란스러워 돌아갈 의미가 없다."라고 충고했다. 이특은 깊이 동의하고, 파촉(巴蜀) 땅에 할거할 뜻을 품게 되었다. 이특은 염식을 라상에게 여러 차례 파견하여 귀향을 가을까지 연기해 줄 것을 요청했다. 게다가, 라상과 풍해에게 뇌물을 보냈으므로 연기가 허가되었다. 조정은 조흠을 토벌한 공적으로 이특을 선위장군(宣威將軍)·장락향후(長樂鄕侯)에 임명하고, 이류를 분위장군(奮威將軍)·무양후(武陽侯)에 임명했다. 또한, 익주 정부에 명하여 육군(六郡)의 유민 중 이특과 함께 난을 진압하는 데 공헌한 자들을 열거하여 봉상(封賞)을 하려 했다. 신염은 이를 불만스럽게 여기고, 조흠을 멸망시킨 공적을 자신이 차지하려 하여, 유민들의 활약을 상언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유민들은 모두 이를 원망했다.

신염은 탐욕스럽고 난폭한 성격이었으며, 유민의 수령을 죽이고 그 재산을 빼앗으려고 꾀하며 이필(李苾)과 함께 라상에게 "유민들은 조흠의 난을 틈타 약탈을 했습니다. 관소를 설치하여 이것을 되찾아야 합니다."라고 간언했다. 라상은 이를 받아들여 재동군 태수 장연에게 편지를 보내, 진주와 옹주로 돌아가는 길목에 관소를 설치하고 유민들의 재산을 조사하게 했다.

얼마 후, 라상은 종사(從事)를 파견하여 유민들에게 7월까지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권고했다. 이특은 다시 염식을 파견하여 가을 수확이 끝날 때까지 퇴거 기한을 연장해 줄 것을 간청했다. 그러나 신염과 이필이 이에 반대했다. 별가 두도는 유민들의 귀향을 1년 기다려 줄 것을 간언했지만, 라상은 신염 등의 의견에 찬성했다. 두도는 일찍이 라상에 의해 수재(秀才)로 추천되었지만, 그때의 추천서를 반납하고 사직하여 집에 돌아갔다.

당시 유민들은 대부분 양주(梁州)와 익주에서 육체노동에 종사하고 있었고, 주군이 자신들을 내쫓으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원망했지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 또한, 큰 비가 계속 내려서 돌아갈 방법도 없고, 곡물도 여물지 않은 시기였기에 식량도 없었다. 이특 형제가 자신들을 위해 청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모두 감동하여 이특에게 모여들었다.

이특은 면죽에 큰 진영을 구축하고, 갈 곳 없는 유민들을 보호했다. 그리고 신염에게 이 일에 대해 관대한 조치를 요청했다. 하지만 신염은 이에 격노하여 사람을 파견하여 길가에 입간판을 걸어 이특 형제의 목에 무거운 현상금을 걸었다. 이특은 이것을 알고 크게 놀라, 입간판을 모두 가져가고 이상과 함께 내용을 고쳐 "육군의 호족인 이, 임, 염, 조, 양, 상관 및 저족(氐族)·수족(叟族)의 우두머리 목 하나를 보내면 비단 백 필을 주겠다."라고 바꾸어 다시 세웠다. 유민들은 이 입간판을 보고 경악하며, 모두 이특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한 달도 되지 않아 그 수는 2만 명을 넘어섰고, 이류에게도 수천 명의 백성이 모였다.

이특은 또다시 염식을 라상에게 파견하여 기한을 연기해 줄 것을 요청했다. 라상은 이때, 유민들에게 관대한 처우를 해 줄 것을 생각하고 있었고, 염식에게 유민들을 안정시키라고 전했다. 하지만, 신염이 요지에 울타리를 쳐서 유민들을 포획할 준비를 하고 있었으므로, 염식은 이것을 보고 크게 탄식했다. 염식은 면죽으로 돌아와 이특에게 "라상은 관대한 대응을 하겠다고 했지만, 믿어선 안 됩니다. 라상은 위엄이 없고, 형벌을 명확히 하지 않아서, 신염 등이 강병을 독점하고 있습니다. 한 번 변고가 일어나면, 라상은 사태를 수습할 수 없을 것입니다. 충분히 대비해야 합니다."라고 말했고, 이특은 동의했다.

4. 2. 유민들의 추대와 거병

301년 조흠이 죽은 후, 나상이 이끄는 토벌군이 오자 이특은 항복하고 선위장군, 장락향후에 봉해졌다.[6] 그러나 나상은 이특을 따르는 유민들을 해산시키려 했고, 이에 유민들은 이특을 추대하여 거병하게 하였다. 이특은 진북대장군(鎭北大將軍)을 자칭하고, 촉 백성들에게 간략한 법령을 약속하고 재화를 베풀며 인재를 선발했다.[7] 302년에는 대장군(大將軍)과 익주목(益州牧)을 자칭했다.[8]

5. 뤄상과의 전쟁 및 최후

이특은 조흠이 301년에 사망한 후, 서진나상이 이끄는 토벌군에 항복하여 성도를 넘겨주고 선위장군에 임명되고 장락향후(長樂郷侯)에 봉해졌다. 그러나 나상은 이특을 따르는 유민들을 해산시키려 하였고, 이에 이특은 유민들의 추대를 받아 302년 거병하여 진북대장군(鎮北大將軍)을 자칭했다. 이후 대장군과 익주목(大將軍, 益州牧)을 자칭하며 세력을 확장했다.[9][10][11][12]

이특은 나상과의 전투에서 여러 차례 승리하였다. 광한을 점령하고, 자통과 번성에서 나상의 군대를 격파했다. 또한 양주 자사 허웅(許雄)과의 전투에서도 승리하여 영토와 영향력을 확장했다. 이러한 승리는 나상과 진(晉) 조정을 불안하게 만들었다.[11][12]

303년 1월, 이특은 성도에 도착하여 나상의 군대를 기습, 소성을 점령하고 사면령을 내렸다. 나상은 평화 협상을 제안했지만, 이류와 상관돈(上官惇)은 이에 반대했다.[13]

5. 1. 전투의 경과

303년 정월, 이특성도의 소성(小城)을 함락하고 나상의 군대를 태성(太城)에 고립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에 독자적인 연호를 정하여 독립적인 세력임을 표방하였다.[17]

5. 2. 이특의 죽음

303년 정월, 이특은 성도의 소성(小城)을 함락하고 나상의 군대를 태성(太城)에 고립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성도 함락 이후 이특은 방심하여 경계를 게을리하였고, 이로 인해 2월에 나상이 기습하여 이특은 살해되었다.[14]

이특의 죽음은 갑작스럽고 비참했다. 서진 조정은 뤄상을 돕기 위해 형주(荊州)로부터 증원을 명령했고, 이특은 이당 등 몇몇 사람을 보내 덕양을 방어하게 했다. 뤄상의 부하 임예(任叡)는 뤄상과 공모하여 이특을 매복 공격하기로 했다. 임예는 이특에게 항복하는 척하며 뤄상의 상황에 대한 잘못된 정보를 제공했다. 303년 2월, 뤄상은 요새의 도움을 받아 이특의 진영을 기습 공격했다. 병력이 매우 적었던 이특은 이보이원과 함께 이틀 동안 싸우다 사망했다. 그들의 시신은 불태워졌고 머리는 수도로 보내졌다.[14]

이특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반란군을 뒤흔들었지만, 그들은 재빨리 이류를 새로운 지도자로 선출했다. 이류가 303년 늦게 사망한 후, 이특의 아들인 이웅이 그의 지위를 계승했다. 이웅304년성한을 건국하여 십육국 시대의 첫 번째 국가가 되었다. 이웅은 처음에는 스스로를 왕이라고 칭했으므로, 사후에 그의 아버지를 성도 경왕(成都景王)으로 추존했다. 이웅306년에 황제를 자칭한 후, 이특의 칭호는 경황제(景皇帝)로 변경되었다.[15]

5. 3. 추존

李雄|이웅중국어은 처음에 스스로를 왕이라 칭했으므로, 이특을 성도경왕(成都景王)으로 추존했다. 李雄|이웅중국어이 306년에 황제를 자칭한 후, 이특의 칭호는 경황제(景皇帝)로 변경되었다.[15]

6. 가족 관계

7. 평가

이특은 파저족 출신으로, 뛰어난 무예로 이름을 알렸다. 298년, 간쑤성 동부 옹주 지역에 기근이 발생하여 천수를 비롯한 6개 군에서 많은 유랑민이 발생하였다. 이특은 이들 유랑민을 이끌고 한중으로 이동하였으나, 서진 정부는 이들을 해산시키려 하였다. 이특은 뇌물을 사용하여 촉으로 이주할 수 있었다.[1]

300년, 이특은 서진 익주자사 조흠의 반란에 협력하여 익주 장악을 도왔다. 그러나 301년, 조흠은 이특 형제의 힘을 두려워하여 형 이상을 죽이고 이특을 제거하려 하였다. 이에 이특은 반격하여 성도를 점령하고 조흠을 살해했다.[1]

이후 이특은 나상이 이끄는 토벌군에 항복하여 선위장군, 장락향후에 봉해졌다. 나상은 이특을 따르는 유민들을 해산시키려 하였고, 이특은 유민들의 추대로 거병하여 진북대장군을 자칭했다. 그는 백성들에게 간략한 법령과 재물을 제공하고 인재를 선발했다. 302년에는 대장군과 익주목을 자칭했다.[1]

303년 정월, 이특은 성도의 소성을 함락하고 나상의 군대를 태성에 고립시켰으며,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여 독립 세력임을 표방했다. 그러나 방심으로 인해 2월에 나상의 기습으로 살해되었다.[1]

이특은 혼란한 시대에 유민들을 이끌고 새로운 터전을 찾으려 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의 군사적 재능과 백성을 위한 정책은 백성들의 지지를 얻는 데 기여했으며, 이러한 노력은 성한 건국의 기반이 되었다.

참조

[1] 기타 Zizhi Tongjian Vol.85
[2] 서적 Book of Jin, Volume 120
[3] 서적 Book of Jin, Volume 120
[4] 서적 Huayang Guozhi, Volume 7.4
[5] 서적 Book of Jin, Volume 120
[6] 서적 Huyang Guozhi, Volume 7.5
[7] 서적 Book of Jin, Volume 120
[8] 서적 Book of Jin, Volume 120
[9] 서적 Zizhi Tongjian, Volume 84
[10] 서적 Zizhi Tongjian, Volume 84
[11] 서적 Book of Jin, Volume 120
[12] 서적 Book of Jin, Volume 120
[13] 서적 Zizhi Tongjian, Volume 85
[14] 서적 Book of Jin, Volume 120
[15] 서적 Annals of the Sixteen Kingdoms, Volume 6
[16] 기타
[17] 기타
[18]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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